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보다'에 해당되는 글 45건

  1. 낭만의 밤 4 2018.08.07
  2. 빈센트 반 고흐 2 2018.02.08
  3. 최백호, 불혹 2017.04.15
  4. 토마스 쿡 2016.12.29
  5. 여름의 끝 2 2016.10.18
  6. 최고은과 방백 2 2016.07.19
  7. 새해의 포크 2 2016.02.10
  8. 베르테르 2015.12.21
  9. 맨 오브 라만차 2015.11.16
  10. 제비다방의 강아솔 6 2014.05.09

낭만의 밤

from 무대를보다 2018. 8. 7. 17:18



   그 주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긴팔 원피스를 입고 갔으니까, 아직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나와 동생, 그리고 친구는 6월 마지막 날에 정밀아를 만나러 갔다. 친구와 나는 두 번째이고, 동생은 첫 만남이었다. 공연장에서 셋이 보기로 했는데, 가는 도중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동생에겐 우산이 있었고, 나는 얇은 장우산을 샀고, 친구는 공연장 근처 스타벅스 처마지붕 밑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인사를 나누고, 공연장까지 우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비를 맞으며 나란히 걸어갔다. 예매자 확인을 하고, 책갈피로 쓰면 딱 좋을 예쁜 빛깔의 티켓과 가사 한 구절이 새겨진 나무연필 두자루를 건네 받았다.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친구, 동생, 나 이렇게 나란히 앉았다.


   정밀아는 궂은 날,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익숙해진 노래들을 차례로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지난 공연과 멘트와 레퍼토리가 비슷해서 조금 아쉬웠지만, 여전한 정밀아였다. 친구와 나는 지난 겨울 정밀아를 처음 만나고 '신여성' 비슷한 무언가 단단한 인상을 받았는데, 동생도 이번에 그랬다고 했다. 정밀아는 향이 옅게 번지는, 단단하게 속이 여문 봉오리처럼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또 노래하고, 이야기했다. 두 번의 공연 모두 머리카락을 뒤로 단단히 여미고 나왔더라. 어떤 각오가 단단히 느껴지는 머리였다. 아마도, 좋은 노래를 들려드리겠다는 각오.


   공연을 보고 나면 그 날의 공기, 어느 순간의 웃음과 눈물, 어떤 멘트로 인해 똑같은 곡이 공연 뒤에 들으면 조금씩, 혹은 아주 많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그날은 '다시'가 그랬다. 이별을 하고 힘들어하는 동료와 밤새 술을 마시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는데, 그 뒤에 동료가 해맑게 다가와 다른 사람과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러야 할지 난감했단다. 그런데 몇 개월 뒤에 동료의 새 연애가 또다시 깨어져서 진심을 다해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웃픈 이야기. 

 

이별의 눈물 안고 잠이 든 너를 

토닥 토닥 토닥

꿈에는 슬픈 기억 담지 않기를

부디 부디


언젠가 나도 이별을 했었는데 

참 슬펐었어

내일이 없을 듯한 그 날 밤에는

비가 한참 오더라


음-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한 걸까

변하지 않는 것 없는

이 세상을 또 알게 하더니


언제쯤 이런 사랑 다시 올런지

알지 못하지만

구름을 걷는 듯이 차오를 기쁨 

다시 사랑 사랑


  구름을 걷는 듯이 차오를 기쁨, 다시 사랑 사랑. 아, 가사 정말! 공연을 보고 나왔더니 비가 그쳐 있었다. 우산을 접고, 동생이 찜해둔 곱창집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었다. 비온 뒤라 공기가 정말 좋았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다. 무엇보다 방금 우린 좋은 공연을 보고 나왔고. 룰루랄라 걸어갔으나 곱창집에는 그 날 준비한 곱창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화사 때문!) 어쩔 수 없이 근처 양꼬치 집으로 갔는데, 나는 그 날 두부피에 야채와 고기를 싸 먹는 중국식 월남쌈을 처음으로 영접하였다. 아, 진짜 맛있더라! 살도 안 찔 것만 같고! 친구와 동생은 자주는 보지 못해도 오랜세월 보다보니 가족 같아졌다. 동생은 친구에게 진짜 고민을 이야기하고, 친구는 진심으로 고민을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동생이 가고 싶어했던 망원동 바르셀로나에서 끝맛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와인을 마시고 자정을 넘겨 헤어졌다. 


   이제 우리 셋 모두 정밀아의 1, 2집을 들으면 비가 그친 합정과 망원의 밤을 생각하겠지.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하지만, 또 이 세상을 알게 하니까. 열심히 살다 또 언젠가 만나 서로 토닥토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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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from 무대를보다 2018. 2. 8. 21:24

    


   2017년 마지막 날, 남희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한때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일년에 두세번씩만 보고 있네. 그래도 작년에는 세 번 봤다. 원래 마지막 날 만나 이소라 공연을 보려고 했는데, 늦장을 부리다 좌석을 놓치고 말았다. 매진이 된 이소라 공연을 뒤로 하고, 뭔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을 찾다가 선우정아가 음악감독이고, 고흐 이야기니까 좋을 것 같았다. 언니와 신당동에서 만나 떡볶이를 먹었다. 언니가 맥주 할래? 라고 물었고, 나는 지금 못 마셔요, 라고 했다.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에도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말들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한 사람, 그때의 장소, 그때 공기의 흐름, 그 사람의 표정. 시간이 지날수록 울림이 커지기도 한다. 얼마 전 B의 말도 그랬다. 이제 집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혼자 있을 때도 그 말을 떠올리고 혼자서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였다. 2017년 마지막 날,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이런 말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덕분에 힘이 난다고. 공연값을 물어보는 언니에게 나는, 공연값은 됐다고, 지난 한해 열심히 살아온 언니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라고, 말해줬다. 언니에게 나의 그 말이 깊게, 그리고 넓게 퍼졌으면 좋겠다. 언니가 예전만큼 강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언니는 선물이라며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진 검은색 에코백을 사줬다. 두 개 사서 하나씩 메고 다니자고 했다. 우리는 공연 전에 마주보고 커피를 마셨다. 내가 요즘 에스토니아 맥주가 유행인 모양이라고, 탈린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니는 지난 핀란드 여행 때 갔었다며 사진들을 보여줬다. 언니가 보여준 사진에 중세를 그대로 재현한 맥주집의 결코 맛있어 보이지 않은 뭉툭한 맥주잔이 있었다. 맛있었어요? 라고 물어보니, 역시나 언니의 대답은 아니. 언니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탈린에 더 가고 싶어졌다. 언니는 내게 사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너무 체크하지 말고 만나보라고 했다. 아,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보고 (사실 조금 졸았다. 나는 요즘 회사에서도 자주 꿈뻑하고 졸아서 깜짝 놀란다), 고흐의 밤이 새겨진 마스킹테이프랑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선물할 책갈피를 샀다. 언니는 마스킹테이프는 뭐할 때 쓰는 거니? 하고 물었다. 언니는 무슨 말을 하든 먼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다. 편지봉투에도 붙이고, 장식하고 그런 데에 쓴다고 말하고, 새해엔 언니의 새 집에 꼭 편지를 써야지 생각했다. 언니는 5분도 걸리지 않는 신당역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한때 우리 둘은 이 차를 타고 파주까지 가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는데. 그때 언니는 초보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 아홉이나 마흔이나 체감하기에 비슷한 것 같아요, 나의 말에 절대 다르다며 어른들이 왜 자기 나이를 몇학년 몇반으로 말하는 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언니는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창문 너머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먼저 살아보고 마흔이 어떤지 말해줘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마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언니가 그래, 하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운전을 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언니의 마흔은 괜찮을 것이다. 아니, 좋을 것이다. 많이 좋을 것이다. 고흐가 살아보지 못한 서른아홉과 마흔을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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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불혹

from 무대를보다 2017. 4. 15. 10:26



   가고 싶긴 한데, 어떤 이유로 망설여질 때 요즘은 이렇게 생각을 한다. 그러다 영영 못 간다. 3월에는 최백호를 보고 왔다. '부산에 가면'을 정말 많이, 그리고 오래 들었더랬다. 젊은 가수들과도 많이 작업을 하는 걸 보고, 깨어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공연에서 '부산에 가면'을 부르기 전에 영상이 나왔는데, 그 영상에서 최백호가 말했다. 이 노래가 나의 제3의 전성기를 열어줄 거라 확신한다고. 40년간 노래해온 사람은 겸손했다. 나는 젠체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좋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떠벌리지 않아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저절로 빛이 난다. 그는 화려하게 입지 않았다. 단정한 셔츠와 자켓을 차려입고 나왔다. 자연스럽게 부르는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다. 박수가 나올 때마다 허리를 많이 굽혀 인사했다. 자주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함께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능도 취미도 없던 자신이 40년동안 노래를 하고 있다는 게 꿈만 같다고 했다. 신곡 '바다 끝'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때였는데, 이 날 '바다 끝'을 마음에 담았다. 노래를 하기 전에, 최백호는 에코브릿지의 노래가 쉽지 않다고 했다. 어렵기 때문에 다 부르고 나면 성취감이 높다고 했다. 불러보겠다고 했다. '청사포'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청사포가 얼마나 아름다운 바다인 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바다 끝'에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남해의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잔잔한데, 햇살이 비춰 찰랑찰랑하게 빛나는 바다. "오-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순간 풍덩 소리가 나면서 그것이 심해 깊숙이 빠른 속도로 들어가는 거다. 저 아래, 바다 끝까지. "몰라" 친구는 두번째인가 세번째 곡에서부터 울었고, 나는 역시 그의 팬이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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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쿡

from 무대를보다 2016. 12. 29. 22:20




   십이월 첫째주 금요일 저녁에는 한강진의 공연장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리 춥지도 않았는데, 엄청나게 두껍고 엄청나게 긴 목도리를 칭칭 감고 갔다. E와 함께 공연장 제일 뒷자리에 앉아 토마스 쿡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순간 오늘 낮의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파주의 창문이 없는 사무실 창가 자리에 앉아 모니터 화면만 보며 키보드로 열심히 복사하기 + 붙여넣기를 하고 있었는데, 몇 시간 후에 짠-하고 이런 설레고도 벅차며 느긋한 공간에 앉아 있는 거다.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관객석의 우리를 막 공격하는 그런 공간에. 어릴 때 쌍둥이 자매가 순간이동을 하는 티비만화를 참으로 좋아해서 아직까지도 그 주제가를 외우고 있는데 (너무 달라 너무 달라, 너무 달라 우리들은,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쌍둥이 자매-) 마치 내가 그 쌍둥이 중 왼쪽 아이가 된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순용이 오빠는 오래간만의 공연에 너무 신이 나 노래보다 토크에 집중을 하느라 공연의 말미 시간에 쫓겨 급하게 노래를 불러댔지만, 그의 유머는 변함없었다.


   그런 럭셔리한 '저녁이 있는 삶'에 잔뜩 취해 있을 무렵, 토마스 쿡이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이번 앨범 '별과 나 그리고 우리 사이'를 만든 사연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적도 부근에 있는 나라로 여행을 갔단다. 밤새 낚시를 하는 밤낚시 투어를 신청했는데, 적도의 바다는 정말 잔잔하단다. 파도 한 점 없는 평온하고 고요한 바다. 그런 바다를 생각하면 된단다. 순용이 오빠는 낚시에 관심이 없어 뱃머리에 누워 있었단다. 거기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거기 별이 정말 장난이 아니란다. 그런 별천지는 처음 봤단다. 그 환상적인 밤하늘을 삼십 여분 넘게 올려다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아, 저 별이랑 나랑 아주 멀리 있다. 그런데 얼마 만큼 멀리 있는지 그 거리를 정확하게 알 것 같다. 확실하게 알 것 같다. 그때 친구가 순용이 오빠를 불렀단다. 순용아! 이렇게 불렀겠지? 순용이 오빠가 순용이 오빠의 친구를 쳐다봤단다. 아!! 순용이 오빠는 깨달았단다. 저 별과 나는 저렇게 멀리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가깝게 있구나.


    그 뒤로 '별과 나 그리고 우리 사이'를 들으면 바다와 별, 밤과 우리가 떠오른다.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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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from 무대를보다 2016. 10. 18. 23:28


   여름동안, 그리고 가을이 오는 동안,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보고, 꽤 읽었는데 기록하질 못했다. 마음에 담아둔 순간들이 많아서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두어야 하는데, 자꾸만 게을러진다. 더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보자고 결심해본다. 오늘의 기록은, 여름의 끝에 만난 썸데이 페스티벌.


   가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외투도 가져갔는데, 한여름만큼 더웠다. 잔디밭에서 늦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다 받아냈다. 내가 축제에 온건지, 고생을 한바가지 하려고 온건지, 짜증이 잔뜩 날 무렵,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어왔다. 해가 스물스물 지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콜리 너마저가 나왔다. 동생과 나는 가지고 온 와인을 각자의 잔에 따르고 무대 앞으로 나갔다. 아,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지려고 고통의 시간을 보낸 거야. 행복은 참으로 쉽게 오지 않는구나. 우리는 무대 앞에 서서 춤췄고, 노래했다. 심장소리 마냥 쿵쿵거리는 스피커와 와인 때문에 잔디밭 위 사람들이 딴 세상 사람 같았다. 사람들아, 이리 와봐요. 여긴 딴 세상이에요. 그 날의 노을은 무척이나 근사했다. 그리고 그 뒤의 시간들은, 선선한 바람 덕분에, 그 바람을 타고 흐르는 음악 덕분에, 행복했다.

 

   우리는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성공해야 돼. 성공한 사람만이 황금시간대에 나올 수 있다는 진리. 제이래빗이 이른 오후의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즐거운 얼굴로 노래하다, 멘트할 때마다 여러분 너무 덥죠? 저희도 더워요, 를 연발하던 장면이 잊히질 않는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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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과 방백

from 무대를보다 2016. 7. 19. 22:55



   지난 금요일에는 비가 왔고, 우리는 그 비를 뚫고 홍대의 공연장에 도착했다. 나는 이 공연을 삼만원에 응모했고, 이만원에 낙찰받았다. 만원이나 굳었다. 그런데 최고은과 방백, 이 사람들이 두 시간이 넘게 공연해줬다. 나와 친구는 이 돈을 내고 이렇게 길고 열성적인 공연을 본 것에 미안했고, 감사했다.


   백현진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고 준비가 되자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흠뻑 그 노래에 빠져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체동물처럼 몸을 이렇게 저렇게 흐느적거렸다. 그 움직임은 노래의 리듬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영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신기했다. 저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언젠가 시옷의 모임에서 한 뮤지션을 두고 꼭 약 한 것 같지 않냐, 라고 표현하는 걸 들었었는데 그게 백현진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한 곡, 한 곡 지나자 그의 그 특이한 움직임이 익숙해지고, 찌릿해지고, 좋아지고,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나는 심지어 그의 움직임에 울어 버릴 뻔 했다.

   나는 올 초 어떤 사람에게 잠깐 빠져 있었는데, 정말 병신같은 짓을 했더랬다. 그 기억들을 잊으려고 열심히 운동을 하며 몸을 움직였고, 열심히 음악을 들었댔다. 그때 제일 위안이 되었던 노래였다. 방백은. 특히 '다짐'. 이를테면, 이런 가사. "반복되는 허망한 이 패턴이 이 나이에 정말 병신 같아서 한동안은 면벽하는 심정으로 자중을 하자 다짐을 하네 도대체 언제쯤 좀 더 맑은 정신과 좀 더 깔끔한 기분으로 살까 술 담배도 끊고 연애도 끊어 보고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해 본다."

    아, 이 노래의 전주가 시작될 때의 심정이란. 다 잊었던 그 겨울의 심정과 다짐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 지면서. 그래 그때 참 병신 같았지, 하고. 공연 전의 나는 방백의 몇몇 곡을 좋아했는데, 공연 후의 나는 방백의 모든 곡이 좋아졌다. 다음에 공연을 하면 또 가고 싶어졌다. 백현진은 세상이 이 모양이니, 열심히 살지 말자고 했다.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돈 많이 모을 수 없어요. 그때 그때 즐기면서 살아요, 라고. 가사가 아주 잘 들렸다. 그래서 더 좋았다.

   백현진에 빠져서 감흥이 살짝 묻히긴 했지만, 최고은의 라이브 공연도 무척 좋았다. 그녀는 한 소리도 허투루 내지 않았다. 예쁘게 보이려 하지 않고, 한 소리 한 소리 집중해서 입술을 아주 작게 오므리기도 하고, 아주 크게 벌리기도 하면서 노래했다. 그래서 예뻤다. 원래 최고은은 예쁘지만, 더 이뻐 보였다. 그녀의 길다란 몸이 아름다운 소리통이었다.

    내겐 최고은이 예전에 가내수공업으로 완성했던 앨범이 있다. 천을 직접 자르고 미싱질도 했다고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우연히 그녀의 노래를 들었고, 좋았고, 그래서 앨범을 샀다. 좋은 노래니까, 좋은 것은 나눠야 하니까, 함께 듣고 싶은 친구에게 선물했다. 친구는 예상대로 좋아했고, 좋은 것은 나눠야 하니까, 당시 같이 일하던 좋아했던 선배 언니에게 선물을 했다. 최고은이 'Eric's Song'을 (앵콜 전) 마지막 곡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우리가 생각났다.

   좋았다, 좋았다. 이 비를 뚫고 오길 잘했다, 집에 바로 가지 않길 잘했다, 공연 포기하고 술 마시러 가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집이 멀어 일찍 출발했어야 했는데, 이 기분으론 그냥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비오는 풍경을 곁에 두고 삼겹살에 맥주를 마셨다. 치즈볶음밥도 볶아 먹었다. 막차를 놓치지 않고 지하철을 탔다. 그야말로 완벽한 불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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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포크

from 무대를보다 2016. 2. 10. 19:10

 

 

 

 

 

   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S가 그랬다. 우리는 강아솔과 이영훈의 공연을 보고, 금룡통닭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맥주를 마시다 S가 말했다. 언니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좋은 사람 만날 수 있게 내가 기도하고 있어. 언닌 정말 좋은 사람 만날 거야. S는 내가 빌려준 책을 돌려주며 퇴근길에 먹으라며 말랑카우도 여러 개 넣어주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도 귀엽게 리본을 묶어 넣어줬다. 이런 다정한 아이가 다 있나. S를 위해 나는 올해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강아솔과 이영훈은 우리에게 여러 노래들을 들려줬다. 그 중 몇몇 곡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마음에 남아 여러 날 반복해서 듣고 다녔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일할 때에, 이유없이 길을 걸을 때에. 강아솔은 농담을 던지듯 무심하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이런 사람의 노래라면 언제까지나 계속 들을 수 있겠다고 안심이 되는 이야기였다. S는 옆에서 자주 웃고, 자주 울었다. 그녀와 그의 노래와 이야기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 앞에서 솔직한 사람을 만나야 겠다고. 내 곁에 있는 들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겠다고, 나도 하나의 싱싱한 들꽃이라고. 언젠가 볕이 좋은 날, 하도리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가만히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새해, S와 좋은 공연을 함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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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from 무대를보다 2015. 12. 21. 23:19

 


 

 

   공연을 보고 찾아본 조승우의 인터뷰에 그런 말이 있었다. 사실은 13년 전처럼 베르테르라는 역할에 푹 빠져들 수가 없다고. 조승우는 13년 전, 실제로 깊은 짝사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정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던 거다. 이번에는, '젊은'도 빠지고, '슬픔'도 빠졌다. 그냥 '베르테르'다. 항상 무대 위의 조승우를 보고 오면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성장에 설레이면서도 마음이 착찹해지기도 했다. 같은 80년 생이고, 오랫동안 지켜본 팬으로써, 그는 성큼성큼 나아가는데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이번엔 공연을 보고 찾아본 그 인터뷰 기사 덕분에, 그와 나의 '다름'이 아니라 '같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우리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지.

 

   발하임은 아름다웠다. 그 전보다 저 아름다워져 있었다. 커다란 해바라기들이 우르르 무너져 버릴 때는 마음이 덜컹 했다. 달빛길도 예뻤고, 롯데의 온실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10여 년 전, 처음 공연을 보고 마음이 먹먹해져서 베르테르가 너무 가엾어서 소리죽여 울었던 나는 이제 없더라. 롯데가 베르테르에게 떠나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고, 적당히 사랑해달라고 노래할 때는 저, 저, 나쁜 년, 롯데가 저렇게 나쁜 년이었다니, 배신감이 들었다. 베르테르가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을 때, 달려가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세월이 지나면 이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이렇게 죽어버릴 일은 정말 아니라고. 지금 니가 얼마나 빛나는데, 니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렇게 저버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고, 진정으로 말리고 싶었다. 그래.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어 버렸다. 알베르트가 제일 이해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설레였다. 그건 베르테르가 배우 조승우였기 때문에. 그의 세심한 작은 행동들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슬쩍 롯데의 손을 잡으려다 용기를 더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풋풋한 모습이라든지, 자신을 봐 달라고 노래할 때 무릎을 조금 낮춰 키를 낮추고 얼굴을 마주보려고 애쓰는 애절한 모습이라든지. 자신의 사랑이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걸 완전히 깨달고 부르는 노래에는 목소리 톤 자체에 찢어질 듯한 아픔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갈까 궁금한 배우. 바라던, 베르테르가 된 조승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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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라만차

from 무대를보다 2015. 11. 16. 23:16

 

 

 

    10월의 연휴에 돈 키호테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전히 황량한 라만차를 떠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사랑에 빠졌다. 허름한 여관에서 '알돈자'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를 만났다. 돈 키호테는 노래했다. 당신은 '둘시네아'라고. '둘시네아'는 스페인어로 '사랑스러운 여인', '귀여운 여인'. 알돈자는 그를 무시했다.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화를 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몸을 팔고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신은 알돈자라고. 하지만 돈 키호테는 계속해서 노래했다. 그에겐 이 허름한 여관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고귀한 성이었고, 촐싹대는 여관주인은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줄 고마운 성주였고, 모두가 한번 하고 싶은 헤픈 여자 알돈자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여인 둘시네아였다. 그는 세상을 세상 그대로 보지 않고 '둘시네아'로 보았다. '둘시네아'의 또 다른 뜻, '이상적인 포부', '환상적인 큰 뜻'. 그의 세상은 절망적이지 않았다. 희망찼다.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둘시네아'니까.

 

   <돈 키호테>는 여전히 내게 어렵다. <맨 오브 라만차>도 그렇다. 조승우가 이 극 때문에 배우가 되길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극인지 너무 궁금해 아주 추운 겨울 날, 높은 언덕 위에 있는 학교에 가 학생들이 하는 공연을 봤다. 그렇게 처음으로 공연을 보았을 때에도, 한창 뮤지컬에 빠져 있을 때 Y언니와 공연을 보고 씨디를 사서 가사를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넘버들을 들었을 때에도, 사실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질 못했다. 그저 아름다운 선율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극이 후반을 향해가고 있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알아내기 위해서! 돈 키호테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사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니 극이 더 어려워졌다. 더 모르겠더라. 조승우만 잘하더라. 그런데 극이 끝나갈 무렵 알돈자가 죽어가고 있는 돈 키호테를 찾아왔을 때, 울먹이며 돈 키호테 곁에서 노래할 때, 이 이야기가 한 순간 이해가 됐다. 이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이야기구나.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찾았고, 보았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지. 한 사람은 몰랐다. 자신이 그런 존재인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계속 말해줬다. 노래해줬다. 당신은 '둘시네아'라고.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깍아 내기만 했던 한 사람은 한 사람의 말을 개소리라고, 꺼져버리라고 고함쳤지만 사실은 기뻤다. 사실은 자신도 소중한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랬던 거다. 자신도 몰랐지만 그랬던 거다. 한 사람은 계속 노래했고. 한 사람은 모른 척 했다. 한 사람이 떠났고, 한 사람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돈자는 죽어가는 돈키호테를 찾아가 울면서 노래한다. 그래요, 내가 둘시네아예요. 당신의, 그리고 나의, 둘시네아예요.

 

    2015년 10월, 내가 이해한 라만차의 이야기는 이거다. 우리는 모두 '둘시네아'라는 것. 그러니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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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우리는 신촌의 맥주창고에 앉아 있었다. 그날 언니와 헤어지면서 일기를 꼭 쓰고 자겠노라 말했다. 술집의 풍경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손님이 거의 없었다. 새로 개업한 가게였고, 토요일 밤에 이렇게 술 손님이 없다니 곧 망할 것만 같았다. 그 가게에 한참 뒤에 등장한 세 팀의 손님이 모두 특이했다. 한 여자가 잔뜩 술이 취한 채 비틀거리며 혼자 들어와서 결국 맥주잔을 깼고, 의대생들이 우루루 몰려와 잘 빠진 몸매의 여자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리고 또 한 팀. 한 쌍의 커플은 장애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그 속에 우리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 틈에 앉아 나는 언니의 제주도 여행이야기, 오키나와 여행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오키나와 이야기는 참 좋아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달린 오키나와 도로 위의 언니, 우연히 들른 해변에 마침 열리고 있었던 오키나와 영화제에 있는 언니, 매일 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술을 퍼 먹는 언니의 모습이 머릿 속에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금령아, 오키나와에 가봐. 거긴 천국이야. 금령도 분명 좋아할 거야. 언니가 말했다.

 

   그 날, 오랜만에 언니를 만나는 터라 뭔가 전해주고 싶어 향뮤직에 들러 강아솔 앨범을 샀다. 며칠 뒤에 언니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강아솔은 여자 루시드폴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어제 상수에 있는 제비다방에 갔다. 강아솔이 지하에서 1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노래도 불렀고, 남의 노래도 불렀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렀는데, 가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고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그리고 남의 노래를 두 곡 더 불렀는데, 모두 루시드폴 노래였다. '봄눈'과 '오사랑'. 강아솔이 네가 틔운 싹을 보렴, 이라고 노래하는데 2월의 그 날의 풍경이 갑자기 떠올랐다. 신촌의 곧 망할 것 같은 술집의 비현실적인 밤 풍경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오키나와의 선명한 바람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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