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안국역의 작은 극장에 있었다. 그날 극장 이벤트로 <리틀 포레스트>를 단돈 만원에 연이어 볼 수 있었다. 집에서 혼자 보았던 여름과 가을을 극장에서 다시 한번 혼자 봤다. 겨울과 봄은 친구와 함께 봤다.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사계절 동안 계곡과 산, 논으로 둘러 쌓인 일본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여자아이가 농사를 짓고, 살림을 하고, 밥을 지어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무 열매를 따서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잼을 만들어 먹고, 직접 재배한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계곡에서 딴 나물줄기를 잘게 다져 맨밥에 얹어 먹고, 직접 딴 밤을 졸여 간식으로 먹는 장면을 지켜봤다.

 

    카레. 카레도 있었다. 여자 아이는 동네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친구는 동료를 도와준 이야기를 했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건 진정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야. 친구가 가만 있다 말했다. 너는 항상 그러더라.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그게 그 사람을 위한 건지, 아닌 건지 정말 알지도 못하면서. 다음 날 여자아이는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걷는다. 그 깊은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친구가 와 있었다. 커다란 냄비를 들고서. 카레 만들어 왔어. 같이 먹자. 어제는 미안했어. 두 사람은 평온하면서 담백한 화해를 하고, 함께 카레를 데워 먹는다. 마침 여자아이가 다른 요리에 쓰려고 만들어 두었던 반죽은 난이 된다. 그렇게 먹는 두 사람의 '오늘'의 카레. 그리고 두 사람이 마루에 앉아 나눠 먹었던 봄나물과 봄꽃과 봄생선을 넣어 만든 담백하면서도 꽉 차보였던 봄 스파게티도 기억에 남는다.

 

   어제는 퇴근을 하고 동네 야채가게에서 호두를 샀다. 영화 속 여자아이는 산에서 다람쥐와 경쟁하며 떨어진 호두를 줍고, 호두를 땅에 묻어 겉이 까맣게 썩길 기다린 뒤 망치로 호두껍질을 깨서 꽉 찬 호두알을 이쑤시개로 깨끗하게 빼내고 절구통에 넣어 질퍽하게 될 정도로 빻았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그냥 야채가게에서 호두를 샀다. 집에 절구통도 없어서 믹서기로 곱게 갈았다. 갈은 호두를 씻은 쌀에 간장과 맛술 양념을 하고 새벽에 취사가 되게 예약을 하고 잤다. 여자아이처럼 일을 하다 먹을 수 있도록 아침에 일어나 참기름과 깨를 살짝 섞어 오니기리를 만들었다. 동생 도시락도 만들어 줬다. 간장을 한쪽 면에 더 바르고 후라이팬에 구웠으면 간이 딱 맞았을 것 같은데, 약간 심심하긴 했지만 맛있었다. 동생에게서도 맛있다는 메세지가 왔다. 오늘은 내일의 오니기리를 위해 마트를 들러 연어를 사왔다. 우유도 사고, 계란도 샀다. 계란 코너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고기를 너무 좋아하지만 점점 채식주의자'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던 E가 얼마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계란은 꼭 풀어 키운 닭이 낳은 것만 산다는 것. 가격을 보고 고민을 하다 방사된 닭이 낳은 알을 샀다. 조금씩이지만 점점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버이날이라 아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빠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마가 건강에 좋다고 해서 아침마다 우유에 꿀을 살짝 넣고 갈아 먹고 싶었는데, 마트며 야채가게며 너무 비싸더라. 아빠에게 말하니 밭에 마를 한번 심어 보겠다고 했다. 그게 작년 일이다. 결국 아빠의 작년 마 농사는 폭삭 망했다. 심은 그대로 썩어 버린 것 같다고 했다. 마는 먹고 싶은데, 참 비싸니까 나는 마의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월, 경상남도 어느 마을의 작은 밭에서, 작년에 심어놓은 마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아빠가 전했다. 어쩌면 올해는 아빠의 마를 갈아마실 수도 있겠다는 기쁜 소식. 실패했다고 생각한 일이 결코 실패한 게 아니라는. 아빠가 심은, 죽은 줄 알았던, 그러나 다음 봄을 준비할 뿐이었던, 마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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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콩스탕스 2015/05/13 13:1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이 정말오랜만에 올라왔네요ㅎ가끔왔었는데ㅋㅋ봄이되자마자 여름이네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5/05/17 22:51 BlogIcon GoldSoul

      아, 계속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네요. 봄이 되자마자 여름이에요. 일교차가 너무 심해서 아침에는 춥고, 낮에는 막 땀나요. 동생은 그래서 이 계절에 감기도 걸렸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

  2. BlogIcon 네르 2015/05/14 14:0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반가워서 한달음에. ^^ 마가 전해준 가르침이 마음에 남네요.
    저도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5/05/17 22:54 BlogIcon GoldSoul

      오늘 제가 고등학교를 보낸 곳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잠깐 집에서 밤을 지새고 왔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마의 싹도 보고 왔어요. 이제는 아빠의 자랑이 되어버린 마예요. 동생들이 전화해도 아빠는 마 얘기를 빼놓지 않고 있대요. 흐흐- 저는 단번에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사람 같아요. 점점,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우리 같이 노력해요. :)

  3. 오혜진 2015/05/16 01:0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리운 금령씨!
    오랜만이죠!!
    나도 오랜만이고, 금령씨 글도 오랜만에 올라왔네요 :)

    잘 지냈나요?
    나도 잘 지내고 있어요-
    엽서에 썼던 것처럼 나는 일을 정리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마무리가 되어서 벚꽃 구경은 못했어요.

    일을 정리하고 경주에 다녀왔어요. 벚꽃은 보지 못했지만 유채꽃이 예뻤어요.
    금령씨 경주여행기에서 보고 경주에 가면 꼭 봐야지 했던 감은사지에 가서 석탑도 봤고, 많이 걷고, 쉬었어요.
    경주 다녀와서는 노트북이 고장나 고치느라 여기저기 다녔고, 며칠은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기도 했구.
    그리고 최근에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고, '살을 빼셔야 합니다'라는 처방을 받고 운동을 시작했어요.

    나도 이 영화 개봉일 손꼽아 기다렸는데, 담주에 서울에 가서 보려구요.
    집에 있으니까 스스로 요리를 해서 먹는 일이 많아요.
    오늘 점심엔 뭘 먹을까, 저녁은 뭘 먹지? 이런 고민도 하고. 정성들여서 음식을 하다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기도 해요.

    집에서 쉬니까 좋냐고 사람들이 물어봐요.
    처음엔 두렵고 걱정도 되고 많이 심란했는데, 지금은 그냥 좋아요.
    마가 전해준 가르침처럼, 나에게 주어진 휴식시간도 그저 의미없는 시간이 아닌, 다음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겠죠? 나도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년 봄엔 어떤 모습의 내가 되어 있을까, 문득 기대됩니다.

    한번도 만난적 없지만 자주자주 생각나는 금령씨-
    보고파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5/05/18 12:56 BlogIcon GoldSoul

      혜진씨, 혜진씨-

      그 엽서 받고 마음에 남아서 계속 생각하다가, 봄에 부안을 다녀왔거든요. 흠, 봄이라고 할 수 있나. 날씨로 따지면 늦은 겨울이었는데. 암튼 부안 내소사에서 조그마한 선물을 샀는데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보내질 못하고 있어요. 그랬구나. 경주 다녀왔구나. 감은사지는 잘 있죠? 나는 예전엔 존재했는데 지금은 없어진 곳에 가게 되면 마음이 이상해요. 그 충만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좋아요. 혜진씨도 다녀왔단 얘기 들으니까 경주 또 가고 싶다. 하지만 경주는 자제하기로. 흐흐-

      이번 주에 <위아영>을 봤어요. 영화가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젊다고 모두 순수한 건 아니고, 나이 들었다고 실패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할까. 혜진씨, 그러니까 우린 죽는 날까지 실패할 거예요. 그런 생각이 요즘 내게 많은 도움이 되요.

      그리고 저도 그래요. 혜진씨. 우리 함께 살을 빼 보아요. 흐흐- 이건 늘 결심으로 끝나고, 요요가 찾아오지만! 우리 점점 건강해져요.

      PS. 저 요즘 <와카코와 술> 보고 있는데, 혹시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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