아빠, 나를 사랑해?
그럼.
난 아빠를 더 사랑해.
무엇보다 더?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건 안돼. 그건 내가 할 일이야.
그렇지만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아빠를 사랑하는걸.
- 249~250쪽, 저지대, 줌파 라히리
9월 중순. 한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가을이 와버렸구나, 아침마다 느끼고 있다. 8월보다 조금 쌀쌀해졌다. 토요일, 학원을 한 번 갔고, 한 번 수업을 빠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고레에다 히로즈 감독의 책 <걷는 듯 천천히>. 그의 영화들처럼 담담한 글들이 담겨 있었다. 무심히 읽고 책장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라고 생각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제법 쌀쌀한 때였으니 가을이나 겨울이었을 거다. 우리집은 복층인데, 여름에는 아예 위에서 자질 못한다. 복층이 겉보기에만 좋다는 걸 이 집에서 살면서 느끼고 있다. 아무튼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올라가질 못하고, 봄과 가을에는 올라가 자기에 좋다.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공간이다. 외롭지 않으면서 외로울 수 있는 공간인 거다. 소리로는 외롭지 않고, 공간으로서는 외롭다. 그 복층에서 <고잉마이홈>을 봤다. 아래층에서 볼 수 있었는데, 꼭 넷북을 들고 올라가 복층에서 봤다. 복층에서만 집중할 수 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첫회를 온전히 보는 게 쉽지 않아서 보고, 또 봤다. Y언니에게 1회를 보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드라마를 나와 마찬가지로 기대하고 있었던 언니는 이미 포기했노라고 말했다. 다시 시도하지 않겠다고 했다. 몇 달에 걸쳐 10부작의 드라마를 봤다. 결국, 드라마도 좋았고, 다 보았다는 것도 좋았다. 드라마의 마지막,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장례식장에서 주인공 혼자 밤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펑펑 울었었다. 이 에세이집을 읽고 그 장면이 감독의 경험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역시 그랬어. 아, 싶은 순간이었다. 그 부분은 출근길에 읽었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다. 드라마를 본 그때처럼.
당시 두 살이었던 나는 이 TV 방송을 책상다리를 한 아버지의 다리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TV에 빠져든 내 볼에 까슬까슬한 아버지의 수염이 스치던 그 감촉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TV로 프로야구를 보는 걸 좋아했다. 뭐랄까, 취미라고 부를 만한 게 그 정도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 몇 번인가 함께 고라쿠엔 구장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된 후 둘 사이에 의견 대립 같은 것이 생겨 얼마 안 있어 대화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둘만 남으면 "올해는 어떨까, 자이언츠는?"이라고, 이미 프로야구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인 다 큰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애매하게 대답을 하고, 되도록 아버지와 둘만 남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돌아보면, 정말 차가운 아들이었구나 하는 후회가 함께 떠오른다.
아버지 통야(고인을 밤새 추모하는 의식) 때의 일. 조문객이 모두 돌아가고 조용해진 사찰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와 둘만 남게 됐다. 관의 작은 창을 여니, 코를 고는 듯이 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이대로 고별식을 하는 것은 보기 흉하다고 생각해, 수건을 말아 아버지의 턱밑에 댔다. 그 순간, 내 손에 까슬까슬한 수염이 닿았다. 30년 만에 그리운 그 기억이 되살아나 처음으로 울었다. 아침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p. 203-204
8시 26분.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빠는 문자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인데, 인터넷 뱅킹할 때는 문자가 온다. 장례식에 올 때 통장을 가져오질 않아서 내게 돈을 빌렸는데, 삼만원을 더해 붙이며 메세지를 이렇게 남겼다. '잘썼다.' 그 전의 문자는 5월 28일의 문자인데, 그 날의 메세지는 이렇다. '생일축하.' 그 전의 문자는 온전한 문자다. 인터넷 뱅킹 메시지가 아닌. 2014년 2월 8일의 메세지.
금령아
보내준거자ㄹ받아ㅆ다
ㄸㅏ듯ㅎㅏㄱㅔㅇㅣㅆ어라
따듯하게 있어야 겠다.
마지막에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친구들이 커다란 소라게를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후타는 생각한다. "이런 광경도 얼마 안 남았구나. 4월이 오면 아마 모든 게 변할 것이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4월이 오면 그녀는."
일요일에는 '이대'로 영화를 보러 갔다. 다큐 영화제 마지막 날이었는데, SNS에서 <티타임>에 관한 글을 보고 보고 싶어져서 보러 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매달 한 번씩 티 모임을 갖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였다. 당연하지만, 할머니들은 처음부터 할머니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줍은 아가씨였다가, 사랑에 빠진 여자가 되었다가, 결혼을 한 유부녀가 되고,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고, 손자손녀를 본 할머니가 되었다. 관객과의 대화도 있었는데, 감독이 말했다. 대학교에서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생애 첫 영화였다. 할머니를 초대했는데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 그 날, 친구들과의 티 모임이 있기 때문에. 감독은 그때부터 이 모임이 궁금해졌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모임이길래, 사랑하는 손녀의 첫 작품도 못 보러 오는가.
할머니들은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만났다. 오후 네 시. 커다란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 샌드위치나 케이크를 먹고, 때때로 술을 마셨다. 돈을 모아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서로의 낯뜨거운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좋았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래, 그때 너 그랬지. 너 그때 참 좋았지, 하고 추억을 공유하기도 했다. 쉴 틈없이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고등학교 졸업 60년 후의 모임에서 시작한다. 5년 동안 찍었는데, 그 사이 할머니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어떤 할머니가 말한다. 이제 더 죽으면 안 돼. 금방 티가 난다구. 영화의 마지막, 사별한 남편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늘어놓던 곱디 고운 할머니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할머니는 자신이 떠나고 한 테이블에 모일 친구들을 생각해 편지를 남긴다. 슬퍼하지 마. 우울해 하지도 마. 평소하던 것 처럼 웃어. 내 얘기하면서 마구 웃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내가 니네들 인생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웃어. 이런 식의 편지였다. 맞아 맞아. 나는 (눈물이 많은 여자니, 이 영화를 보면서 수도 없이) 울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사라져도, 내 친구들이 사라져도, 서로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지. 우리가 함께 한 추억이 몇 갠데. 영화를 보고 나니 소중한 사람들이랑 '함께' 무언가를 많이많이 하고 싶어졌다. 사라져도 사라지는 게 아닐 수 있도록.
그러니 후타도 4월이 되면 그녀가 떠나버리고, 그러면 쓸쓸해지고, 바닷가에서 만주 먹을래? 라는 말 따위 할 수도 없고, 자기를 잊어버릴까 걱정도 되겠지만, 그렇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해도 괜찮은 거다. 지금 이렇게 바닷가에서 또 하나의 사라지지 않을 추억을 만들고 있으니. 괜찮은 거다, 후타!
그녀들의 여섯번째 이야기. 나오자마자 주문해서 정말 아껴서 읽었다. 그런데 벌써 다 읽었다. 흑흑. 오래간만에 1권부터 다시 봐야겠다. 그나저나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J씨도 이 책을 주문했겠지? 무척 아끼는 만화라고, 나도 좋아할 것 같으니 빌려주겠다고 했던 J씨는 잘 있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만큼 맥주를 좋아하던 J씨.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계절을 충분히 느끼고 있을지. 낮에 비가 온 것 같았는데, 창이 따로 없는 사무실에서 커다란 빗소리만 들었다. 지금, 다시 비가 와주면 좋겠다.
동생은 박웅현 빠순이다. 어디서 박웅현을 알아와서는 <책은 도끼다>를 매일 들고 다니며 읽었다. 모든 부분이 좋다고 했다. 밑줄을 얼마나 그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박웅현이 나온 팟캐스트를 같이 듣자고 했다. 집에서 둘이서 낮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술도 들어갔으니, 좋다고 듣자고 했다. 박웅현이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우리 둘에게 필요한 거였다. 내가 말했다. 다시 들어보자. 방금 자존감 부분. 다시 들었다. 다시 들어도 좋았다. 다시 들어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였다. 동생이 물었다. 한번 더 들을까?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가 우리는 그 부분을 녹음하기로 했다. 동생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들을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어느 쓸쓸한 귀가길에 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 밤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의 시도 뒤에 우리는 말끔히 '자존감'을 녹음했다. 그 파일은 결국 맥주를 잔뜩 마신 쓸쓸한 귀가길에 딱 한 번 듣고, 유유히 사라졌다. 핸드폰 용량이 부족해 이것저것 지우다 그 파일인 줄 모르고 삭제해 버렸다.
어쨌든, 동생은 박웅현 빠순이다. 그래서 이 책도 샀다. 언니, 박웅현이 추천한 책이라는데 혹시 알아? 나는 모르겠는데, 라고 했고, 동생은 바로 주문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동생은 그때 깁스 상태라 회사가 끝나면 늘 집에 왔고, 덕분에 나도 집순이가 되어 동생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지금은 깁스를 풀었다! 나는 이제 동생의 손발이 아니다!) 아무튼 깁스 상태여서 티비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는 일 말고 별다른 일이 없었던 동생은 이 책을 야금야금 읽다가 어느 날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언니가 딱 좋아할 책이야. 리스본 얘기도 나오고. 꼭 읽어. 그 날 이후에 하루에도 몇번씩 말했다. 읽었어? 읽고 있어? 아직도? 읽으라니까. 읽고 있다고? 좋지? 읽었고, 좋았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내가 딱 좋아할 책이었다. 얼마 전에 다녀온 리스본 얘기도 나왔다. 사실 이 책은 한 카피라이터의 오래된 일기인데,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 이야기인데, 나는 거기서 나를 봤다. 내가 보였다. 이상했다. 이 카피라이터의 일상 이야기가 내게 위안이 됐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슬프기도 했다. 즐겁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런 책이다. 좋은 책. 그래서 나를 닮은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동생이 나한테 계속 읽으라고 한 이유가 서문만 읽어도 이해가 되는 책. 그러니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산문집을 다시 읽었다. 마음에 박히는 구절들이 많았다. 그런 페이지에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이병률은 바람둥이가 분명할 거란 생각을 했다. 바람둥이, 만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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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떠날 때 포도주 한 병이나 비누, 손수건 한 장이나 자신이 읽던 책들을 선물로 두고 떠난다고 했다. 모르는 이로부터 받았던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다음 사람에게 표시하고 말이다. 그 사람이 떠나고 집 청소를 하러 집에 들어간 주인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선물 포장을 보고 뿌듯해진다고 했다.
멋지고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말했더니 주인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나는 집으로 올라가 선물 포장을 뜯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선물은 묘한 두근거림을 선물했다. 수채화로 곤돌라 그림이 그려진 손바닥 크기의 '포스트 잇'이었다.
나는 커다란 베니스의 지도를 선물 받은 것처럼이나 감사했다. 이 감사가 내가 그곳을 떠나올 때도 이어질 것이고 그 다음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나는 그곳을 떠나오면서 다음 사람이 나처럼 굶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파스타 한 묶음을 올려놓고 왔다. 그리고 잊지 않고 메모지 위에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라고 적었다.
계속해서 감사는 박자를 맞춰 감사를 부를 것이다.
- 이야기 스물, '다음 사람을 위하여' 중에서
오후 다섯 시에 마시는 보드카, 창밖의 초승달을 닮은 크루아상, 저녁식사를 끝냈다는 의미의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 이 모든 것이 순하게 엉킨 어느 저녁, 나는 당신을 떠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자작나무 길을 지나 당신의 집 문을 두드린다.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보다 더 간절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그래서 떠나려고 합니다."
남겨진 사람 마음이 더 아플 거라는 예측이며 추측일 뿐, 떠나는 사람의 마음도 아플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 알게 되면서 빽, 울컥해진다.
- 이야기 스물다섯, '사랑의 역사' 중에서
혼자 이국의 바닷가에서 울적해하기보다는 웃을 수 있는 일을 먼저 생각하자고 씁쓸히 마음을 먹는 일도, 떠나는 일은 점퍼의 지퍼 같은 것이어서 지퍼를 채우기만 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아해. 그리고 눈이 내리고 내리고 쌓이고 또 쌓이는 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당신하고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술이나 사러 나갈까 하며 벗어놓은 양말을 신는 걸 좋아해.
- 이야기 마흔하나, '좋아해' 중에서
그때 불쑥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인도 가서 따로 다니면 어떨까?"
겨우 용기를 내서 꺼낸 그 말에 친구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우린 세상에서 제일로 친한 친구 아니니?'라고 묻고도 싶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린 같은 비행기 안에 있지 않니?'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잘못 들은 것도 같아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정말 그랬음 좋겠어?"
그러자 한 친구가 말했다.
"둘이 다니면 많이 못 볼 것 같아."
맞는 말이긴 했다.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어떻게 준비한 여행이고, 어떻게 빼낸 두 달인데. 하지만 그 말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거렸던 친구는 화장실에 가서 갑작스런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 울다 나왔다.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헤어졌다. 두 달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 공항,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 이야기 쉰다섯, '중심으로' 중에서
그러니 떠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기갈 들린 사람처럼 천박해 보여도 좋다. 떠나서만큼은 닥치는 일들을 받아내기 위해 조금 무모해져도 좋다. 세상은 눈을 맞추기만 해도 눈 속으로 번져들 설렘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 이야기 쉰, '환상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중에서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때 그 기억만으로 눈이 매워지는 일이다.
- 이야기 쉰넷, '그때 내가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이 맵다' 중에서
올해 포르투갈을 못 가게 된다면 마카오라도 가자고 결심했었다. 뭔가를 검색하다가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마카오에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여럿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카오는 카지노가 다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막 열의에 차서 마카오 책을 찾았는데, 마카오만 소개된 책은 없고, 홍콩과 마카오가 함께 소개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여행을 가게 된다면 사람들이 다 가는 곳 말고 좀더 특별한 곳을 돌아다니고 싶어 구입한 책이다.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책. 이 책을 읽고 홍콩이라는 도시는 물론이고 주성철이라는 사람에 빠졌다. 정말 심한 홍콩영화 덕후인데, 뭐랄까. 그 열정이 부러운 사람이랄까. 영화를 보다 인상적인 곳을 발견하면 크레딧의 장소협찬지를 캡쳐해 두고 그 곳을 검색해서 찾아가는 식이다. 그렇게 찾아간 홍콩에서 똑같은 장소를 발견하면 뛸 듯이 기뻐하고, 그 장소에 있었던 캐릭터들을 생각하고, 배우들을 생각하고,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곳에 가게 되면 너무나 아쉬워하고. 주성철의 장국영과 양조위에 대한 사랑이 무척이나 각별한데, 이 책을 읽다가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지하철 안에서 장국영에 대한 글을 읽다 울어버린 적도 있다. 장국영 이야기로만 책을 따로 출간했던데, 그 책도 읽어보고 싶다. 장국영 책에 대한 이동진의 추천사. "주성철 기자의 글은 늘 흥미롭다. 그게 홍콩영화와 관련된 글이면 더욱 그렇다(그가 중국어 혹은 광동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홍콩 영화와 배우들의 인기가 굉장했을 때도 있었는데, 예전 생각도 많이 났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나도 홍콩 영화를 꽤 많이 봤더라. 주성치 영화를 보면서 정말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여명과 서기도 그때 참 좋아했더랬다. 장만옥은 나이 들어가면서 더 좋아진 배우. 좋았다. 이 책이 여러 추억을 일깨워주었다. 몇 편은 다시 봐야겠다. 으아, 추억 돋는다.
. . .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일 때문에 싱가폴로 떠나게 된 양조위는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장만옥에게 묻는다. "나에게 티켓 한 장이 있다면,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하지만 장만옥은 거기에 응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4년 뒤, 앙코르와트를 찾은 양조위는 사원의 구멍 속에 자신의 못다 한 오랜 사랑을 봉인한다. (p.15)
- 골드핀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기. 꼭 겨자 소스에 찍어 먹어야지.
<중경삼림>의 모든 주인공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금성무는 허탈한 마음에 자정이 지나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막 뛰어오르고,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스튜어디스 주가령과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남자 친구 양조위 모두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요리를 하고 밖을 내다보며 그렇게 잠든다. 장장 8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인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이 촬영되던 당시 막 운행을 시작했었다. 그 속도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마치 눈앞으로 영화 슬라이드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는 누구나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던 왕정문처럼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는 창문과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앞뒤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곁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현지인과 관광객 그렇게 모두 뒤섞여 일렬로 한 방향만을 바라본다.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2046>에서 양조위는 말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p.58-59)
. . .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99년 장만옥에 대한 특집호에서 이렇게 썼다. "장만옥은 홍콩의 비 오는 밤과 같다. 그녀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p. 64)
. . . 스탠튼 바 앞은 세계 각국 여행자들이 모여 맥주 한 병을 들고 서로 친구가 되는 곳이다. 늘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꼭 스탠튼 바 옆 계단에 컬터앉아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며 맥주 한 병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다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정말 주변 계단에 걸터앉은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걸어왔다. 여행자의 들뜬 마음을 만끽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나 할까. (p.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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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만나는 구도 마스터. 5월에는 술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셔봤다. 두 번씩이나. 한 번은 강남의 엄청 큰 수제맥주집에서. 한 번은 상수의 아일랜드 펍에서. 처음에는 무척 긴장되었고, 두 번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서도 씩씩한 서른 여섯으로 적응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사이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읽었다. 이 책이 시리즈의 첫 권인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나중의 이야기부터 읽게 되었다. 이제 구도 마스터의 이야기는 출간된 책으로는 <벚꽃 흩날리던 밤> 한 권이 남았고, 또 마지막 한 권이 출간되겠지. 그러면 끝. 아쉽다.
산타마가와 선 산겐자야 역에서 나와 역 앞 상점가를 지나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2백 미터 정도 되는 골목의 끝에 막다른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 바로 앞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술집 '가나리야'. 하얗고 커다란 초롱 이외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을린 삼나무로 만든 두터운 문을 열면 카운터 안쪽에 마스터 구도가 있다. 가게에는 열 석 정도의 L자형 바와 2인용 탁자가 두 개 있다. 생맥주는 필스너. 도수가 다른 네 종류의 맥주가 갖춰져 있다. 맥주잔이 비거나 오래되서 거품이 빠지면 새 맥주로 바꿔주고, 좋은 재료가 있는 날은 마스터가 묻는다. 마침 이 재료가 들어왔는데, 이런 걸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맛있는 안주와 내 기분에 맞는 도수의 술이 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꿰뚫어 보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은 마스터가 있는, 그리고 항상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있는 술집이다. 5월, 두 잔의 맥주를 혼자 마시면서 가나리야를 생각했다. 내게도 가나리야가 있음 좋겠다, 하는.
이번 책에서 좋았던 단편은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거처'. 사실 나는 이 전에 읽었던 <반딧불 언덕>의 이야기가 더 좋았다. '마지막 거처'의 이 부분에는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좋은 안주에 좋은 술을, 좋은 사람과 마시고 싶은 불금이다. :)
조금 더 달라고 하자, 부인은 올해 처음 수확한 가지로 만들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모터크로스 라이더들이 엉망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텃밭에서 자란 가지인 듯했다. 땅에 모래가 섞여 있어서 작년에는 재배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흙을 조금씩 옮겨와 토양을 개량하고, 마침내 스무 개 정도의 가지 묘목을 키웠다며, 처음으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더욱이 겨자와 누룩과 미소를 균등하게 섞어서 기분양념을 만들고, 가볍게 소금을 뿌려 담근다는 것까지 즐겁게 말해 주었다. 옆에서 차가운 청주를 마시고 있던 데라오카 노인도 들뜬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 안주에 마시는 술이 최고지."
'시작 즈음에'라는 제목을 붙인 사진이 그때 오두막 안에서 부부를 촬영한 것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되었다. 그날 밤, 데라오카 노인은 마침내 쓰마키의 명함을 받아 주었다. '마지막 거처'라는 시리즈는 약 1년에 걸쳐 촬영되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 117-118쪽.
에드가 말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여행을 떠난다고 믿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삼천년이 걸리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영혼이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로 보존에 신경을 쓰진 않아요."
염색체도, 미토콘드리아도 없는.
"삼천년이라, 그리고 돌아온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에 따르자면 그렇죠." 그가 빈잔을 내려놓고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니나가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물어보았다. "영혼같은 걸 믿나요?"
그는 손으로 식탁을 누르며 잠시 서 있었다. 작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젓더니 그는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 p.210 '위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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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혹은 그가 있다. 그가 길을 걷고 있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있었지만, 나쁜 길은 아니었다. 길을 걷던 그녀 앞으로 갑자기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그녀의 몸이 흔들릴 정도다. 그녀는 길가의 작은 나무 아래 몸을 기댔다. 나무 아래였지만 비바람을 온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흠뻑 젖었다. 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비바람이었다. 그녀는 작은 나무에 기대어 몸을 잔뜩 숙이고 비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비바람이 지나갔다. 멈춘 게 아니라 지나갔다. 사라진 게 아니라, 커다란 회오리를 만들며 그가 지나왔던 길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바람이 지나고 이내 햇볕이 나타났다. 그녀는 길을 계속 걸었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서 가느다란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난 후, 그 혹은 그녀는 기억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따듯한 무엇이었다고. 그리고 그녀 혹은 그는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은 그것이 언제고 자신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2014년 9월 12일 직인이 찍힌 엽서에 소설의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앨리스 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글은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어 읽어볼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 문장들에 반해 책을 구입했다. 두꺼운 책이라 오래 걸렸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덮어버렸고, 몇 개월 뒤에 다시 펼쳤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그 이야기가 끝나니, 그 다음 이야기는 그 전 이야기보다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위와 같은 풍경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 나오는 비바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랬다. 무슨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결국 벌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마무리됐다. 어떤 이는 마음을 여미고, 어떤 이는 서서히 누군가를 잊어갔다. 그런 결말들이 쓸쓸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시인은 인도에 갔다. 시인의 꿈이었다. 인도에 가는 일이. 시인은 인도에 가서 보고, 생각하고, 보고, 생각했다. 지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고, 지금의 일들도 생각했고, 때로는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했다. 시인은 돌아왔고, 얼마 뒤 다시 인도에 왔다. 시인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 해 만에 다시 인도에 왔다." 김연수의 추천글을 읽고, 출간되었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어느 날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해 놓고는 가만히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2015년 겨울 어느 날, 가만히 꽂혀 있는 하얀 책등을 보게 됐고, 읽을 때라고 생각했다. 기승전결의 여행기를 계속 읽다가, 기승전결이 없는 시인의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지러웠다. 무슨 풍경인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삼분의 일 즈음 지나서야 풍경들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인이 두 해에 걸쳐 여행한 인도. 시인의 꿈이었던 인도. 시인의 눈으로 인도를 들여다봤지만 사실 어떤 나라인지 모르겠다. 대학교 때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한달 정도의 경비가 100만원 미만으로 광고된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실제로 한 달동안 인도를 다녀왔는데, 심하게 배앓이를 했지만 그곳에서 행복했다고 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어떤 이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 나는 인도에서 출발한 엽서 두 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는 아니었다. 낯설지도 않았다. 오래되어 더는 느끼지 못하던 바로 그 냄새였을 뿐이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누런 광채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는 이내 주 경계선을 넘어 밤길을 달려갔다. 나도 어떤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 p.86-87
짜이를 주문했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더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왠지 뜨거운 것을 마시고 싶었다. 낯선 이국에서 적응하려면 그곳의 차를 자주 마셔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딱히 선택할 만한 것도 없었다. 사내가 손잡이 달린 컵으로 몇 번 우유를 떠 넣고 두 손으로 뭔가를 으깨어 넣는 동안 부글부글 냄비가 끓어올랐다. 그는 유리잔 가득 짜이를 따라주었다. 너무 뜨거워서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손바닥과 손끝으로 겨우 짜이를 받아들고 앉았다. 그 뜨거운 것을 입술 끝으로 조금 받아 넘기자 혼몽인 듯 덜 깬 잠이 물러가는 듯했다. 내 입에서 강물 냄새가 났다. 마치 멀고 먼 고요한 강가에 앉아 있는 듯 했다. 강물에 흰 발목이 잠긴 물풀 냄새가 났다. 두 시간만 더 가면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 p.93-94
혼자서 하는 말이라면 이미 말이 되기 전에 자기 안에 고여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온 혼잣말은 어디에도 고이지 않는다. 흘러가버린다. 밤바람에 스며들 뿐이다. - p.116
아무리 더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어도 그것은 인도에서 산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어떤 물건은 기억과 함께 존재한다. 그 물건에는 그때의 시간과 그곳의 공간이 존재한다. - p.158
이상하게도 모두가 어딘가로 떠나지만 모두가 이곳에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어깨를 스쳐 가지 않아도 좁은 골목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어느 먼 곳을 거쳐 왔는지 꿈꾸게 된다. 한줌의 바람이 젖은 먼지로 바짓단에 묻어 있어도 그 오랜 것들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냄새가 없었다. 묵은내마저 다 사라지고 없는 골목에서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생각했다. 길을 등지고 들어선 식당 앞에 앉아서 양귀비 같은 까만 씨앗을 넣고 담배를 마는 사내에게서 낯선 기억들이 떠올랐다. - p. 168-169
짜이를 한 잔 마시자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내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카다멈과 정향과 생강과 어떤 알 수 없는 마살라 향이 나를 오래된 골목 안쪽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오래 끓고 남은 홍차 찌꺼기처럼 짙은 그늘 속으로 작고 고요한 문이 가득한 길이었다. 냄비에다 두 손으로 생강을 짓이겨 넣던 사내가 그걸 눈치챘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p.210-211
이 세계는 신이 꾸는 꿈이다. 그리고 인간도 신을 꿈꾸며 이 세계를 유지한다. 혹시 인간이 꿈을 꾸는 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실패한 결과가 아닐까. 신조차도 이제는 이 세계를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세계를 허구로 만드는 데 재능을 탕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 꿈이 그러한 자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 p.222-223
시를 외울 필요가 없다고 하니, 다들 얼굴이 환해졌다. 뭔가 불편한 숙제 하나를 해결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서로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쓴 시를 하나하나 읽었다. 별을 소재로 한 시였다. "젠장! 또 달고야 말았다, 별" 이런 시구가 나올 때는 다들 활짝 울었다. 자신의 삶을 시로 쓰고 함께 읽으면서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다 소용없는 것이리라. 자기의 가슴을 치고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서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 p.256
사랑할 때 가장 먼저 태어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다.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다 지워버리고 남은 나를. - p.262
지난 크리스마스 밤, 잠실의 공연장에 있었다. 옥주현이 출연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뮤지컬을 보러 갔다. 동생이 표가 생겨 따라간 거였고, 별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보다 루이 16세가 궁금해졌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왕권이 짓밟힌 상황에서 그(들)의 도주 계획이 실패하고,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일과를 마친 루이 16세는 자신의 초라한 의자 위에 앉아 노래했다. 그냥 평범한 대장장이로 태어났으면 좋았다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고.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당할 때. 그녀는 의연하게 단수대로 올라갔다. 더이상의 노래나 대사는 없었다. 단수대에 누워 목을 대었고, 무대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게 물들었다.
어쨌든 '그'가 궁금해진 나는 얼마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떠올랐다. 공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읽고 싶었고, 새해 나의 첫 책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이었던 페르센이 계획했던 루이 16세 일가 도주사건의 24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페르센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녀의 목숨을 꼭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루이 16세 일가를 프랑스 외곽으로 도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곳에서 그들은 망명을 할 수도 있고, 주변 국가들에게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고, 왕당파와 결합하여 다시 왕권을 굳건히 세울 수도 있다고 믿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 도주사건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책을 읽고 보니 이 모든 실패는 내가 뮤지컬을 보면서 측은해했던 루이 16세 때문이었다. 그는 때에 맞지 않는 질투를 했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고, 말도 안 되는 여유로움을 부리면서 이 도주계획을 완전히! 백퍼센트 망쳐놓았다. 설마, 설마, 이번에도? 싶을 때, 루이 16세는 그래, 그래 이번에도 내가, 이러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을지는 몰라도, 무능한 왕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총명했던 형이 죽으면서 그를 왕위에 올려 놓았다. '오직' 루이 16세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결정적인 요인을 한 것은 분명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직 왕실 안에서 곱게 보살펴진, 그래서 불운했던 왕비였지만, 혁명이 발발하고 현실에 직면하자 의연하고 단단해진다.
이건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문장들.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앙투아네트의 편지)
- 74쪽
애초에 앙투아네트는 용모가 단정하다기보다 그 훌륭한 자세와 우아하면서도 발랄한 태도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터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는 회화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쿠차르스키는 슬픔에 빠진, 젊음을 잃어가는 그녀의, 저녁노을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미완성의 이 초상화를 보면 앙투아네트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건 페르센의 마음 한구석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79~80쪽
그런데 방에 있던 사람 모두가 왕의 한심스러움을 말없이 비난하고 있을 때, 긍지 높은 왕비는 놀라울 만큼 스스로를 억제했다. 초조해하고, 절망하고, 체념한 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그것은 신하가 왕을 경멸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결의였다. 왕권은 흔들림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려는 일념으로 표정도 온화함을 되찾고, 거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일 만큼 상냥한 태도로, 슈아죌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왕은 가족 때문에 하는 수없이 이러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유부단한 왕을 감쌌다.
왕비의 의향이 충분히 신하들에게 전달되었음은, 신하들이 왕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왕비와 만나기 전까지는 왕당파조차 그녀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았다. '사치스럽고 교만하며 왕을 쥐고 흔드는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편견 섞인 이미지는 그렇게나 강렬한 것이었다. 만약 루이 16세가 선앙 루이 15세처럼 화려한 애첩이라도 데리고 있었더라면 정치에 대한 불평불만은 왕비가 아니라 그 애첩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외국인 왕비 앙투아네트는 떄로 자진해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됨으로써 왕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 283쪽
흥미를 가지고 있는 소재라 그런지, 재미있게 읽혔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책이 말하는 바도 흥미로웠다. 이 도주에 성공했더라도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 페르센의 예상대로 프랑스의 왕권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거. 역사는 이미 이쪽으로 기울었고,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그게 다른 쪽으로 기우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성공했더라도 목숨을 건지고 오래 살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에서는 무심히 잊혀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의 극적인 죽음이 아직까지도 그들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은, 지도자는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