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from 서재를쌓다 2016.07.27 23:00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몸 속 어딘가에, 아니 마음 속 어딘가에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는 것 같다고. 전혀 잊고 있었던 말인데, 어느 순간 문득 떠올라 나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의 그이는 이런 마음이었던 거구나. 그때의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그 마음을 백프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다. 그 말들은 아주 소소한 말들부터 의미심장한 말들까지 다양하다. 따뜻한 말도 있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말도 있다. 얼마 전 만난 남희언니는 친구 얘기를 하며, 그즈음엔 술을 마시면 신이 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 신이 나는 게 미안했어,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어느 저녁 친구네 집으로 가는 지하철 계단 위에서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 언니는 언젠가 그해에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부럽다고 하자, 언니는 그만큼 외로웠다는 거야, 식의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극장 안에서 혼자 있다가 생각이 났다. 차장님의 내 나이엔 기름종이가 필요없어, 라는 말도. 흑흑.


   소설의 경우도 그렇다. 어제 일본의 장애인 살인사건을 접하면서 이 소설이 생각났다. 이 소설은 살인사건 이야기도 아닌데, 생각이 났다. 같은 일본의 이야기라서 생각이 났던 건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거액의 은행돈을 횡령한 주부의 이야기를 범죄 자체보다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냈기 때문인 것 같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떻게 자라났고,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사건 후에 어쩔 생각이었을까. 이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이 말은 한때는 함께 돈을 쓰는 게 즐거웠지만 이제는 그녀의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진 불륜의 연하남이 주인공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태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이렇게는 더는 살 수 없을 거 같다 결심하고 라오스 국경을 넘으려다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거 같은 경찰에게 중얼거리듯 건넨 말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여기'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고, 그보다 더 많은 걸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리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뒀고 임신을 하고 싶었지만 잘 되질 않았다. 집안일만 하며 계속 있는 것이 그래서 일을 구했다. 은행의 파트타이머였다. 일하는 즐거움을 소소하게 느끼다가 어느 날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살 때 현금이 부족해 고객의 돈에 손을 댄 이후로 리카의 인생을 조금씩 달라졌다. 한 아이를 만났고, 횡령이 시작됐다. 조금만 조금만, 금방 채워넣으면 돼, 했던 것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의 횡령으로 이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리카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소설을 읽고 꽤 지난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내 안에도 리카가 있다는 걸. 나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이 이야기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도 그만큼 좋다고 해서 보았는데, 정말로 소설도 좋고, 영화도 좋다. 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이야기같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 중 뭘 먼저 보든, 나중에 다른 것도 꼭 보는 걸 추천한다. 영화는 리카가 연두빛이 가득했던 커다란 창을 깨어부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고, 소설의 경우는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태국에서의 도피생활 부분이 좋았다.

   나온 것은 닭고기와 바질 볶은 것에 달걀부침을 올린 밥이었다. 리카는 하야마 것까지 맥주를 추가 주문하고 먹기 시작했다. 입에 넣자 은근히 달았지만, 삼키는 순간 놀라울 만큼 매워졌다. 매워, 라고 조그맣게 말하자 하야마가 웃었다. 리카는 너무 매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맥주를 마시고 식사를 계속했다.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식사하고, 사람과 웃는 것이 얼마 만인지. 방심하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추억 때문에 좀 전까지 단단하게 뚜껑을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물이 새듯 어느덧 리카의 마음속에 추억이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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