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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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아침독서서재를쌓다 2015. 10. 22. 08:34
매일 밤 그는 벨라가 우기는 바람에 아이가 잠이 들 때까지 아이 옆에 누웠다. 이것은 수바시와 벨라의 관계를 서로에게 반기시키는 행위였다. 거짓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한 관계를. 밤마다 아이가 이를 닦은 다음 파자마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 나서 불을 끄고 아이 옆에 누웠다. 벨라가 그에게 얼굴을 자기쪽으로 돌리라고 했으며 이어 자기 눈을 바라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의 숨이 섞였다. 아빠, 나를 봐, 아이가 속삭였다. 아이의 강렬하고 순수한 속삭임에 수바시는 가슴이 저릿했다. 때때로 아이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아빠, 나를 사랑해? 그럼. 난 아빠를 더 사랑해. 무엇보다 더?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건 안돼. 그건 내가 할 일이야. 그렇지만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아빠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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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서재를쌓다 2015. 9. 15. 21:39
9월 중순. 한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가을이 와버렸구나, 아침마다 느끼고 있다. 8월보다 조금 쌀쌀해졌다. 토요일, 학원을 한 번 갔고, 한 번 수업을 빠졌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고레에다 히로즈 감독의 책 . 그의 영화들처럼 담담한 글들이 담겨 있었다. 무심히 읽고 책장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라고 생각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제법 쌀쌀한 때였으니 가을이나 겨울이었을 거다. 우리집은 복층인데, 여름에는 아예 위에서 자질 못한다. 복층이 겉보기에만 좋다는 걸 이 집에서 살면서 느끼고 있다. 아무튼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올라가질 못하고, 봄과 가을에는 올라가 자기에 좋다.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공간이다. 외롭지 않으면서 외로울 수 있는 공간인 거다. 소리로는 외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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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오면 그녀는서재를쌓다 2015. 9. 2. 22:15
마지막에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친구들이 커다란 소라게를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후타는 생각한다. "이런 광경도 얼마 안 남았구나. 4월이 오면 아마 모든 게 변할 것이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4월이 오면 그녀는." 일요일에는 '이대'로 영화를 보러 갔다. 다큐 영화제 마지막 날이었는데, SNS에서 에 관한 글을 보고 보고 싶어져서 보러 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매달 한 번씩 티 모임을 갖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였다. 당연하지만, 할머니들은 처음부터 할머니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줍은 아가씨였다가, 사랑에 빠진 여자가 되었다가, 결혼을 한 유부녀가 되고,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고, 손자손녀를 본 할머니가 되었다. 관객과의 대화도 있었는데, 감독이 말했다. 대학교에서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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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서재를쌓다 2015. 7. 30. 23:32
동생은 박웅현 빠순이다. 어디서 박웅현을 알아와서는 를 매일 들고 다니며 읽었다. 모든 부분이 좋다고 했다. 밑줄을 얼마나 그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박웅현이 나온 팟캐스트를 같이 듣자고 했다. 집에서 둘이서 낮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술도 들어갔으니, 좋다고 듣자고 했다. 박웅현이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우리 둘에게 필요한 거였다. 내가 말했다. 다시 들어보자. 방금 자존감 부분. 다시 들었다. 다시 들어도 좋았다. 다시 들어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였다. 동생이 물었다. 한번 더 들을까?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가 우리는 그 부분을 녹음하기로 했다. 동생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들을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어느 쓸쓸한 귀가길에 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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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서재를쌓다 2015. 6. 15. 22:14
올해 포르투갈을 못 가게 된다면 마카오라도 가자고 결심했었다. 뭔가를 검색하다가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마카오에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여럿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카오는 카지노가 다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막 열의에 차서 마카오 책을 찾았는데, 마카오만 소개된 책은 없고, 홍콩과 마카오가 함께 소개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여행을 가게 된다면 사람들이 다 가는 곳 말고 좀더 특별한 곳을 돌아다니고 싶어 구입한 책이다.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책. 이 책을 읽고 홍콩이라는 도시는 물론이고 주성철이라는 사람에 빠졌다. 정말 심한 홍콩영화 덕후인데, 뭐랄까. 그 열정이 부러운 사람이랄까. 영화를 보다 인상적인 곳을 발견하면 크레딧의 장소협찬지를 캡쳐해 두고 그 곳을 검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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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서재를쌓다 2015. 6. 5. 08:21
두 번째로 만나는 구도 마스터. 5월에는 술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셔봤다. 두 번씩이나. 한 번은 강남의 엄청 큰 수제맥주집에서. 한 번은 상수의 아일랜드 펍에서. 처음에는 무척 긴장되었고, 두 번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서도 씩씩한 서른 여섯으로 적응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사이 을 읽었다. 이 책이 시리즈의 첫 권인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나중의 이야기부터 읽게 되었다. 이제 구도 마스터의 이야기는 출간된 책으로는 한 권이 남았고, 또 마지막 한 권이 출간되겠지. 그러면 끝. 아쉽다. 산타마가와 선 산겐자야 역에서 나와 역 앞 상점가를 지나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2백 미터 정도 되는 골목의 끝에 막다른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 바로 앞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술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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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서재를쌓다 2015. 3. 29. 20:14
에드가 말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여행을 떠난다고 믿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삼천년이 걸리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영혼이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로 보존에 신경을 쓰진 않아요." 염색체도, 미토콘드리아도 없는. "삼천년이라, 그리고 돌아온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에 따르자면 그렇죠." 그가 빈잔을 내려놓고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니나가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물어보았다. "영혼같은 걸 믿나요?" 그는 손으로 식탁을 누르며 잠시 서 있었다. 작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젓더니 그는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 p.210 '위안'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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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병든 자서재를쌓다 2015. 3. 16. 07:21
시인은 인도에 갔다. 시인의 꿈이었다. 인도에 가는 일이. 시인은 인도에 가서 보고, 생각하고, 보고, 생각했다. 지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고, 지금의 일들도 생각했고, 때로는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했다. 시인은 돌아왔고, 얼마 뒤 다시 인도에 왔다. 시인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 해 만에 다시 인도에 왔다." 김연수의 추천글을 읽고, 출간되었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어느 날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해 놓고는 가만히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2015년 겨울 어느 날, 가만히 꽂혀 있는 하얀 책등을 보게 됐고, 읽을 때라고 생각했다. 기승전결의 여행기를 계속 읽다가, 기승전결이 없는 시인의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지러웠다. 무슨 풍경인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삼분의 일 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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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서재를쌓다 2015. 3. 7. 10:13
지난 크리스마스 밤, 잠실의 공연장에 있었다. 옥주현이 출연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뮤지컬을 보러 갔다. 동생이 표가 생겨 따라간 거였고, 별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보다 루이 16세가 궁금해졌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왕권이 짓밟힌 상황에서 그(들)의 도주 계획이 실패하고,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일과를 마친 루이 16세는 자신의 초라한 의자 위에 앉아 노래했다. 그냥 평범한 대장장이로 태어났으면 좋았다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고.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당할 때. 그녀는 의연하게 단수대로 올라갔다. 더이상의 노래나 대사는 없었다. 단수대에 누워 목을 대었고, 무대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게 물들었다. 어쨌든 '그'가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