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341건

  1. 여름밤 2 2014.07.14
  2. 소년이 온다 8 2014.06.11
  3.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2 2014.06.05
  4. 청춘의 문장들+ 2 2014.06.04
  5. 새로운 오키나와 여행 3 2014.06.01
  6.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4 2014.03.12
  7. 일요일 오후 2014.03.03
  8. 당신에게, 여행 14 2014.02.12
  9.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2014.02.05
  10. 그들에게 린디합을 2 2014.01.27

여름밤

from 서재를쌓다 2014. 7. 14. 21:54

 

 

 

 

 

    택시 안이었다. 혹시 인디밴드 음악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그렇다고 하니, 그럴 줄 알았다고 했다. 일산에서 1차를 하고 2차를 하러 합정으로 넘어가는 택시 안이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가 만나기도 전, 같은 공간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크리스마스 날, 루시드 폴의 공연장에. 그것도 그녀도, 나도 혼자서. 좋아할 것 같다면서 이 만화책을 빌려줬다. 정말 아끼는 만화라면서. 바닷마을 다이어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화한다는 뉴스를 보고, 기억이 가물가물해 고민하다가 주문을 했다. 누군가 이 책의 100자평에 "계속 벼르다가 산 만화책들. 안 샀다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다."라고 남긴 걸 보고서 바로 주문했다. 다시 읽는데,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처음 읽는 것만 같았다. 읽으면서 지금은 일을 그만둔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내게 인디밴드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하던 사람. 우리는 공통점이 꽤 있었는데, 좀더 친해지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밤, 다섯 권을 다 읽고 나니 누군가 남긴 100자평처럼 나도 "계속 벼르다가 산 만화책들. 안 샀다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다." 가마쿠라에 더 가고 싶어졌고, 잔멸치 토스트를 꼭 만들어 먹고 싶어졌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해도, 시간을 두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에게 서서히 물들어 가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아야세 하루카가 과연 첫째 딸 역할에 잘 어울릴까도 생각했다. 그 사람은 임신을 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애기를 낳고 누구의 엄마로 카카오톡 대화명이 바뀌더니, 얼마 전에는 부쩍 자란 아이의 사진이 올라왔다. 한번 연락을 해 볼까 하다 말았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내년 초여름이면 영화를 볼 수 있겠지. 그녀의 아이는 그때가 되면 몰라보게 더 자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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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from 서재를쌓다 2014. 6. 11. 22:1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133페이지. 책을 읽기 시작한 날, 퇴근을 하고 그대로 소리없이 집에 들어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놓고 옷을 갈아 입었다. 화장실 불을 켜고 수도꼭지를 틀어 비누거품을 내 발을 씻었다. 얼굴도 씻었다. 수건으로 닦고 화장실 불을 끄고 화장대 앞으로 가 스킨과 수분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보조등을 켜고 그대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이 페이지를 만났다. 133페이지. 저 문장들은 오른쪽 제일 아래줄에 있었다. 그 뒤의 문장을 읽으려면 한장을 넘겨야 했다. 그런데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는데, 마음이 아파 넘길 수가 없었다. 이 페이지를 넘기면 이 가엾은 소년들의 가혹했던 최후를 정면으로 마주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133페이지와 함께 했다. 고요했다. 티비도 틀지 않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 이제 내가 133페이지에서 134페이지로 넘어가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정말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음엔 소년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제목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소년의 이야기가 끝나니 다른 한 소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소년은 광주에서 죽었다. 다른 한 소년의 이야기가 끝나니 출판사에 다니는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다른 한 소년은 광주에서 죽었다. 출판사에 다니는 여자 이야기가 끝나니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남자는 모나미 검정 볼펜을 볼 때마다 숨을 죽인다고 했다. 남자는 광주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그 밤 총을 가졌지만 총을 쏘지 못했다. 한 남자의 이야기가 끝나니 또 다른 한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녀는 옥상에서 복숭아를 나눠먹던 봄밤을 그리워 했다. 여자는 광주에서 살아남았다. 여자는 그 후 자궁이 망가져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 봄밤을 그리워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끝나니 어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소년의 어머니다. 소년의 어머니다. 이어지는 또하나의 이야기. 그리고 소설은 끝난다. 모두 광주의 이야기다.

 

    절대 아침에 읽으면 안 된다. 화장을 곱게 한 아침에 더더욱. 아침에 읽다 결국 책을 덮었다. 계속 눈물이 나서. 내게 창비 홈페이지 공지글에 올라온 2014년 6월 2일에 발행된 초판 3쇄본이 배송되었다. 6월 2일 3쇄본이 무엇인고 하니, 1쇄본과 2쇄본, 그리고 다른 날 발행된 3쇄본은 모두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비가 올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배송받은 3쇄본은 이렇게 시작한다. "전등을 타고 자꾸 안경이 흘러내린다고, 겨울엔 실내에 들어갈 때마다 안경알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작은 형이 그랬는데, 더이상 눈이 안 나빠져서 안경을 안 쓸 순 없을까." 첫 페이지와 두번째 페이지가 뒤바뀌어서 제본되었다. 처음엔 이상한 소설이다. 이렇게 다짜고짜 시작하다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장을 넘기니 거기에 진짜 첫 문장이 있었다. 읽기 시작할 때는 교환을 받아야지,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이것 나름의 의미 있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바꾸지 않아도 좋겠다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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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한 어떤 바램이 있어서 출간되었다는 걸 안 순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일찍 번역본을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은행나무에 기자라 이즈미의 팬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은 그동안 봐 왔던 기자라 이즈미의 드라마와 비슷했다. 조금은 밋밋하고, 뭔가 여운이 돌고, 어느 순간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다가, 어느 정도의 행복감으로 충만해지는 것. 이 연작소설집에는 죽음이 늘 존재한다. 여자가 있다. 여자는 꽤 괜찮은 남자를 만난다. 남자에게는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 있다. 여자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남자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여자는 죽는다. 남자와 남자아이는 은행나무가 있는 집에서 살아간다. 남자아이는 남자어른이 되고, 한 여자를 만난다. 둘은 결혼을 한다. 그러다 한 명의 남자아이도, 한 명의 여자아이도 낳지 못한 채 남자는 병에 걸려 죽는다. 그 은행나무가 있는 집에 여자와 남자의 아버지가 남았다. 또 다시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그 삶이 생각보다 평화롭다. 그러던 중 여자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긴다. 여자는 은행나무가 있는 이 집의 소소하고 오래된 평화로운 삶이 좋다. 그 남자를 좋아하지만,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이 소설집은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이다. 은행나무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은행나무가 꽃을 피우고, 잎을 돋우며, 열매를 맺고, 가지를 드러내며 다음 봄을 준비하는, 그런 이야기. 좋았던 장면은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가 이제는 없는 여자의 남편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쓸쓸함을 느끼는 장면. 아침을 함께 먹는데, 여자와 시아버지의 밥그릇은 같은 것이고, 남자의 밥그릇은 모양이 다르다. 남자는 그 밥그릇에서 쓸쓸함을 느낀다. 딱 기자라 이즈미스러운 쓸쓸함. 4분기에 드라마가 방영된다는데, 기대하고 있다. 캐스팅이 제일 궁금한데, 상관없을 것 같다. 기자라 이즈미의 드라마는 뭐든 좋았으니까. 아, 그리고 보니 노부타를 프로듀스를 아직 다 못 봤네;;

 

 

    아침 메뉴가 좌탁에 차려졌을 때 이와이의 그릇만 손님용인지 달랐고, 이와이는 그게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금 쓸쓸했다. 데쓰코가 아무 말 없이 병에 든 김조림과 버터나이프를 건네자, 시부도 아무 말 없이 받아들고 버터를 미리 발라둔 토스트 위에 김조림을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데쓰코는 데쓰코대로 TV를 보면서 빵 위에 성게알젓을 바르고 있다. 꼭 중년부부의 아침식사 풍경 같네,라고 이와이는 빵을 베어 먹으며 생각했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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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from 서재를쌓다 2014. 6. 4. 17:31

 

 

    그렇게 해서 추풍령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추풍령을 넘어가면 거기서부터는 충청도가 시작되는데, 내 힘으로, 내 두 다리로 그렇게 먼 곳까지 갔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이었다. 나는 완전히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추풍령휴게소에서 우리는 김밥 같은 걸 사먹고,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다가 죽은 노동자들을 위해 세운 위령탑의 글귀를 읽고, 원숭이와 공작을 구경했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내려가는 길은 직지사 삼거리까지 페달을 한 번도 밟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상쾌한 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니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이제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서쪽으로는 양천, 남쪽으로는 남면, 동쪽으로는 아천, 북쪽으로는 직지사까지 나는 신나게 쏘다녔다. 그중에서도 직지사는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김천에 들르면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갈 정도로 자주 찾아간 곳이었다.

p. 63-64

 

 

    이 부분을 읽고 두 아이가 생각났다. <귀를 귀울이면>과 <허니 클로버>의 주인공들. 두 영화에서도 저 구절과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한 주인공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기 위해, 한 주인공은 좋아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어딘가에 도착한다. 두 사람 다 그 끝에서 웃었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나는 저런 성장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찰나의 순간을 거치며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요새 그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어떤 순간을 경험한 뒤였는데, 이 일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전의 행복감, 좌절감과는 다른 종류의 행복감과 좌절감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확신이었다. 영화 <외출>을 보면서 내가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는 손예진과 배용준이 아니라 임상효와 류승수였다.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했을까, 두 사람이 깨어나면 어떻게 될까 등등. 영화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이 더 궁금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쓰여지지 않은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들, 그 때의 날씨, 그 때의 심정에 대해.

 

 

- 모든 연령이 다 힘든데, 인생에서 골짜기처럼 꺼지는 나이대가 있죠. 그게 마흔 살에서 쉰 살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기에 아이는 성인이 되고, 부모는 돌아가시죠. 그 두 가지 중요한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오히려 모두가 나에게 기대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계획된 일정 같은 거예요. 그 중압감이 우리로 하여금 "아,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거죠.

p.49

 

-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김천에 내려갔다가 올라왔더니 택배가 왔다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주문했던 책들이더군요. 정신이 없으니까 까맣게 잊어버렸던 거죠. 택배 박스를 풀었더니 리디아 플렘이 쓴 <수런거리는 유산들>이라는 책이 나오더라구요. 별생각 없이 펼쳤는데, 첫 문장이 다음과 같았어요. "나이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가 된다."

p.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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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에 있는 것 같았다. 책장을 펼치면. 여행에세이와 가이드북 중 가이드북 성격에 더 가까운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만 가지고 여행을 떠나기엔 부족하지만, 이 책을 참고한다면 좀더 다채로운 오키나와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곳들은 오키나와의 카페, 빵집, 공방, 숙소. 카페와 빵집이 압도적으로 많다. 책의 표지도 밝고, 하늘도 밝고, 사진들도 밝고, 사람들의 표정들도 밝다. 소개된 곳의 영업시간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반나절 정도인 경우가 많다. 12:30-18:30 (품절되는 대로 종료, 정기휴일 화.수요일) 12:00-18:00 (영업일 수-목요일) 11:30-18:00 (정기휴일 일.월요일) 14:00-17:00(정기휴일 수.목요일) 11:30-17:30(정기휴일 수.목요일). 이렇게 운영해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는걸까. 소개된 사람들은 대부분 '삶'이 중요하므로, '가정'이 일보다 더 중요하므로, 라고 말하고 있었다. 일에 치이는 삶에 지쳐 이곳으로 왔다고. 이제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이 곳의 시간은 느긋하고 천천히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빵집을 열기로 결심한 뒤 홋카이도를 시작으로 오키나와까지 석달동안 여행을 떠난 빵집 이페코페의 주인. 대지진으로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을 때 오키나와로 옮기기로 결심한 마법커피의 주인. 우연히 발견한 작고 아름다운 해변 유반타에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산책하러 오기 위해 근처에 집을 구한 아이디어 닌벤의 주인.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비결을 물으니 완성된 맛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제대로 상상하지 않으면 그 맛에 다다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몽슈슈의 주인. 읽다 보면 이 곳에 가서 건강한 빵 한 쪽, 신선한 커피 한 잔, 고슬고슬 잘 지은 쌀밥 한 그릇 대접받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후의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오키나와에 다녀온 N언니가 오키나와는 제주도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루시드 폴도 제주도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고, 이효리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평온함 그 자체고, 동생이 좋아했던, 홍대 어딘가 장사가 꽤 잘 되었던 커피집은 모든 것을 접고 제주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대로 살아도 좋은걸까, 생각하게 된다.

 

 

    야마자키 아키오 씨와 아오이 씨가 마법커피의 문을 연 것은 2년 전의 일. 아키오 씨는 어릴 때부터 몹시 감수성이 풍부했다. 도시적인 삶에 대한 동경과 평온한 삶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때때로 여행을 떠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모색하곤 했다. 그러나 스물세 살 때, 친구를 만나러 처음 찾아간 오키나와에서 야부 료마 씨를 만났다. (...) 그리고 아키오 씨가 스물 여섯 살 즈음, 도쿄에서 하던 일에 지쳐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도 야부 씨를 찾아갔다. "오키나와로 오지 그래?" 그 한 마디에 아키오 씨는 오키나와로 향했다. (...) 주문을 받으면 손님의 얼굴을 본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할지 떠올려 보면서 커피를 만든다. "제게 드립이라는 일은 작은 기도 같은 거예요. 오리지널리티 다음에 있는 게 퍼스널리티라고 생각하는데요. 야마자키 아키오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저만의 커피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p.28-31)

 

마법커피 | 중부 | 기노완시

시간 : 9:00-18:00

정기휴일 : 월.마지막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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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란 무엇인가> 하루키 편을 읽다가 읽다 만 하루키 소설이 생각났다.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의 인터뷰는 움베르트 에코, 오르한 파묵 다음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인터뷰가 무척 궁금했지만 책의 순서대로 읽기로 했다. 그래야 즐거움이 증폭되니까. 그런데 뭐랄까. 에코와 파묵 다음에 이어진 하루키의 인터뷰는 기대했던 것만큼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존 레이의 글에서처럼, 하루키는 역시나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존 레이는 '가급적 정확한 대답을 찾으려고 오래 뜸을 들이기도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하루키의 담백한 인터뷰를 읽고나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생각이 났다.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를 끝내야지 생각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잘 읽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잘 읽혔다. 책장도 잘 넘어가고 재밌었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이 있다. 나고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도쿄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 그에게는 고교 시절 완벽한 멤버들로 이루어진 '그룹'이 있었다. 여자 둘, 남자 셋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가 잘 났고 모두가 똑똑한 식의 '완벽함'이 아니라 각자의 결점들과 장점들이 하나의 그룹 안에서 잘 어우러지는 '완벽함'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던 도중 네 멤버들이 일제히 다자키 쓰쿠루를 거부한다. 영문도 모르고 그룹에서 쫓겨난 것. 누군가의 표현처럼 다자키 쓰쿠루는 조용하고 냉정하고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사람. 그는 죽을만큼 괴롭고 이해할 수 없지만, 이유는 묻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만큼 그에게 그 그룹은 특별했다. 오래 앓고난 뒤,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내면도 겉모습도, 고독한 모습의 어른이 된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서른 여섯살이 된 그가 두 살 연상의 사라라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그녀의 충고에 따라 네 친구를 찾아 그 때 그 이유를 묻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 사라는 그때 그 이유로 다자키 쓰쿠루의 마음이 닫혔고, 그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직접 그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자키 쓰쿠루는 살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를 처음 만났고, 그러기 위해 친구들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사실 이유라는 건 김이 빠졌다. 친구들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당연하게도, 그들은 조금만 조사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그곳에서 '대부분' 살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 또한 맥이 빠졌다. 이런 저런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읽으면서 즐거웠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어쩌면 하루키는 우리에게, 나는 내게, 이 한 명의 독자에게 이 말을 건네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넌 정말 멋지고 색채가 넘치는 다자키 쓰쿠루야. 그리고 근사한 역을 만드는 사람이고, 지금은 건강한 서른여섯살 시민으로 선거권이 있고 세금도 내고 나를 만나러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까지 올 수 있어. 너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 너에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야. 두려움이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놓쳐선 안 돼." (p.387)

 

    그나저나 가장 궁금증을 많이 남긴 인물 둘. 하루키가 가장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기고 소설을 끝낸 두 사람. 사라와 하이다. 사라는 다자키 쓰쿠루의 과거와 아무 관련이 없을까? 그리고 하이다는 어떻게 된걸까? 그러고 보니 둘은 정말 완벽한 인물이었네. 완벽한 일처리와 완벽한 사라짐. 제일 인상깊었던 부분은 쓰쿠루가 죽음을 극복한 후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과 하이다가 사라진 후 쓰쿠루의 체념. 그리고 사소한 일상을 묘사한 이 부분도.

 

... 쓰쿠루가 얼굴을 보이자마자 책을 덮은 후 밝은 미소를 떠올리고, 부엌에서 커피와 오믈렛과 토스트를 만들었다. 신선한 커피향이 풍겼다. 밤과 낮을 가르는 향기이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낮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하이다는 평소처럼 짙게 구운 토스트에 꿀을 살짝 발라 먹었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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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from 서재를쌓다 2014. 3. 3.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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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여행

from 서재를쌓다 2014. 2. 12. 21:23

 

 

 

    군산에 가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최갑수였다. 어느 토요일, 늦은 아침으로 죽을 사 먹고 들른 커피집에서 보게 된 최갑수 시인의 글 때문이었다. 최갑수 시인은 군산에 가라고 했다. 특별한 일 없이 가을을 쓸쓸히 보냈다면, 철길이 있고 예쁜 창문을 볼 수 있는 군산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그 글이 좋아서 결국 잡지까지 샀다.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군산에 가야지. 군산에 갔고, 철길과 예쁜 창문을 보지 못했지만, 쓸쓸한 기분이 더해져 돌아왔지만, 좋았다. 쓸쓸해서 마음에 남는 군산이었다.

 

    또 어딘가 나를 떠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아서 산 책이다. <당신에게, 여행>. 사실 처음에는 좀 실망했다. 여행지마다 소개하는 글이 너무 짧았다. 한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 정도다. <트래블러>에 실린 긴 글을 기대했던 내게는 너무 짧았다. 그래, 한번 떠나볼까? 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글이 끝났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자 마음 먹고 읽었다. 그러자 장점들이 보였다. 이 책에 소개된 여행지가 99곳. 가고 싶은 생각이 들때마다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그러자 포스트잇이 가득 찼다. 시인의 글은 넘치는 감성에, 적당한 정보가 곁들여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와, 나 가고 싶은 데 정말 많이 생겼다. 뿌듯했다. 

 

    시월의 군산. 십이월의 강릉 보헤미안. 어느 때나 좋은 태안 꽃지해변. 삼월의 남해 물미해안도로. 십일월의 경주. 십일월의 동해. 시월의 정선 만향재. 유월의 횡성 숲체원. 사월의 강진 백련사. 십이월의 주문진. 시월의 영주 부석사. 삼월의 통영. 사월의 부산 기장 대변항. 유월의 안동.

 

    아쉬운 점은 모든 길 안내가 자가용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왠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가기 힘든 곳 같은 느낌이 든다. 뚜벅이들을 위한 길 안내가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은 최갑수 시인이 밑줄 그어 놓은 곳, 그리고 아래는 내가 밑줄 그어 놓은 문장들.

 

- 복성루는 1973년에 개업한 집이다. 우리나라 5대 짬뽕집(복성루, 강릉 교동반점, 공주 동해원, 평택 영빈루, 대구 진흥반점)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p.45, 군산 근대문화 여행

 

- 다방 같았다. 열 개 남짓한 갈색의 테이블과 의자가 별다른 장식 없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갈색 설탕병이 놓여 있었고, 창문을 넘어온 투명한 겨울 햇살이 설탕병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멀리, 아득하게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에서 흰 파도가, 설탕 같은 파도가 일렁였다.

p. 53, 강릉 보헤미안.

 

- 당신과 다투었을 때, 그래서 나나 당신이나 낙담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을 태안 안면도 꽃지해변으로 데려갔다. 낙조 아래에서 나는 당신의 손을 슬며시 잡았고 우리는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p. 57, 태안 꽃지해변.

 

- 파도가 밀려왔다 갈 때마다 해변은 자르륵 하는 소리를 낸다. 해변 한 켠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p. 61, 남해 물미해안도로.

 

- 무덤을 보러 가끔 경주에 가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첨성대 건너편에 자리한 노서 노동동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몇 기의 능을 보러 간다. 그 앞에서 딱히 하는 일은 없다. 이 능들, 참 예쁘다, 요렇게 감탄하며 우두커니 서 있다.

p. 75, 경주 노서 노동동 고분군.

 

-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도 아름다워 한국의 100대 명소리로 선정되었다.

p. 81, 동해 망상해변에서 추암해변까지.

 

- 몽환이다. 그 풍경 속에 서 있으면 마음도 저절로 만발한다. 사랑 따위는 없어도 살 수 있겠다 싶다.

p. 136, 정선 정암사와 만향재.

 

- 유월의 숲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의 기척과 디테일로 가득하다. 햇살을 받은 나뭇잎은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유월의 따스한 공기 속에서 나무껍질은 말랑거린다. 엄지손가락으로 지그시 나무를 누르면 지문이라도 남을 것 같다.

p. 145, 횡성 숲체원

 

-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7,000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인간세계로 내려와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다. 미륵불 곁에 서 있는 미륵보살의 합장이 간절하다.

p. 151, 파주 겨울 나들이

 

- 백련사는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는 곳.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월부터 동백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에 만개한다. 4월말이 되면 떨어지기 시작해 바닥을 물들인다. 예로부터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서 한 번, 그리고 당신의 마음 속에서 또 한 번.

p. 163,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  주문진은 세상사에 지쳤을 때,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할 때 한번쯤 찾아보시길. 새벽 네 시의 포구에 나가보시길. 귀를 베어갈 것처럼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수평선을 향해 배를 몰아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서 부글거리던 불평과 불만이 깨끗이 사라진다.

p. 181, 강릉 주문진항.

 

-  해질 무렵, 백두대간을 넘어온 장엄한 노을이 절집 안마당에 내려앉을 무렵,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량수전 풍경을 흔들고 지날 무렵, 황금빛 노을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비출 무렵, 법고가 울리고 목어가 울리고 운판이 울릴 무렵...

그 무렵이면 부석사를 찾은 모든 이들이 아무 말없이 합장.

p. 184, 영주 부석사.

 

- 도다리쑥국은 오직 봄에만 맛볼 수 있는 통영의 진미다. 도다리쑥국은 봄에 나오는 자연산 도다리와, 역시 봄에 나오는 쑥을 함께 넣어 끓인 국이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절반 정도로 자른 도다리를 넣고 끓인다. 도다리 살의 촉촉한 질감과 향긋하면서도 강한 쑥의 냄새가 어울린 맛은 어느 문호의 글이나 고급 사진기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도다리 살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다.

p. 251, 통영 봄맛기행.

 

-  절터는 넓다. 동서 288m, 남북 281m. 이 자리에 구리 3만 근과 황금 1만 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륙상이 있었고, 동양 최대 목탑인 9층 목탑이 있었다.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p. 311, 경주 황룡사지.

 

- 한해살이인 멸치는 기장 앞바다로 번식을 위해 찾아들었다가 조류가 순해지는 조금물때를 기다려 암초 위에 알을 쏟고는 짧은 생을 마친다. 기장 대변항의 어부들은 이 멸치들을 쓸어담으며 생을 산다.

p. 330, 부산 기장 대변항.

 

- 선비들은 비 오는 날, 달이 밝은 날, 화창한 날, 만대루에 앉아 글을 읽었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만대루에 앉아 글을 읽는 그들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배롱나무가 내내 그들의 등을 희롱했으리라.

p. 341, 안동 병산서원.

 

- 이빨 빠져 섭섭해진 접시 위에 사과를 깍아 올리는 일,

오이나무를 비추던 여름 햇빛의 분주에 잠시 어지러웠던

어느 하루라고 해 두자.

여행 말이다. 여행.

아니, 어쩌면 삶일 수도, 그게 사랑일 수도.

p. 358-359, 에필로그.

 

 

    나는 이제,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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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니 이번 겨울에는 주로 먹는 이야기를 읽었다. 음식 이야기를 읽으면 왜 이렇게 신이 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트위터에서 '하루키 레시피'를 팔로우했다. 하루키의 작품 속 레시피들을 트윗해주는데, 오늘은 이런 트윗이 올라왔다. "후카에리는 얼그레이를 마시고 토스트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 그녀는 마치 옷의 주름을 그리는 렘브란트처럼 주의깊게 시간을 들여 토스트에 잼을 발랐다." <1Q84>의 문장이란다. 먹는 이야기를 쓴 책 뿐만 아니라 먹는 이야기를 하는 영상도 좋아한다. <한국인의 밥상>을 즐겨보는데, 얼마 전에 못생긴 생선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보는 내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속초에 갔을 때 '도치알탕'이라는 간판을 봤는데, 그저그런 알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야 알탕마니아) <한국인의 밥상>을 보니 보통 알탕이 아니었다. 물컹물컹하게 복어의 배를 닮은 볼록하고 못생긴 생선이 도치였는데 배를 갈라보니 볼록한 것이 모조리 알이었다. 헉. 그 알로 두부도 만들어 먹고, 탕도 만들어 먹고 한단다. 못생긴 고기 편에서는 동해의 시원한 바다도 보고, 그 짠내도 실컷 맡을 수 있었다. 보면서 완전 신났다.

 

   박찬일의 책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군산에 하루에 30분만 볶음밥을 파는 중국집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볶음밥은 윅을 휘두르는 팔 힘 맛이란다. 그러니까 불 맛이란다. 그런데 그 집 주방장이 이제는 늙어 하루종일 윅을 휘두를 팔 힘이 없어 딱 30분만 볶음밥을 판단다. 블로그를 검색해보니 모양은 그냥 그런 볶음밥이던데 맛이 끝내주나 보다. 다음 군산 여행 때 도전해 볼 것 추가. 보슬보슬한 흰 밥에 김이 솔솔 나는 병어 조림, 평일 오후 건강한 육체노동자가 먹는 자장면 곱배기, 사각거리는 수박에 바늘로 잘게 뽀갠 얼음, 촉촉하게 익은 꼬막살, 미디엄 웰던에서 레어까지 노른자 층위가 만들어진 달걀프라이, 둥그런 밀가루 전병 속에 리코타 치즈 크림을 채운, 영화 <대부>에서 사람을 죽이고서도 챙긴 과자 카놀리, 소박하지만 진짜 서해안의 갯벌 맛을 다부지게 보여주는 바지락 칼국수, C의 두툼한 진짜 민어회까지. 음식 이야기로 가득찬 책이다. 재미나게 읽었다. 다음은 만화책이다. 빌려뒀다. <오무라이스 잼잼>.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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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린디합을

from 서재를쌓다 2014. 1. 27. 22:48

 

   

   언니가 그랬다. 손보미 읽어봤니? 내가 아직이라고 했고, 언니가 말했다. 한번 읽어봐. 이상해. 읽어보면 아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거야. 손보미의 첫 소설집을 읽었다. 그때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희안하게도, 신기하게도 그때 언니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서 이상하다는 말.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내 경우에는 좋은 쪽으로 저울의 바늘이 좀 더 많이 가 있다. 동생이 얼굴에 자그마한 혹이 나 수술을 했는데, 평일에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같이 갔다. 동생이 수술을 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했다. 아침을 못 먹은 터라 배가 고팠다. 그렇다고 혼자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수술하는 동생에 대한 배신, 따위는 아니고 수술하고 나오면 바로 죽 먹으러 가기로 했기 때문. 그래서 로비에 가서 편의점에서 천원 짜리 아메리카노를 뽑아왔다. 일단 계산대에 가서 컵을 사고, 그 컵을 가지고 커피 머신으로 가서 빈 컵을 놓고 진한 아메리카노 버튼을 눌렀다. 천원짜리지만 제법이다. 약간의 크레마도 생겼다. 그 커피를 가지고 다시 수술 대기실로 올라왔다. 여기서 마셔도 되는지 간호사에게 물어보고 소파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평일의 대학병원은 북적이면서도 한산했다. 친구에게 이 소설집이 마음에 든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어떤 옷을 보면 어떤 여행이 생각나듯, 평일의 대학병원에 가면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딱 두 군데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먼저 143페이지. '육인용 식탁'이다. 이 소설 재밌었다. 내가 포스트잇을 붙인 부분은 여기.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아내와 나는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다. 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컵을 하나 깬 것 이외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아내는 깨진 컵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유리조각을 꼼꼼하게 치운 후,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함께 봤고, 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이런 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컵을 하나 깬 것 이외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와 아내는 깨진 컵을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사이. 그 사이에 말하지 않은 것. 그걸 느낄 수 있어 좋았고, 말해주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포스트잇은 작가의 말에 있다. 이 소설집은 당연하게도, 어떤 이야기에서 시작해 어떤 이야기로 끝나는데, 이 두 이야기가 연관이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건 우주 너머에 똑같은 내가 한 명 존재하지는 않을까, 라는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내가 너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엄마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너가 죽지 않았더라면. 정말 이 우주 너머에 나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또다른 내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애는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할까. 그런 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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