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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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밤무대를보다 2018. 8. 7. 17:18
그 주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긴팔 원피스를 입고 갔으니까, 아직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나와 동생, 그리고 친구는 6월 마지막 날에 정밀아를 만나러 갔다. 친구와 나는 두 번째이고, 동생은 첫 만남이었다. 공연장에서 셋이 보기로 했는데, 가는 도중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동생에겐 우산이 있었고, 나는 얇은 장우산을 샀고, 친구는 공연장 근처 스타벅스 처마지붕 밑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인사를 나누고, 공연장까지 우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비를 맞으며 나란히 걸어갔다. 예매자 확인을 하고, 책갈피로 쓰면 딱 좋을 예쁜 빛깔의 티켓과 가사 한 구절이 새겨진 나무연필 두자루를 건네 받았다.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친구, 동생, 나 이렇게 나란히 앉았다. 정밀아는 궂은 날,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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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무대를보다 2018. 2. 8. 21:24
2017년 마지막 날, 남희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한때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일년에 두세번씩만 보고 있네. 그래도 작년에는 세 번 봤다. 원래 마지막 날 만나 이소라 공연을 보려고 했는데, 늦장을 부리다 좌석을 놓치고 말았다. 매진이 된 이소라 공연을 뒤로 하고, 뭔가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을 찾다가 선우정아가 음악감독이고, 고흐 이야기니까 좋을 것 같았다. 언니와 신당동에서 만나 떡볶이를 먹었다. 언니가 맥주 할래? 라고 물었고, 나는 지금 못 마셔요, 라고 했다.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에도 생명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말들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한 사람, 그때의 장소, 그때 공기의 흐름, 그 사람의 표정. 시간이 지날수록 울림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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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불혹무대를보다 2017. 4. 15. 10:26
가고 싶긴 한데, 어떤 이유로 망설여질 때 요즘은 이렇게 생각을 한다. 그러다 영영 못 간다. 3월에는 최백호를 보고 왔다. '부산에 가면'을 정말 많이, 그리고 오래 들었더랬다. 젊은 가수들과도 많이 작업을 하는 걸 보고, 깨어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공연에서 '부산에 가면'을 부르기 전에 영상이 나왔는데, 그 영상에서 최백호가 말했다. 이 노래가 나의 제3의 전성기를 열어줄 거라 확신한다고. 40년간 노래해온 사람은 겸손했다. 나는 젠체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좋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떠벌리지 않아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저절로 빛이 난다. 그는 화려하게 입지 않았다. 단정한 셔츠와 자켓을 차려입고 나왔다. 자연스럽게 부르는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다. 박수가 나올 때마다 허리를 많이 굽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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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쿡무대를보다 2016. 12. 29. 22:20
십이월 첫째주 금요일 저녁에는 한강진의 공연장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리 춥지도 않았는데, 엄청나게 두껍고 엄청나게 긴 목도리를 칭칭 감고 갔다. E와 함께 공연장 제일 뒷자리에 앉아 토마스 쿡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순간 오늘 낮의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파주의 창문이 없는 사무실 창가 자리에 앉아 모니터 화면만 보며 키보드로 열심히 복사하기 + 붙여넣기를 하고 있었는데, 몇 시간 후에 짠-하고 이런 설레고도 벅차며 느긋한 공간에 앉아 있는 거다.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관객석의 우리를 막 공격하는 그런 공간에. 어릴 때 쌍둥이 자매가 순간이동을 하는 티비만화를 참으로 좋아해서 아직까지도 그 주제가를 외우고 있는데 (너무 달라 너무 달라, 너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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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무대를보다 2016. 10. 18. 23:28
여름동안, 그리고 가을이 오는 동안,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보고, 꽤 읽었는데 기록하질 못했다. 마음에 담아둔 순간들이 많아서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두어야 하는데, 자꾸만 게을러진다. 더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보자고 결심해본다. 오늘의 기록은, 여름의 끝에 만난 썸데이 페스티벌. 가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외투도 가져갔는데, 한여름만큼 더웠다. 잔디밭에서 늦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다 받아냈다. 내가 축제에 온건지, 고생을 한바가지 하려고 온건지, 짜증이 잔뜩 날 무렵,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어왔다. 해가 스물스물 지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콜리 너마저가 나왔다. 동생과 나는 가지고 온 와인을 각자의 잔에 따르고 무대 앞으로 나갔다. 아,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지려고 고통의 시간을 보낸 거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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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과 방백무대를보다 2016. 7. 19. 22:55
지난 금요일에는 비가 왔고, 우리는 그 비를 뚫고 홍대의 공연장에 도착했다. 나는 이 공연을 삼만원에 응모했고, 이만원에 낙찰받았다. 만원이나 굳었다. 그런데 최고은과 방백, 이 사람들이 두 시간이 넘게 공연해줬다. 나와 친구는 이 돈을 내고 이렇게 길고 열성적인 공연을 본 것에 미안했고, 감사했다. 백현진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고 준비가 되자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흠뻑 그 노래에 빠져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연체동물처럼 몸을 이렇게 저렇게 흐느적거렸다. 그 움직임은 노래의 리듬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영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엔 신기했다. 저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언젠가 시옷의 모임에서 한 뮤지션을 두고 꼭 약 한 것 같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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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포크무대를보다 2016. 2. 10. 19:10
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S가 그랬다. 우리는 강아솔과 이영훈의 공연을 보고, 금룡통닭으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맥주를 마시다 S가 말했다. 언니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언니가 좋은 사람 만날 수 있게 내가 기도하고 있어. 언닌 정말 좋은 사람 만날 거야. S는 내가 빌려준 책을 돌려주며 퇴근길에 먹으라며 말랑카우도 여러 개 넣어주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도 귀엽게 리본을 묶어 넣어줬다. 이런 다정한 아이가 다 있나. S를 위해 나는 올해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강아솔과 이영훈은 우리에게 여러 노래들을 들려줬다. 그 중 몇몇 곡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마음에 남아 여러 날 반복해서 듣고 다녔다. 출근길에, 퇴근길에, 일할 때에, 이유없이 길을 걸을 때에. 강아솔은 농담을 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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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무대를보다 2015. 12. 21. 23:19
공연을 보고 찾아본 조승우의 인터뷰에 그런 말이 있었다. 사실은 13년 전처럼 베르테르라는 역할에 푹 빠져들 수가 없다고. 조승우는 13년 전, 실제로 깊은 짝사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정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던 거다. 이번에는, '젊은'도 빠지고, '슬픔'도 빠졌다. 그냥 '베르테르'다. 항상 무대 위의 조승우를 보고 오면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성장에 설레이면서도 마음이 착찹해지기도 했다. 같은 80년 생이고, 오랫동안 지켜본 팬으로써, 그는 성큼성큼 나아가는데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이번엔 공연을 보고 찾아본 그 인터뷰 기사 덕분에, 그와 나의 '다름'이 아니라 '같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우리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지. 발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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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라만차무대를보다 2015. 11. 16. 23:16
10월의 연휴에 돈 키호테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전히 황량한 라만차를 떠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사랑에 빠졌다. 허름한 여관에서 '알돈자'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를 만났다. 돈 키호테는 노래했다. 당신은 '둘시네아'라고. '둘시네아'는 스페인어로 '사랑스러운 여인', '귀여운 여인'. 알돈자는 그를 무시했다.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화를 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몸을 팔고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신은 알돈자라고. 하지만 돈 키호테는 계속해서 노래했다. 그에겐 이 허름한 여관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고귀한 성이었고, 촐싹대는 여관주인은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줄 고마운 성주였고, 모두가 한번 하고 싶은 헤픈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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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다방의 강아솔무대를보다 2014. 5. 9. 22:29
2월, 우리는 신촌의 맥주창고에 앉아 있었다. 그날 언니와 헤어지면서 일기를 꼭 쓰고 자겠노라 말했다. 술집의 풍경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손님이 거의 없었다. 새로 개업한 가게였고, 토요일 밤에 이렇게 술 손님이 없다니 곧 망할 것만 같았다. 그 가게에 한참 뒤에 등장한 세 팀의 손님이 모두 특이했다. 한 여자가 잔뜩 술이 취한 채 비틀거리며 혼자 들어와서 결국 맥주잔을 깼고, 의대생들이 우루루 몰려와 잘 빠진 몸매의 여자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리고 또 한 팀. 한 쌍의 커플은 장애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그 속에 우리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