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예스24와 비씨카드가 만든 '책읽아웃' 팟캐스트를 들었다. 팟캐스트는 주로 불광천 길을 걸으면서 듣는다.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 김하나와 김동영이 번갈아서 진행을 하는데, 김동영 편에 뮤지션 오지은이 나왔다. 둘이서 앞으로 나올 책 이야기를 하는데, 오지은이 말했다. 내 식대로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왜 나는 여행을 가서도 마냥 행복하지 않은가, 그런 감정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고, 쓰고 있다고 했다. 지금 글이 잘 진행되지 않아 괴롭다고 했는데, 방송을 듣고 이 책을 기다리게 되었다. 저도 그래요, 왜 그런가요, 알려주세요, 오지은님, 이런 심정이랄까. 김동영도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친해서 그런지 이야기하는 게 꽤 재밌었다.


   지난 추석에는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 한수희 작가의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사실 별 기대없이 산 책이었는데, 처음부터 재미나서 추석 연휴 내내 즐거움을 주었다. 여행을 마냥 찬양하지 않고, 뭔가 툴툴거리면서 이야기하는데, (내가 왜 이 고생을 또 하고 있지? 라는 식)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행을 북돋우는 책이다.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어찌되었든 우리 계속 여행해봅니다, 라고. 시원시원해서 뭔지 모르게 속이 펑-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많이 웃었다. 역시 책읽아웃 팟캐스트에서, 김하나 편에 나온 이다혜 기자가 말했다. 여기를 지우려고 떠난 여행은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에서도 행복해야 거기에서도 행복하다고. 읽고 싶은 책이 점점 늘어나고, 느린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지만, 그것들이 나를 흐뭇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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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내가 그간의 여행들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여행을 하는 것보다 여행을 하는 나를 더 좋아한다. 여행의 계획을 짜고 짐을 꾸려 새벽녘에 집을 떠나 공항의 대합실에 앉아 비싼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비행기들을 바라보는 나를 좋아한다. 가본 적 없는 도시를 향해 출발하거나 그런 도시에서 막 도착한 비행기들을 바라보는 나를 좋아한다. 이제 곧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나를 좋아한다. 나는 그런 나를 여행보다 더 좋아한다.

- 10쪽


   게다가 나는 언제나 슈트케이스보다는 배낭이다. 나는 성큼성큼 걷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걷는 여자에게는 슈트케이스가 어울리지 않는다. 슈트케이스는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고 있어. 개처럼 질질'의 느낌으로 끌고 다녀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깨에 이고 다니는 쪽이다. 성큼성큼.

- 19~20쪽


   태국의 요리는 늘 이렇게 가볍고 양이 적고 채소를 곁들여줘서 좋았다.

- 65쪽


   어느 날은 늦게까지 유적지에 있었는데 해질 무렵 어디에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유적지 뒤편에서 남자들 몇이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연주였다. 해질녘의 사원에 잘 어울리는 황홀한 음악이었다.

- 172쪽


   우리는 밤을 놓치는 대신 아침을 얻었다.

- 195쪽


   어느새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농카이다. 새벽에 낯선 도시에 떨어지는 것은 어찌나 당혹스럽고 또 어찌나 흥미진진한 일인지. 암흑 속을 뚫고 밤새 달리다 보면 아침이 오고 그제야 완전히 다른 동네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느낌이 정말 좋다. 나는 그저 잠을 잔 것뿐인데 일어나 보면 누군가가 나를 들어다 옮긴 것처럼 다른 세상인 것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이곳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거의 순간이동에 버금간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된 기분이다.

- 200쪽


    옷가게에서는 젊은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금세기 내에는 다 처분할 수 있을까 싶은 수많은 옷들을 판다. 태국의 엄마들은 중국 여자들처럼 화끈하게 아이의 뺨을 때리지 않는다. 대신 달콤하고 나긋나긋한 말로 아이들을 달랜다. 아이들은 얌전하고 또 수줍다. 태국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골목을 걷다 보면 사람을 피하지 않는 느긋한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다. 고양이도 국민성을 닮아가나 보다.

- 271쪽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를 정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그렇다. 아주 오랜 후에야, 그때 느꼈던 좌절감과 무력감과 두려움과 분노와 수치심과 열등감 같은 것들이 흔적이나 남을 정도로 옅어졌을 때에야, 다른 것들로 그것들을 덮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야, 그 시기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시간이 온다. 그런데 그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파묻은 상처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실체조차 알 수 없는 것들에서 헤어 나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 287쪽


  솔직히 그때의 나는 그가 나를 적극적으로 꼬시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했다. 사람은 언제 둔해지느냐 하면, 부족함이 없을 때 둔해진다. 부족한 사람은 뭐든 오해하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없는 사람은 누가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면 '날 좋아하는 걸까?' 하고 오해한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이 학원만 다니면, 이 문제집만 풀면 성적이 오를 거라고 착각한다.

- 301쪽


    <론리 플래닛>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안내서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준 후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 수영을 가르친답시고 아이를 물속에 던져 넣는 야속한 체육선생님 같다. 심지어 <론리 플래닛>의 일본 규슈판에는 유명한 관광지 '하우스텐보스'에 대해 이런 소개글 하나만 달랑 남겨놓았다. '누가 일본까지 와서 네덜란드 축소 마을을 구경하고 싶겠는가.' 재미있는 가이드북이다.

- 328~329쪽


   대학 4학년의 장래희망이 '유라시아 일주'였던 나의 대단하신 모험심은 이제는 좀 더 소심하고 내밀하고 진지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내가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고 싶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보고 싶가. 더 이상 낯선 장소를 예정처럼 열망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내가 잘 알고, 또 좋아하는 곳에 간다. 그런 곳에서 나는 가이드북 따위는 없이,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관광명소나 인기 식당 같은 것들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관광 안내소에서 얻은 지도 한 장만 달랑 손에 쥔 채로. 길을 잃으면 스마트폰을 켜고 구글 맵을 들여다보면 그만이다.

- 340~341쪽


   선생님은 적은 수입으로 검소하게 살아가는 데 익숙했다. 선생님의 고향은 제주도였고 방학 때면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의 고향집 주소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 나이 든 여자에게 무엇을 적어 보낸 것일까.

- 346쪽


   모 대학 공대의 졸업생에게 직장명을 물었을 때 잠깐 동안 이어지던 어색한 침묵을 떠올린다. 끝내 말하지 않고 끊어버리던 그 사람의 인생을 떠올린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의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너무 좋은 직장이라서, 알고 보니 재벌의 후계자라서 밝히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모 덕에 일 따위는 하지 않고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냥 자기 정보를 밝히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느낀 것이 옳다면, 그렇게 생각을 하면, 갑자기 슬퍼진다. 돌이킬 수 없는 나이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잘못된 자리에 서 있다고 느끼는 그 사람의 사정에 슬퍼진다. 나도 이제는 그 사람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 357~358쪽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그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이고, 낯선 나라에서 죽도록 고생을 한 후에 이제 그 모든 익숙한 것들에게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구나. 어쩌면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것이겠구나.

- 381~382쪽


  1. 오혜진 2017.11.11 17:3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여행 갈 때 이 책 한권만 가지고 갔었어요. 금령씨가 마지막에 적어놓은 구절, 저 구절을 읽고 아! 했었어요. 익숙함을 떠나고 싶어서 떠났다가 다시 그 익숙한 것으로 돌아갈 때의 묘한 안도감을 나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집에 돌아올 때 짐을 줄이느라 저 책을 호텔 라운지 서가에 꽃아놓고 왔는데 누군가 읽어 줄까요?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 읽어야겠어요.
    금령씨 어디 아팠어요? 괜찮아진거에요? 괜찮아졌다고 생각할래요. 몸도 마음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요 우리.
    나는 지금 폴 콘서트장에 왔어요. 너무 일찍 도착해서 커피 한잔 마시려고 공연장 앞에 커피숍에 왔는데 오는 길에 폴처럼 생긴 사람을 마주쳤어요. 곧 만날텐데 두근두근했어요. 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ㅋㅋㅋㅋㅋ

    폴 콘서트에 올때면 꼭 금령씨 생각이 나요
    금령씨도 이번엔 공연을 보러 갈까.

    주말 잘 보내요~
    따뜻하게~

    •  address  modify / delete 2017.11.12 21:35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공연은 어땠어요? 나는 이번에야 이번 앨범을 주문해 받았어요. 생각보다 크고 튼튼하더라구요.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읽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이번엔 예매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가고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