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341건

  1. 반딧불 언덕 2015.02.25
  2. 다시, 포르투갈 2 2015.02.16
  3.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2015.02.08
  4. 스토너 2 2015.02.03
  5. 토우의 집 2 2015.01.02
  6. 백년식당 8 2014.12.17
  7. 계속해보겠습니다 7 2014.12.10
  8. 김남희가 매혹된 라틴아메리카 2 2014.12.04
  9. 이방인 2014.11.22
  10. 소설가의 일 4 2014.11.20

반딧불 언덕

from 서재를쌓다 2015. 2. 25. 23:50

 

 

    지난 도쿄 여행 때 산겐자야에 다녀오질 못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산겐자야가 <수박>을 촬영한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가고 싶었지만, 여러 계획들이 있어 가질 못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앗! 산겐자야다! 했다. 이 전에 시리즈가 두 권이나 출간되어 있었는데, 산겐자야가 배경인 줄 몰랐다. 하긴 그때는 <수박>의 배경이 산겐자야인 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바로 구입해서 읽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미스터리물인데 세지 않다. 잔잔한 미스터리물이다. 그리고 매 단편마다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맥주도 나온다. 이야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갖춘 셈. 이야기들은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소소하고 따뜻해서 정이 갔다.

 

    그러니까, 도쿄 산겐자야 한적한 곳에 맥주바가 있다. 조용한 바다. 하지만 단골손님들이 가득 찰 때도 있으니, 매번 조용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 곳의 마스터, 구도 데쓰야.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맥주바 가나리야에 찾아오고 네 가지 도수의 맥주 중에 알맞은 맥주를 시킨다. 원하는 안주를 말하기도 하고, 마스터가 눈치껏 알맞은 안주를 만들어 내어오기도 한다. 그러면 손님들은 모두 만족한다. 세상살이 쉽지 않으니 다들 하나 둘씩 문제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고, 손님들은 마스터나 단골손님에게 그 문제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 이 구도 데쓰야라는 마스터는 조용하고 용-하다.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 고민을 다 안다. 그리고 해결책이 될 수 있는 힌트를 넌지시 건넨다.

 

    이런 문장들에는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곧 벚꽃이 필테니까.

 

   도부이세사키 선 아사쿠사 역을 빠져나와 걸어서 아즈마 다리를 건너 상류를 따라 2백 미터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스미다 공원이 있는데, 벚꽃 피는 계절이 되면 꽃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명소다. (...)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잠들어 있다고 하면 퇴폐적인 낭만이 느껴지지만, 그 방수 시트를 보는 순간 갑자기 시트에 둘둘 말아 놓은 부패한 시체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흥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적어도 돗자리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거 아니나며 괜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벚꽃은 떨어질 때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평일의 한낮이라면 더욱. 취객도 없고 시퍼런 방수 시트도 없고, 그저 혼자서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게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그것이 가능한 지금은 의외로... 아니, 아니야."

   손에 든 캔 맥주의 마개를 당기자 성대한 하얀 거품이 쏟아져 나오며 흘러넘쳤다. 서둘러 입술을 가져다 대려다가 그러고 있는 자신이 싫어져서 관뒀다.

    바람은 바람인 채로 좋다. 아, 평일의 한낮.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마음껏 벚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이름 있는 좋은 술 약간과 백화점 지하에서 산 고급스러운 안주 같은 걸 옆에 두고서 먹고사는 데 급급하기만 한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벚꽃을 상찬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사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의 내 모습을 보면 결국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살아가기 위해 내 한 몸 보전하느라 급급하다. 그러니 바람은 영원히 바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p. 124

 

    이 문장들을 읽고는, 진정 가나리야에 가고 싶었다.

 

   가나리야는 결코 젠체하는 가게가 아니다. 각 요리의 양도 충분하게 제공된다. 가시와기는 마지막 하나를 다 먹고서 혀끝에 남은 환상적인 맛을 맥주로 씻어 낼 때까지 시간 감각을 아예 잃었다. 가게 밖에서 부스럭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다. 맛있는 안주와 맛있는 술. 이 세상에 근심거리는 수없이 많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잠시 모든 것을 잊으련다.

p. 131

 

   이 소설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은 작가의 이력 때문이기도 했다. 기타모리 고. 서른 다섯에 데뷔해 마흔여덟에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30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가나리야 시리즈는 모두 네 권. 나는 이제 한 권을 읽었으니 세 권의 책을 더 읽으면 가나리야 맥주바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이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이 더 애틋해졌다. 그래서 현재 출간되어 있는 두 권을 빨리 읽고 싶기도 하고, 더 묵혀두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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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포르투갈

from 서재를쌓다 2015. 2. 16. 23:45

 

 

    한 편의 영화로 시작해 꽃피우게 된 포르투갈 여행. 올해 꼭 가리라 결심하고 포르투갈어도 배우고 있다. 사실 포르투갈어보다 브라질어에 가깝고, 열심히 하지 않고 있지만. 하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다. 공부를 안해서 저번 주에는 그냥 그만 다니는 게 어떠냐고 선생님이 말하기도 했지만, 같이 다니는 언니랑도 공통점이 많고,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광화문까지 버스 타고 가고, 거기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종로까지 칼바람을 맞으며 걷는 기분도 좋다. 가이드북은 진작에 사놓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월요일 아침에 책장에서 꺼내 가방에 넣고 출근했는데, 지하철에서 리스본이 소개된 페이지를 펼쳐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리스본 사람들은 최고의 부를 경험했고, 바다로 나간 이를 그리워했으며, 최악의 재앙을 함께했다." 이런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 

 

    지난 주에는 포르투갈 관련 책을 두 권 구입했다. 한 권은 포르투갈을 여행한 에세이, 또 한 권은 포르투갈 시인이 쓴 에세이. 포르투갈 시인이 쓴 에세이는 평이 정말정말 좋아서 아껴두고 있다. 먼저 포르투갈 여행 에세이를 읽었다. <다시, 포르투갈>. 저자는 포르투갈을 여러 번 여행한 사람. 다시 떠난 포르투갈에서 장기여행을 한 기억을 책으로 옮겼다. 그는 스무 도시를 걸었다. 포르투갈 시인이 쓴 책, 포르투갈 소설가가 쓴 책을 좋아하고, 그들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 그 자체 만으로 감격스러운 사람이 여행한 포르투갈 이야기이다. 역시 이 곳도 사람이다. 저자가 여행 중 가장 감동받았던 순간들은 모두 사람에서 비롯됐다. 착하고 정이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 저자가 표현한 포르투갈은 "고집스러운 노인의 오래된 일기장" 같은 곳,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다시 수 십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 책으로 인해 '파두', '사우다드', '포르투 와인'이 전부였던 나의 포르투갈 지식이 조금 더 넓어졌다.

 

 

    좋았던 구절.

 

    여행을 하다 보면 한 번 마주친 사람을 다른 곳에서 또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비두스에서 같은 호스텔에 묵었던 브라질 청년은 보름이 지난 후 포르투의 돔 루이스 다리에서 만났고, 코임브라에서 같이 식사를 했던 호주 노부부는 한 달이 지나 오르셰 미술관 한 조각 앞에서 만났다. 브라질 청년을 본 나는 반가워 소리를 질렀고, 그는 뽕망치로 나를 때렸다. 이런 만남은 무척이나 반갑다. 여행지에서 다시 만난 사람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다. 얼마간 떨어져 지냈지만, 어느새 더 친근하다. 의도치 않은 만남이 도시 풍경과 같이 각인된다.

p.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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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학원을 마치고, 지난주에 인터넷에서 봐두었던 네팔인도요리전문점엘 갔다. 1월에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를 읽었는데, 이 책 덕분에 출퇴근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어찌나 재미나게 여행기를 썼던지. 읽으면서 엄청 웃었다. 특히 화장실 이야기가 압권이다. 정유정 작가에게 히말라야는 첫 해외여행지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고, 그 뒤로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작가의 꿈을 이룬 뒤에는 또 열심히 썼다. 그러다 <28>을 끝내고 글이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단다. 그렇게 찾아온 슬럼프 앞에서 작가는 혹시나 영영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좌절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히말라야로 가기로. 히말라야는 작가의 등단작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이 마지막 발을 디딘 곳. 정유정은 그 곳에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혼자라도 꼭 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쉽지 않은 곳이라 동행을 찾았다. 김혜나 작가. 두 사람은 한달동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내린다. 고통스러운 변비도 찾아왔고, 죽을 것 같았던 고산병도 찾아왔다. 잘 씻지도 못하고 매일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가이드 검부와 포터 버럼과 함께. 가이드 검부는 뷰를 중요시해 숙소나 밥집, 찻집을 고를 때 맛보다는 풍경이 좋은 곳으로 안내했다. 포터 버럼은 영어를 거의 못하는 작가의 한국말 '까자', '까꽁', '뭐라꼬'의 뜻을 듣고 완벽하게 적재적소에 활용한 영특한 아이였다. 이국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김혜나 작가와는 달리, 정유정 작가는 한국에서도 잘 자고, 잘 먹는 스타일인데 안나푸르나의 음식만은 맞지 않았다. 마살라 향을 못 견뎌했다. 그래서 거의 한 달 내내 야채볶음밥만 먹었다. 지난주에 검색을 하다 보니, 광화문에 있는 한 네팔인도음식점에서 네팔 트레킹을 할 때 여행자들이 먹는 음식을 팔고 있었다. 정유정 작가는 끝내 못 먹고, 김혜나 작가가 맛있게 먹었던 그것. 책을 읽으면서 그 맛이 궁금했는데, 잘 됐다 싶어 오늘 갔다. 그런데 그 요리는 사전 예약을 할 때만 먹을 수 있단다. 그것도 4인 이상일 때. 나는 혼자갔고 사전 예약 따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보긴 했는데, 친절하게 안된다는 대답만 들었다. 재료를 따로 구입해서 만드는 요리라 그렇단다. 아쉽지만 다음에 친구들과 함께 와서 먹기로 하고, 추천해주는 매콤한 치킨카레를 시켜 먹었다. 맛있었다.

 

   친구의 남편, 그러니까 내 친구이기도 한 친구가 15년 동안 내가 딱 네 번 본 자신의 친구와 네팔로 트레킹을 갔다. 작년 12월에. 결국 내가 지금까지 딱 네 번 본 친구가 고산병에 걸리는 바람에 일정보다 일찍 돌아왔지만. 고산병 때문에 두 사람은 네팔의 커피집만 전전했다고 한다. 친구는 네팔을 가기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고, 갔다 와서 한 번 더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 그러니까 친구에게 말했단다. 2년 안에 같이 네팔을 가자고. 다시 가서 꼭 트레킹에 성공하겠다고. 책을 읽으면서 그 친구의 그 결심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영화 <와일드>와 같이 이 책도 트레킹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 마지막에 트레킹 완주 후에 찍은 것 같은 사진 한 장이 있는데 책을 다 읽고 이 사진을 마주하니 괜히 내가 뭉클해졌다. 그 사진에는 트레킹 후 다시 힘을 얻은 정유정 작가가 있고, 그녀의 든든한 동행자 김혜나 작가가 있고, 두 사람을 이끌어 준 고마운 가이드 검부와 포터 버럼이 있다.

 

 

    이틀 전 스스로 던졌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니?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돌아가 맞닥뜨릴 내가 두려웠다. 떠나온 나와 돌아간 내가 똑같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나는 쏘롱라패스 돌탑 밑에 타임캡슐을 밀어 넣던 순간을 돌이켰다. 돌탑에 귀를 대고 안나푸르나를 향해 묻던 내 목소리를 생각했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나 자신과 싸울 수 있을까.

    그때 답해왔던 목소리가 똑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죽는 날까지.

 

    비레탄티는 안나푸르나의 출구였다. 철교를 건너가면 우리는 그녀의 품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철교 앞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정식으로 안나푸르나와 작별했다. 고마워. 그 말 오래오래 기억할게.

-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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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from 서재를쌓다 2015. 2. 3. 22:09

 

 

   사실 나는 이 책의 보도자료에 반했다. 책을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읽고 나는 내가 아는 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첫 문장을 읽기도 전에. 친구에게 함께 읽자고 책을 보내면서 이 책이 우리의 2015년 최고의 책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책을 다 읽은 친구와 맥주를 마시는 저녁에, 내가 물었다. 어땠어? 친구가 말했다. 진짜 있는 사람 같앴어. 스토너. 그리고 생각했어. 이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은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로 끝난다. 이 책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남자의 한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톰 행크스의 추천글. "이것은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농과대학에 진학한 한 남자가 영문학 교양과목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만나게 되고,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는 교수가 되지만 성공한 교수는 아니었다. 남자는 첫눈에 반한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지독하게 불행했다. 사랑하는 딸도 있었지만, 딸과 남자는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친구의 말대로, 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는 사랑에 빠진 대상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학에 빠졌고,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내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다. 딸 아이도 마찬가지. 그리고 단 한 번,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고, 그는 그녀 안에서 행복을 만끽했다. 함께 책을 읽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는 투쟁하거나 싸우지 않았다. 밀물처럼 몰려온 행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행복을. 밀물의 기억이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체념하는 사람. 내가 읽은 스토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책 뒤표지에 있던 "슬프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안"이라는 문장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소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50년 후에야 빛을 발한 소설. 작가는 스토너를 허구의 인물임을 분명히 했지만, 친구의 말처럼 어디선가 열심히 살다 죽었을 것만 같은 소설. 그게 당신같기도 한 소설. 그래서 내가 마음이 아픈 소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 소설.

 

    이 책에서 가장 신났던 부분이다. 159페이지부터 160페이지. 아내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랜 기간 부재 중일 때, 스토너는 딸과 함께 일상을 산다. 그 일상은 소소하고, 평온했으며, 평화로웠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딸을 더욱더 사랑했으며, 문학에 더욱더 깊이 빠졌다. 그리고 경험하게 되는 어느 순간에 대한 묘사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자신이 성장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의 스토너.

 

    그는 이 새로운 발견에 슬프면서도 기운이 났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학생들과 자신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기계적인 단계들을 반복적으로 밟으며 그의 강의를 끈기 있게 버텨내던 학생들이 당혹감과 분노를 안고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면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는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참석하고, 복도에서 만나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 p. 159-160

 

   160페이지의 스토너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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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from 서재를쌓다 2015. 1. 2. 23:44

 

 

   그들은 통성명을 하고 서로가 일곱 살 동갑내기임을 확인했다. 원은 얼마 전에 언니가 보는 만화책을 몰래 훔쳐보고 '스파이'라는 말을 새로 배웠던 터라 그 말이 써먹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럼 이제 우리 목숨을 바치는 스파이가 되기로 하자.˝
  ˝스파이?˝
  ˝스파이가 뭔지 알아?˝
  ˝몰라.˝
  은철이 시무룩하게 발로 땅을 찼다.
  ˝스파이는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야.˝
  은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27~28쪽

 

 

   권여선의 새 소설을 읽었다. 27쪽에서 28쪽을 읽을 때, 저 이야기를 하는 원과 은철이 귀여워서 아이고, 귀여운 것들, 했다. 203쪽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은철과 원은 더이상 동네 사람들 이름을 캐묻고 다니며 우물가 돌을 갈아 주문을 외우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저주하던 신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권여선의 전작 <레가토> 생각이 났다. 권여선은 자신이 겪어온 잔인한 현대사의 아픔과 진실을 소설로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레가토>에 이어 <토우의 집>까지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너무나 잔인해서, 가슴이 먹먹해질 수 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의 어머니는 점심 때면 계란볶음밥을 주로 원에게 해줬다. 간단하고, 찬밥으로도 만들 수 있어 네 식구 중 두 사람만 먹는 점심으로 딱이었다. 어머니는 계란을 풀어 한 번에 다 넣지 않았다. 반은 처음에 넣고, 반은 볶음밥이 반쯤 익었을 때 넣었다. 그래야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게 된다. 그래야 볶음밥이 더 맛있다. 원이는 엄마가 해줬던 이 계란볶음밥을 기억한다. 이 가엾은 아이는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던 계란볶음밥의 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그건 엄마 만이 낼 수 있는 맛이다. 다시는 맛 볼 수 없는 맛. 권여선의 새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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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당

from 서재를쌓다 2014. 12. 17. 23:30

 

   상호도 없이 그저 '실비집'이라고 불렸던 그때, 최대 여섯 팀이 이 드럼통을 놓고 화덕에 고기를 구웠다. 여섯 명이 아니라 여섯 팀! 그러니까 화덕 하나에 여섯 무리의 고기가 다 올라간 것이다. 고기가 섞이기도 하고, 먼저 익으면 다른 손님들에게 고기를 밀어주기도 했다. 상상만 해도 훈훈한 장면이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한다는 커뮤니티 테이블의 진정한 원형인 셈이다.
"그랬지. 멋있고 정겨웠어. 어이 형씨. 이거 한 점 드슈, 그러면서."
- 79~81쪽, 서울 연남서서갈비

 

   "브랜드가 백화수복과 금관 청주가 있는데, 수복이 더 비싸거든요. 문제는 콜라병이 다 똑같잖아요. 그래서 둘을 구별하기 위해 백화수복을 담은 콜라병에는 빨간색 철사를 걸어두었어요. 그게 넥타이를 닮았다고 사람들이 '넥타이 한 병!' 이케 외치기 시작했지요."
은퇴한 시어머니 김 씨의 뒤를 이은 맏며느리이자 2대 안주인 조 씨의 설명이다. 그때의 넥타이는 사라졌어도 청주는 여전히 잔술로 팔고 있다. 오뎅에 청주, 일제 때 시작된 식민음식사의 면면한 현재다. 당시에는 청주를 잔술로 마시면 바둑돌을 놓아서 그 수를 표시했다. 일어설 때 바둑돌 수가 곧 마신 술의 양이었다. 운치 있는 표기법이었다. 요즘에 다들 '포스'라고 부르는 컴퓨터 시스템에 기입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114쪽, 부산 마라톤집

 

   족맛도 족맛이지만, 필자에게 이 집이 각별한 건 이 씨의 말대로 화목한 동업의 역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집은 조카며느리들이 대를 이어 일한다. 영원히 그 역사를 이어갈지 지켜보게 될 것 같다. 필자에게 족발을 내주며 이 씨가 한 말에 평안도족발집의 어떤 기운이 스며 있다.

   "나는 스스로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해.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 219쪽, 서울 평안도족발집

 

   32공탄 연탄에서 프로판가스, 도시가스로 열원이 바뀌었지만 굽는 법은 늘 같다. 10여 년 전부터 가업을 잇기 위해 나온 아들 상건 씨에게 가르쳐주는 기술도 늘 한결같다.

    "미리 부치지 마라, 맛없다. 아무리 바빠도 한 장 한 장 주문이 들어오면 부친다. 뭐 이러거쥬."

   우 씨는 이제 화.목.토 주 3일만 나온다. 그에게는 열 살짜리 손주가 있는데, 열차집을 이을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아, 한 시절을 잘 보냈다 싶어유."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 씨가 혼잣말하듯 필자의 눈을 보며 말했다. 400원짜리 빈대떡이 이제 1만 1000원을 한다.

- 271쪽, 서울 열차집

 

  우선 순댓국밥 한 그릇을 청한다. 건더기 고명 양이 수북하고, 밑에 밥이 깔려 있는데 토렴이 예술이다. 건더기 고명 양이 많아서 같이 데우려면 열 번에 이르는 국자질을 해야 토렴이 완성된다. 적당히 뜨끈한 국밥이 식욕을 자극한다. 국물이 무척 진하다. 이곳 표현으로는 바특한 국물을 '딸린다'고 한다. 아마도 달였다는 뜻인 듯 싶다.

    곁들이는 찬은 소박하다. 내장을 따로 삶아내는 안주를 하나 청한다. 새끼보와 머리고기가 그득하게 들었고, 아주 맛있다. 찍어 먹는 장도 시어머니 시절부터 만들어 쓰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도 아침마다 국밥 먹고 일하우다."

    노포의 한결같은 공통점! 자신이 파는 음식을 늘 먹는다.

- 321쪽, 제주 광명식당

 

    박찬일의 새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사이 새 책이 또 나왔다. 읽을 책들은 쌓여가고 있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백년식당 열 여덟 곳이 소개된 책. 백년식당이지만 백년동안 이어진 식당들은 아니다. 백년식당이 되길 바라는 곳들이다. 한 곳 한 곳 읽으며 내가 그 식당에 앉아 맛난 음식들을 먹는 상상을 했다. 상상 만으로도 행복했다. 좋은 파를 정성껏 손질해 넣은 담박하고 깔끔한 육개장,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돼지국밥, 연탄 센불에 구운 갈비, 심심하고 길게 끄는 맛이 일품인 추어탕, 진하면서도 구릿한 설렁탕, 굴젓과 함께 먹는 빈대떡, 개운한 물냉면, 포항의 자연바람에 건조시킨 국수 등. 한국 현대사와 맛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책이다. 제일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은 제주의 광명식당 순대국. 수첩에 식당 목록을 적어놓고 표시하면서 모두 다녀볼 생각이다. 흐흐-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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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from 서재를쌓다 2014. 12. 10. 00:09

 

    

    요즘 월요일마다 치과에 다닌다. 치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칼퇴를 해야 하므로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월요일을 정신없이 보내고, 치과에 도착해서 대기실이며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친절한 치과지만 어디가 안 좋고, 또 어디가 안 좋고, 그러므로 많은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알려주면 기분이 처진다. 그렇게 짧은 진료를 마시고 치과를 나오면 숙제를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겨울바람이 상쾌해진다. 비록 한 주 뒤에 이 과정이 다시 반복되지만. 이번주 월요일, 마취가 풀리지 않은 채 집에 도착해 씻고 소파에 앉아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래, <계속해보겠습니다>. 마취가 풀리고 왼쪽 이가 아프면 신경치료를 해야한다. 아프지 않으면 신경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면 조금 두근두근해진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12월의 출근길 아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장 읽지 않았지만 알았다. 이 책이 내게 <백의 그림자>와 같은 따뜻함을 줄 거란 걸. 그 느낌은 맞았고. 220쪽. "매년 혼란스러웠지. 상이 두개라서. 올해는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하고. 올해부터는 여기로 오면 돼. 나나가 말했다. 곧장 와도 돼. 소라가 말했다." 이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막 났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마취가 풀려가는 중이었지만, 아프진 않았다. 그러므로 이가 아파서 운 게 아니고, 이 소설 때문에. 소설은 여름과 가을 사이의 일이다. 그 계절 속에 소라와 나나와 나기가 있다. 세 사람은 아주 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그리고 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소라는 나나의 태몽을 꾸었고, 나나는 강해보이지만 약한 아이다. 하지만 나나에게는 언니가 있지. 나기는, 나기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오랫동안 한 사람을.

 

    나기는 '삯'이라는 조그만 맥줏집을 하는데, 삯에서는 신선한 재료만을 쓴다. 그 날의 재료는 그 날 모두 요리한다. 오늘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삯에 가서 애피타이저로 폭신폭신한 계란말이를 시켜 먹었음 좋겠다. 물론 시원한 맥주와 함께. 그 사이에 바삭하게 구운 생선구이도 주문하고. 누군가 삯에 들어오면, 아마도 그 아이일 거다. 소라. 미나리 '라'자를 쓰는 소라. 소라는 나기에게 따뜻한 국물을 달라고 할 거고, 나기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냄비를 불에 올리고 데울 거다. 소라는 맥주도 한 잔 달라고 할 거고, 그걸 마시며 나나 이야길 할 거다. 앞으로 부르나 뒤로 부르나 똑같은 나나. 나나는 그 시간, 뜨끈뜨끈한 방에 누워 있을 거고, 그 옆에는 몇 달을 배에 품었던 '쐐쐐'가 있을 거다. '쐐쐐'의 이름은 뭐가 되었을까. 맥주 두 병을 다 마시면 용기내서 '쐐쐐'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삯'. 

 

    책을 읽으면서 나도, 소라와 나나가 있었던 한 여름의 목욕탕 속에 있고 싶었다. 그 길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 둘 사이에 끼여 잠들고 싶었다. 거실에서 커다란 달을 올려다 보고 싶었다. 황정은은 사진마다 그렇게 퉁명스럽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왜 이렇게 따뜻할까. 참 고맙다.

  

 

여름 달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하루만 두번째 귀가이고 이미 자정입니다. 노곤하지만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소라에게 서운하지만 먼거 가버리지 않아서, 고맙다고 여기는 마음도 있습니다. 간단하지 않네 사람의 마음은, 하고 생각하며 소라의 곁에서 잠자코 걸어갑니다.

목욕용품 중에서 젖은 것을 베란다에 펼쳐두고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탁자에 소라의 앨범이 펼쳐져 있고 종이로 만든 조그만 꽃송이가 열개도 넘게 흩어져 있습니다. 잎이나 꽃자루도 없이 오로지 꽃송이뿐, 패랭이나 코스모스처럼 보입니다. 애자가 만들었다고 소라가 말합니다. 보고 왔느냐고 묻자 그렇다,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떄수건으로 닦아 반들반들해진 뺨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종이로 꽃을 만든대. 이런 것을 잔뜩 만들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밀어주는 패랭이꽃을 받아 탁자 위에서 이리저리 돌려봅니다. 뭔가 만든다니 좋네. 애자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니 그건 좋네. 모처럼 불어온 바람에 창가에 걸린 풍령이 흔들립니다. 소라가 달아 두었는지 풍령의 추에도 애자의 꽃이 한송이 달렸습니다. 저렇게 달아두면 꽃의 무게로 덜 흔들리게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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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빠진 아이가 있다. 최근에. 그 애는 순식간에 그 사람에게 빠졌다.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자마자 웃고, 늘 그 사람 생각을 한다. 왜 그 사람은 나한테 이 말을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나봐.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 사람 이야기 뿐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입맛도 없어졌단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졌어, 라며 청소를 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평소에 절대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가. 사랑의 힘은 이런 거구나. 긍정적인 기운이 그 아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래, 연애, 해 볼만 한 거구나 생각했다.

 

   아이가 사랑에 빠진 동안 이 책들을 읽었다. 김남희가 1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온 얘기. 그 책에서도 화두는 '사랑'이다. 김남희는 남미를 여행하다 사랑에 빠졌다. 유희열과 이적과 윤상도 여행했던 바로 그 곳, 페루의 쿠스코에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호탕했고, 붙임성도 있었다. 베테랑 여행자인 여자와 초보 여행자 남자. 둘은 보름을 함꼐 어울려 다녔다. 때로는 둘이, 때로는 여럿이. 남자는 불꽃놀이를 보고 숙소에 있는 여자에게 달려갔다. "빨리 옷 입고 나와요. 불꽃놀이가 엄청 아름다워요." 남자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싶었다. 남자는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여자는 혼자 남았다. 여자는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도 여자를 생각했겠지. 두 사람은 그 뒤로 계속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가 노래로 고백을 했다.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그곳엔 푸른발부비새가 산다. 빼어난 수직 낙하 다이빙 실력을 가진 새. 그런데 알을 훔쳐가기가 너무 쉬워 '얼간이'라고 불린단다. 김남희와 같이 에콰도르를 여행을 하던 지인이 말한다. "언니, 부비가 물속으로 다이빙하듯 사랑 속으로 뛰어들어요." 이 구절을 사랑에 빠진 아이에게 이야기해줬더니 보여달란다. 그래서 읽어줬더니, 너무 좋다, 그런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구나.

 

   이상하지. 이걸 읽기 위해 이 책을 샀는데. 김남희가 남미 여행 중에 사랑에 빠졌다, 라는 소개를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사랑이 남자가 다시 남미로 날라와 이어지자, 그래서 여행기가 오직 남자 '감자씨'로 가득하게 되자, 심지어 1년 뒤 다시 찾은 브라질에서도 혼자 두고 온 아픈 남자를 생각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바뀌자, 이 여행기가 내게 좀 시들해졌다. 그래서 1권은 설레기까지 하면서 신나게 아침이며 저녁이며 빠른 속도로 읽어댔는데, 2권은 좀 더뎠다. 1권에는 포스트잇을 잔뜩 붙였는데, 2권에는 4개만 붙였다. 나만 이럴까, 궁금해졌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읽고 있는지, 그리고 읽을지.

 

    에콰도르에 가고 싶어졌고, 혼자 하는 여행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김남희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의 장단점에 대해.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에 대해. 분명한 건, 내가 하는 여행이 최고인 건 맞지만, 내 여행만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더 많은, 다양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이후 죽어가던 내 안의 촉수 하나가 슬며시 깨어나고 있다. 한때는 그 어떤 두근거림도 없던 날들을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사무친 외로움도, 떠올릴 얼굴 하나 없는 밤들이 여유롭다고 믿었다. 그래서 슬픔도 외로움도 모른 채 한 줄의 일기조차 쓰지 못하는 날들을 보냈다. 길 위에서 나는 다시 외로움에 사로잡힌 볼모가 되었다. 날마다 흔들리고, 질문하고, 만나고, 헤어지며 생생히 깨어 하루하루 보내는 날이 없다. 결국 내게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일까. 아직은 여행만이 내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고,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오르게 한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도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있다는 것, 삶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임을 매일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 135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어떤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곳에 새겨진 추억이다. 나의 아마존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함께한 이들 덕분이었다. 활기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벗들이 있어 매 순간이 즐거웠다. 우연히 만나 이곳까지 동행한 아저씨 또한 최고의 여행 친구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길 위에서 마음을 단단히 여민 채 걷고 있었다. 헤어지고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웠기에. 지난 다섯 달간, 며칠을 함께 보낸 이와 헤어질 때면 나는 조금 쓸쓸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내게서 사라졌고,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대륙이 품고 있는 경이로운 자연에 위로받았지만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날들은 아니었다. 가뭄에 바싹 말라가는 논바닥처럼 건조한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메마름이 질척함보다는 낫다고 여겼는데... 아저씨는 다시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시 나를 울게 만들었다.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조금 용감해진 걸까. 일정 따위는 무시한 채 벗을 찾아 야간버스에 오르는 걸 보니. 세계 최대의 습지인 판타날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낸 베키와 필을 만나기 위해 나는 지금 볼리비아의 남쪽 도시로 가고 있다. 일정이 좀 꼬이면 어때. 그게 여행인 걸. 헤어진 후에 좀 울게 된다 해도, 잠깐 만나고 오래 그리워해야 한다 해도, 괜찮다. 어차피 여행은 정들어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니까. 삶은 결국 이별하는 과정이다.

- 199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여행이란 결국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고립이다. 그 고립과 단절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더 예민한 감성의 촉수를 일깨우고, 주변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능케 한다.

- 248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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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from 서재를쌓다 2014. 11. 22. 14:00

 

 

    공판이 끝났다. 법원을 나와 호송차에 오르면서, 나는 아주 잠깐 여름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알아차렸다. 내 움직이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마치 피로의 밑바닥으로부터인 듯, 내가 사랑했던 도시의, 내가 행복을 느끼곤 했던 어떤 시간들의 모든 친숙한 소리들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나른해진 공기 속에서 신문팔이들이 외치는 소리, 공원의 마지막 남은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도시 고지대의 커브길에 울려대는 전차의 비명 소리, 그리고 밤이 항구 위로 내려 앉기 직전에 울리는 하늘의 웅성거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너무나 잘 알던 것이었는데 이제 내게는 눈 먼 여행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내가 만족하던 시간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꿈도 없는 안락한 잠이었다. 하지만 이제 무언가가 바뀌었는데, 왜냐하면 다음 날에 대한 기다림과 함께 내가 다시 대면한 것은 내 감방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여름 하늘에 그어진 친숙한 길들이 순결한 잠으로 이끌어 가듯 아주 쉽게 감옥으로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처럼.

p. 133-134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1부의 마지막 장에 합정 편의점 파라솔에 떨어졌던 올 가을의 단풍잎이 빳빳하게 말라 있었다. 친구는 논란이 많은 이정서 번역을 샀는데, 빌려주면서 그냥 <이방인>만 읽으라고 했다. 이 책의 반은 <이방인>이고, 반은 기존 번역을 까는 역자노트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역자노트를 길게 넣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좋은 번역은 이런 역자노트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 아닌가. 친구의 조언대로 <이방인>만 읽었다. 다 읽고 검색해보니 이 역자노트 마케팅 때문에 이 책이 베스트셀러 수준으로 팔렸다고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엄마의 장례식 부분이 지나고, 정말 푹 빠져 읽었다. 주인공 뫼르소에도 빠져 있었다.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짧은 출근길에도 읽고, 피곤한 퇴근길에도 읽고, 잠이 쏟아지기 전에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내가 잘 읽은건가 싶었다. 다들 <이방인>이 무척 어렵다고 하는데. 좋은 고전을 읽고 나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잘 읽은 것인가. 결국 읽는 사람이 중요하니까, 잘못되었더라도 내가 읽고 느낀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뫼르소가 1부와 2부에서 각각 다르게 체감하는 '자유'에 대해 골몰했다. 당연시 여겼던 자유가 그에게서 빼앗겨 졌을 때 그가 느꼈던, 그리고 괴로워했던 생각들. 그것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위의 저 인용 문장을 읽을 때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카뮈가 썼던 미국판 서문을 찾아 읽었다. 그 서문에서 카뮈는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창조해낸 그의 주인공 뫼르소는 '거짓말을 거부'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알라딘에서 에코백 이벤트를 할 때, 색깔이 마음에 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를 주저없이 택했는데, 카뮈의 에코백이 색깔이 좋았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 <이방인>을 읽었다면, 색깔이 좋은 카뮈 에코백을 주저없이 택했을 텐데. 역시 더 늦기 전에 많이많이 읽어야겠다. 생각해보니, 1부의 마지막 장, 단풍잎이 곱게 말라져 있던 그 장에서 뫼르소의 육체적 자유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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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from 서재를쌓다 2014. 11. 20. 23:14

 

 

   내겐 파란색 책이 왔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우표가 그려진. 예약판매 중인 이 책을 주문해놓고 타이완에 다녀왔다. 주문할 때 보니, 돌아왔을 때 받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정말 돌아온 다음날 받았다. 나는 이 책을 15년 동안 얼굴을 보아온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2년 동안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친구에게도 선물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셋에게 각각 다른 색의 책이 왔다. 말랑말랑한 산문집일 줄 알았는데, 왠걸 의외로 단단한 작법책이었다.

 

    프루스트 책으로 1년 계획을 세우는 소설가, 자신을 미남 소설가라고 (미안합니다, 말도 안되는) 자뻑 농담을 건네는 소설가, 자신을 정승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소설가, 출근길 아침 나로 하여금 'Creep'를 듣게 한 소설가(무척 좋았다), 옌벤에서 또 독일에서 오래 머물며 글을 쓰는 (아니 때론 글을 안 쓰고 끼니와 포도주를 챙겨 먹기도 한) 소설가. 책장에 좋은 소설과 좋은 비소설 순위를 매겨가며 꽂아두는 소설가, 나이가 들어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설가, 한때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을 책에서 은근하게 까고 있는 소설가, 11세기에 일본궁녀가 쓴 수필집을 비소설 쪽 4위에 꽂아둔 소설가, 사전 만드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소설가, 줄리언 반스,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소설가, 그 분들이 두꺼운 소설을 써내면 읽어 보기도 전에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하는 소설가, 천천히 뛰면서(때론 그저 걸으며) 평소에 보지 못했던 풍경을 느껴보라는 소설가, 해가 저물 무렵 편의점 파라솔에서 한 두개의 캔맥주를 마시는 소설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소설가, 소설가의 일을 하는 소설가, 소설가의 일을 쓴 소설가.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가의 일이란 간단하다. 계속 쓰는 것. 끊임없이, 꾸준히 쓰는 것. 쓰다보며 알게 된다고, 그러니 쓰라고, 이상한 생각 그만하고 일단 손을 움직여 한 문장이라도 시작해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이건 꼭 소설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라고.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하고 싶은 일은 하자고. 실패해도 시작해보자고. 그러면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고.

 

    소설가, 김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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