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밤
그 주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긴팔 원피스를 입고 갔으니까, 아직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나와 동생, 그리고 친구는 6월 마지막 날에 정밀아를 만나러 갔다. 친구와 나는 두 번째이고, 동생은 첫 만남이었다. 공연장에서 셋이 보기로 했는데, 가는 도중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동생에겐 우산이 있었고, 나는 얇은 장우산을 샀고, 친구는 공연장 근처 스타벅스 처마지붕 밑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인사를 나누고, 공연장까지 우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비를 맞으며 나란히 걸어갔다. 예매자 확인을 하고, 책갈피로 쓰면 딱 좋을 예쁜 빛깔의 티켓과 가사 한 구절이 새겨진 나무연필 두자루를 건네 받았다.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친구, 동생, 나 이렇게 나란히 앉았다. 정밀아는 궂은 날, 이렇..
2018. 8. 7.
빈센트 반 고흐
2017년 마지막 날, 남희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한때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일년에 두세번씩만 보고 있네. 그래도 작년에는 세 번 봤다. 원래 마지막 날 만나 이소라 공연을 보려고 했는데, 늦장을 부리다 좌석을 놓치고 말았다. 매진이 된 이소라 공연을 뒤로 하고, 뭔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을 찾다가 선우정아가 음악감독이고, 고흐 이야기니까 좋을 것 같았다. 언니와 신당동에서 만나 떡볶이를 먹었다. 언니가 맥주 할래? 라고 물었고, 나는 지금 못 마셔요, 라고 했다.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에도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말들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한 사람, 그때의 장소, 그때 공기의 흐름, 그 사람의 표정. 시간이 지날수록 울림이 커..
2018. 2. 8.
여름의 끝
여름동안, 그리고 가을이 오는 동안,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보고, 꽤 읽었는데 기록하질 못했다. 마음에 담아둔 순간들이 많아서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두어야 하는데, 자꾸만 게을러진다. 더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보자고 결심해본다. 오늘의 기록은, 여름의 끝에 만난 썸데이 페스티벌. 가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외투도 가져갔는데, 한여름만큼 더웠다. 잔디밭에서 늦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다 받아냈다. 내가 축제에 온건지, 고생을 한바가지 하려고 온건지, 짜증이 잔뜩 날 무렵,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어왔다. 해가 스물스물 지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콜리 너마저가 나왔다. 동생과 나는 가지고 온 와인을 각자의 잔에 따르고 무대 앞으로 나갔다. 아,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지려고 고통의 시간을 보낸 거야. 행복..
2016.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