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341건

  1. 최초의 한모금, 에비수 맥주박물관 2 2014.10.12
  2.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2 2014.10.03
  3. 순간의 꽃 2 2014.09.28
  4. 가장 잔인한 달 2 2014.09.27
  5. 이 고도를 사랑한다 6 2014.09.15
  6. 꿈꾸는 하와이 2 2014.08.31
  7. 내 누나 4 2014.08.11
  8. 마음이 풀리는 작은 여행 2 2014.08.10
  9. 잠깐 저기까지만, 2 2014.08.10
  10. 도쿄의 북카페 2 2014.08.02

 

    도쿄는 흐렸다. 여행 첫날이었다. 이른 아침에 인천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낮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도로 흐렸다. 그래서 걷기 좋았다. 비도 오지 않았고, 원래 흐린 날을 좋아하기도 하고. 넥스를 타고 고탄다에서 내려 1시간 넘게 기다려 스테이크를 먹고, 메구로의 숙소로 이동했는데 Y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감기가 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날의 원래 일정은 고탄다에서 함박스테이크 런치를 먹고 (우린 늦어서 런치를 못 먹었지 ㅠ), 메구로 숙소에 짐을 풀고, <최고의 이혼> 배경지 나카메구로를 걷고, 부유한 동네라는 다이칸야마를 구경하고, 에비스에서 저녁으로 유자라멘을 먹는 것. 아, 에비스 전에 일정이 있었다. 에비수 맥주박물관에서 갓 나온 신선한 에비수 생맥주를 마시는 것. 결국 언니는 다음날 일정을 위해 숙소에서 몸을 추스리기로 하고, 나 혼자 길을 나섰다. 언니에게서 에비스 가는 방향 설명을 들었다. 숙소 앞에서 길을 건넌 뒤 쭉 직진을 하다 우회전을 하면 된다고. 언니 말대로 쭉 직진을 하다 나타날 때쯤 됐는데 생각이 들었을 때 우회전을 하니 가든 플레이스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가이드북 지도를 보고 맥주박물관을 찾아가는데, 지도에 있는 건물들이 나오지 않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헤매다 어떻게 할까 용기내서 경비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나타났다. 맥주박물관!

 

    말이 박물관이지 그리 크지 않았다. 오래된 맥주병, 잔들을 훑어보고 바로 테이스팅 살롱으로 이동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곳에서 갓나온 신선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 했다. 지난 오사카 여행에서 남은 동전 400엔을 넣고 에비수 코인으로 바꿨다. 코인 하나에 생맥주 한 잔씩을 마실 수 있다. 스테이크를 먹고 얼마되지 않은 터라 안주 없이 맥주만 마시기로 했다. 에비수 프리미엄 맥주와 에비수 흑맥주를 반씩 섞은 프리미엄 믹스로 주문했다. 고레 히또쯔 구다사이. 맥주를 주문 받으면 그 맥주에 맞는 컵받침을 준다. 그걸 옆 맥주대에 보여주면 거기에 맞는 맥주를 따라서 짠-하고 올려준다. 따르는 걸 봤는데, 맥주거품이 넘치도록 따른 후에 자 같은 물건으로 거품을 맥주 잔에 딱맞게 잘라낸다. 그리고 컵 주위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고 건네준다. 한 잔을 들고 구석자리에 가서 앉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높았다. 거기서 맥주를 마시며 이 책을 읽었다.

 

    먹거리의 추억.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먹었는가?

    잊어버린 기억이 더 많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도 많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그날이 특별한 날이었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콜라를 처음으로 마신 날도, 흔하고 흔한 여름날의 오후였다. 

   친구가 살던 단층의 연립주택.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부엌. 그대로 선 채 콜라를 마셨던 환상적인 그날의 나. 옆에 있던 친구도, 친구의 어머니도 수다를 떨며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름날에 누군가가 함께 웃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쌓여 과거가 되는 것이기에 그 날, 아무것도 아닌 날에 웃고 있던 예전의 나를 추억하게 해 주는 콜라의 존재.

    과연 작았을까?

    오히려 최초의 한입은 미래의 자신에게 용기를 복돋아주는 커다란 한입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p. 214-215, 끝내면서.

   

    끝내면서, 부터 읽었는데, 이 부분을 읽고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벌써 취한건가, 생각하며 높은 테이블에서 내려와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환전한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자판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이번 코인으로는 퍼펙트 에비수를 주문했다.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두번째 맥주를 받을 때 조그맣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했더니 뭐라고 한마디를 더 해준다. 흑. 그렇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코인을 받는 총각이 잘 생겼었다! 두번째 맥주를 마실 때는 이어폰을 꺼내 김동률을 들었다. 그리고 구석 높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혼자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자도 있었고, 나랑 같은 가이드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도 있었다. 그 한국인 무리는 두 명이서 맥주 한 잔과 두 잔을 각각 마시고 떠났다. 책을 읽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내 앞에 또 있었는데, 그 사람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등이 좀 외로워보였는데, 쓸쓸해보이지는 않았다. 그 미묘하고 기묘한 차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렇게 두 잔을 마시고 가든 플레이스의 야경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시간 전만 해도 생소했던 길이었는데, 한 번 걸어봤다고 익숙해져 버린 그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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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떠나보내며, 잊지 않으려고 옮긴 구절들.

 

   리장 고성이 유명해진 건 지진 때문이다. 1996년 리장이 속한 윈난성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리장 고성 내의 전통 가옥들은 아무런 피해없이 멀쩡했다. 발 빠른 중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리고자 리장 고성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1999년 이에 화답하듯 유네스코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부터 대대적으로 진행된 개보수 끝에 리장 고성은 관광지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관광지로 거듭났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그 무서운 버스를 타나 했는데,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버스에서의 무용담과 그 끝에 찾아낸 보물에 대해 조잘대는 엄마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다. 엄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한다. 이들이 저만치에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요리조리 참 잘도 돌아다닌다. 과연 엄마의 호들갑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리장 고성은 소문대로 무척이나 아름답다.

    맨질맨질한 돌담길이 미로처럼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데, 워낙 곳곳이 아름다워 발걸음을 딛는 곳마다 모두 옳은, 나만의 길이 된다. 고풍스런 기와지붕이 여기저기 넘실대고, 깜찍한 수로들이 부지런히 골목골목을 휘감아 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을까 싶은 키 큰 버드나무는 우아하게 몸을 흔들며 우리를 유혹한다. 더불어 골목 어디에나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은 세상의 모든 색을 늘어놓은 듯 화사하다.

   너무 인위적이라느니 너무 관광지화되었다느니 말도 많은 곳이지만, 그 모든 말이 시샘처럼 느껴질 정도다. 딱 봐도 리장은 원래 미인이다. 민낯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자기를 보러 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살짝 분을 찍어 바른 것뿐이다. 한참을 걸은 끝에 찾아낸 숙소마저 마음에 쏙 든다. 짐을 풀기 무섭게 엄마가 여전히 상기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는다.

   "아들, 가능한 한 여기에 오래 머물자."

-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 p.72-73

 

    <엄마, 일단 가고봅시다!>와 <엄마, 결국은 해피엔딩이야!>를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남았던 구절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엄마와 아들의 해외여행은 장장 300일간 이어지고 런던에서 그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리장은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만난 여행지이다. 빠른 여행 속도와 불편한 환경에 지쳐갈 즈음 도착한 곳. 엄마와 아들은 리장에서 바램대로 오래 머물며 심신을 회복한다.

    그리고 리장에서 예순 살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일이 막 궁금해져."

 

    엄마와 아들은 몇년 뒤 다시 여행을 떠났다. 엄마가 그렇게 바랬던 남미로. 현재 여행 중이고, 작가의 블로그에는 매일매일 그날의 이야기가 업데이트된다. 책으로 엮어질 그들의 남미 이야기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종류의 여행의 꿈을 키워줄 고마운 책에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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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꽃

from 서재를쌓다 2014. 9. 28. 22:01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소쩍새가 온몸으로 우는 동안

별들도 온몸으로 빛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내가 버젓이 누워 잠을 청한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

 

여보 나 왔소

모진 겨울 다 갔소

 

아내 무덤이 조용히 웃는다

 

*

 

이런 시들에 포스트잇을 하나 둘 붙이다 시집이 포스트잇으로 너덜너덜해졌다.

박웅현은 이렇게 말했단다.

"처음 읽고 줄 친 게 열 개였어요. 그다음에 다시 읽었더니 스무 개로 늘구요. 다시 읽었더니 오십 개로 늘어요. 그런 책입니다."

아, 나는 세월이 지나고 다시 읽게 되면 시집 전체에 포스트잇을 붙이게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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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from 서재를쌓다 2014. 9. 27. 16:12

 

 

    여름의 시작 즈음, 내게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 곳은 캐나다 퀘벡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세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곳. 이름하야 스리 파인스. 조용하고 평화롭고 화목해보이던 이 작은 마을에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사연이 있어 폐가가 되어버린 저택 안이었고,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은 사람을 불러내는 교령회 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교령회 도중 갑자기 죽어버렸다. 공포에 질린 채. 모두가 심장마비일 거라 추측했지만, 마을에 나타난 그는 그녀가 살인을 당한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수사를 진행한다. 그는 바로 가마슈 경감.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 옆에 있으면 어리석고 서투른 존재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가마슈 옆에 있으니 온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 365

 

    나를 스리 파인스로 초대해 준 사람은 이 책을 이렇게 소개했다.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럽고 따듯한 추리소설.' 두꺼운 책이라 자주 들고 다니지를 못했다. 조금씩 천천히 읽었다. 그렇게 읽혔다. 흠. 살인사건을 하나의 조그만 점이라고 생각하자. 점은 짙은 녹색이다. 그 점이 하얀 종이 중간에 찍혀 있다. 그 위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조그만 양의 잉크가 천천히 종이의 가장자리까지 퍼져간다. 마침내 진녹색 점은 커다랗고 옅은 민트색의 무늬가 되어 종이를 꽉 채운다. 그게 이 이야기이다. 그 무늬 속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감정은 소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던 '슬픔'. 자극적인 사건보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감정들, 그 감정을 갖기까지 살아온 각자의 시간들에 집중하는 소설이라 생각보다 읽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지막 반전에 흥분되어 뒷부분은 후다닥 읽었지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마침내 머나에게 다시 눈을 맞추며 가마슈가 말했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과 연민이 제일 이해하기 쉬워요. 연민은 교감을 필요로 하죠. 고통받는 사람과 동등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요. 하지만 동정은 달라요.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갖는 거라고 할 수 있죠."

   "두 감정은 서로 잘 구별이 잘 안 되는데요."

   "정확한 지적이에요. 감정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도 구별이 어렵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연민을 느낀다고 주장해요. 연민은 숭고한 감정 중 하나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건 동정이에요."

- p. 336-337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머릿 속에서 종이 울렸다. 아, 맞지. 그렇지. 늘 느꼈던 어떤 미묘한 감정이 몇 줄의 문장들로 논리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동정과 연민. 이 두 감정에 대한 정의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소설의 범인이 평생 느껴왔던 감정이기도 했고,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느낌을 당해왔던 것이기도 했다. 이 문장들을 읽고 나자 나는 이 작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스리 파인스라는 마을의 광장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다는 거요." 

   "아닙니다. 이 마을은 미국독립전쟁 당시 미국에서 국경을 넘어 도망온 연합제국 왕당파들이 세웠습니다. 그땐 다 숲이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가마슈가 그녀 옆에 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마을과, 마을 너머의 울창한 수풀을 바라보았다.

   "왕당파들은 언제 안전해질지 확실히 알지 못했죠. 그래서 암호를 만들었습니다. 빈터에 세 그루 소나무가 있으면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안전하다는 뜻이군요." 잔이 말했다. 그녀는 나른해 보였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가 속삭였다.

   가마슈는 부드러운 황금빛 태양 아래 서서 잔이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 p. 236-237

 

    작가 소개에 따르면 가마슈 경감이 등장하는 가마슈 시리즈는 벌써 10편이 출간되었단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캐나다에서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단다. 이 소설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데, 물론 이 책만 읽어도 별 무리는 없지만 시리즈의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장부터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과 안면을 익히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1, 2편의 배경도 스리 파인스이고,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등장한다고. 내게 스리 파인스 초대장을 친절하게 보내준 고마운 사람은 이 책을 옮긴 이. 다 읽고 정중하게 하려고 감사 인사를 아직도 하지 못했는데. 고마워요. 덕분에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어요. 보내준 말처럼,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달만이 가득하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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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되고 경주를 세 번 갔다. 한 번은 무더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불국사 길을 걸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문무대왕릉을 보러 갔다. 그리고 올해 늦여름. 부산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날, 경주에 있었다. 비를 쫄딱 맞으며 양동마을을 걸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왔더니 딱 때를 맞춰 이 책이 출간되었다. 마침 옛다, 읽으렴, 이라는 듯.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 경주를 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니 나는 아직도 경주를 모른다. 하긴 소개팅을 해도 세 번을 만나고 더 만날 사람인지 그만 만날 사람인지 알 수 있듯이. 이제 나는 겨우 경주의 마음에 든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더 친해질 일이 남았다. 깊어질 일만 남았다. 때론 토라질 일도 있겠지만. 책은 경주에 정착하게 된 소설가가 꽃피는 봄에, 능의 풀이 무성한 여름에, 벼가 익는 가을에, 그리고 겨울에 경주의 이곳 저곳, 이 골목 저 골목을 산책한 뒤 쓴 글들이다.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다녀온 곳보다, 갈 곳이 더 많았다. 생각보다 많은 곳을 가지 못했더라. 앞으로 더 많은 곳을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뻤다. 경주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칠레의 시인 네루다는 "꿈의 궁전에서 살듯이" 아름다운 지명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꿈은 시인의 특권이라 싱가포르, 사마르칸트에서는 지명의 발음을 음미하며 살았다고 한다. 매혹적인 지명이 분명 있으니 나는 전에 '아스파한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단편을 읽고 아스파한을 오랫동안 꿈꾸었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도 나를 사로잡았던 이름이어서 '라사'를 제목으로 넣어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신라라는 옛 이름을 불현듯 떠올리고 뒤늦게 몸을 돌린 것은 인도 여행 뒤다. 농경민의 후예처럼 좁은 땅에 붙박여 살다가 인도의 드넓은 대륙에서 삶의 본질을 보고 경주로 향했다. 자연인 듯 이지러져 천오백 년 전 고분이 도심에 솟아 있는 풍경은 근원적이었다. 김씨 왕들의 거대 능을 산책하며 내 속에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고, 비로소 한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신라라는 찬란한 이름을 만나기 전 나는 디아스포라였다. 경주는 모태와 같으니, 이 책은 유목민의 금빛 꿈이 묻혀 있는 고도에서 발길 닿는 곳마다 길어올린 사색의 우물이다. 나와 우리들의 뿌리에 대한 소박한 찬미이다.

 

   신라- 당신도 시인처럼 이 아름다운 발음을 음미해보라.

- p. 6-7

 

 

    그래, 내가 경주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처음도 능 때문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의 조그만 한 극장 안이었다. 그 날 추상미가 나오는 독립 영화를 봤다. 추상미가 서울에서 내려와 친구 차를 타고 경주 시내로 들어갔는데, 곳곳에 커다란 능이 있었다. 우회전을 할 때도, 좌회전을 할 때도 고운 선이 보였다. 그때부터 반했다. 경주의 고운 능선에. 신-라-. 신-라. 발음해보니 능 위로 조그만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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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하와이

from 서재를쌓다 2014. 8. 31. 22:29

 

 

 

 

 

 

 

   

 

    하와이로의 여행을 꿈꾸게 됐다. 훌라춤은 어디서 배울 수 있나 검색해봤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진정한 훌라춤의 의미를 알게됐다. 훌라는 하와이의 자연을 표현하는 춤이었다. 하와이의 바다, 하와이의 바람, 하와이의 파도. 요시모토 바나나가 여행한 하와이의 이곳저곳,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 하와이는 정말 좋은 곳이구나, 생각하게 됐다. 예쁜 책이다. 작가의 친구가 찍은 사진이라는데, 사진들이 참 좋다. 에메랄드 빛 바다 속, 해질녘의 환상적인 노을, 해진 후 근사한 밤의 풍경이 글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마지막에 요시모토 바나나가 말한다. "여러분도 인생을 사랑하세요. 단 한 번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잊힐 만 할 때, 하와이는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서 만나러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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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

from 서재를쌓다 2014. 8. 1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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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저기까지만,>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작은 여행들이 나온다. 마스다 미리는 어디선가 이곳이 좋더라는 정보를 접하고 어디 그럼 한번 가볼까 하고 훌쩍 떠난다. 혼자서,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이 책에서는 편집자 네코야마 씨와 주로 떠난다. 마스다 미리가 여기가 좋다고 하던데 한번 가볼까요 하면, 네코야마 씨는 재빠르게 정보를 수집한 후, 여기 뭐가 좋고 이렇게 가면 된대요 하고 동참하는 것. 후기에서 마스다 미리는 밤새 춤을 춘 구조하치만 여행과 교향곡 9번 합창곡의 즐거운 체험이 특별히 더 좋았다고 꼽았지만, 내가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여행은 해파리 여행이었다. 신에노시마 수족관의 숙박 나이트 투어. 수족관 구경도 하고, 전시실 안에서 저녁도 먹고, 전시실 안에서 잠도 자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이 국내에도 있다면, 당장 신청하고 싶어질 정도. 마스다 미리는 한밤의 해파리를 마주하고 늘 그렇듯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간다.

 

    빌린 담요를 펴고 어슴푸레한 해파리 수조를 바라보았다. 한 명씩 잠에 빠져들었고,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한밤중에 눈을 떠서 휴대전화를 보니 새벽 2시였다. 몇 명은 의자에 앉아 해파리를 보고 있었다.

    나도 해파리를 응시했다. 움직임이 확실히 둔했고, 해파리도 밤인 걸 아는지 얌전했다. 마치 심장박동처럼 해파리는 몸을 펼쳤다 구부렸다 하며 물 속을 떠다녔다. 아무 생각도 없이 떠다니는 것 같아도 신기하게도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해파리는 싸우지도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며 삶이다.

    밤의 수조관에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나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생각이 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든 용서하고 언제나 착하게 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이상적인 나를 추구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의 한심함에 실망하면 무엇하랴. "해파리 나이트에 같이 갈래?" 하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나도 제법 괜찮지 않나? 이런 친구를 소중히 여기며 50대, 60대가 되는 것도 유쾌하지 않을까. 해파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해파리에 싫증이 나서 이번에는 대수조를 보러 갔다. 정어리 대가족도, 커다란 가오리도, 복어도, 쏨뱅이도, 슬로모션처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매우 아름다웠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대한 수조를 밤에는 마음껏 볼 수 있었다.

   해파리 방보다 여기에서 자는 게 더 재미있었을 텐데!

   후회하긴 했지만, 해파리도 나름대로 귀여웠다.

   해파리 나이트.

   바닥이 딱딱해서 잠자리가 불편하긴 해도 인생에서 단 한 번인 하룻밤이다. 그쯤이야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여름 끝 무렵의 신비로운 해파리 여행이었다.

- p.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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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저기까지만,

from 서재를쌓다 2014. 8. 10. 01:14

 

    원래 여행을 좋아했던 건 아닙니다. 예전에 일본에는 47개의 도도부현이 있다 하니, 전부 한번 가보자 하고, 혼자 전국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서랄까, 떨떠름하게 시작했는데, 어느새 여행은 내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은 걸핏하면 여행을 갑니다. 혼자일 때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잠깐 저기까지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갑니다.

    처음으로 혼자 외국여행도 경험했습니다. 핀란드에 있을 때의 '나'도, 평소의 '나'라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내 인생을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실감합니다.

- p.5, 시작하며.

 

    '어제까지 몰랐던 세계를 오늘의 나는 알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날 밤은 이불 속에 누우면 언제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p. 194, 마치며.

 

 

    사실, 사람들이 하는 커다랗고 화려한 여행들이 부러웠다. 내가 하지 못한 모든 여행들이 부러웠다. 좀 더 일찍 그곳들에 가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스다 미리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작은 여행이라도 괜찮아. 아니, 작은 여행이라서 좋아. <잠깐 저기까지만>과 <마음이 풀리는 작은 여행>을 연달아 읽었다. 이 책들에서 마스다 미리는 작은 여행들을 한다. 길게 떠나는 여행보다 가고 싶어질 때, 그래 한번 가볼까, 하고 훌쩍 떠나는 짧은 여행들. 그 여행길에서 먹은 것들, 한 것들, 떠오른 생각들을 써내려 간다. 돌발 상황은 거의 없다. 계획했던 대로다. 그걸 담담히 써내려 간다. 엄마랑도 떠나고, 남자친구와도 떠나고, 친구들과도 떠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혼자서도 떠난다. 기차에서 바다에 잠기는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을 발견하면 줄을 서서 얼마나 맛있는지 꼭 먹어본다. 청춘이란 지난 뒤에도 어딘가 가까이 있다가 이따금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버섯을 보고 다양한 생물이 있구나 생각한다. '즐거웠던 날이 끝나고, 언제나의 생활로 돌아와 청소와 빨래로 정신없이 바쁘네! 고맙다. 즐거운 추억이 생겼구나'라는 엄마의 문자를 받기도 한다.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다음에도 같은 여행이 될리는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도 하고, 집단에서 잘 어울리는 못하는 혼자 있는 아이를 보고 빨리 어른이라는 장소로 도망쳐 오라고, 어른이 되면 좀더 자유롭다고, 혼자 여행을 떠나도 괜찮다고 빔을 보내기도 한다. 7월에는 여러모로 우울했다. 우울한 동안 이 책을 읽었다. 이 책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8월이 되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괜찮아졌다. 그래, 이대로도 괜찮아, 라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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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북카페

from 서재를쌓다 2014. 8. 2. 08:16


 

   상암동에 맥주를 파는 작은 북카페가 있다고 해서 7월에 갔었다. 상암동 지리를 잘 몰라 조금 헤맸다. 해가 진 뒤에 도착해서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이 책 저 책을 구경하다가 요 책을 꺼내 들었다. 처음엔 심드렁하게 보기 시작했는데, 어떤 서점의 소개글을 읽고 괜찮네, 생각이 들었다. 맥주 한 잔을 더 시키고 알딸딸해질 무렵 카페를 나오면서 결국 읽고 있던 책을 그대로 샀다. 나중에 이런 카페를 해도 좋겠다, 생각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던 여름밤.

 

 

 

 

  

    카페를 나서려는데, "이거 스테디셀러인데요.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은 정말 좋아요."라며 나를 붙잡는다. 문 닫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손님들이 돌아갈 생각 없이 눌러앉아 있자 푸념을 늘어놓는 웨이터. 그러자 나이 지긋한 다른 웨이터가 '사람은 누구나 밤늦은 시간까지 자기를 감싸줄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 필요한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인 단편이다. 주인의 철학이 담긴 카페에는 정직함과 성실함이 있다.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소설 속 웨이터가 말하는 카페가 어딘지 모르게 이하토보의 모습과 겹쳐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21, 이하토보

 

   여행 관련 서적들을 들이게 된 것은 주인 부부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행광이어서다. 진열된 책들 중 '파리 책장'에는 <지구를 걷는 법>부터 트뤼포의 <영화독본>, 프랑스 가정 요리와 인테리어에 관한 책, 프랑스 문학, 거기다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까지 꽂혀 있다. 요즘은 인터넷과 가이드북을 통해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정보로는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후치가미 씨는 소파에 몸을 맡기고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는 누구라도 근사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책의 진열에 공을 들였다.

- p. 25, 트래블 북스 앤 커피 캣츠 크래들

 

   '북카페 괴담'을 들어본 적 있나요. 직원도 모르는 사이에 카페 서가에 놓인 책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한다는 겁니다.

   늘어나는 것은 대체로 카페의 단골손님인 작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이겠지요. 자주 가는 카페에 자신의 책을 몰래 끼워 놓는다나요.

    직원 허락 하에 카페의 책을 늘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작은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근처에 사는 노신사가 산 지 얼마 안 된 책을 가지고 와서 카페 서가에 끼워두고는 카페를 방문할 때마다 야금야금 읽어 내려간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책을 맡겨두는' 셈이지요. 책장에 진열된 옅은 색깔의 책들 중에서 그가 끼워놓은 실용서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만큼 조금 튀더군요.

- p. 34, 북카페의 체온

 

   THESE의 매력은 책이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베스트셀러부터 아는 사람만 아는 진귀한 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텐더들이 좋아하는 책들로 구성돼있다. 호감이 가는 부분이다. "손님들에게 권하기 쉬운 책은 역시 제가 좋아하는 책들입니다." 그렇다. 독서 바의 매력 중 하나는 바텐더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세계관을 한결 넓힐 수 있다는 점.

   예를 들어 위스키를 마시다가 "이게 스코틀랜드의 스카이 섬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졌어요."라는 바텐더의 이야기를 들으면 책장에서 그곳의 여행기나 지도를 찾아본다. 그러고나면 스카이 섬을 상상하며 '아름다운 술'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이 책에 어울릴만한 칵테일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할 수도 있다. 상상했던 칵테일이 나올지, 아니면 생각지 못한 조합의 오리지널 칵테일이 나올지.

- p. 72, 테제

 

   하늘의 별처럼 많은 주당들의 바람 중 하나는 '얌전히 취하게 하소서'이다. 맛있게, 즐겁게, 함께한 이들도 모두 유쾌하게, 다음 날 아침도 상쾌하게.

   항상 얌전히 취하길 바라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다. 그런 식으로 영리하게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주당'이라 불릴 만큼 술을 마시진 않을 테니까.

   맨 정신일 때 그렇게 얌전히 취하는 장면이 그려진 소설을 읽으면 한없이 부러워진다. 반대로 만취해 엉망진창이 된 이야기를 읽으면 '아, 나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구나'하며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늘 어찌되었든 한 잔 걸칠 나에게 책 속에 등장하는 술은 한없이 따뜻하다.

-p. 90, 주당의 마음을 읽는 책

 

    이 가게에서는 비영리 민간단체 NPO법인 자립생활 서포트센터가 제공하는 '고모레비커피'(*고모레비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을 의미한다)'를 판매하고 있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원두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로스팅.브랜딩한 커피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도 북카페의 매력이자 역할일 것이다.

- p. 99, 고엔지 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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