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빼기의 기술

from 서재를쌓다 2017.11.28 22:45




    짜증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이 상황을 넘겼을까. 내가 상상하게 되는 '그 사람'은 내게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이것 따위! 하고 힘든 생각들을 냅다 내다버릴 수 있는 담대함, 무한한 긍정적 기운. 최근에 책도 읽고, 팟캐스트도 듣고 해서인지 긍정 기운을 생각하며 김하나 씨를 생각한 적도 있다. 김하나 씨는 <모든 여행의 기록>의 김민철 씨 인스타에서 처음 얼굴을 뵈었는데, 술을 마시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포즈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고, 코믹하기도 하고, 힘찼다. 긍정 기운이 그득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둥실 둥실, 두둥실. 올해의 남은 날들은 힘을 한껏 빼고 유유히 보내고 싶다.




두둥실, 포스트잇.


... 여행기를 펴낼 생각으로 쓴 건 아니었는데 가끔 블로그에 들어가 오랜만에 남미 여행기를 읽어보면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남미에서만, 그러니까 이구아수폭포와 파타고니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리우데자네이루가 있는 대륙에서만 가능한 글들이었다. 남미에 몸을 푹 담근 그때의 나는 이곳에서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물기 어린 사람 같다. 나조차도 이 글을 쓴 사람이 낯설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내 안에 살고 있음을 잊고 싶지 않다.

- 9쪽


   사랑은 처음에는, '빠지는' 듯 느껴진다. 어디론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나를 떠밀고 가는 것 같다. 힘든 줄도 모르겠고 그저 사랑에 몸을 내맡기면 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잘 유지하려는 서로의 노력과 기술 없이 사랑은 건강하게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끝나곤 한다. 다행인 것은 사랑이 끝나도 사랑한 경험과 넓어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나의 경우 저주와 눈물 바람, 술 취한 다음 날 통화 기록 보고 경악하기 등등 다양한 활동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한 뒤에야 그런 성숙한 감사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 53쪽


... 연대기식으로 시시콜콜 써나가는 여행기는 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날에 대해선 그렇게 해보고 싶다. 전등 스위치를 켜듯 한번에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더해져, 결국엔 또르르 넘쳐흘렀던 하루였으니까.

- 179쪽


   짧은 여행에서는 초보자인 채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장기 여행이라도 짧게 짧게 여러 곳을 다닌다면 초보자인 채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머물러보는 것은 다르다. 당신은 이 도시로 이사를 오는 것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긴장되지만, 당신은 점점 익숙해진다. 처음 운전할 땐 앞차 꽁무니만 따라가는 것도 버겁다가 점점 백미러도 보이고, 나중엔 음악도 듣고 경치도 보고 차선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만 해도 버겁지만, 차츰 그곳과 어울리는 시간대도 생각해볼 수 있고, 그곳으로 가는 다른 골목길을 탐색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맘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 '다음에 또 와야지' 라고 그곳을 기억해두게 된다. 이것은 대단한 차이다. 당신은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 207-208쪽


   해변은 고급 주택가지만 구두 신은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구두는 정말 답답하게 느껴진다. 다들 조리나 운동화에 펄렁한 야자수 무늬 반바지,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얇은 원피스 같은 걸 걸치든지 말든지. 웃통을 벗은 채 백팩을 멘 청년들이 버스에 올라타고, 셔츠는 언제나 단추를 서너 개 풀어헤치며, 초등학교 교복은 티셔츠다. 해변뿐 아니라 리우 시내도 그리 다를 게 없다. 이 도시는 전체적으로 이지고잉(easy-going) 그 자체. 잘 입는 것보다 잘 벗는 것이 중요하므로 몸만들기에 열심이다. 해변의 근력 기구엔 남자들이 매달려 있고 온통 달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 240쪽

 

   "고마워, 페르난두. 넌 정말 친절하구나."

   페르난두가 대답했다.

   "하나. 너를 보고도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먼 곳에 혼자 서 있어보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말이 어째 먹먹했다.

- 244쪽




  1. 2017.11.30 14:3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7.12.03 21:12 신고 BlogIcon GoldSoul

      역시 좋은 분이셨어요. 흐흐-
      읽어보셔요. 앞부분이 특히 좋아요. :)
      아, 어느새 12월이 되어버렸어요.
      우리 화이팅해요! 남은 한달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