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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킬로그램의 삶
    서재를쌓다 2017. 12. 29. 00:22



       요즘에는 집에 오면 물부터 끓인다. 최근 우리집에서 제일 열일하는 전기포트. 가을에 사둔 보이차가 바닥을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 모양의 옥색 다기에 꽁꽁 뭉쳐진 보이찻잎을 넣고 뜨끈한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재빨리 따라 버리라던데, 적합한 시기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따라 버리고, 어떤 날은 찻잎에 묻은 먼지 따위, 하면서 그대로 우려 마신다. 우려내는 찻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면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늘치의 물을 마셨다고.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가벼운 것이 들어가고 가벼운 것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다. 다만 차의 카페인 때문인지 10시에 잠들었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막내는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남자아이가 벌써 두번이나 근사한 꽃을 선물해줬다. 첫번째 꽃다발은 내가 물컵에 담아줬다. 아끼는 녹색컵에 물을 담고 꽃다발을 포장했던 포장지가 아까워 그대로 둘둘 말아 리본을 묶어줬다. 컵의 물을 몇번 갈아주고 시들시들해지는 것 같아 그대로 두었는데, 물이 마르고, 꽃들도 마르면서 그대로 근사한 드라이 플라워가 되었다. 오늘밤에 또 근사한 생일 꽃다발을 받아왔더라. 잘 마른 꽃은 리본으로 묶어 벽에 걸어뒀다. 새 꽃은 새로운 포장지를 컵에 두르고 물을 가득 담아 꽂아뒀다. 꽃들은 투명한 테이프와 노란 고무줄로 군데군데 꽁꽁 감겨 있었는데, 가위로 재빨리 잘라 주었다. 줄기들이 아, 이제 살 것 같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요즘 피천득 수필을 읽고 있어서. 하하)


       그러니까 이 밤 결론은, 오늘치의 물을 마시고 과다 카페인 섭취로 잠이 오지 않으니 지난주에 읽은 구절들을 옮겨둔다는 것.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가방을 들어 올리던 손의 감각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외국에선 방 하나가 나의 '집'이라 쉬웠는데,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에 사는 지금은 쉽지 않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라 온전히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침실만큼은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꾸리고 있다. 매트리스, 스탠드, 피아노, 기타 외에는 아무것도 놓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작은 집'을 꾸릴 연습을 해나간다. 언젠가 가진 옷도 거의 다 버리고 싶다. 계절별로 세 벌 정도씩만 있으면 좋겠고, 신발도 몇 켤레 없길 바란다. 몇 안 되는 가구나 물건을 아끼며 오래 쓰고 싶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가난하게 살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 오래 좋아할 수 있는 것엔 그에 대한 값을 지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손이 두툼한 목수가 만든 나무 책상과 의자, 오래 누워도 허리가 편한 침대, 수십 년을 입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을 옷...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머지않은 내일엔 그런 것만 남기고 싶다.

       이런 걸 얘기하자면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다기보다는 꿈이라서 그렇다. 걷거나 자면서 꾸는 꿈이라, 상상하며 히죽거리면 한도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 12-13쪽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 피천득, '인연' 중에서

    - 14쪽


    추위를 잊고 비행기를 구경한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다. 길로 보이는 곳을 따라 걷고 걸어 겨우 도로를 찾았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걸 먼 거리로 돌아온 뒤에야 깨달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길을 돌아오면서 본 것들이 있었기에.

    - 26쪽


       단잠을 깨운 것은 알람 소리가 아니라 빛이었다. 창호지를 뚫고 은은한 빛이 들어왔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누워서 그 빛을 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매일 듣는 익숙한 알람 소리가 울렸고, 친구는 "출근하자!"라고 외쳤다.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했고 친구는 지하철, 나는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어제의 시간을 되짚으며 웃다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밥도 잘 먹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잠도 잘 잤지만, 무엇인가 빠져있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어김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 38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최신판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예상했지만 새로 나온 책은 모두 대출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대기자 예약을 해놓으려다, 1988년에 나온 <노르웨이의 숲>을 발견하게 되었다. 빈손으로 들어가기 아쉬워 청구기호를 손등에 옮겨 적었다. '813.32촌51' 책은 더러웠다.

    - 61쪽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아이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세상엔 그런 관계도 있는 거겠지. 둘밖에 없는 것처럼 한때를 보냈지만, 결코 다시 볼 수는 없는 사이. 가끔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꼭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 115쪽


       아까워서 잠시 주저했었는데 공항에 도착해 떨리는 것을 보니 그 돈을 주고 살 만한 설렘이었다. 여행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내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기내식, 먹어볼 수 있겠지?"였다. "아마 두 번은 먹을걸?"이라는 답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친구는 능숙한 솜씨로 승무원에게 안대, 담요, 수면 양말을 부탁했다. 비닐에 곱게 쌓인 것이 친구에게 건네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주세요..."라고 소심하게 말했다. 친구는 밥이 와도 깨우지 말라며 잠에 빠졌고, 나는 혼자 열네 시간짜리 여행에 빠져들었다. 담요를 꺼내 무릎에 얹어놓고 책을 꺼냈다. 흥분되어 책이 읽히지 않았다. '촌스럽게 처음 비행기 타는 티 내지 말자!'라고 호기롭게 다짐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티가 나도 여러 번 났을 거다. 몇 번씩 두리번거리며 화장실을 오갔고, 의자에 달린 리모컨을 누르며 나도 모르게 "와." 라는 소리를 냈다. 기내식 사진을 찍는다고 플래시를 여러 번 터뜨리기도 했다. 열네 시간을 지루한 줄 모르고 보냈다. 수첩을 꺼내 항공권값을 시급으로 나눠보며 '그렇게 일해서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 감상을 일기장에 끄적거렸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우리 앨런 영화 두 편을 보며 여행을 기다렸다.

    - 119-121쪽


    미리 준비하지 않아 가고 싶은 곳에 못 가도 낙담하지 않고 카페나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천천히 걷고 어딘가에 앉아 낯선 것을 보는 정도로 만족하는 어설픈 여행자.

    - 138쪽


       여행 다닐 땐, 똑딱이 카메라 두 대를 갖고 간다. 하나는 필름카메라고 다른 것은 디지털카메라다. 여행을 다녀와 사진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내가 어떻게 사진을 찍는지 엄마는 본 적이 없다. 여느 여행과 다름없이 천천히 걷다가, 바라보다가, 멍하게 있다가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옆을 보면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영 낯선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잠들기 전, 엄마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말없이 사진을 보다가 "카메라를 하나 살까?"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작년 언젠가도 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좋은 생각이 났다. "엄마, 이번 여행 동안 디지털카메라를 빌려줄게. 여기에 엄마가 본 걸 담아. 돌아가면 몽골 여행으로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그때 엄마 사진을 실을게." 그 후, 엄마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내가 찍은 것 좀 봐봐. 잡지에 실릴 만한 것 같아? 괜찮아?"라고 자꾸 묻기에 "걱정하지 마, 못 나와도 책임지고 엄마 사진은 꼭 실을게."라고 놀리듯 답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가 잘 때 몰래 훔쳐본 카메라 속의 사진은 아름다웠다.

    - 154-155쪽


    지난 일이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려고 애쓰지만, 혼자 가만히 생각하면 뼈 안쪽이 저릿하다.

    -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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