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를보다'에 해당되는 글 66건

  1. 원테이크 6 2022.10.31
  2. 아이슬란드 2 2021.12.12
  3. 조용한 희망 2021.10.08
  4. 라이브 2021.08.10
  5. 렛다운 2021.07.21
  6. 빅 리틀 라이즈 2020.10.11
  7. 블랙독 2020.01.03
  8. 유퀴즈 4 2019.10.10
  9. 세계테마기행 4 2019.02.19
  10.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2 2017.01.12

원테이크

from 티비를보다 2022. 10. 31. 22:01

 

   일요일 밤 넷플 <원테이크>를 봤다. 동생이 꼭 맥주를 마시며 유희열 편을 보라고 했기 때문에 김치냉장고에 있던 크라운 맥주 캔을 꺼냈다. 최근 엄청 좋아하게 된 살라미도 얇게 잘랐다. 지안이 덕분에 예정에 없던 월요 휴가가 생겨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죽기 전 딱 한 곡을 할 수 있다면? 유희열은 고심 끝에 한 곡을 골랐고 그 곡이 시작되자마자 내 찌질했던 이십대 연애담이 머릿 속에 펼쳐졌다. 아니다 삼십 대까지네. 연애담 뿐만이 아니다. 찌질했던 업무담, 찌질했던 친구담, 찌찔했던, 찌찔했던. 다시 그 찌질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순간들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렇게 사십대가 된, 초등학생의, 청소년의 엄마아빠가 된 사람들이 거기 앉아 있었다. 어떤 남자는 펑펑 울었다. 어떤 여자는 마이크를 들고 울면서 말했다.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런 사람을 내가 좋아한다. 관객들이 진심으로 웃었다. 나도 웃었다. 같이 티비를 보던 남편도 웃었다. A는 그냥 나쁜 남자였고, B는 나의 허상을 본 거였다. C는 끝내 나를 버렸고 그걸 후회하지 않았다. D랑 사귀었더라면 내 이십대는 어떠했을까. 내가 도망친 수많은 자리들이 생각났다. 내가 즐겼던 수많은 만취의 밤이 생각났다. 이상하게 그때는 그렇게 밤새 술을 먹고 들어와 따뜻한 온돌방에 몸을 지지며 순식간에 잠들기 시작한 아침이 좋았다. 철이 없고 책임감도 없고 자신감도 없던 시절들. 그 시절을 지난 사람들이 토이의 7년만의 공연에 앉아 있었다. 그때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그때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노라 말하면서. 지난 토요일, 그러할 미래를 한순간에 잃은 청춘들의 뉴스를 티비에서 봤다. 그렇게 삼십 대가 되어야 했는데. 그렇게 사십 대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어떤 가수가 용기를 내 간만에 여는 공연 한 구석에 앉아 그 가수가 노래하는 첫 구절을 들으며 이십 대의 나로 순식간에 돌아가는 경험을 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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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from 티비를보다 2021. 12. 12. 00:52

 

  아이는 이제 하루에 네번 혹은 다섯번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 트림을 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깨어난지 두 시간 즈음이 되면 칭얼대기 시작한다. 잠이 오는 것이다. 안방의 범퍼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엉덩이를 토닥여주면 잠에 든다. 눈을 자꾸 비비는데도 자지않고 계속 칭얼거리면 안고 등을 두드려준다. 좀 진정이 되면 소파에 앉아 엉덩이를 토닥여준다. 그러면 얼마 안 가 잠이 든다. 그때부터 한시간 길게는 두시간 동안 자유시간이다. 피곤할 때는 같이 자기도 하는데 그렇게 자버리면 하루 중 내 시간이 없어 아쉽고 아쉬워서 깨어있는 상태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 주로 밥을 먹는다. (시간이 아까워 간단히, 아주 빨리 먹는다 ㅠ) 달달한 것과 커피를 동시에 섭취하기도 한다. 책을 몇 자 읽기도 하고, SNS에 아이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티비를 보기도 한다. 

 

  정상훈, 조정석, 정우, 강하늘이 출연하는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은 그 시간에 본 프로그램이다. 소파에 누워 쉬려고 티비를 켰는데 올리브 티비에서 아이슬란드 편 1화를 하고 있었다. 3시에서 4시 사이였다.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지는 시간. 마음이 살짝 놓이기 시작하는 시간. 저 멀리 춥디 추운 북유럽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을 군포의 작은 아파트에서 보았다. 1화를 보고 난 뒤 다음날 편성표를 확인했다. 그 날도 편성표에 있었다. 그 뒤 오후가 되면 지안이가 시간에 맞춰 잠들길 바랬다. 저 멀리 북유럽으로 잠시 떠날 수 있길 바라며. 어떤 날은 그랬고 어떤 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본 날도 있고 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볼 수 있는 한 끝까지 봤다. 

 

  네 사람이 오로라를 본 날의 에피소드는 지안이가 자질 않아 보지 못했는데 마지막회까지 보고 영 아쉬웠다. 몇화인지 확인한 뒤 자기 전에 티빙앱에서 그 회를 틀어뒀다. 요즘의 나는 밤에 누우면 바로 골아 떨어지므로 며칠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그리고 그저께 오로라를 드디어 봤다! 신기했다. 네 사람은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바빠서, 가난해서 잘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피디가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출력해와 보여줬다.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멋진 곳들을 다 마다하고 굳이 보고 싶지 않다던 네 사람이 한 사진에만 유독 눈을 반짝였다. 오로라였다. 그렇게 만창일치로 떠나게 된 아이슬란드 여행이었다.

 

  영상을 보며 오로라가 왜 생기는지 이해했다. 텅빈 것 같은 우주에 태양에서 나오는 플라즈마라는 것이 가득 차 있고 지구의 자기장이 이 플라즈마를 막아준다는 것. 이때 미처 튕겨나가지 않은 소량의 플라즈마들이 자기장을 따라서 남극과 북극에 모여들고 대기와 부딪혀 빛이 난다는 것. 우주를 여행하는 지구라는 우주선, 지구호의 보호막이 정상 가동 중임을 알리는 푸른 신호라는 것. 네 사람은 호텔에서 술을 마시다 오로라를 만난다. 밖으로 나가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본 정우가 호텔 안으로 들어와 외친다. 오로라! 밤하늘에 거대한 초록빛 띠가 드리운다. 그 띠가 움직인다. 그리고 흐른다. 우아하게 춤을 춘다. 네 사람은 오로라를 본 뒤 개별 인터뷰에서 똑같이 말한다. 지금 이 친구들과 함께여서 너무 좋았다고. 한국에 있는 아끼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들이 생각났다고. 그들과 다시 한번 꼭 보고싶다고. 

 

   7화까지 보면서 매일 추운 아이슬란드를 상상했다. 군포의 작은 아파트에 앉아서. 얼마나 추울지. 얼마나 따뜻할지. 얼마나 아름다울지. 언젠가 나도 오로라를 꼭 보고 싶다. 나도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딱 하나 오로라 사진에서 마음이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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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

from 티비를보다 2021. 10. 8. 16: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틀에 걸쳐 봤다.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티비를 켜지 않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고 있는 사이 틀었다가 깨어나도 끄질 못했다. (미안, 아가) 3살이 되어가는 딸이 있는 알렉스가 함께 사는 남자친구에게 학대를 당하고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라고 쓰고 사전에서 '고군분투'를 찾아봤다. 고군분투 : 적은 인원(人員)이나 약한 힘으로 남의 힘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극악스럽게 함. '극악스럽다'도 찾아봤다. 극악스럽다 : 더할 나위 없이 못되고 나쁜 구석이 있다. 극악스럽다는 표현을 제외하면 맞는 것 같다. 탈출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의 완벽한 독립이다. 알렉스는 한 번의 실수를 하지만 결국 해낸다. 그녀에게는 어릴 때 엄마를 학대했던 아빠가 있고, 허상에 빠져 삶을 잘 일구어나가지 못하는 엄마가 있다. 도움을 받을만한 가족이 없다. 정부에게서 받을 수 있는 지원 절차와 조건들도 힘이 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딸이 있기 때문에. 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알렉스는 얼굴 가득 충만한 미소를 보인다.

 

  알렉스가 이 많은 상처와 고난을 치유해나가는 방법은 글쓰기이다. 카펫에 누워 실의에 빠져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친구는 한밤중에 말도 없이 떠났지만 그녀에게 노트와 펜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파출부의 고백. 이 제목 아래 자신이 생계를 위해 청소를 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몇년 전 포기했던 대학교에 재지원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학교는 최근에 쓴 글이 있냐고 묻고 그 글을 보내달라고 한다. 알렉스는 노트에 가득 썼던 이야기들을 타이핑해 전송을 한다. 결과는 합격. 본래의 글쓰기 능력과 그동안 겪은 출산과 육아, 학대와 시련의 나날들이 더해져 그의 글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었을 거다. 알렉스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된 남자와 사랑을 하지 못한 것.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오지만 이번엔 출구를 잘 찾아나간다. 

 

  새로운 삶이 펼쳐질 도시로의 이사를 앞두고 알렉스는 지내던 쉼터에서 글쓰기 치유 교실을 맡는다.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글을 써보고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읽어보는 거다. 좋았던 장면은 발표가 끝나면 한 사람씩 방금 읽었던 글 중 좋았던 구절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거다. 쉼터를 관리하던 책임자도 글쓰기 교실에 참여했다. 그녀는 지옥같았던 시기에 9주된 딸이 자신을 만졌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글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띄며 좋았던 구절을 이야기한다. 여과되지 않은 애정. 따뜻한 젖을 주는 여자. 밤낮으로 두려워했던. 작은 손. 그리고 드라마의 제일 마지막 장면. 알렉스가 자신의 글을 읽는다.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알렉스의 글 전체를 읽을 수 있었다. 글은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에서 "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은 네 것이라고."로 끝난다. 나는 잠시 이 글쓰기 교실의 일원이 되어 알렉스의 글 중 좋았던 구절을 읊어본다. 참 많았다. 오래된 참치 냄새가 나는. 내 놀라운 딸. 많은 행복한 날. 300개 하고도 38개의 변기 청소. 페리 선착장 바닥에서의 하룻밤. 내 딸 인생의 3번째 해 전부. M은 매디의 첫 글자. 완전히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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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from 티비를보다 2021. 8. 10. 23:11

 

 

 

  지금은 지안이가 혼자 누워도 있고 누워서 잘 자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온종일 안겨 있으려고만 하는 날들. 저녁과 새벽에는 남편과 어찌어찌 교대하며 하면 되었는데 (하지만 이것 역시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낮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 내가 온종일 안아줘야 했다. 소파 구석에 등을 바짝 대고 앉아 이대로 망부석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정말 영영 이렇게 안아줘야만 할 것 같이 떼를 쓰며 울어댔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시기를 지나니 눕더라. 어찌나 기뻤는지.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는 당연한 사실에 눈물이 날 듯 행복했다. 

 

  <라이브>는 그 시기를 나와 함께해 준 드라마. 수유를 하고나면 트림을 시켜야 했는데, 트림을 잘 하지 않아 소화가 잘 되도록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오래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수유와 트림의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빨리 찾아왔다. 주말에 남편에게 수유할 시간이야, 라고 말하면 남편은 항상 벌써? 라고 말했다. 트림할 때 온전히 아기에게 집중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이 길고 긴 시간을 버틸 무언가가 필요했다. 넷플릭스가 있었다! 끊어서 봐야 했으므로 영화는 집중하기 힘들고 드라마가 딱이었다. 심지어 아주 길다는. 우연히 찾은 <렛다운>에서 많은 위안과 즐거움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한국드라마가 어떨까 찾아보다 남편이 예전에 정말 좋다며 꼭 한번 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라이브>는 시보, 즉 수습기간을 보내는 새내기 경찰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성장하는 이들은 시보들만이 아니다. 이들의 선배, 나이 많고 경력 많은 사수들도 이들과 함께 성장한다. 그런 이야기이다. 드라마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경찰시험에 지원하기까지 고단했던 염상수와 한정오의 생활을 보여주고, 어느 날 결심한 경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몇 계절이 바뀌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녹록치 않았던 경찰학교를 거쳐 배정받은 지구대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맡으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고단한지 경찰이라는 직업은 또 얼마나 고단한지 알아간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힘을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노희경 드라마 답게 캐릭터들이 드라마 제목 그대로 '살아있다'. 시보들은 할 말은 한다. 할 말은 하면서 맡은 일은 또 열심히 해낸다. 선배 뒷담화도 열심히 한다. 그러다 들키지만 굴하지 않고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한다. 시시한 일은 맡기 싫다면서 막상 시체를 마주하고는 얼어버린다. 경찰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하곤 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당당하게 말한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계속 좋아하겠다 말한다. 시보들도 좋았지만 제일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사수 오양촌. 실제로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성질 더럽다며 멀리 했겠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불같은 사람. 겉은 활활 타오르지만 실은 가슴 속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계란 하나를 품고 사는 사람이다.

 

  7화의 부제 한 줄이 이 드라마 전체를 설명한다.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는 길을 함께 가주는 사람.' 좋은 파트너들이 대거 등장하는 드라마다. 매화 좋은 기운을 받으며 '안겨만 있을게요' 시기를 지나왔다. 끝의 몇 화는 지안이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울었다. 아, 너무 좋은 드라마잖아, 하면서. 저 부제는 너무 좋아서 사진으로 찍어뒀다. 지금 육아를 하고 있는 우리를 설명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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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다운

from 티비를보다 2021. 7. 21. 06:00

 

 

  조리원 입성 첫날 울었다. 의지했던 남편을 2주동안 만날 수 없고 낯선 곳에서 생애 처음 해보는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사실이 턱 밑까지 부담으로 다가왔다. 조리원 일정은 간단했다. 코로나 때문에 프로그램은 진행되지 않았다. 수유와 아침, 점심, 저녁식사. 마사지가 있는 날이 있고 없는 날이 있었다. 수시로 수유를 해야했고 아침과 저녁에 모자동실 시간이 있었다. 아침식사 뒤에는 생과일주스가 점심식사 뒤에는 두유를 곁들인 간식이 나왔다. 야식으로는 호박죽. 수유는 각자 방에서 했고 식사는 칸막이가 설치된 식당에서 다같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겠는데 당시에는 이유를 몰라 답답했다. 배고프다고 울어대며 방으로 들어온 아이는 젖을 물리자마자 잠들어버렸다. 이번엔 제대로야, 양껏 먹여 보냈어, 점점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 싶었는데 30분도 되지않아 신생아실에서 콜이 왔다. 탕이가 배고파하네요. 보충할까요? 원장선생님이 가끔 와서 자세를 잡아주고 방법을 알려주셨지만 계실 때는 잘 되던 것이 혼자 있을 때는 되지 않았다. 아기와 함께 끙끙대며 시간을 보내다 낙심하며 신생아실에 데려다 주는 일상이었다. 

 

  마사지를 받는데 옆의 분이 말하더라. 삼일 정도까지는 진짜 우울했어요. 3일이 지나자 적응되나 싶었는데 그 뒤부터 시간이 쏜살같이 가는 거예요. 퇴소를 앞둔 분이었다. 정말 맞았다. 삼일까지 매일 울었더랬다. 외로워서. 수유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밤에 잠을 잘 수 없어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답답해서. 그 3일동안은 식당에서 말없이 밥을 먹었더랬다. 4일째 되는 날이었고 점심시간이었다. 조금 늦게 갔더니 늘 앉던 자리에 그 날 입소한 분이 앉아 있었다. 다른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국을 한 술 뜨니 앞의 분이 말을 걸어왔다. 첫째세요? 수술하셨어요? 아프진 않으세요? 병원이 어디였어요?

 

  그렇게 앉은 네 사람이 밥멤버가 되었다. 물론 그 날 입소한 누군가가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곳에 가 앉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첫째세요? 자연분만이요? 많이 아프시죠? 병원이 어디예요? 실밥은 풀으셨어요?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조리원 생활이 점점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세 끼를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겉으로 봤을 땐 다들 잘 하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들 서툴렀고 (심지어 둘째 엄마까지) 다들 몸이 조금씩 아팠고 다들 수유가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조리원 후의 생활을 걱정하고 있었다.   

 

  '2개월 된 아기를 키우는 오드리' 라는 문구에 이끌려 보게 된 <렛다운>은 그런 드라마였다. 육아교실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육아교실 첫 날, 오드리는 수업을 듣다 중간에 일어난다. 오드리는 자신의 죽을 뻔 했던 출산경험을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고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매일 밤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기 싫었다. 자기는 혼자 잘 할 수 있다며 이런 육아교실 따위는 필요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하지만 다음 수업에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죽을 뻔 했던 출산경험을 공유하고 매일밤 잠 못드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차를 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다들 문제 없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것을 서로 공유하기 시작하며 나의 생활이 괜찮아진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된다. 

 

  드라마 마지막 회. 네 아이를 키우며 알코올에 의존하는 바버라는 술을 멀리 하기 위해 매주 한번씩 댄스홀을 찾는다. 그리고 육아교실 친구들을 부추겨 함께 춤을 추러 가자고 한다. 친구들은 바버라 덕에 오래간만에 모이고 댄스홀 앞에서 근황을 나눈다. 오드리는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임신을 해 결국 둘째를 낙태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자신의 몸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무척 힘이 들었다. 비난받을까 겁났고 자신이 엄마 자격이 있을까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서 함구했다. 그러다 술을 잔뜩 마신 어느 날 남편과 이야기를 한다. 남편은 누군가와 이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다. 그 뒤 엄마에게도 털어놓고, 육아교실 선생님께도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 날 댄스홀 앞에서 친구들에게 갑자기 말해버린다. '그냥 자기들한테 말하고 싶었어. 털어놓으려고 했었거든. 오랫동안.' 친구들은 괜찮다며 자기도 했었다고 말하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다독여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함께 울어준다. 어제 설거지를 하다 생각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였구나. 털어놓으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질 수 있다고. 그러니 혼자서 끙끙대지 말자고. 함께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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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리틀 라이즈

from 티비를보다 2020. 10. 11. 18:08

 

 

   시즌 1을 끝내고 '몬터레이'를 여러 번 검색해 봤다. 이 드라마에는 니콜키드 만, 리즈 위더스푼 등 화려한 스타들이 줄이어 등장하는데 그들보다 나는 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오는 마을의 분위기에 마음을 뺏겼다. 몬터레이는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항구도시로 옛 건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고 자연경관이 뛰어나며 일년 내내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어 해안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된 재즈 축제가 열리고, 유명한 수족관도 있는 곳이란다.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사는 어마어마한 저택 뒤로, 혹은 앞으로 몬터레이 바다가 보인다. 집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바다가 연결되어 있어 백사장을 밟을 수 있기도 하고, 집 안 수영장에서 바다를 내다볼 수도 있다. 통유리창인 안방에서 파도가 생생히 느껴지기도 한다. 등장인물 모두가 거의 어마어마한 부자들인데 유일하게 형편이 좋지 않은 제인도 답답한 마음이 생길 때마다 항상 바다로 나간다. 이어폰을 끼고 백사장을 달리거나 파도가 무성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드라마 속 몬터레이 바다는 강하다. 파도가 바위를 향해 힘차게 몰려와 세차게 부서진다. 미련없이, 거침없이. 꼭 동해 바다같이.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그들도 그렇게 거침없이 돌진하는 파도를 매일 들여다보면서 힘을 냈는지도 모른다.

 

    어제 시즌 2 마지막회를 봤는데 엉엉 울고 말았다. 그동안의 드라마 전개상 울지 몰랐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터졌고 멈추지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잘 살고 있든 못 살고 있든 지금의 내가 된 것에는 반드시 과거의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말해준다. 그게 아낌없이 받았던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버틸 수 없이 힘들었던 상처일 수도 있다. 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던 아득함일 수도 있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도 한번 무릎이 꺽이게 되면 그 상처들이 어김없이 튀어나오니 상처가 났을 때 소독을 잘 하고 약을 잘 바르고 치료를 잘 해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그걸 인정하고 사과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외롭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모이면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안의 아픈 어린아이를 잘 위로하고 보듬어주고 웃으며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울고나니 개운해졌다. 이제 그녀들은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아, 이 드라마 음악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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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독

from 티비를보다 2020. 1. 3. 10:36

 

     
   금요일 밤이니 한 잔 해야했다. 간만에 의왕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후기가 좋아 찜해두었던 시장 안 통닭집에 갔다. 오래 장사를 했다는 평에 비해 인테리어가 세련되어서 주문하고서 맛을 의심했었다. 일단 생맥 맛은 합격. 혼자서 일을 하는 직원도 친절하진 않지만,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서비스 과자 맛도 좋았다. 통닭은 반반을 시켰는데 후라이드에서 카레맛이 은근하게 났다. 좋아하는 광화문의 통닭집도 반죽에 카레가루를 쓰는데. 의왕역의 이곳도 맛이 괜찮았다. 오백 두 잔을 신나게 마시고 통닭이 조금 남아 포장해달라고 했다. 그러고도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뜨끈뜨끈한 오뎅탕을 먹을 참으로 근처 이자카야에 갔다. 옆 테이블이 무척 시끄러워서 괜히 왔다 싶었는데, 기본 안주가 줄줄이 나왔다. 괜찮은 거 같다 싶었을 때 나온 오뎅탕도 푸짐했다. 결국 배가 불러 맥주 한잔만 마시고 포장해서 나왔지만 1차로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다. 기본 안주로 나온 방울 토마토도 휴지에 고이 싸 집에 가지고 왔다. 집에 와 3차를 하자며 동네 편의점에서 산 만원짜리 까바를 땄지만 오백을 세 잔이나 마시고 월화수목금요일을 보낸 마흔의 나는 곧 골아떨어졌다.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지고는 있지만 아침 여섯시가 마지노선인 평일의 나 덕분에 주말의 나도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다. 주말이면 늦잠을 늘어지게 자는 옆사람을 두고 거실로 나왔다. 어젯밤 시도했던 3차의 흔적을 치우고 티비를 켰다. 서현진이 나오는 드라마 재방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에서 꽤 괜찮다는 말을 들은 참이어서 한번 봐볼까 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누웠다. 그러다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결국 정자세로 드라마 정주행을 했다. 그러는 동안 옆사람이 일어났고, 광고시간에 둘이서 후다닥 밥을 차려 먹었다. 그러고 옆사람은 요새 한창 빠져있는 <스토브리그> 재방을 보러 방에 들어갔다. 그 토요일 오전에 나는 이 드라마를 4회까지 보았는데 (아직까지 1회 초반을 못 보고 있다 ㅠ) 매회 울었다. 매회 감동 포인트가 있었다. 이 놈의 세상,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진이 힘을 낼 때! 마음 깊은 속에서 우러난 응원을 했더랬다. 라미란은 매회 얼마나 멋진 여성이던지. 그야말로 츤데레. 라미란의 이 대사가 어쩐지 계속 생각이 난다. 자기는 낙하산이라도 실력이 뛰어나다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일본의 게임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왔지만 마리오 게임을 개발해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한 사람이 있다고. 외삼촌 빽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실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도 않지만) '소문난 낙하산' 서현진이 포기하지 않고 방학기간 동안 매일 출근을 하며 개학 준비를 하고, 두려운 마음을 움켜잡고 아무도 없는 교단 앞에 서 있었을 때,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 결국 누군가가 알아봐 줄 사람. 고하늘 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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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

from 티비를보다 2019. 10. 10. 22:17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는 거의 옆사람이 먼저 퇴근해 있고, 내가 여덟시 즈음에 집에 도착한다. 살이 찌고 있는 심각성을 깨닫고 있지만 그래도 아쉬워 뭔가 간단하게 하거나 시켜서 먹는다. 저녁에는 항상 티비 앞에 상을 펴놓고 나란히 앉아 먹는다. 한글날을 앞둔 화요일 밤, 그러니까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공휴일을 앞둔 아주아주 신나는 밤에 멕시카나에 치킨을 시켰다. 후라이드 반, 양념 반. 맥주를 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 되냐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했다. 멕시카나 주인분이 말씀하시길, 뜨근뜨근한 치킨과 함께 배달하면 미지근해져서 그런지 맛이 없다는 항의가 많이 들어와 이제 맥주는 배달하지 않는단다. 아쉽지만 냉장고에 친구가 주고 간 맥주가 있으니까. 따끈따끈한 치킨에 각자의 맥주와 소주를 따라놓고 티비를 봤다. 큰 자기와 작은 자기가 나오는 유퀴즈온더블럭. 한글날 특집이라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문해학교라는 곳을 찾아갔다. 글자도 모른채 한평생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교육을 받는 곳이었는데 학구열이 엄청났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했다. 오래오래 건강해서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 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긴 시간을 걸려 통학을 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할머니는 가난해서 어릴 때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야했고 그 때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고 했다. 살면서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금 이렇게 배울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부부는 글자를 몰라 식당에 가도 어느 식당에나 있을 평범한 메뉴 백반만 시키고, 외식도 잘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는 햄버거도 주문할 수 있다고 커다랗게 웃었다. 긴 인터뷰 끝에 큰 자기와 작은 자기는 할아버지에게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자음과 모음을 연결해서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 전에 인터뷰한 사람들은 쉬운 단어들을 골랐었다. 사랑, 정 이런 것들. 그런데 할아버지의 단어는 좀 어려웠다. 모두 세 글자였고, 두 글자를 만들자 큰 자기와 작은 자기, 그리고 우리는 알아차렸다. 마지막 글자가 '순'일 거라는 걸. 박묘순. 할머니의 이름을 할아버지는 천천히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 그때부터 우리 두 사람의 눈물샘이 터졌다. 티비를 보다 나 혼자만 울어댄 적은 있어도, 같이 운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어서 할머니는 '사랑'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만드는 것 같았는데, 그 뒤의 글자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할아버지의 단어 때문에 울었던 제작진이 할머니의 모음과 자음이 모자라는 지경까지 되자 웃기 시작했다. 티비를 보던 우리도 울다가 웃었다. 할머니의 단어, 아니 문장은 이것. '사랑하는 우리 신랑 너무너무 사랑해요. 행복하게 삽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께 살면서 힘든 시기가 많았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잘 버티고 견뎌왔으니 이렇게 서로가 소중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영어공부부터 시작해야겠다!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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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테마기행

from 티비를보다 2019. 2. 19. 21:09



   절반의 성공이다. 목표했던 바에 크게 못미치지만, 그래도 지난 번보다는 나아졌다. 1월의 헬스 이야기. 한달치만 끊어서 다시 끊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데(탈의실 누수로 일주일이 연장되었다), 고민이다. 요가같은 GX가 있는 헬스장으로 끊고 싶은데, 집앞이 아니면 잘 가지 않을 것 같아서. 헬스를 끊고 처음 첫주를 부지런히 잘 다닌 것은 오지은 덕분이다. 오지은이 출연한 세계테마기행 때문. '기차를 타고 구석구석, 우리가 몰랐던 일본'이 이번 여행의 테마였다. 오지은이 안내하는 일본 구석구석을 함께 걸으면서 보려고 시간에 맞춰 길 건너 헬스장에 갔다. 헬스장에 입장해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고, 운동복을 받아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와, 물 두 컵을 재빠르게 마시고, 러닝머신 위에 서서 티비를 켜고 EBS를 틀고, 이어폰 연결, 러닝머신의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목표했던 40분이 지나도 프로그램은 끝나지 않아서 더 걷는다. 50분이 지나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1분 정도 더 걷다가 내려온다. 다리가 살짝 후들거리고,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뿌듯한 시간. (아, 젠장. 이 뿌듯함을 약 2주 전에 마지막으로 느껴보았구나.)


   오지은은 튼튼한 등산화를 신고, 단단한 잠바를 입고, 때때로 따뜻한 모자를 쓰고서 일본 이곳저곳을 걸었다. 인상적인 장면들을 집에 오면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뒀다. 첫 날 방송의 이런 장면. 시골민박집을 나오는 오지은의 손을 잡은 주인 아주머니. "아이고 손이 작네요." 오지은의 말, "일을 많이 안 한 손이라 죄송합니다." 둘째 날 메모. "오지은은 온천에 몸을 담근 뒤 말했다. 온천은 힘든 일을 하고 난 뒤에 받는 상 같다고. 힘든 일이 많았던 날 더 좋다고. 눈이 폴폴 날리기 시작했다." 둘째 날 방송에 아침시장에서 해산물과 회를 사서 뜨거운 밥에 얹어 먹는데, 회를 와사비 푼 간장에 미리 이리저리 적시고 얹이더라. 맛나보였다. 셋째 날에는 이런 메모를 했다. "아직 꽤 많이 남은 은행나무의 노오란 잎과 펄펄 날리던 눈, 신비로웠던 분위기. 쥬니코 호수, 9미터인데도 안이 내려다보이는 호수, 다른 색은 다 흡수하는데, 파란색은 흡수하지 못해 샛파랗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가이드 할아버지의 설명. 360도 바다. 현지인만 아는 명소. 왼쪽도 오른쪽도 바다. 민박집의 푸짐한 식사. 구마모토는 지지 않아! 인기 없는 가수 힘내세요! 인기 있을 때까지 힘내세요!" 그리고 딱 50분 러닝머신 위에서 걷고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눈이 날리고 있었다. 마지막 날, 오지은은 "코모레비"를 말했다.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라는 코모레비. 코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뜻하는 말. 스고이 보다 더 대단한 것을 뜻하는 일본말도 했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나네. 그리고 이 모든 여행의 마지막에 오지은의 노래 '작은 자유'가 흘러나왔다. 


   "너와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네.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름다운 것들을 같이 볼 수 있다면 좋겠네. 작은 자유가 너의 손안에 있기를, 작은 자유가 너와 나의 손안에 있기를, 너의 미소를 오늘도 볼 수가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계속 볼 수 있다면 좋겠네. 니가 꿈을 계속 꾼다면 좋겠네. 황당한 꿈이라도 해도 꿀 수 있다면 좋겠네. 너와 나는 얼굴은 모른다 하여도 그래도 같이 달콤한 꿈을 꾼다면 좋겠네." 


   그나저나 헬스 빨리 등록하여야겠다. 날씬해지면 좋겠네- 



* 코모레비(こもれび) :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네이버 일본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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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오랜만에 편지 드립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회사를 그만둔 후 전혀 예상도 못했던 가게를 시작하고 시간은 어느새 물 흐르듯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만남도 조금은 쓸쓸했던 헤어짐도 있었습니다. 오래전 몇 번이나 이 마을에서 벗어나려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태어난 후 줄곧 집에만 머물렀던 자신이 답답하고 화가 나서 풀죽어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랬던 저에게서 갑작스레 어머니가 떠나시며 내치듯 혼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왔던 장소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간 가운데 저는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날 묶어두었던 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선생님, 저는 너무 진지하기만 했습니다. 이제부터 조금 불량해지렵니다. 자신이 먼저 자유로워져야 다른 이들과의 시간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좋아하는 대로 가게를 해 나가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불량한 사람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를 다시 찾아주세요. 분명 무언가가 변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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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이어 '변한다', '변하고 있다', '변했다' 라는 말에 마음이 들뜬다. 물론 그 앞에 '좋은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인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가 붙는다. 이 말에 마음이 들뜨는 이유는 좀더 좋은 사람으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변하고 싶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 만삭인 임산부가 식사를 하고 갑자기 잠이 쏟아져 주체할 수 없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만삭도 아니고, 임산부도 아니지만 지난 일요일에 잠이 쏟아져서 예매해뒀던 두 편의 영화를 취소했다. 그리고 잠이 쏟아지는 사이사이에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를 다시 봤다. 다 보고 나니, 드라마는 이런 이야기더라.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처럼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없을까봐 두렵다. 어머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어머니와 나는 절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면 되는 거다.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다. 좋은 이야기는, 그것을 마주하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것이 내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는 이유이다. 오늘도 야근을 했지만, 내일은 금요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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