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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맛집산책 2018.05.10
  2.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12) 2018.05.08
  3.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2) 2018.04.10
  4. 잘 먹고 갑니다 2018.04.02
  5. 밤의 발코니 2018.03.29

일본맛집산책

from 서재를쌓다 2018.05.10 23:14



  ​

   히라마츠 요코의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가 무척 좋아서 새 책이 출간되면 때맞춰 읽어야지 다짐했었다. 신간 알리미 신청을 안 해놔서 몰랐는데, <일본맛집산책>이라는 촌스러운 제목의 책이 히라마트 요코의 새 책이라는 걸 알고 바로 주문했다. 그림이 조금 나오는데, <고독한 미식가>의 다니구치 지로가 그렸다. 히라마츠 요코가 출판사 편집자 Y군과 함께 맛집을 찾아가 음식을 먹는 내용인데, 흠. 뭐랄까 뒤로 갈수록 기사 느낌이랄까. 딱딱한 글도 있고, 잘 읽히지 않기도 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그래도 다시 일본을 가게 된다면 방문하고 싶은 가게가 몇 생겼다. 중고서점에 팔기 전에 적어둬야지. 그나저나 나는 '비어홀'이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좋을까. 비어홀. 듣기만 해도 넓직한 곳에서 왁자지껄하게, 삼삼오오 커다랗고 튼튼한 맥주잔을 부딪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 생각만해도 좋은 것!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용산의 고깃집에 출몰했다고 해서 용산이 시댁인 친구에게 맛집이냐고 물어봤다. 친구도 아직 못 가본 곳이라는데, 분명 이제는 갈 수 없겠지. 새벽까지 운영하는 곳인데, 고로상이 다녀간 후 저녁 9시에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어제 아침에 보았다는. 흑-



   사람의 몸은 정말로 잘 만들어졌다. 추울 때는 그렇게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따뜻해지면 용기를 내어 먹고 싶어지는 맛이 있다. 싹이 튼 채소나 산나물의 알싸하고 쓴맛에는 추운 겨울 동안 쌓인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몸이 원하는 것이다. 

   경칩에서 춘분, 춘분에서 청명, 청명에서 곡우로 바통을 넘기면서 지금도 봄은 움직이고 있다. 채소와 산나물을 맛보며 계절을 받아들이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주위는 온통 봄의 싱그러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 26-27쪽


  히야시 토마토, 아츠아게, 모로큐.

  이것이 '오늘 신바시 아저씨들의 베스트 3 안주'인 모양이다. 신바시 역전 빌딩 1호관 B1 '타치노미 긴'은 초저녁부터 손님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셀프서비스 안주, 한병 300엔 균일, 생맥주 500cc 한 잔 380엔.

  꿀꺽꿀꺽꿀꺽, 캬아.....

  여기저기에서 환희에 찬 신음소리가 쏟아진다. 옛 추억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건물은 1층과 지하에 술집과 작은 음식점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아저씨들의 성지다. '탄포포' '오후쿠로' '샤샤' '칸자시' '사쿠라코' ...... 저마다 스트레스를 풀러 오라고 유혹하고 있다. 건물 입구의 안내 지도판에 쓰여 있는 한 줄 문구도 마음에 꽂힌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기가 바로 논스트레스 공화국!"

- 28-29쪽


   군만두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말투를 따라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극장을 나와 그대로 직진해서 빨리 들어간 곳은 늘 그렇듯 '텐코 만두방'이다. 이곳은 군만두가 생각날 때마다 달려가고 싶어지는 가게 중 하나, 물론 생맥주와 함께다. 

   세상에는 '절묘한 조합'이라는 것이 있다. 마리아주 같은 멋 부리는 말은 시건방지다. 쌍방이 정면으로 맞잡고 다짜고짜 승부를 겨루는 씨름은 이것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군만두와 생맥주.

   '텐코 만두방' 니시키초 점은 1953년 창업한 '간다 만두 가게'가 시초다. 그만큼 만두는 대표 메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작은 '원조 만두'도 버리기 어렵지만,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흑돼지 만두'는 견딜 수 없는 맛이다. 조금 적은 듯한 양배추와 듬뿍 들어간 부추. 흑돼지의 진한 맛이 응축되어 있는 큼직한 놈이다. 바삭하게 구워서 노릇하게 눌은 갓 구운 만두를 한입 물면 도톰한 만두피가 씹히는 맛이 남다르다. 우선 한 개를 다 먹어치운 뒤 차가운 생맥주를 쭉 들이킨다. 감동에 겨워 가게 구석자리에서 TV를 올려다보니 한가로운 오후 와이드쇼가 방영중이다. 아, 행복하구나.

  군만두, 생맥주, TV.

- 30-31쪽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얼음덩어리를 꺼내 옛날부터 쓰던 빙수기로 얼음을 갈아 만드는 빙수는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다. 빙수를 다 먹을 때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고, 그 후 깜짝 놀랄 정도로 시원한 딸기 우유 한잔을 곁들였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가 포렴을 젖히고 불쑥 들어왔다. 

    "여기 빙수요. 그리고 딸기 우유 주세요."

    여름 참배의 즐거움은 얼음, 가을과 겨울은 구운 경단. 봄은 쑥 경단. 이 가게도 참배객들을 부지런히 맞이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오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간다. 장어도 훌륭하고, 빙수도 훌륭하고, 게다가 참배까지 마쳤으니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언젠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귀엣말로 말해주었다.

    "나리타산으로 참배하러 가면 꼭 좋은 일이 생겨요. 이거 정말이에요."

- 60-61쪽


    젓가락을 놓고 볼이 발그레해진 왕씨가 종잇조각에 뭔가를 적었다.

    "주봉지기천배소."

    "소중한 친구와 마시는 술은 천 잔으로도 모자란다는 뜻이에요. 중국 속담이죠." 왕씨가 가르쳐주자 일동은 환희로 들끓었다. 좋구나, 맛있어요, 자자 또 건배! 술잔을 비우면서 만석인 가게 안을 둘러보니 손님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왁자지껄, 시끌벅적. 중국 둥베이가 웬 말이냐, 이건 우주 비행이지 않은가.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지며 공간 전체가 가까운 미래의 한 장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89쪽


    세 개를 안주로 기쿠마사무네를 데워서 마신다. Y군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다. "마구로누타, 참 맛있네요. 시라코폰즈도 맛있어요." 술을 꿀꺽꿀꺽 비우고 이따금 입으로 가져가는 이타와사의 선뜻하고 싱싱한 식감이 또 즐겁다. 처음엔 일 얘기만 하더니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 아이 이야기, 만난 사람들 이야기, 작은 배를 타고 흔들거리며 가는 듯한 기분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이 또한 고아가리의 마법이다.

    "안주 좀 더 시킬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 143-144쪽






   망원의 벨로주에서 친구와 나란히 본 정밀아 공연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곡은 '심술꽃잎'이다. 정밀아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안에 사정이 있어 형제 중 자신만 잠시 시골 할머니집에 맡겨졌는데, 그때 서럽고 슬펐던 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생각이 났다고 한다. 이 아이를 잘 달래서 노래로 만들어 잘 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심술꽃잎'은 그렇게 만든 노래라고 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큰 나무, 풀잎, 바람 모두 실제의 것이니, 노래를 들을 때 그것들을 직접 눈앞에 그려보라고 했다.


    노동절에는 혼자 광화문에 가 와인영화를 봤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와인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다 보니 아버지와의 어긋난 관계로 집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던 주인공이 집에 돌아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어린시절의 자신을 껴안는 이야기였다. 어린시절의 자신을 잘 보듬아 준 다음에야 주인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린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런 장면이 늘 뭉클하다. 


   그리고 어느 목요일에는 그 사람 집 앞 커피집에서 이 책을 읽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연애를 잘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오는 어떤 고약한 부분이 있다. 지난 연애에서도 그랬었다. 그게 상대방을 슬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잡고 다잡지만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한 짧은 글을 봤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다음 독자에게 남긴 말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잘 되지 않았는데, 헤어지면서 자신은 불안형 애착을, 상대방은 회피형 애착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고.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단계부터 차차 성장해나가 건강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그리하여 좋은 엄마도 되고 싶다는 글이었다. 


   중간쯤 읽다 잘 읽히지 않아 덮어뒀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이 나 책을 들고 전철을 오랫동안 타고 집 앞까지 갔다. 야근이 언제 끝나는지 모르지만 놀래켜 주려고 몰래 커피집에 자리를 잡았다. 야근이 늦어지고 늦어져서 결국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성인의 애착 유형에 관한 설명이 있다. 200페이지부터 202페이지까지, 거기에 내가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릇된 행동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 페이지들을 읽어나가는데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아이였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결국 자정 넘게 야근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는 동안 가슴이 벅찼다. 


    시옷의 모임에 가기 전, 나는 지금보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던 것 같다. 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겸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언젠가 이 사람이 나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어 결국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네, 생각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도 이 페이지에 있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어린 아이들이 이 언니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렇지 않다고, 더 알게 되어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하다고 자꾸자꾸 얘기해줬다. 그리고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에 계속계속 얘기해줬다. 그것들이 나의 못난 면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는 것 역시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247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거든. "치료와 성장은 일생 어느 시기에도 가능합니다." 고마운 사람들.


    나는 내 안에 있는 이 아이를 잘 달래고 오래 들여다 볼 것이다. 보듬아주고, 손잡아주고, 괜찮아 질 때까지 곁에 있어줄 거다. 그 사람에게도 그런 아이가 있다면 힘들었지, 고생했지, 무섭고 쓸쓸하지는 않았니, 말 걸어 주고 싶다. 그리고 괜찮다고, 이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안아 줄 거다.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지만 다들 실수는 하는 거라고,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자고 다독여 줄 것이다. 상처는 누구에게든 있다고, 그 상처를 어떻게 아물게 하는 지가 중요한 거라고. 우리는 상처를 잘 아물게 할 수 있다고. 보경이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튼튼하고도 단단한 애착 상대가 되는 것이다.


-


   애착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입니다. 아기는 혼자 상황을 이해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돌봄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호 간의 연대감 없이는 애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즉, 돌봄을 주고받는 사람이 서로 즐겁고 행복감을 느껴야 애착이 잘 형성됩니다. - 105쪽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애착 도식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애착 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놀라운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저는 심리 치료 중에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본인이 긍정적 변화를 원하는 것과, 상담자와 함께 자신의 변화와 성장에 대해 실존적 책임을 지는 것이 정서적 금수저로 거듭나는 관건입니다. - 207쪽



  1. 2018.05.09 01:2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09 18:38 신고 BlogIcon GoldSoul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앤셜리가 진짜진짜 상담공부를 했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전에도 쭉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 책을 읽고서 앤셜리는 정말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확신했거든. 천천히 준비해서 좋은 상담사가 되어줘. 응응. 나의 다정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내가 큰 나무가 되어줄게. 그러자, 죽을 때까지 재미나고 따뜻하게, 그렇게 서로를 지켜봐주고 격려해주자. 고마워, 앤셜리 (하트 뿅뿅) :-D

  2. 2018.05.09 19: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09 19:20 신고 BlogIcon GoldSoul

      이렇게 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ㅎㅎ 여긴 저의 솔직한 마음들이 담긴 곳이라 (누군가는 일기를 왜 일기장에 안쓰고 인터넷에 쓰냐고 놀려댔지만 흐흐) 그때의 제 마음도 남겨두고 싶었어요. 비단 연애 뿐만이 아니라 관계에서 제가 조금씩 움츠렸던 부분을 이 책을 통해 나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두려운 게 아니라 더 튼튼해졌어요! 헤헤 사실 저 막 내지르는 스타일이거든요. 좋은 관계들을 쭉 이어나가고 싶고, 그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고, 좋은 기운을 주고 싶어요. 제 안의 그 아이는 모른척 할 게 아니라 더 잘 어루만져주다 내보내고 싶어요. 그 아이도 저의 한 부분이지만, 더 긍정적인 부분을 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이렇게 써 놓았지만, 여전히 바야흐로 봄이랍니다. 헤헤- 좋은 밤 보내세요.

      아, 꽃검색 기능은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 보고 알고는 있었어요. 정말 신기하고도 똘똘한 세상이에요! 좋아진 거...겠죠? 하하

  3. BlogIcon wonjakga 2018.05.11 21:4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글 읽고 오늘 이 책 대출했어요. 잘 지내시죠? 벌써 오월이네요. 잘 지내시리라 믿으면서 오랜만에 인사하고 가요. 사실 자주 들어오긴 하지만요 헤헷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22 신고 BlogIcon GoldSoul

      헤헤- 잘 지내고 있어요. 현정씨도 잘 지내죠? :)
      벌써 5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어요. 흑흑-
      이 책, 현정씨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괜찮았음 좋겠어요!

  4. 새봄 2018.05.13 11:1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제 속에는 어떤 고약한 아이가 있어서 이 모양인지!
    저도 오랜만에 인사하고 갑니다:) 잘 지내시죠?! 너무 좋은 계절이에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25 신고 BlogIcon GoldSoul

      진짜요. 먼지랑 일교차만 빼면요. 흐흐-
      저도 가끔씩 올라오는 새봄씨 일상 잘 보고 있답니다.
      기운 내고 있는 거죠? 화이팅이에요! 아자아자

  5. 2018.05.16 18: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34 신고 BlogIcon GoldSoul

      썬님이 회피형이라니. 번쩍!
      잘 모르지만, 이렇게나 멀리 있지만, 왠지 요즘 좋아보였다구. 상처 받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상처 주지 않으려는 노력. 이 노력 좋다아. 나도 노력하겠어! 길고 다정한 조언 고마와. 그러니까, 정말 언니는 30년도 (흑흑) 훨씬 넘는 시간을 타인으로,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지내왔는데 말이야. 몇 개월 만나고서 감정의 소용돌이에나 빠지고 말이야. 반성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육두문자는 줄이도록 하자 ㅋㅋㅋㅋㅋㅋ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은 커플. 고마워요, 썬님. :-D

  6. 2018.05.17 16: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41 신고 BlogIcon GoldSoul

      요 며칠 이곳은 비가 요란하게 왔는데, 그곳도 그랬죠?
      빗소리가 시원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막 그랬어요.
      저도 잘 읽지 않는 류의 책인데, 그 평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완전 마음에 든건 아니지만, 제게 깨달음을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랍니다. 헤헤- 그리고 다음에 산 책도 같은 애착에 관한 책인데 마음에 들어요. 아직 초반이라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요. 다 읽으면 또 얘기 풀어놓아볼게요.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무척 좋아서 기대했는데, 흠. 이 작가의 소설을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아마도 꽤 오랫동안 베스트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소개에 의하면, "마흔여덟살, 이혼 후 다시 독신이 된 남자 주인공이 새 동네, 새 집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이야기. 내내 동경하던 단독주택에서의 우아한 삶, 그리고 옛 연인과의 오랜만의 해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늙은 뒤에 혼자 혹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는 한, 언젠가는 늙으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노년의 삶일까, 하는 생각. 어쨌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주인공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 할머니처럼, 우아하고 여유있게 살지는 못할 거다. 주인공의 여자친구처럼 병이 들었을 때 헌신적인 자식도 없을 거다. 그렇지만 간소하면서도 행복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때의 나는 누구와 함께 살까. 어떤 요리를 해 먹고, 어떤 책을 보고, 어떤 영화를 보게 될까. 어떤 생각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그때도 지금처럼 아주 풍요롭진 않아도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맥주 브랜드가 있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그나저나 마쓰이에 마사시의 다음 소설에도 건축 이야기가 나올까.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일 관계로 인터뷰한 노인은 무수히 많다. 소설가, 철학자, 피아노 조율사, 요리 연구가, 조각가, 양조 장인, 조산사, 성서 연구가, 외과의, 전당업자 등등. 일부를 제외하면 경험의 총량과 이야기의 재미는 비례한다. 정년을 앞둔 점잖은 남자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사락사락 내리는 눈 같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면 나 같으면 분명히 듣는다. 금세 잠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 

- 15쪽


   "이혼했다죠?"

   "네."

   나는 황급히 차를 마셨다. 달고 맛있다.

   "혼자 사는 거 쉽지 않아요."

   "네에."

   "쓸쓸하거든, 마음은 편하지만." 소노다 씨는 쿡 웃고 말을 이었다. "애니웨이, 웰컴 투 아워 킹덤 어브 소로."

- 21-22쪽


   꼭 빗나간 추론도 아니다.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하루새 쌓인 앙금이 잡념이 되어 되살아나 차츰 안개처럼 흩어진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있었던 일, 불쾌한 사건, 정산하지 못한 영수증 다발, 직원 식당의 삼색 덮밥, 오늘도 쓰지 못한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굳었던 어깨도 풀린다. 호흡이 깊어진다. 하루의 끝에 목욕을 하면 자신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고맙다. 목욕은 위대하도다.

- 76쪽


   내 입사 동기인 영원부원이 사내 결혼을 했을 때 사쿠라자키 씨가 중매인 역할을 했다. 나는 피로연 사회를 맡았다. 신랑신부의 소개 글을 읽는 사쿠라자키 씨의 손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바스락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나는 그때부터 내심 사쿠라자키 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 77쪽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청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 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가나를 우연히 만난 국숫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라고 한다) 공원을 산책하고 그 김에 동물원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거나 가나가 부탁한 장을 보거나 한다. 저녁이 되면 마음에 든 동네 주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가볍게 마시고, 가나가 집에 올 즈음에는 직접 물을 받아 목욕하고 NHK의 <뉴스워치 9>를 보고 나서 취침.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가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했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이라기보다 셰어하우스의 주민 같은, 어딘지 모르게 담백한 관계였다. 
- 103쪽

   아들에게도 언젠가 배우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제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호감 가는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 뒤 식사에 초대하고, 두 사람의 개인사며 취향,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맞춰보고, 메일 등등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전할 생각을 하면 다소 귀찮다. 타인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자신도 별로 없다.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 120쪽



  1. 2018.04.12 16:3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4.21 12:51 신고 BlogIcon GoldSoul

      그렇죠? 40대의 연애에 관한 부분은 정말. 그런데 저 동상이몽 프로를 가끔 보는데, 최근의 노사연 부부를 보니 나이에 무관하게 인간이란 언제나 사랑받고 싶고, 확인받고 싶고, 사랑 앞에서 여리디 여린 존재란 생각을 했더랬어요. 30대가 그 전보다 성숙하고 여유롭고 너그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경험해보니, 작가가 표현한 40대 후반의 연애도 그렇게 소설적인 게 아닐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해 보았어요. 헤헤
      겨울나그네님의 말씀대로 마음이 맞는 벤치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 목이 따끔할 정도로 시원한 맥주!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거 꿈꿔 보아요. :)

잘 먹고 갑니다

from 서재를쌓다 2018.04.02 22:47



    '잘'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해 수술을 하면서 알았다. 수술을 하기 전에 몸을 가볍게 한다고 덜 먹고, 하기 직전에 몸 속의 것들을 모두 빼내고 금식을 하고, 입원을 하면서 먹은 푸짐하고 건강했던 세끼 병원밥, 수술 후에 시간을 들여 챙겨먹은 단백질과 채소와 과일들, 그리고 한동안의 금주, 쉴새 없이 마셔댔던 물과 차. 지금 또 다른 의미로 '잘' 먹고 있으면서 그때 내가 얼마나 건강하고 가벼웠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조금씩 그날들로 돌아가려고 걷고, 건강한 저녁을 가볍게 챙겨먹었다. 


   <잘 먹고 갑니다>는 병규가 정한 시옷의 책인데, 모임이 미뤄지고 늦어진 탓에 한겨울에 읽었던 책을 저번주에서야 모임을 가졌다. (손꼽아 기다렸지만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나 ㅠ) 병규가 이 책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수술과 입원의 날들이 없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거다. 병원에서의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밥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커다란지 책에 나오는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다행이 내가 있었던 병원은 책 속 병원 만큼은 아니지만 밥에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이 개별적으로 원하는, 추억이 담긴 음식을 주문하는 '요청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환자들은 이 특별한 요청식을 입으로 먹기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꼭꼭 씹어먹으며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한다. 슬프기도 했지만 따스했다. 따뜻한 밥 한 끼,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식사들. 



   잡지 편집자 시절, 복잡한 시가지의 정취나 지친 마음을 달래는 요리처럼 '바쁜 일상을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 선배가 있었다. 업무상 직속 선배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가끔 나를 데리고 나가 유쾌하게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 선배는 언제나 그런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나비넥타이로 멋을 낸 차림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늘 과도하리만치 서비스 정신과 위트가 넘쳤다. 

- 6쪽


   "맛있다. 맛있어. 고마워."

   선배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다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중에 천천히 즐기고 싶다며 보온병을 자기 곁에 소중하게 놓아두었다. 선배는 양식점 '알래스카'의 콩소메 스프가 어떤 노력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지는지부터 시작해서 풋내기 시절 주방에서 혼났던 이야기, 젊을 때 '진국'이라 불리는 사람과 물건과 요리를 만나는 일이 앞으로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건강했을 때와 비슷한 성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훌륭한 어조였다.

- 9-10쪽


   건조시킨 잔새우를 물에 담가두면 좋은 육수가 되지. 소면 국물은 그거랑 표고버섯으로 육수를 내는 거야. 주변 사람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국물은 항상 많이 만들었어. 한번은 조카 집에 그 집 시어머니가 오시게 되었는데 밥은 무얼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더라고. 마침 여름이라 소면이 좋다고 했지. 국물을 만들어서 커다란 병에 넣은 다음 톳도 삶아서 함께 내라면서. 톳을 싫어하는 노인은 없잖아. 그 다음은 구운 연어의 살을 발라서 갓 지은 밥에 섞은 연어 밥을 권했지. 그 위에 구워서 잘게 자른 달걀지단하고 김 가루를 뿌리면 충분히 맛있어 보이거든. 

- 52-53쪽


   내 성격이 시원시원하다고? 그건 말이지. 젠체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좋은 건 좋은 대로 싫은 건 싫은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서 그런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 56쪽


... 환자는 식사를 입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해요. 그 마음에 다가서는 일이 중요하지요."

- 61쪽


... 먹을 수 있으면 기분이 차분해지고 자연히 몸도 좋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병문안을 온 사람이 안색이 좋다고 말해줬어요.

- 73쪽


히로오 씨 : 때마침 중국 쑤저우 투어에 참가했었는데 아주 즐거웠어요. 투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부부로 참가했던 유치원 선생님이 "이렇게 같이 와서 즐거웠으니 앞으로 또 함께 가요"라며 모두의 연락처를 수첩에 적었어요. 집에 돌아온 다음 날에 벌써 엽서가 도착했더군요. 그 이후 20년 동안 알고 지냈어요. 

아사코 씨 : 그중에 의사분이 계셨는데 12월 28일까지는 병원 문을 열고 싶다고 하셔서, 매년 29일부터 1월 5일까지 6일 동안만 여행을 다녔어요. 캐나다, 하와이, 발리 섬, 대만... 매년 같은 멤버로요. 스위스가 참 좋았어요. 하와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히로오 씨 : 그랬구먼. 허허.

아사코 씨 : 모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잘 맞아서 서로 집도 오가고 밖에서 식사 모임도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서로의 영역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여행을 거듭하면 공통 추억이 생기잖아요. 예전에 저 사람이 바다에서 배가 거꾸로 뒤집혀서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어요. 호호. 항상 그런 일이 화제의 중심이라 모임이 오래 지속되었는지도 몰라요. 

- 108-110쪽


    호스피스 의료 종사자도 아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당사자도, 그 가족도 아닌 내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자문하면서 환자의 곁에 왕래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말을 문자로 남기는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맺음말을 쓰면서 '여기에 마지막까지 살아갔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 그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197-198쪽






밤의 발코니

from 서재를쌓다 2018.03.29 21:24



    추운 날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전날만 해도 따뜻했는데, 약속한 날에 칼바람이 불어댔다. 보경이는 수요미식회에 나온 적이 있는 곳이라며 근사한 레스토랑 분위기의 밥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들깨가 들어간 국물과 아삭아삭 채소가 들어간 비빔밥을 먹었다. 실내는 빛이 들어오질 않아 어두웠다. 너무 추워 멀리 못가고, 근처 커피집에 들어가 따뜻한 라떼를 한 잔씩 마셨다. 달달한 케잌은 거의 남겼다. 커피집에서 보경이가 말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쓴 문장을 봤는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고. 사서 매일 조금씩 읽었다고. 작가 소개가 있긴 했는데,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언니가 좋아할 지 모르겠다. 언니는 멋낸 문장 안 좋아하잖아. 


   처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읽어내진 못했다. 처음에 무척 좋았거든. 보경이가 말한, 언니가 싫어할 멋낸 문장이 뭔지 알겠더라. 나는 담백한 힘을 믿는 편이다. 심플하고 담백한 것이 더 묵직한 감흥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그게 이야기일 수도 있고, 문장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이 책에는 내가 모르는 이국의 언어와 이국의 지명들이 잔뜩 나온다. 어떤 행동을, 어떤 기분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내게 곧장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빙빙 에둘러 느리게 온다. 좋아하는 담백함이 아니지만, 나쁘지 않더라. 어떤 문장들은 무척 좋았다. 그 문장을 품고 바로 잠들고 싶을 정도로. 


   어떤 문장은 시 같고, 어떤 문장은 소설 같고, 어떤 문장은 꿈 같았다. 버섯으로 국물을 낸, 뼈를 일일이 발라내야해서 손이 많이 가는 우럭미역국은 꼭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만들어서 좋은 사람과 나눠 먹고 싶다. 그 미역국을 먹을 때 생각날 거다. 함께 걸었던 광화문 칼바람 길, 어두웠던 실내에서의 들깨국, 문이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지 않던 커피집, 나란히 탔던 택시, 연남동의 값비싼 초콜릿 가게도. 그 날 보경이는 초콜릿 가게에서 계피를 넣고 함께 끓일 수 있게 포장된 초콜릿 가루를 선물해줬는데, 집에서 끓여보니 무척 진했다. 걸쭉했다. 따뜻했다. 이렇게 겨울, 밤도 간다. 


  

   가쓰오부시를 우려낸 다시 국물에 배춧잎과 삼겹살을 한 입 크기로 썰어 냄비에 담는다. 흙으로 빚은 전골냄비 속 고기와 채소들이 익어가면 거품 쌓은 맥주 한 모금. 레몬즙과 겨자가 중심이 되는 소스를 취향대로 만든 우리는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채소를 산뜻한 소스에 적셔 입에 넣는다. 달이 어디 있지, 하며 마주 앉아 먹던 나베의 맛.

- 14쪽


   모든 것이 처음인 것 같은 아침에, 우리는 작은 탁자에 마주 앉아 아침을 먹었다. 빵과 버터, 반으로 자른른 자몽과 꿀, 크루아상과 마멀레이드와 커피포트를 테이블에 늘어 놓았다. 나는 파란색 팬티를 입고 커피를 새로 만들어 꿀과 버터를 빵에 바른다. 크루아상은 아침의 빵이고, 우리는 아침을 사랑하고, 아침의 섹스는 꿈 같다. 쿤스트카머, 이상한 사물들의 나라, 그 무질서한 세계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붕들과 레이스 팬티를 사랑했다. 

- 19쪽


... 바깥은 어둠이 짙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려 맥주를 마시고 또 마시는 것은 창문을 뒤흔들며 마음을 헝클어뜨리고 마는 거센 바람 때문이다. 

- 22쪽


Recipe_5 시래기국

Procedure_시래기(마른 무청)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물에 불린다. 불린 시래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다음 된장, 다진 마늘, 들기름으로 버무린다. 끓는 물에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국물 맛을 낸다. 다시마는 살짝 끓이다가 건져낸다. 멸치육수가 우러나면 멸치를 건져내고 된장을 풀어 양념한 시래기를 넣어 중불, 약불에서 뭉근하게 끓여낸다. 콩가루를 뿌려서 밥 말아 먹으면 배 속이 따뜻해진다. 

- 24쪽


...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지난 것들 사이에 너와 내가 고여 있다. 

- 32쪽


... 섬은 아름답지만 견뎌야 하는 곳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견딜 수 있는 일상의 순간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내게 그것이 오전 열한 시경, 마당에 널린 바삭하게 마른 하얀 이불의 냄새였다면 H에게는 아침의 해장국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알 것 같다. 자고 가, 잠깐만 자고 가, 라고 말하던 그 순간은 나는 외로워, 그리고 너의 외로움을 이해해, 라는 말이었음을. 마루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잠드는 밤이면 보이지 않는 외로움 세 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손을 꼭 잡은 세 마리 수달이었다. 

- 46-47쪽


... 어느 날 당신이 버려진 정원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모과나무 식탁에서의 저녁이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밤이면 당신에게 비밀의 해변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싶다. 그런 밤이면 지나간 아름다운 날들처럼 밤하늘 가득 별들이 빛났으면 한다. 

- 56쪽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인데도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두 시간 내내 굳은 표정으로 운전대만 잡고 있는 남자친구 때문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는 시무룩하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 바다에 도착한 우리는 키스하고 해변을 걷고 새우를 굽고 소주를 마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그날 밤 처음 차를 몰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난폭하게 커브를 도는, 브라우니 냄새가 희미하게 시트에 밴 자동차를 타고 낮과 밤의 드라이브를 즐겼다. 나는 그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자주 잠들곤 했는데 세상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하던 내게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조수석은 세상의 경계를 향해 달려 가는 의자였다. 그때 그는 내가 지구에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67쪽


... 어부들은 아귀찜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쌉싸래한 미더덕이 입안에서 탁, 터질 때 술잔을 들었다. 

- 71-71쪽


... 어부들이 상온의 소주를 즐기는 이유는 아마도 찬 술이 바다의 풍미를 덮기 때문인 것 같다. 술의 온도를 바다와 같은 온도로 마시는 것이다. 

- 74쪽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 두 고양이 모두 여기 없다. 이제 나는 쉽게 이름 지어주지 않고 쉽게 잊는다.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간다. 나는 세상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들고양이처럼, 기울어진 지구 끝에서 살그머니 움직인다. 

- 116쪽


Recipe_우럭 미역국

Ingredients_말린 미역, 우럭, 버섯, 마늘

Procedure_미역국에 참기름을 넣지 않고 버섯만 끓여보았더니 깨끗하고 깊은 맛이 났다. 이 국 요리는 한때 머물던 깊은 숲에서 배운 것이었다. 가시를 발라내야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생선미역국은 나를 위해 끓여본 적은 없는 국이다. 손질한 우럭을 냄비에 넣고 뭉근히 끓인다. 불을 줄이고 생선을 건져 손으로 가시와 살을 발라낸다. 불린 미역과 다진 마늘, 우럭살을 넣고 끓이다가 소금, 국간장으로 간한다. 

-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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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겨 쓰면서 생각이 났는데, 이 책의 '나'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다. 한 독자는 이 책을 와인을 마시면서 읽었다고 했다. 그 평을 읽고 나서야 와인과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바닷가가 있는 숙소의 마당에서, 오래된 결이 느껴지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얇은 책 귀퉁이에 아침의 일기를 쓰는 상상을 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