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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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의 일기모퉁이다방 2010. 3. 25. 14:35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꿈을 꿨는데, 이상했다. 이상했다. 그 말밖에. 이불을 개고, 얼큰한 맛 생생우동을 끓여 먹었다. 방을 쓸고, 운동화 두 켤레를 빨았다. 좋아하는 비누를 잔뜩 묻히고 칫솔로 빡빡 문질러 닦았다. 시커먼 흙탕물이 한 가득. 4월 한 달도 잘 부탁한다, 운동화야. 세탁기도 돌렸다. 창문도 활짝 열어뒀다. 분명 날이 환했는데, 청소를 하다보니 어둑어둑해졌다. 비가 쏟아졌다.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들어있는 모든 곡을 랜덤으로 재생해 놓았는데, 갑자기 김갑수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K양, 행복해지고 싶죠? 행복해지기가 쉬운줄 아십니까?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법입니다. 은호야, 행복해져라. 은호야.' 노력해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인데. 그런 법인데. 친구랑 영화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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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모퉁이다방 2010. 2. 25. 00:22
봄이 왔다. 오늘 계속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겨울이 갔다. 이번 겨울은 정말 추웠지. 정말 추웠어. 봄이 오는 건 어색하고, 징글징글한 추위였지만 겨울이 가는 것도 아쉽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딱 고 사이에 서 있는 나. 오늘은 늦게 끝났고, 좀 걸었다. 합정에서 홍대까지 걸었다. 공기는 따듯하고, 바람이 불었다. 봄바람. 아니, 초봄바람. 아니, 초봄 밤바람. 정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초봄 밤바람이었다. 홍대까지 걸어가 컵케잌을 4개 샀다. 하나는 해피버스데이. 하나는 내일 날짜를 초콜렛으로 새겼다. 내일은 지인의 생일. 그녀와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서로를 알지 못했는데, 같은 공간에 같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1월에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시러 가는 택시 안에서 우리가 그 날,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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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 끝났다모퉁이다방 2008. 8. 25. 10:53
올림픽이 끝났다. 나는 이번 올림픽을 그야말로 아주 열심히 챙겨 보았다. (재방송까지) 세상에 이런 룰의 스포츠들이 다 있단 말이야, 희안해하면서. (나는 유도가 바닥에 등을 닿으면 점수를 얻는 경기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역도의 인상과 용상의 차이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육상 계주에서 프로들도 국민학교 때 우리들처럼 바톤을 놓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몸을 따라 움직이는 근육들에 감탄하고. 선수들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쓸어 내리면서 닦을 때는 사람이 저렇게 단시간에 많은 땀을 흘릴 수 있는 동물이었단 말이야, 감탄했다. 누워서 보다가 앉아서 보는 날이 많았다. 그것도 허리를 바짝 세운 꼿꼿한 자세로. 생각 같아서는 러닝머신 위에서 선수들처럼 땀 흘리면서라도 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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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내가 받은 선물들모퉁이다방 2008. 7. 27. 23:49
택배 안에 들어있던 아빠가 동생에게 보내는 손편지. "부칠 말이 없어 적어보았지만 멋쩍어보인다." "언제나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꾸려라!" 아름다운, 아름답게. 두번이나 강조된 아름다움. 가끔씩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아름다운 시간들이라는 걸 까먹는다. 그러니 잊지 말자. 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 우리들. 편지에서 잔뜩 감동하고 편지를 싸고 있는 꾸러미를 꺼냈는데 요 귀여운 양말들이 있었다. 우쥬 플리즈 꺼져줄래 은초딩 G드레곤 은초딩이랑 지드래곤은 저렇게 안 생겼던 것 같은데. 한참을 웃었다. 등산화도 생겼다. 야호. 이건 엄마가 보내주신 것. 가을에는 산에 올라가주어야지. 아, 그리고 알록달록 땡땡이 무늬 여름가방도 생겼다. 신나게 들고 다닐께요. 언니. :) 내일부터 다시 더워진단다. 이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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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그런 꿈을 꾸었다모퉁이다방 2008. 7. 16. 23:43
어제는 그런 꿈을 꾸었다. 뺨과 뺨이 맞닿는 꿈. 팔과 팔이 맞닿는 꿈. 마주한 몸과 몸이 너무 따스해 이건 꿈이구나, 느꼈을 무렵 나는 꿈에서 깨어나려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꿈을 마주하는 아침은 깨어나기가 싫어진다. 영영 꿈 속에서만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제는 하루종일 그 꿈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꿈이란 건 붙잡고 싶다고 붙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당연하게도 그 꿈은 내 몸에서, 내 기억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나는 그 꿈의 따스했던 기운만 하루종일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꿈 속에서 그 뺨은 내게 괜찮다고 했다. 꿈 속에서 그 팔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꿈 속에서 그 몸은 내게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뺨이, 그 팔이, 그 몸이 나를 위로해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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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삼겹살만 먹다가 간섭 아저씨가 우리에게 한 말모퉁이다방 2008. 7. 6. 17:32
- 얼마 전까진 분명 '우리의' 간섭이네였던 곳. 동네에 우리가 간섭이네,라고 부르는 고깃집이 있다. 츄리닝에 슬리퍼 질질 끌고 가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맥주 한 병 하면 기분 좋아지는 곳. 안에도 자리가 있지만, 간섭이네에선 꼭 밖에서, 그것도 찻길 바로 옆에서 272버스가 지나가는 바로 옆에서, 먹고 싶어 죽겠지 메롱메롱 포즈로 상추 위에 잘 구워진 삼겹살 한 점에 마늘이랑 파조리개 얹어 입을 쩍-하니 벌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먹어줘야 제 맛이다. 바람이 솔솔 불고, 배도 슬슬 불러오고, 취기도 약간 알딸딸하게 돌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은 없지만 변함없는 밤하늘이 있는, 자박거리면 5분만에 집에 갈 수 있는 곳. 정말 얼마 전까지 그 곳은 분명 '우리의' 간섭이네였다. 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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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세우며 기도하옵니다모퉁이다방 2008. 6. 28. 00:18
- 금요일 저녁. 열심히 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한 밤. - 어젯밤에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물이 받고 싶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면 배달왔습니다, 라며 누군가 내게 안겨주는 선물. 갑자기 뭔가 선물받고 싶어졌어, 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 인터넷 서점에서 찜해두었던 책을 주문했다. 현장비평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소설들과 중국어 책. 이건 순전히 인터넷을 떠돌다가 발견하게 된 보물같은 블로그들에서 발견한 리스트. 장마가 시작할 때쯤엔 항상 이 책이 나온다고 했던 소설집과 이건 너무 시적이라며 공부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절들을 옮겨놓은 중국어 책.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인터넷 서점도 오전 10시 이전에 주문하면 당일 배송이다. 똑똑. 저녁, 선물이 도착했다.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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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모퉁이다방 2008. 6. 26. 19:10
불면증이 시작됐다. 더워서 잠이 오지 않던 지난 여름의 괴로웠던 밤들이 떠올라 끔찍했다. 우리집은 확실히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계절을 충실히 따르는 집이다. 어제는 또 잠이 안 올까 두려워 8시쯤에 동생이랑 중랑천엘 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밤운동을 하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렇게 강가의 저녁바람이 시원한지도 몰랐다. 가지고 갔던 엠피쓰리를 내려놓고 뛰고 걸으면서 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 넘실대는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다 떠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비스듬히 누워 시청률 한자리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보고, 무릎팍도사를 봤다. 김주하 언니의 마감뉴스까지 챙겨보니 저절로 잠이 달아나버렸다. 다시 물대포다. 며칠 전엔 길치에다 바보같은 나는 늘 가던 약수터 위였는데도 빙 둘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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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이 되는, 군인이 되는 너에게모퉁이다방 2008. 5. 20. 01:01
내일, 아니 12시가 지났으니 오늘 사촌 동생이 군대에 가요. 가기 전에 같이 밥이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사촌동생 홈피 방명록에 가서 몇 자 끄적거렸는데, 밤에 전화가 왔어요. 밖으로 나와서 우두커니 입대 전 마지막 전화들을 돌리고 있는 모양이예요. 막내 동생에게 걸려온 전화니 막내 동생이 먼저 받고, 다음에 둘째 동생이 받고, 마지막으로 제가 받았죠. 예의 그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그러길 바랄 뿐이지, 그러네요. 이제 군생활이 2년도 안 된다며? 그러니 시간이 금방 갈거다, 그러니깐 그러길 바랄 뿐이지, 그러네요. 저희는 세 자매니 말할 것도 없고, 친가 친척들 중에서는 제일 먼저 군대를 가는 녀석이예요.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고, 무뚝뚝해서, 말을 시켜도 몇 마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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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라고 할 순 없지만모퉁이다방 2008. 5. 14. 14:00
연휴가 지나고 동생이 무거운 종이 가방을 안고 돌아왔다. 그 안에 고추장으로 볶은 크고 작은 멸치볶음,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고추장 진미채볶음이 락앤락에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군침을 돌게 한 건 팔뚝만한 애호박 세 덩이와 굵기로 소문난 내 손가락보다 더 굵고 큰 풋고추'들'. 셋이서 자취를 처음 시작하던 때에 우리는 삼겹살을 구우면서 흥분했다. (그렇다고 지금 삼겹살에 흥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노릇노릇해질 정도로 바삭 구워 참기름 장에 찍어서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 소리를 연발했다. 정말 맛있었다. 그 꼬글꼬글한 삼겹살의 육질. 우린 진정한 육식주의자였다. 그러던 우리가 이제는 저런 알찬 채소에 흥분한다. 예전엔 시장에서 쇠고기 덩어리를 보고 저건 얼마나 비쌀까, 도리도리질 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