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깐밤을 만원 어치 샀다. 오천원 어치씩 포장이 되어 있어서 하나를 살까, 둘을 살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는 부족한 거 같아 두 개를 샀다. 집에 꿀도 있고, 우유도 있다. 며칠동안 생각한 밤잼을 만들어 보았다. 깐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한번 끓였다. 드문드문 붙어 있는 밤 껍질을 정리해 주고 으깼다. 살짝 식힌 뒤에 우유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밤이 퍽퍽해서 잘 갈려지지 않더라. 그렇게 간 밤우유를 냄비에 다시 넣고 끓였다. 꿀을 듬뿍 넣었다. 오래 끓일수록 냄비 밖으로 밤꿀우유가 튀여서 뚜껑을 덮어 뒀다. 그러다 타지 않나 뚜껑을 살짝만 열고 주걱으로 바닥을 뒤적거려 줬다. 또 덮어 두고, 또 뒤적거려 줬다. 잼을 만드는 것은 이 일의 반복이구나 생각했다. 그 시간이 은근히 길어서 그 사이 책도 몇 페이지 읽고, 티비도 보고 그랬다. 티비를 보면 정신이 팔리니, 책을 읽으면서 잼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페이지 읽고, 뒤적거려 주고, 한 페이지 또 읽고, 뒤적거려 주고. 얼추 시중의 잼과 비슷한 농도로 걸쭉해졌을 때 불을 껐다. 집 안 가득 달달한 밤냄새가 가득해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줘야 했다. 한밤 중은 아니지만, 밤의 잼이 완성되었다. 요즘 빵을 줄이려고 하고 있어서, 다음 날 아침, 우유를 몽글몽글하게 데워 밤잼을 조금 넣어 마셔 보았다. 따뜻하고 적당히 달달한 것이, 배가 든든해졌다.


   밤잼을 만드려고 결심한 것은,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몇달 전 박찬일 쉐프의 강연회를 갔다.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강연회였다. 강연회는 생각보다 지루했는데, 그 강연회에서 얻은 건 박찬일 쉐프의 추천책 목록이었다. 박찬일 쉐프는 책 한 권 한 권 설명해주면서,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오래된 고전 소설을 말하면서도 재밌어요, 전공서 같은 느낌의 책을 추천하면서도 재밌어요. 그 재밌다는 말이 참 좋더라. 그래서 나도 '재미있게'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도 그 목록에 있었는데, 제목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사 놓고는 한동안 책장에 꽂아 두었다. 어느 날, 한번 읽어볼까 하고 책장에서 꺼냈는데, 왠걸 첫장을 읽자마자 너무 좋은 거다. 어떤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 보자. 그 음식에서 느껴지는 맛을 또 떠올려 보자. 그것을 글로 써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 음식의 맛을 표현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이 분, 그러니까 히라마쓰 요코는 그걸 아주 잘 해낸다. 단번에 그 음식을 찾아가, 혹은 만들어 먹고 싶게 만든다. 음식과 그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다. 문장들이 좋다. 책을 읽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로 되돌아가 보니, 이런 소개가 있었다.


"유명 레스토랑 음식에 별점 매기는 일보다는 퇴근 후 서둘러 집에 돌아가 해 먹는 밥 한 끼의 매력, 도시 변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매일의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요리사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인정 넘치는 밥상을 손쉽게 차릴 수 있는 고유의 레시피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별거 아닌 식재료도 그녀의 미각과 손길을 거치면 마법처럼 생생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소개도. "그중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소설가 야마다 에이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제16회 분카무라 되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성 짙은 글쓰기는 탄탄한 독서 이력이 밑거름되었다. 독서에세이 <야만적인 독서>로 제28회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고."


   나는 이 책을 찬찬히 읽고, 그녀의 책 두 권을 더 주문했다.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몸이 힘들 때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다. <한밤 중에 잼을 졸이다>를 읽으면, 우리가 무심하게 먹던 밥과 소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들을 마트에 가서 함부로 고르지 말아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계절에 맞는 제철음식을 고르고 골라 그 맛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어야겠구나 생각이 든다. 이제 그만 사먹자는 생각도 든다.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과정들을 충분히 느끼면서 먹는 그 시간들을 되찾고 싶어진다. 내가 포스트잇을 붙여둔 부분에 이런 맛들이 있다. 매일 사용해서 길들이는 옻그릇, 처음 술맛을 보고 바로 따라 버린 고등학교 시절, 여름의 맛 백도, 무엇보다 내가 어떤 밥을 짓고 싶은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한 솥밥, 초여름 6시 반에 짓는 새벽밥, 밤이 열리는 계절에 변함없이 전화를 걸어 주문하는 밤과자, 냄새를 맡으면 언제나 행복한 카레카레카레, 냉장고 안 여름 맥주,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 북소리와 함께 하는 한여름의 야키소바.




  1. 오혜진 2017.11.20 00:24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책 읽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읽어봐야겠다.
    나는 얼마전에 무화과잼을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양이 나왔어요.
    주변에 무화과 먹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혼자서 열심히 먹고 있답니다.

    주말 잘 보냈어요?
    엄청 추웠는데...
    이제 겨울이려니...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서
    히트텍을 주문하려고 들어왔다가 금령씨 블로그에 왔어요.
    (하의만 입어왔었는데 올해부터는 상의도 입어야겠어요 ㅠㅠ)

    루시드폴 콘서트는 좋았어요.
    무려 사인회까지 했다는...
    코 앞에서 사인을 받는데 심장이 두근거려서 혼났어요.
    사인을 받은 책은 고이고이 간직해야겠어요. 막 굴리면서 읽지 못하겠는거 있죠 ㅋㅋ

    다시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니
    힘내요 우리.
    따뜻하게 보냅시다!!
    잘자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7.11.22 21:31 신고 BlogIcon GoldSoul

      무화과는 샀는데, 금새 흐물흐물해지더라구요. 맛나는데- 그래서 껍질 벗겨서 냉동실에 넣어뒀어요. 주스 만들어 먹을 때 하나씩 갈아 먹으려고 했는데, 계속 잊어버려요. 내일아침에는 하나 넣고 갈아먹어야겠다! 혜진씨가 만든 무화과잼은 어떤 맛일까? 달달하겠죠? :)
      좋았겠다, 루시드 폴의 사인회. 진짜 두근두근했겠어요. 뭐라고 다정하게 말도 걸어주던가요? 흐흐- 오늘은 에세이 한 챕터 꼭 읽고 자야지.
      혜진씨, 벌써 수요일이에요! 나는 요즘 추워도 전철로 두 정거장 정도는 꼬박꼬박 걸어다니고 있어요. 다이어리를 받으려고 아침커피도 열심히 마시고, 살을 빼려고 밥을 조금씩 줄이고. 아, 어제는 열풍 건조한 현미와 율무를 샀는데, 정말정말 고소해서 내일 아침에 우유에 말아먹을 거예요. 그 생각하면서 잠들 예정이에요. 헤헤- 혜진씨의 늦가을, 아니다 초겨울도 괜찮은 거죠? 히트텍 따뜻하게 입고 댕겨요! 좋은 꿈 꾸어요. :-)

  2. 2017.11.22 10:1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7.11.22 21:40 신고 BlogIcon GoldSoul

      사실 맥주는 언제나 맛있지만요. 그렇지만 맥주 중의 제일은 여름 맥주! 헤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맥주는 어디든 따라서 마셔야 더 맛있는 것 같아요. 투명한 유리잔이 최고이구요. 삿포로 클래식 맛있죠? 그렇게 특별한 맛이 아닌 것 같은데, 특별한 맛인 것 같아요. 왜 이런 게 제일 어려운 거잖아요. 평범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훌륭한 것. 아, 눈 내리는 삿포로에서의 겨울 맥주도 맛나겠네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칭따오 댓병을 무척 사랑하는 제게 녹색은 하이네켄 것이라고 이야기하시다니요. 아 ㅠ 칭따오 댓병은 사랑입니다. 흐흐- 요즘 사정이 생겨 맥주를 못 마신지 꽤 되었는데, 댓글로 맥주 얘길 하다보니 한 잔 진하게 마신 기분이에요. 캬- 잘 마셨습니다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