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290건

  1.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1) 2018.07.16
  2. 브루클린 2018.07.01
  3. 오늘 뭐 먹지? 2018.06.14
  4.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 2018.06.10
  5. 오로지 일본의 맛 2018.06.08




   가끔 회사를 그만두면 무얼 해야할까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게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곤 한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다른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왜 기술이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돈은 계속 벌 수 있을까. 지금 너무 낭비하고 사는 게 아닐까. 아끼고 아껴 좀더 모아야 하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 지금까지 해 봤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 아니,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일이 좋을까. 책을 좋아하니까 조그만 책방은 어떨까. 어느 월요일, 조금은 울적한 마음으로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 이 책이 떠올랐다. 장바구니에 오랫동안 담아놓고, 매번 주문 때마다 슬쩍 빼버린 책. 지금이야말로 주문해서 읽을 때라고, 책방을 운영하는 일이 어땠을지, 왜 책방 문을 닫아야만 했는지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은 술술 잘 읽힌다. 퇴사를 결심하고, 희망으로 가득찬,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책방을 여는 것에서부터 운영을 중단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최종 정리를 하기까지의 일들이 소소하게 담겨 있다. 현실적인 문제들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역시 책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운영을 하면 저녁과 주말이 없어지는 거였어, 책 몇 권 팔아서는 책방 유지를 할 수 없는 거였어, 그래서 책방들이 죄다 커피며 맥주까지 파는 거였어, 등등의 작가가 직면했던 현실적인 어려움을 내 것인양 안타까워하며 읽어나갔다. 언젠가 조그만 책방을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금세 접혔다. 나는 망할 게 틀림없었다. 역시 월급을 받는 편이 훨...ㅆ


   어디선가 보고 이대에 있었던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꼭 한번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계속 생각에만 그쳐 결국 작가가 말한 것처럼, SNS로만 염탐하는 손님에 그치고 말았지만. 가이드북과 여행에세이들이 그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소설도 있었네. 그래, 여행하는 소설도 있지. 작가가 책방 공간에 어떤 책을 주문할 지 고심하는 에피소드를 읽고 내가 작가의 입장이 되어 잠시 생각해봤는데, 참 좋더라. 책방 주인이 되면 그게 참 좋을 것 같다. 책방과 어울리는 책을 고심해서 주문하고, 예쁘게 진열하고, 볕 좋은 날 한 손님이 들어와 그 책을 만지작거리고, 뒤적거리다 끝내 구입해가는 풍경. 흠. 나는 커피를 파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맥주도.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 읽은 책을 그대로 사가지고 온 경험이 내게 있으니.


   나는 실패가 늘 두렵지만, 모든 실패가 진짜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수많은 실패를 하는 것이 어떤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 성공이 크든 작든간에. 언젠가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작가가 책의 말미에 말한 것처럼. 그때 또 실패해도 상관없지. 어떤 성공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 가고 있는 거니까. 끝내 가보지 못한 이대 책방의 처음과 끝을 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역시 모든 책은 때가 있는 거였어.



-
    북토크를 세 시간이나 앞두고 책방에 도착한 작가 부부의 손에는 커다란 솥과 가스버너, 식재료 상자가 들려 있었다. 미리 삶아온 쌀국수 면에 판매용 육수를 부을 거란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는 각종 향신료를 넣은 솥에다 생닭을 흐드러지게 끓여낼 작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작가의의 '큰 그림'에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책방에서 닭 육수를 고아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의 엉뚱한 상황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북토크 신청자들이 하나둘 책방에 도착했다. 두 시간 동안 팔팔 끓인 육수 냄새가 바깥의 찬 공기와 뒤섞이면서 푸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드나들 때마다 꼭 웃풍이 심한 어느 시골 식당에 놀러 온 것만 같다. 고명으로 얹을 고수와 으깬 땅콩, 매끈하게 익은 면까지 준비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난로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금방 퍼올린 쌀국수 그릇이 손에서 손으로 옆 사람에게 전달됐다. 더운 나라에서 건너온 음식은 서울의 추운 겨울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날 저녁 우리는 여름날의 치앙마이를 함께 추억했다. 
- 114-115쪽



  1. 2018.07.20 16:1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브루클린

from 서재를쌓다 2018.07.01 09:36



   아주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아일리시를 생각한다. 2016년 봄에 보았던 영화를, 2017년 겨울 책으로 다시 읽었다. 2017년 겨울,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 아일리시였다. 아일리시는 아일랜드 소도시에서 미국 뉴욕 브루클린까지 간 사람이다. 1950년대에. 똑똑하지만 시대상황 상 그럴듯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아일리시에게 어느 날 신부가 제안을 해 온다. 브루클린에 가면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기 싫었던 아일리시는 아일랜드를 떠나기 싫어한다. 아일리시를 단호하게 보낸 건 그녀의 친언니였다. 동생의 미래를 위해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힘이 들었다. 향수병도 깊었다. 짙은 향수병 덕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이탈리아 청년 토니도 만나게 된다. 다정하고 배려깊은 토니를 사랑하게 되고, 점점 브루클린 생활에 애정이 생기게 된다. 야간학교에서의 우수한 성적, 공부가 끝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희망, 하숙집 주인의 신뢰, 토니의 깊은 사랑. 그런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언니를 잘 보내기 위해, 그리고 슬픔에 빠져있는 엄마를 챙기기 위해 고향으로 잠시 돌아온 아일리시는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일하게 미국 브루클린에 다녀온 사람인 것이다. 오랜시간 배를 타고 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이곳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활을 한. 혼인신고까지 한 토니의 존재를 지워버리며,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자신감이 한껏 상승한 아일리시. 그곳의 부유한 집안 아들의 애정공세를 즐기던 아일리시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진다. 브루클린에서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 아일리시는 그 길로 아일랜드를 떠난다. 아마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토니와 결혼을 하고, 잠시동안 다시 머무른 아일랜드에서의 시간들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새로운 직장을 갖고, 아이들을 낳고 생활해 나갈 것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일리시가 아일랜드로 돌아오고, 토니의 존재를 잊어버리며 고향 친구들 사이에서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즐길 때. 이런 나쁜 년이 있나 생각했다. 그렇게 착한 애였는데, 미국물이 이 아이를 이렇게 나쁘게 만들어 버렸네, 생각했다. 혼인신고를 한 사실이 발각되자 후다닥 떠나버리는 것을 보고도 나쁜 것 나쁜 것, 돌아가서 토니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 보고싶었다고, 너밖에 없다고 속삭이겠지, 욕했었다. 소설을 읽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여전히 나쁜 행동이긴 했지만, 아일리시는 본능에 충실했던 보통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인 것이다. 다른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동생을 위해 헌신하는 언니, 첫눈에 반해 끊임없는 사랑을 펼치는 토니,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늘 외로운 엄마. 아일리시는 비록 타의에 의해 자기 일생의 굵직굵직한 일들을 실행했지만, 그 일들에 적응해가면서 그때그때의 감정들에 지극히 충실했던,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처음 브루클린을 떠날 때 배 위에서의 시간, 언니의 부고를 듣고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로 돌아가며 겪은 시간, 도망치듯 아일랜드에서 또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며 보낸 배 안의 시간. 아일리시는 지난 겨울,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었다. 멀리 다녀온 사람은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알아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아일리시는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교구 사제관까지 걸어가서 플러드 신부에게 그 공문을 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키호 부인에게 메모를 남기고 거리로 나선 아일리시는 저녁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나무는 잎이 무성했고 거리엔 사람들이 나와 있었으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브루클린에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편지가 기운을 주고 새로운 자유를 준 것 같았다.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아일리시는 플러드 신부가 사제관에 있다면 이 편지를 보여줄 생각에, 다음 날 약속대로 토니를 만나면 토니에게도 보여줄 생각에, 그리고 편지로 이 소식을 집에 알릴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1년 후면 정식 부기원이 되어 더 나은 일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 1년 동안 날씨는 점점 찾을 수 없을 만큼 더워지고 다시 열기가 수그러들면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릴 것이며 그러면 브루클린에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겨울 또한 봄으로 녹아들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햇빛이 남아 있는 초여름이 되었다가 그녀는 다시, 브루클린 칼리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을 것이다. 

   다가올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갈지 꿈꾸면서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일리시는 미소 짓는 토니의 존재, 그의 관심,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들,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그의 손길, 키스해 오는 숨결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냄새, 그가 그녀에게 집중할 때 느껴지는 소중한 기분, 그녀를 감싼 그의 팔, 그녀 입에서 느껴지는 그의 혀를를 상상했다. 아일리시는 그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이 편지까지 받게 된 지금, 그녀가 가진 것들은 처음 브루클린에 도착할 때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아일리시는 걸으면서도 자꾸 웃음을 참아야 했다. 

- 223~223쪽



오늘 뭐 먹지?

from 서재를쌓다 2018.06.14 22:06




   홈플러스에서 야키소바면과 소스를 샀다. 면 세개와 소스 세개가 한 묶음이다. 순한맛과 매운맛이 있었는데, 고민하다 둘다 샀다. 두 번 해 먹었는데, 두 번 다 2인분이었다. 순한맛과 매운맛을 하나씩 섞었다. 마트에서 천원짜리 컷팅 양배추와 붉은색 초생강도 샀다. 컷팅 양배추는 딱딱한 것과 보슬보슬한 것 두 종류가 있었는데, 보슬보슬한 배추로 골랐다. 집 건너편에 야채가게가 생겼다. 자주 애용하는 역앞 가게보다 훨씬 싸다. 거기선 작은 당근 세 개를 샀는데, 역시 천원이었다. 좋아하는 정육점에서 대패삼겹살도 샀다. 대패삼겹살은 늘 이 집이다. 두 번 해 먹고 딱 한 번 더 해 먹을 만큼 남았다. 재료 준비는 끝. 이제부터는 간단하다. 야채는 모두 채썰어두고, 대패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자른 뒤 기름을 두르지 않고 익힌다. 돼지기름이 살포시 나왔을 때 야채를 넣는다. 야채와 고기가 적당히 익었을 때 면과 소스를 넣고 면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뒤적거려 준다. 작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장자리가 바삭한 반숙 계란 후라이를 후다닥 만들어 둔다. 소스가 면과 야채에 잘 어우러지면 후라이를 얹고 맛나게 먹어주는 거다. 싱거우면 굴소스를 약간 넣어준다. 맥주도 빠질 수 없지. 맥주는 예쁜 유리잔에 따라 마신다. 


    히라마쓰 요코는 야키소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해 질 녘 시원한 바람. 정원에 뿌리는 물. 땀띠분 냄새. 유카타의 촉감. 멀리서 축제의 북소리가 들려오면 귀를 기울인다. 또는 온 가족이 전철을 타고 나가 해수욕. 들뜬 마음에 수영을 너무 오래해 새파래진 입술을 햝으면 바닷물 맛이 나고, 목이 타고, 배는 등에 붙는다. 여름 축제도 해수욕도 야시장도 본오도리도 그리운 그 여름과 함께 떠오르는 맛, 그것이 야키소바다. 좋아했는데, 소스 야키소바. 건더기라곤 양배추와 숙주 정도, 몇가지 들어 있지 않아 오히려 파래와 빨간 생각절임이 주연을 맡는다. 드문드문 발견하는 튀김옷 부스러기가 기쁘다. 고소한 소스 뒤범벅의 야키소바는 이벤트 기분이 가득 들게 한다. 진하고 짠 소스의 맛과 향, 이것 또한 일본 여름의 맛이다."


   오늘 뭐 먹지? 제목에서 촌스러운 느낌이 마구마구 드는 이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권여선과 안주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더도 말고 딱 한 가지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서 맛난 맥주와 함께 먹고 싶어졌다.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대단한 음식(이라고 쓰고 안주라 부른다)들이 이 책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들깨가 듬뿍 든 순댓국, 해장에 좋은 만둣국, 집필할 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속을 각각 다르게 말아두는 김밥, 따끈따근할 때 바로 먹는 육전, 설명이 필요없는 누룽지와 명란달걀찜 (명란은 사랑입니다), 해장엔 또 이것이지 물냉면, 동해안의 싱싱한 물회, 여름에 쌈 싸먹기 좋은 땡초 가득 들어간 깡장, 여름나기에도 좋고 안주로도 좋은 밑반찬들, 혼자서 한 그릇 독차지 할 수 있는 찬바람 불기 시작할 때 먹으면 좋은 냄비우동, 문학관의 심심한 급식 탓에 급 마련된 두부와 김치제육볶음 안주 술자리, 단골 시장에서 사온, 단골이라 게다리까지 덤으로 받아와서 국까지 끓인, 쌀밥과 찰떡궁합 갈치조림, 추운 계절에 더 생각나는 칼칼한 감자탕,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맛난 꼬막조림, 추운 겨울 동네 시장에서 먹는 어묵 한 꼬치와 짭조름한 국물 한 컵, "내가 앞으로 집밥을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내 손에 달"린 집밥집밥, 마른오징어를 물에 불린 뒤 고소하게 튀겨먹는 오징어튀김, 쇼핑몰에서 두 상자를 잘못 배송해 그날 저녁에 조림도 해 먹고, 구워서도 먹은 고등어, 먹고 싶은 것만 해 먹는 부러운 명절상 (명절음식재료가 다 떨어지면 치맥을 시켜먹는다는!), 그리고 끝내 져버린 간짜장까지. 


    권여선은 소설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고, 요리도 잘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단식을 한 번 경험해 본 작가는 그 뒤 종종 단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는 자의였고, 나는 타의였고, 작가는 여러번이지만, 나는 달랑 한번 뿐이지만. 입원을 하는 동안 며칠 단식을 하며 몸이 굉장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관장도 했겠다, 몸에서 나쁜 것은 모두 빠져나가고 정화되는 느낌. 그리고 못 먹는 탓에 예민해져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는데 (마음을 잡기 위해 먹고 싶은 음식들 목록을 적어보기도 했다), 결론은 오늘보다 나은 인간이 되자, 였다. 세상에 단식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다니. 그리고 단식 후 먹게 되는 음식이 간이 일도 없는 흰죽일 지라도 엄청나게 맛있게 느껴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미각이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인 것이다. 아, 책의 제일 마지막에 작가가 좋아하는 중국집 에피소드가 있는데, 정말 읽다 빵- 터졌다. 이건 실제로 읽어 보아야 합니다. 하하하. 요리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나를 두 번이나 야키소바를 만들게 한, 이 책의 기억해둘만한 구절들도 옮겨본다. 정성껏 만들어서 맛나게 먹는 즐거움을 잊지 말자. 


-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26쪽


   첫 단식 이후로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단식을 한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내가 살아온 과거들은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은 곰곰이 따져본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맵게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서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따위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쓸데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속에 웅크린 채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뒤돌아 보아주고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고아처럼 어리고 상처 입은 감정들이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 74-75쪽


   (...) 병치레를 많이 했던 내가 어렸을 때 몹시 앓고 난 후면 어머니는 부엌 처마 밑에 걸어두고 아끼던 굴비 두름에서 한 마리를 꺼내 연탄불에 구워 살을 발라내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시곤 했다. 연탄불에 구운 옛날 굴비의 맛이야 뭐라 말을 보태고 말고 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특히 굴비 살을 따뜻한 밥 위에 얹어 먹는 게 좋았다. 유년에 먹던 그 맛과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이다. 정말 이렇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밥과 무와 갈치가 어울려 내는 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게다리를 넣어 구수한 단맛이 도는 무된장국을 한술 떠먿는다. 그러면 내 혀는 단풍잎처럼 겸허한 행복으로 물든다. 

- 168-169쪽







   루나파크의 웹툰과 글을 열심히 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루나의 친구로 등장하는 노난이라는 특이한 별명의 사람이 이 노란 책을 출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 남유럽에서 열여덟 명의 사람을 여행한 기록. 표지 색깔이며, 길다란 제목이 따뜻한 책일 것 같았다. 바로 주문했다. 읽어보니 역시 따뜻한 책이었다. 노난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윤주 씨는 따뜻하고, 용기 있고, 느긋하고, 삶의 순간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작가 소개에 의하면 네 번 회사를 옮겼고, 회사를 자주 그만둔 덕분에 길고 짧은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단다. 겁이 많지 않은 덕분에 낯선 사람들을 따라가 숨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단다. 가장 쓰고 싶은 것은 언제나 일기란다. 나는 이런 여행들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이렇게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더랬다. 무척 잘 쓴 글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마음들이 좋아서 잘 읽혔다. 편안한 글이다. 스페인에 가져가 여행 중 이 책을 읽은 동생에게 어땠냐고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너무 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라는 동생의 말에 우리의 여행이 우리의 추억 속에서 모두 미화되어 있지 않냐고, 그래서 온갖 일을 겪고 와서는 또다시 떠나는 꿈을 꾸지 않느냐고,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그녀가 지금까지처럼 용기 있고 느긋한 여행을 계속 해서, 그리하여 다정한 일기를 열심히 써서, 언젠가 또다른 다정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 좋겠다. 



   "있잖아, 윤주.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정말 많은데도 그 생각을 말하려고 하면 겁이 나. 덜덜 떨려. 이 수업이 너무 좋아서 매일 이 수업하는 날만 기다렸는데도 막상 수업에 가면 말하는 것이 힘들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겁없이 혼자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부러워.

   뭐든 하고 싶은데 소심하고 생각이 많고 착하고 여린 라우라에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가장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추천했다.

  "<조르바>를 읽어, 라우라. 나는 <조르바>를 읽고 용기가 생겼어. 난 조르바처럼 살고 싶어."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좋아하는 라우라는 다른 책은 봤지만 아직 <조르바>를 못 봤다고 했다. 어떤 책이냐고 묻길래,

   "조르바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틀이 없는 사람이야. 용감하고 동시에 다정한 사람이야. 하고자 하는 것을 해버리는 사람이야."

   라고 취기에 흥분해서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라우라가 대답했다.

   "윤주, 그게 조르바라면 넌 이미 나한테 조르바야."

- 36-37쪽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나도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 번째 좋은 살사람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다니다가 좋은 사람 '한 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다음은 볕 좋은 날 목 좋은 곳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것처럼 순조롭다. 

   좋은 사람 곁에는 약속한 듯이 좋은 사람들이 있기 떄문에, 첫 번째 좋은 사람을 슬쩍 당기는 노력만으로도 두 번째, 세 번째 좋은 사람들이 줄지어 매달려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동안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야?'라고 감탄하며 웃을 수 있게 된다. 기억해두자. 첫 번째 좋은 사람은 두 번째 좋은 사람을 몰고 온다. 

- 84쪽


   "윤주, 나는 다른 나라로, 아니 다른 도시로 여행을 해본 적이 거의 없어. 그래서 이렇게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걸 정말 좋아해. 사람들을 통해서 여행을 하는 거야. 나와 필립한테 너는 가장 멀리서 온 손님이니까 우리 둘은 오늘 가장 먼 나라로 여행을 간 거야. 우리는 네 덕분에 오늘 많이 행복했어."

- 108쪽






   진짜 일본은 어떤 모습일까? 이동하기는 편할까?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정처럼 맑은 계곡과 콘크리트 숲,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정리된 정원, 눈 덮인 산, 고딕 로리타 패션의 소녀, 게이샤....... 이 모든 것이 혼재된 곳에 과연 유럽에서 온 호기심 많고 평범한 가족이 (환대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이라도 있을까?

- 26쪽


   자욱한 숯불 연기 속에서 아이들이 꼬챙이에 꽂힌 닭 내장을 기분 좋게 우적우적 씹어 먹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콘플레이크와 토스트로 시작한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다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꿈이 아닌가 싶으면서 한편으로 이상하게 흐뭇하고 행복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일본에 연착륙했다. 

- 46쪽


   우리 가족은 후쿠오카에 도착하자마자 편안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방문한 모든 도시 중 다시 와서 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후쿠오카는 감당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충분히 작으면서 한편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컸다. 또한 이곳은 좋은 의미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편안하고 따뜻하며 재미를 추구하고 가식 없이 진솔한 그런 분위기. 좋은 기후, 최고의 상점, 미술관, 공연장, 항상 인파로 붐비는 유흥가 등은 덤이다. 아무튼 이곳 후쿠오카에서 우리는 도시에서 기대 가능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 404쪽


    작년 여름에 시작한 책인데, 이제야 끝났다. 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끝낼 수 있다. 일본인 요리사 친구가 있는, 그렇지만 일본 요리에 무지했던 영국 요리 작가가 가족과 함께 일본 전역을 몇달동안 여행하며 경험하고 맛본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반부에는 유머러스한 면이 많아 책장이 잘도 넘어갔는데 (작가의 새 책이 나왔는데, 출판사에서 '빌 브라이슨'과 맞먹는다고 홍보하더라) 어쩐지 중반을 넘어갈수록 지루해져서 (취재 내용이 많아졌다) 한참을 쉬었다 다시 읽었다. (잠자기 전에 읽다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는) 좀더 생생한 경험을 원했는데, 그런 경험들은 초중반에 몰려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500페이지의 책을 끝냈다는 뿌듯함! 서양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 요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책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박상현의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주에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트파이터> 후쿠오카 편을 볼 때도. 좋아하는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 작가의 일본 요리에 대한 사랑, 진심으로 아끼는 것들을 먹기 위해 기꺼이 투자해온 정성스런 시간과 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 이런 메모를 해뒀다. 오키나와에 가면 사올 것. 누치 마스 소금. 다량의 미네랄이 함유되어 몸에 아주 좋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