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277건

  1.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2) 2018.01.04
  2.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4) 2018.01.03
  3. 20킬로그램의 삶 2017.12.29
  4. 애도일기 (2) 2017.11.29
  5. 힘빼기의 기술 (2) 2017.11.28



    집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창문을 연다. 현관을 연다. 그러면 바람의 움직임이 생긴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살랑살랑 가늘게, 어떨 때는 두껍게, 가끔은 몰래, 또는 세차게 다양한 바람이 지나간다. 거기 어디쯤 장소를 정해서 가늘게 자른 무, 푸른 잎, 배를 가른 생선, 작은 베리류, 고깃덩어리 등등 생각나는 대로 뭐든지 말린다. 요즘은 배추꼬랑이에 푹 빠져 있다. 채에 펼쳐서 며칠 동안 말린 다음 그것을 잘게 채 쳐서 된장국에 넣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 43-45쪽


    어른들의 여름이라면 역시 아이스케키가 아니라 하이볼이다.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긴자의 바 '록피시'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바텐더인 마구치 씨가 직접 만든 하이볼이야 당연히 끝내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나는 이 바의 메뉴를 읽는 것이 너무나 좋다. 지나치게 간결하다 싶을 정도로 한 줄 또 한 줄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걸 보면 상상력이 샘솟고, 마치 깊은 맛이 나는 장편소설처럼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 59쪽


   식은밥은 그런 것이다. 차갑게 식어버려서 밥솥에서 굴러다닌 밥. 금방 지은 그때의 따끈따끈함도 광택도 완전히 사라져서 딱딱하게 뭉쳐져 있다.

   그것을 그릇에 담는다. 약간의 조림이나 절임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훌륭한 반찬은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꾼이 될 뿐이다. 식은 채로 그릇에 담아 체온을 전달하듯 들고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여서 입으로 운반한다.

   그때 깨달았다.

   어느 늦은 오후, 혼자서 식은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밥맛이 좀 달랐다. 금방 지은 뜨거운 밥과는 맛이 전혀 달랐지만, 그전까지는 몰랐던 맛, 여태껏 깨닫지 못했던 맛있는 맛이 찬밥에서 느껴졌다.

    밥은 식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저금이 줄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고마움을 알 듯. 무겁고 차가운 밥에는 씹으면 씹을수록 올라오는 듬직한 단맛이 난다. 점성이 좋고 아밀로오스가 낮은 것이 특징인 쌀이 식은밥에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이건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밥이 식으면 쌀알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정체를 드러낸다.

- 76-77쪽


   설거지를 한 후에 늘 하듯이 수건으로 깔끔하게 닦는다. 힘을 약간만 더 줘 열심히 닦는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주문을 외우면서.

   "빨리 자라라."

   그렇게 3년, 4년... 세월이 지난 후의 어느 날 아침, 평상시처럼 천으로 닦는데 손가락 끝에 갑자기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미끄르르, 주르르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감각에 나는 별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그릇으로 시선을 던졌다.

   "앗!"

   숨이 멎을 뻔했다.

   밤나무 결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밤나무의 연륜이! 빛나는 흑색 옻칠 속에서 나뭇결에 조각되어 있던 아름다운 모양이 청명한 아침 공기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 124쪽


    제일 처음에 사용한 것은 겨울에 귤 목욕을 할 때였다. 바짝 말린 귤 껍질을 주머니로 된 무명천으로 싼 뒤 욕조에 띄운다. 그러면 흰색 무명천 주머니에 공기가 들어가서 뜨거운 물 위에 두둥실 뜬다. 뜨거운 물에 감도는 귤 향기, 정말 기분이 좋다.

- 207쪽


   그러나 고생도 인내도 다 갚아주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철 주전자는 준비하고 있었다. 끓인 물을 먹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달콤하다. 달콤한 이슬이 혀 위에서 데구르르 굴러가는 듯 부드럽고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촉감이다. 물이 이렇게 맛있다니,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철 주전자를 사용하고 나서부터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을 석 잔이나 마신다. 느긋하게 철 주전자로 끓인 물을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몸이 기뻐한다. 물론 센차도 호지차도 메밀차도 보리차도 훨씬 맛이 좋아졌다.

- 226쪽


   "주방에서 사용하는 행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답니다."

  아까워하지 않고 마구 사용한다. 많으면 그만큼 쉴 수도 있으니까 덜 닳는다. 다시 말해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뜨거운 냄비를 잡을 때 쓰기도 하고, 냄비 받침의 대용으로 쓰기도 하고, 갓 구운 빵을 싸기도 하고, 주방에서 사용할 만한 곳에는 눈치 볼 것도 없이 막 사용한다.

   30장이나 되는 리넨은 출신이 참 다양하다. 다국적이다. 아일랜드를 필두로 벨기에, 핀란드,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등. 각각 미묘하게 분위기도 다르고 짜임새도 다르다.

- 232쪽


   어둠을 되돌리고 싶다. 어둠 속에 봉인되어 버린 비밀스런 숨결을 일상 속으로 다시 가져오고 싶다. 촛불의 불빛을 고집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친숙한 어둠의 기억을 더듬는다. 저녁 하늘에 쏘아 올리는 불꽃, 반딧불의 불빛, 은하수, 축제의 초롱, 등롱, 모기향 끝의 빨간 불꽃...

   모두 여름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여름의 어둠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다. 거기에 촛불이 함께한다면 달콤한 허무함이 깃든다. 그것은 흐릿한 겨울 촛불의 무게와는 또 다르다.

   전등을 하나 끄자. 그 대신 빛을 하나 더하자. 몸을 숨기고 있던 어둠 속 이야기가 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 285쪽


    선물은 가끔 귀찮다. "어머, 고마워." 하고 순수하게 기뻐하고 싶은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휩싸인다. 종이 가방 채로 건네지는 것보다 풀기 쉬운 보자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과자가 훨씬 고맙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보자기에 싸기만 한다고 다 좋다는 건 아니다. 싸고 비싸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건 상관없다.

- 289-291쪽


   무게감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지만,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은 되어 보고 싶다.

- 324쪽


*


   두번째, 아니 두번째 반반의 히라마츠 요코 책이다. (이전의 한 권은 읽다가 중단한 상태) 병원에 있을 때 읽었는데, 그때는 첫 책보다 심심하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옮겨 적다보니 역시 좋았네. 아침에 일어나 맑은 물을 세 잔 연거푸 마시고 싶어지고, 여행지에서 행주로 쓸 린넨을 하나씩 사오고 싶어지네. 시원한 바람이 불 초여름이 기다려진다. 좋아하는 이에게 줄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선물 포장을 상상해본다. 어제 불광의 북카페에서 산 옥빛의 작은 빈티지 접시를 잘 써야지 생각했고, 내일부터 먹는 귤은 껍질을 잘 말려 보아야지 생각했다. 욕조가 있는 숙소로 여행을 갈 때에 무명천이랑 같이 가져가야겠다. 입맛이 없을 때 (사실 그런 날은 없다) 식은 밥에 미지근한 물을 말아 먹어봐야지. 그러려면 좋아하는 낙지젓을 사두는 게 좋겠다. 올 여름에는 시원하고 진한 하이볼을 간단하지만 좋은 안주를 두고 마셔야지. 좋은 사람이 함께이면 좋겠다.




  1. 2018.01.05 15:1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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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을 하지 않고, 점심 전에 충무로에 가는 일정이 있는 아침. 새벽에 일어났는데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아 목감기가 오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동생이 구워준 부침개와 두부와 우유를 넣고 갈아만든 콩물을 아침으로 먹었다. 보이차는 다 떨어져 어젯밤에 티백과 찻잎을 함께 주문했다. 이불을 개고, 바닥의 먼지를 돌돌이 테이프로 훔치고, 간밤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게 얇은 이불을 덮어뒀다. 이제 씻어야 하는데 영 귀찮네. 친구가 오늘도 많이 추우니 따뜻하게 입고 다녀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줬다. 책장 앞에서 새해 첫 책을 신중하게 고르고, 작년에 읽은 책 한 권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겨울나그네님이 추천해 주신 이병우의 음악과 어제 나온 우효의 새 노래를 가만히 듣는 아침이다.


-


   어떤 사람들에겐 가게를 연 목적이 돈을 되도록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가게의 몸집을 크게 키우는 것도 아니다. 많은 손님이 들이닥치면 오히려 곤란하다. 호리베 씨는 사람이 많이 몰리다 보면 주인이 원치 않은 유형의 사람들도 와버리고 일도 번잡해져, 자신이 바라던 서점의 모습을 잃을까 봐 우려했다. 그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와서 화제의 베스트셀러나 신간을 사가는 그런 서점을 차릴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지나다 우연히 들르는 손님보다 이 서점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일부러 찾아와주는 손님을 편애하기로 했다. 그런 손님들이 이곳에서 호리베 씨의 엄선된 책 큐레이션을 통해 자신에게 딱 맞는 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 39쪽


'도구라는 것은 소중히 다루면 언제까지라도 생명을 가진다'고 강조하며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건을 대하는 올바른 마음을 전하는 아리쓰구. '수리할 수 있는 물건만을 만드는 것이 장인'이라며 수십 년 전에 만든 상품이라도 완벽하게 수리해내는 솜씨를 발휘한다.

   "새것이 좋다거나 오래된 것이 좋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겁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항상 더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 52쪽


   알기 쉽게 A to Z 식으로 배열하지도 않았다. 신간 위주의 책을 다루는 일반적인 서점도 아니었다. 선풍적인 화제와 인기를 모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힘들게 입고했는데 정작 이 서점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팔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점원들은 확신을 가졌다. 이미 검증된 베스트셀러가 아닌 우리가 '이거야'라고 확신하는 책을 차근차근 팔아나가자고, 우리 나름의 스테디셀러를 만들어나가자고 말이다. 남들이 다 유행처럼 사 가는 책보다는 흥미로운 관점과 콘셉트가 있는 책, 표지 디자인이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책, 현재 유통되지 않고 출판사 창고에 처박혀 있는 보물 같은 책들을 발굴해서 다시 한 번 주목받게 하는 것이 게이분샤 이치조지점의 존재 의의였다. 가치 있는 중고책과 교토에서 만들어진 독립 출판 서적들도 선별해서 손님들에게 선보였다. 점원들은 손글씨로 책 소개 문구를 직접 써서 모든 책 안에 정성스럽게 집어넣었다. 마음을 담아 추천했기에 문구들은 설득력이 있었다.

- 70-71쪽


   규모가 작아도, 겉보기엔 색이 연해도, 테두리가 고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가가면 사색을 하게 만드는 존재.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로서도 기쁠 것이다.

   길이는 총 31킬로미터나 되지만 폭은 좁아 중간중간에 징검다리를 심어놓은 가모강. 서울의 한강처럼 크지도 않고, 파리의 세느강처럼 밋밋하지도 않다. 자연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굴곡을 가지며 들풀과 들꽃들이 제멋대로 피어 있고, 인공적인 조형물이나 시설 없이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유지해왔다. 빼곡히 심어진 나무들 덕분에 사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장소다. 그 아담하지만 명료한 존재감에서 내가 쓰고 싶은 이상적인 글의 모습을 본다.

- 99쪽


    각 도시에 디앤디파트먼트 상점을 전개하는 방식에도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예로, 상점 위치를 정할 때는 인근 전철역에서 도보로 최소 20분 정도 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일반 상인들은 기피하는 장소를 선택했다. 일부러 찾아가기 불편한 장소에 있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은 손님들에게 의자가 있다면 어떻게든 찾아와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122쪽


오히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실패해도 괜찮다는 응원이었다.

- 130쪽


   나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숙소다. 여행지의 숙소는 단순히 낮에 구경을 다니다가 밤에 몸을 쉬게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내게는 숙소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고급스러움이 기준이 아니라 숙소 고유의 개성과 매력을 고려하게 된다.

- 139쪽


    교토 사람들에게는 돈보다는 가치관이나 살아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극적이고 화려한 생활보다는 심플하고 온화한 삶의 방식을 지지한다. 교토에서는 수억 연봉도, 고급 외제 차도, 명품 브랜드도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교토라는 환경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하기에 나답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좋아하는 일을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나에게 깊은 충만감을 줄 수 있는지, 반면 무엇이 필요 없고 의미 없는지를 자연스럽게 깨달아간다. 그것이 '진짜'의 인생이니까.

- 177쪽


   공동체의 일부로서 지척에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절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 내킬 때 언제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음을 뜻할 것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이나 고민을 덜고 싶을 때,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싶을 때,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읽기 위해, 혹은 단순히 '혼자'로 돌아가기 위해 교토의 절은 항상 시민들에게 열려 있다. 내가 원하면 그 절을 관장하는 스님들에게 부담 없이 인생 상담을 하거나 지혜의 언어를 구할 수가 있다. 그것 때문에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참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참배할 때마다 기부를 할 필요는 없다. 강압적인 대가나 의무를 일절 부과하지 않는 점이 그들의 미덕이다.

   "즐거울 때는 종교가 필요 없으니 찾아오지 않으셔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아요. 이곳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면 오히려 다행인 것이죠."

   스님의 자비로운 말씀이 인상에 남는다.

- 225쪽


-


   충무로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광에서 따뜻한 영화 한 편을 봐야지. 뜨끈뜨끈한 순대국도 한 그릇 먹고, 집에 올 때는 귤을 한 봉지 사와야지. 커피집에서 새해 첫 책 읽으면서 커피도 한 잔하고.



 

  1. 2018.01.05 09:5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1.09 20:51 신고 BlogIcon GoldSoul

      비교적 가까운 곳이니 언제고 가시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아요.
      읽으신 책들, 제목들은 많이 들었는데 읽어보질 못했어요. 제게 추천할 책이 있을까요?
      <초초난난>은 검색해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먼저 읽어보시고 얘기해주세요.
      음악은 마침 집에 혼자 있었던 오전이라. 흐흐- 잔잔하니 좋았다니 후기 전합니다. :)

  2. 2018.01.11 09:2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1.16 20:52 신고 BlogIcon GoldSoul

      저는 나미야잡화점도 못 읽어봤어요. 실제로 있는 가게들이라니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저는 이번 주말에 광화문 약속이 있었던 탓에 간만에 교보에 가게 됐는데, 문구코너에서 엄청 열심히 구경했어요. 결국 산 거는 홍학이 그려진 마스킹 테이프 하나지만요. 헤헤- 시라노는 비슷한 소재의 한국 영화를 봤는데, 외국 영화 말씀 하시는 거죠? 한국영화가 리메이크를 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오, <최악> 적어둘게요. 심란할 때,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
      자세하고도 다정한 추천 감사드려요. 저도 많이 읽어 보답하겠어요. 헤헤-
      미세먼지가 심한데, 출퇴근 잘 하고 계시죠? 따뜻한 물 많이 드시고, 감기 조심하셔요. :)

20킬로그램의 삶

from 서재를쌓다 2017.12.29 00:22



   요즘에는 집에 오면 물부터 끓인다. 최근 우리집에서 제일 열일하는 전기포트. 가을에 사둔 보이차가 바닥을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 모양의 옥색 다기에 꽁꽁 뭉쳐진 보이찻잎을 넣고 뜨끈한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재빨리 따라 버리라던데, 적합한 시기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따라 버리고, 어떤 날은 찻잎에 묻은 먼지 따위, 하면서 그대로 우려 마신다. 우려내는 찻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면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늘치의 물을 마셨다고.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가벼운 것이 들어가고 가벼운 것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다. 다만 차의 카페인 때문인지 10시에 잠들었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막내는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남자아이가 벌써 두번이나 근사한 꽃을 선물해줬다. 첫번째 꽃다발은 내가 물컵에 담아줬다. 아끼는 녹색컵에 물을 담고 꽃다발을 포장했던 포장지가 아까워 그대로 둘둘 말아 리본을 묶어줬다. 컵의 물을 몇번 갈아주고 시들시들해지는 것 같아 그대로 두었는데, 물이 마르고, 꽃들도 마르면서 그대로 근사한 드라이 플라워가 되었다. 오늘밤에 또 근사한 생일 꽃다발을 받아왔더라. 잘 마른 꽃은 리본으로 묶어 벽에 걸어뒀다. 새 꽃은 새로운 포장지를 컵에 두르고 물을 가득 담아 꽂아뒀다. 꽃들은 투명한 테이프와 노란 고무줄로 군데군데 꽁꽁 감겨 있었는데, 가위로 재빨리 잘라 주었다. 줄기들이 아, 이제 살 것 같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요즘 피천득 수필을 읽고 있어서. 하하)


   그러니까 이 밤 결론은, 오늘치의 물을 마시고 과다 카페인 섭취로 잠이 오지 않으니 지난주에 읽은 구절들을 옮겨둔다는 것.


-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가방을 들어 올리던 손의 감각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외국에선 방 하나가 나의 '집'이라 쉬웠는데,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에 사는 지금은 쉽지 않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라 온전히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침실만큼은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꾸리고 있다. 매트리스, 스탠드, 피아노, 기타 외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작은 집'을 꾸릴 연습을 해나간다. 언젠가 가진 옷도 거의 다 버리고 싶다. 계절별로 세 벌 정도씩만 있으면 좋겠고, 신발도 몇 켤레 없길 바란다. 몇 안 되는 가구나 물건을 아끼며 오래 쓰고 싶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가난하게 살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 오래 좋아할 수 있는 것엔 그에 대한 값을 지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손이 두툼한 목수가 만든 나무 책상과 의자, 오래 누워도 허리가 편한 침대, 수십 년을 입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옷...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머지않은 내일엔 그런 것만 남기고 싶다.

   이런 걸 얘기하자면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다기보다는 꿈이라서 그렇다. 걷거나 자면서 꾸는 꿈이라, 상상하며 히죽거리면 한도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 12-13쪽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 피천득, '인연' 중에서

- 14쪽


추위를 잊고 비행기를 구경한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다. 길로 보이는 곳을 따라 걷고 걸어 겨우 도로를 찾았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먼 거리로 돌아온 뒤에야 깨달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길을 돌아오면서 본 것들이 있었기에.

- 26쪽


   단잠을 깨운 것은 알람 소리가 아니라 빛이었다. 창호지를 뚫고 은은한 빛이 들어왔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누워서 그 빛을 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매일 듣는 익숙한 알람 소리가 울렸고, 친구는 "출근하자!"라고 외쳤다.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했고 친구는 지하철, 나는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어제의 시간을 되짚으며 웃다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밥도 잘 먹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잠도 잘 잤지만, 무엇인가 빠져있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어김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 38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최신판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예상했지만 새로 나온 책은 모두 대출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대기자 예약을 해놓으려다, 1988년에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하게 되었다. 빈손으로 들어가기 아쉬워 청구기호를 손등에 옮겨 적었다. '813.32촌51' 책은 더러웠다.

- 61쪽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아이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엔 그런 관계도 있는 거겠지. 둘밖에 없는 것처럼 한때를 보냈지만, 결코 다시 볼 수는 없는 사이. 가끔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꼭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 115쪽


   아까워서 잠시 주저했었는데 공항에 도착해 떨리는 것을 보니 그 돈을 주고 살 만한 설렘이었다. 여행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내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기내식, 먹어볼 수 있겠지?"였다. "아마 두 번은 먹을걸?"이라는 답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친구는 능숙한 솜씨로 승무원에게 안대, 담요, 수면 양말을 부탁했다. 비닐에 곱게 쌓인 것이 친구에게 건네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주세요..."라고 소심하게 말했다. 친구는 밥이 와도 깨우지 말라며 잠에 빠졌고, 나는 혼자 열네 시간짜리 여행에 빠져들었다. 담요를 꺼내 무릎에 얹어놓고 책을 꺼냈다. 흥분되어 책이 읽히지 않았다. '촌스럽게 처음 비행기 타는 티 내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다짐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티가 나도 여러 번 났을 거다. 몇 번씩 두리번거리며 화장실을 오갔고, 의자에 달린 리모컨을 누르며 나도 모르게 "와." 라는 소리를 냈다. 기내식 사진을 찍는다고 플래시를 여러 번 터뜨리기도 했다. 열네 시간을 지루한 줄 모르고 보냈다. 수첩을 꺼내 항공권값을 시급으로 나눠보며 '그렇게 일해서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 감상을 일기장에 끄적거렸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우리 앨런 영화 두 편을 보며 여행을 기다렸다.

- 119-121쪽


미리 준비하지 않아 가고 싶은 곳에 못 가도 낙담하지 않고 카페나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천천히 걷고 어딘가에 앉아 낯선 것을 보는 정도로 만족하는 어설픈 여행자.

- 138쪽


   여행 다닐 땐, 똑딱이 카메라 두 대를 갖고 간다. 하나는 필름카메라고 다른 것은 디지털카메라다. 여행을 다녀와 사진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내가 어떻게 사진을 찍는지 엄마는 본 적이 없다. 여느 여행과 다름없이 천천히 걷다가, 바라보다가, 멍하게 있다가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옆을 보면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영 낯선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잠들기 전, 엄마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말없이 사진을 보다가 "카메라를 하나 살까?"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작년 언젠가도 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좋은 생각이 났다. "엄마, 이번 여행 동안 디지털카메라를 빌려줄게. 여기에 엄마가 본 걸 담아. 돌아가면 몽골 여행으로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그때 엄마 사진을 실을게." 그 후, 엄마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내가 찍은 것 좀 봐봐. 잡지에 실릴 만한 것 같아? 괜찮아?"라고 자꾸 묻기에 "걱정하지 마, 못 나와도 책임지고 엄마 사진은 꼭 실을게."라고 놀리듯 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가 잘 때 몰래 훔쳐본 카메라 속의 사진은 아름다웠다.

- 154-155쪽


지난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려고 애쓰지만, 혼자 가만히 생각하면 뼈 안쪽이 저릿하다.

- 158쪽




애도일기

from 서재를쌓다 2017.11.29 22:48






    한나는 롤랑 바르트의 일을 겪었다고 했다. 몇달 만에 나타나 그동안 별일이 없었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말했다. 나는 힘들었겠다, 말했다. 눈가가 촉촉해진 한나가 이제 괜찮다고 했다. 십일월의 시옷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십일월 시옷의 모임에, 우리는 셋이서 만났다가, 잠시 넷이 되었다가, 다시 셋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넷이 되었다. 셋일 때 책 이야기를 했는데, 둘이 하진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읽으면서 궁금했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책이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나는 반쯤 읽었다고 했는데, 끝까지 롤랑 바르트가 이런 마음이냐고 물었다. 나는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해설에 있던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해줬다. "1980년 2월 25일 바르트는 작은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심리적으로 치료를 거부했다. (...) 한 달 뒤인 3월 26일 바르트는 사망했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에 겨워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써내려간 작은 일기들이다. 1977년과 1979년의 기록들이다. 모임이 있기 전,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봄이와 소윤이는 읽고 있는데 너무 우울하다고 말했다. 한나는 자신의 경우, 힘들었지만 추스릴 수 있었다고 했다. 더 잘 살아나가야지 생각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그의 절망에 나도 생각했더랬다. 얼마나 사랑이 깊으면 이럴까. 왜 그는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는가. 기석이가 롤랑 바르트를 좋아했던 것 같아, 망원의 제주도 음식점 오라방에서 제주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홍대로 옮겨 기석이를 만났고, 이야기해줬다. 롤랑 바르트에 대해. 그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엄마에 대한 사랑이 얼만큼 깊었는지. 홍대 지하의 소굴에서 무알콜 칵테일을 마시며 그 이야기를 듣는데,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가 마주한 세상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떠했을지. 어쩌면 어머니 만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 그날 넷이 된 우리는 다시 셋이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그러했듯,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결국 하나가 되었다. 


-

   이건 이 책을 읽으라 하고, 멀리 가버린 하진이가 궁금해한 나의 포스트잇들.


 10. 29

애도의 한도에 대하여.

(라루스 백과사전, 메멘토) :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18개월이 넘으면 안된다.

- 29쪽


10. 31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 33쪽


11. 1

   기분이 즐거워진 "방심" 상태들이 있다. 물론 정신은 여전히 말짱하지만. 그럴 때 나는 얘기를 하고, 어느 때는 농담도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감정 상태에 빠진다. 눈물 흘리고 말 정도로.

- 39쪽


11. 4

   오후 여섯 시경 : 집 안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밝고, 깨끗하다.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서 나는 집 안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즐긴다). 이제부터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는 나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다.

- 46쪽


11. 11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 쯤에 돌아오겠노라고, 또는 (전화로) 지금 집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 54쪽


11. 30

   애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그건 너무 정신분석학적이다.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

- 83쪽


1978. 1. 22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 101쪽


1978. 5. 6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 <세멜레>(Semele, 3악장)를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 마망이 말하던 단어("나의 롤랑, 나의 롤랑")

- 130쪽


1978. 5. 31

   내가 필요로 하는 건 홀로 있음이 아니다. 그건 (작업의) 익명성이다.

   나는 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애도 작업, 꿈 작업)을 진정한 "작업" 으로 완전히 바꾸려고 하고 있다 - 글쓰기 작업.

   그 이유는 :

  (사람들이 말하듯) 커다란 생의 위기(사랑, 애도)를 이겨내고자 하는 "작업"은 너무 급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작업은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서만, 또 글쓰기 안에서만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것이다.

- 142쪽


1978. 6. 9

   FW는 고통스러운 사랑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있다. 그는 괴로움을 당한다. 언제나 침울하고, 메말라 있고,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등등. 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 그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까 등등. 그의 곁에서, 그가 말하는 걸 귀 기울여 들으면서, 나는 침착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 주위를 기울이지만 그의 얘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마치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 같은 건 내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 146쪽


1978. 8. 18

   아직도 나는 마망과 "이야기를 한다"(현재형으로).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마음 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나는 마음속에서 그녀와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존재하는 대화다 :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나는 그녀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쓴다 : 그녀가 했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집 안을 정리하면서. 윤리의 미학이 하나가 되는 삶, 비교 불가능한 생활양식, 그것이 그녀가 일상을 보내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그런 일상의 가사들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별함"을 만날 수가 없다 - 그건 집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니까. 여행은 그래서 나를 그녀로부터 떨어져 있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녀가 곁에 없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 그녀가 바로 가장 친숙한 일상이었으므로.

- 200쪽


1978. 10. 8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 216쪽




  1. 2017.12.02 12:3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힘빼기의 기술

from 서재를쌓다 2017.11.28 22:45




    짜증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이 상황을 넘겼을까. 내가 상상하게 되는 '그 사람'은 내게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이것 따위! 하고 힘든 생각들을 냅다 내다버릴 수 있는 담대함, 무한한 긍정적 기운. 최근에 책도 읽고, 팟캐스트도 듣고 해서인지 긍정 기운을 생각하며 김하나 씨를 생각한 적도 있다. 김하나 씨는 <모든 여행의 기록>의 김민철 씨 인스타에서 처음 얼굴을 뵈었는데, 술을 마시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포즈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고, 코믹하기도 하고, 힘찼다. 긍정 기운이 그득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둥실 둥실, 두둥실. 올해의 남은 날들은 힘을 한껏 빼고 유유히 보내고 싶다.



-

두둥실, 포스트잇.


... 여행기를 펴낼 생각으로 쓴 건 아니었는데 가끔 블로그에 들어가 오랜만에 남미 여행기를 읽어보면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남미에서만, 그러니까 이구아수폭포와 파타고니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리우데자네이루가 있는 대륙에서만 가능한 글들이었다. 남미에 몸을 푹 담근 그때의 나는 이곳에서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물기 어린 사람 같다. 나조차도 이 글을 쓴 사람이 낯설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내 안에 살고 있음을 잊고 싶지 않다.

- 9쪽


   사랑은 처음에는, '빠지는' 듯 느껴진다. 어디론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나를 떠밀고 가는 것 같다. 힘든 줄도 모르겠고 그저 사랑에 몸을 내맡기면 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잘 유지하려는 서로의 노력과 기술 없이 사랑은 건강하게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끝나곤 한다. 다행인 것은 사랑이 끝나도 사랑한 경험과 넓어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나의 경우 저주와 눈물 바람, 술 취한 다음 날 통화 기록 보고 경악하기 등등 다양한 활동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한 뒤에야 그런 성숙한 감사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 53쪽


... 연대기식으로 시시콜콜 써나가는 여행기는 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날에 대해선 그렇게 해보고 싶다. 전등 스위치를 켜듯 한번에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더해져, 결국엔 또르르 넘쳐흘렀던 하루였으니까.

- 179쪽


   짧은 여행에서는 초보자인 채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장기 여행이라도 짧게 짧게 여러 곳을 다닌다면 초보자인 채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머물러보는 것은 다르다. 당신은 이 도시로 이사를 오는 것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긴장되지만, 당신은 점점 익숙해진다. 처음 운전할 땐 앞차 꽁무니만 따라가는 것도 버겁다가 점점 백미러도 보이고, 나중엔 음악도 듣고 경치도 보고 차선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만 해도 버겁지만, 차츰 그곳과 어울리는 시간대도 생각해볼 수 있고, 그곳으로 가는 다른 골목길을 탐색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맘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 '다음에 또 와야지' 라고 그곳을 기억해두게 된다. 이것은 대단한 차이다. 당신은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 207-208쪽


   해변은 고급 주택가지만 구두 신은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서 구두는 정말 답답하게 느껴진다. 다들 조리나 운동화에 펄렁한 야자수 무늬 반바지,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얇은 원피스 같은 걸 걸치든지 말든지. 웃통을 벗은 채 백팩을 멘 청년들이 버스에 올라타고, 셔츠는 언제나 단추를 서너 개 풀어헤치며, 초등학교 교복은 티셔츠다. 해변뿐 아니라 리우 시내도 그리 다를 게 없다. 이 도시는 전체적으로 이지고잉(easy-going) 그 자체. 잘 입는 것보다 잘 벗는 것이 중요하므로 몸만들기에 열심이다. 해변의 근력 기구엔 남자들이 매달려 있고 온통 달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 240쪽

 

   "고마워, 페르난두. 넌 정말 친절하구나."

   페르난두가 대답했다.

   "하나. 너를 보고도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먼 곳에 혼자 서 있어보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말이 어째 먹먹했다.

- 244쪽




  1. 2017.11.30 14:3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7.12.03 21:12 신고 BlogIcon GoldSoul

      역시 좋은 분이셨어요. 흐흐-
      읽어보셔요. 앞부분이 특히 좋아요. :)
      아, 어느새 12월이 되어버렸어요.
      우리 화이팅해요! 남은 한달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