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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0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집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창문을 연다. 현관을 연다. 그러면 바람의 움직임이 생긴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살랑살랑 가늘게, 어떨 때는 두껍게, 가끔은 몰래, 또는 세차게 다양한 바람이 지나간다. 거기 어디쯤 장소를 정해서 가늘게 자른 무, 푸른 잎, 배를 가른 생선, 작은 베리류, 고깃덩어리 등등 생각나는 대로 뭐든지 말린다. 요즘은 배추꼬랑이에 푹 빠져 있다. 채에 펼쳐서 며칠 동안 말린 다음 그것을 잘게 채 쳐서 된장국에 넣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 43-45쪽 어른들의 여름이라면 역시 아이스케키가 아니라 하이볼이다.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긴자의 바 '록피시'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바텐더인 마구치 씨가 직접 만든 하이볼이야 당연히.. 2018. 1. 4.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출근을 하지 않고, 점심 전에 충무로에 가는 일정이 있는 아침. 새벽에 일어났는데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아 목감기가 오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동생이 구워준 부침개와 두부와 우유를 넣고 갈아만든 콩물을 아침으로 먹었다. 보이차는 다 떨어져 어젯밤에 티백과 찻잎을 함께 주문했다. 이불을 개고, 바닥의 먼지를 돌돌이 테이프로 훔치고, 간밤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게 얇은 이불을 덮어뒀다. 이제 씻어야 하는데 영 귀찮네. 친구가 오늘도 많이 추우니 따뜻하게 입고 다녀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줬다. 책장 앞에서 새해 첫 책을 신중하게 고르고, 작년에 읽은 책 한 권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겨울나그네님이 추천해 주신 이병우의 음악과 어제 나온 우효의 새 노래를 가만히 듣는 아침이다. - 어떤 사람들에겐 가게를 연 목적.. 2018. 1. 3.
20킬로그램의 삶 요즘에는 집에 오면 물부터 끓인다. 최근 우리집에서 제일 열일하는 전기포트. 가을에 사둔 보이차가 바닥을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 모양의 옥색 다기에 꽁꽁 뭉쳐진 보이찻잎을 넣고 뜨끈한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재빨리 따라 버리라던데, 적합한 시기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따라 버리고, 어떤 날은 찻잎에 묻은 먼지 따위, 하면서 그대로 우려 마신다. 우려내는 찻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면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늘치의 물을 마셨다고.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가벼운 것이 들어가고 가벼운 것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다. 다만 차의 카페인 때문인지 10시에 잠들었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막내는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남자아이가 벌써 두번이.. 2017. 12. 29.
힘빼기의 기술 짜증나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떻게 이 상황을 넘겼을까. 내가 상상하게 되는 '그 사람'은 내게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이것 따위! 하고 힘든 생각들을 냅다 내다버릴 수 있는 담대함, 무한한 긍정적 기운. 최근에 책도 읽고, 팟캐스트도 듣고 해서인지 긍정 기운을 생각하며 김하나 씨를 생각한 적도 있다. 김하나 씨는 의 김민철 씨 인스타에서 처음 얼굴을 뵈었는데, 술을 마시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포즈들이 굉장히 역동적이고, 코믹하기도 하고, 힘찼다. 긍정 기운이 그득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둥실 둥실, 두둥실. 올해의 남은 날들은 힘을 .. 2017. 11. 28.
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 퇴근길에 깐밤을 만원 어치 샀다. 오천원 어치씩 포장이 되어 있어서 하나를 살까, 둘을 살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는 부족한 거 같아 두 개를 샀다. 집에 꿀도 있고, 우유도 있다. 며칠동안 생각한 밤잼을 만들어 보았다. 깐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한번 끓였다. 드문드문 붙어 있는 밤 껍질을 정리해 주고 으깼다. 살짝 식힌 뒤에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밤이 퍽퍽해서 잘 갈려지지 않더라. 그렇게 간 밤우유를 냄비에 다시 넣고 끓였다. 꿀을 듬뿍 넣었다. 오래 끓일수록 냄비 밖으로 밤꿀우유가 튀여서 뚜껑을 덮어 뒀다. 그러다 타지 않나 뚜껑을 살짝만 열고 주걱으로 바닥을 뒤적거려 줬다. 또 덮어 두고, 또 뒤적거려 줬다. 잼을 만드는 것은 이 일의 반복이구나 생각했다. 그 시간이 은근히 길어서 그 사.. 2017. 11. 19.
혼자서 완전하게 혼자 여행가 있을 때, 동생이 돌아오면 읽어보라고 했던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천둥번개도 치고, 지진도 났다. 세상은 불완전하다. 이 책으로 일상에 제법 힘을 얻었다. 읽으면서 생각한 건, 내가 나 자신을 불완전하게 생각하는 건 남들과 비교를 해서라는 것. 비교하게 될 때, 나는 내가 부족한 걸 계속 떠올리는 거다. 그렇지만 내겐 남들에게 없는 것들도 있는 걸. 불완전하다고 느낄 때마다 그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려야지. 다 읽은 책을 세가지 색 스티커로 분류해 놓는 방법은 정말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소장할 책, 누군가에게 줄 책, 누군가를 주지도 못하겠다 그냥 버릴 책. 이렇게 세가지 색으로 책을 분류해 놓고, 처분을 한다는 것.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일단 사두고 책장에 꽂아두는 .. 2017.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