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404건

  1. 블랙독 2020.01.03
  2. 2020 서재쌓기 2020.01.03
  3. 윤희에게 6 2019.12.26
  4. 시옷의 책 8 2019.12.13
  5. 안산행 2019.11.17
  6. 양재닭집 4 2019.11.14
  7. 베이킹 6 2019.11.07
  8.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4 2019.10.23
  9. 필터 2019.10.23
  10. 명상 2019.10.14

블랙독

from 티비를보다 2020. 1. 3. 10:36

 

     
   금요일 밤이니 한 잔 해야했다. 간만에 의왕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후기가 좋아 찜해두었던 시장 안 통닭집에 갔다. 오래 장사를 했다는 평에 비해 인테리어가 세련되어서 주문하고서 맛을 의심했었다. 일단 생맥 맛은 합격. 혼자서 일을 하는 직원도 친절하진 않지만,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서비스 과자 맛도 좋았다. 통닭은 반반을 시켰는데 후라이드에서 카레맛이 은근하게 났다. 좋아하는 광화문의 통닭집도 반죽에 카레가루를 쓰는데. 의왕역의 이곳도 맛이 괜찮았다. 오백 두 잔을 신나게 마시고 통닭이 조금 남아 포장해달라고 했다. 그러고도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뜨끈뜨끈한 오뎅탕을 먹을 참으로 근처 이자카야에 갔다. 옆 테이블이 무척 시끄러워서 괜히 왔다 싶었는데, 기본 안주가 줄줄이 나왔다. 괜찮은 거 같다 싶었을 때 나온 오뎅탕도 푸짐했다. 결국 배가 불러 맥주 한잔만 마시고 포장해서 나왔지만 1차로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다. 기본 안주로 나온 방울 토마토도 휴지에 고이 싸 집에 가지고 왔다. 집에 와 3차를 하자며 동네 편의점에서 산 만원짜리 까바를 땄지만 오백을 세 잔이나 마시고 월화수목금요일을 보낸 마흔의 나는 곧 골아떨어졌다.

 

   점점 기상시간이 늦어지고는 있지만 아침 여섯시가 마지노선인 평일의 나 덕분에 주말의 나도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다. 주말이면 늦잠을 늘어지게 자는 옆사람을 두고 거실로 나왔다. 어젯밤 시도했던 3차의 흔적을 치우고 티비를 켰다. 서현진이 나오는 드라마 재방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에서 꽤 괜찮다는 말을 들은 참이어서 한번 봐볼까 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누웠다. 그러다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결국 정자세로 드라마 정주행을 했다. 그러는 동안 옆사람이 일어났고, 광고시간에 둘이서 후다닥 밥을 차려 먹었다. 그러고 옆사람은 요새 한창 빠져있는 <스토브리그> 재방을 보러 방에 들어갔다. 그 토요일 오전에 나는 이 드라마를 4회까지 보았는데 (아직까지 1회 초반을 못 보고 있다 ㅠ) 매회 울었다. 매회 감동 포인트가 있었다. 이 놈의 세상,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현진이 힘을 낼 때! 마음 깊은 속에서 우러난 응원을 했더랬다. 라미란은 매회 얼마나 멋진 여성이던지. 그야말로 츤데레. 라미란의 이 대사가 어쩐지 계속 생각이 난다. 자기는 낙하산이라도 실력이 뛰어나다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일본의 게임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왔지만 마리오 게임을 개발해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한 사람이 있다고. 외삼촌 빽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실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도 않지만) '소문난 낙하산' 서현진이 포기하지 않고 방학기간 동안 매일 출근을 하며 개학 준비를 하고, 두려운 마음을 움켜잡고 아무도 없는 교단 앞에 서 있었을 때,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 결국 누군가가 알아봐 줄 사람. 고하늘 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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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서재쌓기

from 기억의기억 2020. 1. 3. 09:36

 

여행할 땐, 책.

빙하 맛의 사과.

지구에서 한아뿐.

 

빛의 과거.

우리만 아는 농담.

 

디디의 우산.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아무튼 떡볶이.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

아무튼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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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아무튼 여름.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말하기를 말하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여름의 빌라.

 

붕대감기.

 

서울 아가씨 화이팅.

치즈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오래 준비해온 대답.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시선으로부터,

40일간의 남미 일주.

시와 산책.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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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

from 극장에가다 2019. 12. 26. 22:22

  

   왜 오타루에 눈이 가득한 장면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을까. 오타루보다 더 눈이 오지 않나, 라고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을까.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도 오타루였는데. 겨울에 눈이 쌓인 운하에 ㅂ찔끔찔끔 나던 오타루.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오타루에 가게 된다. 옛 친구가 있는 곳. 언젠가 꼭 보고 싶었지만, 어쩌면 영영 못 볼 사람이라 생각했던 고운 사람이 있는 곳. 윤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억누르며 버티고 버티던 직장을 어느 날 그만둔다. 출근할 때만 해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매일 아침 그러고 싶었지만 매번 그러지 못했다. 올해 못 쓴 휴가를 쓰겠다는 말에 돌아오면 자리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책임자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공장을 돌아서 나오던 장면이었다. 내내 침울했던 윤희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김희애에게 어울리는 않는 역할인 것 같았는데 그제서야 마음이 열리더라. 그리고 오타루에 가게 된 윤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근사한 코트를 입을 줄 아는 사람, 더이상 담배를 숨어서 피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될 수 있는 통로. 

   제일 마음에 남는 장면에는 윤희가 평생 그리워하는 준이 등장한다. 준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앞자리의 여성에게 말한다. 그전과는 다른 단호한 표정이 되어서. 세상의 어떤 것은 꼭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감당할 수 없는 건 평생 숨기고 살라고. 그 장면에서 준이 얼마나 단단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건 한때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를 오랜 시절에 걸쳐 스스로 극복해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영화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달이 점점 차오른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난다. 기적같이. 두 사람이 얼마나 걸었는지, 걸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약속을 했을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영화를 보고 밤길을 걷다 가득 차오른 달을 보게 되었을 때 함께 오타루의 눈덮힌 운하를 나란히 걸었을 두 사람을 떠올렸다. 준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윤희의 얼굴에는 근사한 생기가 돌았다. 어쩐지 자꾸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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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책

from 모퉁이다방 2019. 12. 13. 10:26

 

 

   결국 마피아는 없었다. 조림이, 봄, 병규, 기석이가 후다닥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 게임이었다. 마피아가 아무도 없는 게임에서 모두들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이 선량한 시민이라고 거듭 강력하게 주장을 했던 조림이는 마피아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허무하고 억울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끼리 좀더 마시기 위해 테이블을 약간 치우고 있었는데, 책상이 있는 방에 들어가 있던 소윤이와 민정이가 나를 불렀다. 언니 책들은 어떻게 정리해놓은 거야? 분류법 따위는 없고 막 채워넣었다고 답을 하니, 여기는 시집이 있네, 여기는 이런 책들이 있네, 하는데 못 보던 책들이 보였다. 잊지 않으려고 쓰는 이야기들. 헉. 아이들이 블로그 글로 책을 만들어 선물해준 것. 고맙고 부끄러웠다. 나는 책을 가질 글을 쓴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날 펼쳐보았으나 결국 읽지 못했다.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제목만 훑어 보았는데 이게 정말 책이 될만한 글들인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시옷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한동안 펼쳐보지 못할  것 같다. 소윤이가 몇달 전에 블로그 대문에 쓰인 사진이 너무 예쁘다며 원본을 받을 수 있냐고 했는데, 다 이 책 때문이었다. 표지에 양양의 숙소에서 찍은 나무가 많은 사진이 들어갔고, 책등 아래에 내가 편지를 쓸 때 그려놓는 표정이 들어갔다. 이 표정은 책이 시작되는 장에도 있고, 표지 아래에도 있고, 판권 부분에도 있다. 판권에는 이런 날짜와 이런 이름들이 있다. 초판 1쇄 발행 2019.11.27, 글.사진 이금령, 편집인 정기석, 편집.디자인 김소윤.선민정, 펴낸곳 시옷. 시옷들은 직접 쓰고 그린 웨딩북도 만들어줬는데 거기에 넣을 내 블로그 글을 찾다 기석이가 많은 분량의 글을 넘기면서 이 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비용도 나눠서 내고. 감동의 시옷. 책을 보고 후다닥 집을 나선 편집인 기석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았다. 나중에 답이 왔는데 전화를 했을 때 이어폰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의왕역까지 칼바람을 맞으며 파워워킹을 하던 중이었단다. 그 느낌 알지. 얼마나 시원하고 얼마나 속이 뻥하고 뚫리는지. 책장에 든든하게 꽂힌 이 책들을 볼때마다 직접 걷지 않았지만 너무나 알 것 같은 이천십구년 십이월 토요일의 칼바람이 생각날 것 같다. 고맙습니다, 시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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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행

from 모퉁이다방 2019. 11. 17. 18:52



   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올라가는 길. 밑에서는 흐리기만 했는데, 충청도에 들어서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동생은 서울에 비가 많이 오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은 아주 춥다는 예보가 있다고. 친구의 신랑은 내 결혼식에서 한 번 보고 오늘이 두 번째인데, 오늘 보니 다부져보였다. 친구는 붉은색 부케를 들었다. 내 결혼식에서 친구가 부케를 받았는데, 세 달 안되는 시간 동안 잘 말려 예쁜 케이스에 담아 내게 다시 선물을 했다. 원래 이러는 거야, 라고 물었더니 요즘 유행이래, 라고 말했다. 어제 이걸 만든다고 잠을 못자 눈이 빨개졌다며. 친구의 부케는 신랑의 친구가 받았다. 남자사람이. 요즘 그런다고들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부러 폴짝폴짝 뛰며 유쾌하게 받아 모두들 즐거워했다. 올해, 나를 포함 유난히 결혼식이 많네. 다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차는 계속 막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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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닭집

from 서재를쌓다 2019. 11. 14. 22:46



  제주도에서 온 친구와 위례에 사는 친구, 파주에서 퇴근을 한 나. 이렇게 셋이 금요일 밤에 양재에서 만났다. 검색을 해보니 양재에서 집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거의 끝과 끝이었지만, 버스를 한 번만 타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오래전 아지트 양재닭집에 갔다. 한때 이곳에 정말 자주 왔었다. 바삭바삭한 옛날 통닭에 양도 푸짐하고 장사가 잘되서 그런지 생맥주도 맛났다. 시원하고 톡 쏘는 맛. 여기만 오면 얼큰하게 취했더랬다. 시장 한 켠에 자리잡은 닭집은 여전했다. 맛도 그대로였고, 인기 있는 것도 그대로였다. 우리는 후라이드 치킨 하나와 닭똥집 튀김 하나를 시키고, 맥주와 사이다를 마셨다. 이날 방광염 약을 먹는 바람에 그 시원한 맥주를 마시지 못했더랬다. 간만에 셋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게 오랜만인 것도 같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도 같았다. 예전에 비해 양이 지나치게 많아진 닭똥집을 남기고 일어났다. 맥주를 마시지 못하니 막차가 끊기기 전에 일어나는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제주에서 온 친구는 코엑스 근처의 숙소로 지하철을 타러 갔고, 위례에 사는 친구와 군포로 가야 하는 나는 길을 건너 중앙차선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정신이 또렷했던 나는 버스앱을 켜고 정류장 이름을 확인해가며 내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가늠해봤다. 버스는 양재에서 출발해 과천을 지나 산본으로 갔다 군포로 왔다. 늦은 시간이라 차는 막히지 않고, 버스 안도 한산했다. 바깥 풍경도 근사했다. 도심의 불빛이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도로를 달리기도 했는데, 그 순간에는 마치 어딘가로 여행을 온 것 같았다. 버스의 종점이 집 바로 전 정류장이었는데, 종점에는 서지 않는다고 안내되어 있어 전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노선을 보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당황해하고 있는데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집앞 정류장을 말하니, 좀 돌아서 가죠 뭐, 타요, 하신다. 아저씨는 집앞 정류장에 나를 내려주시고 유턴을 해 차고지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조금 지나있었다. 이 정도면, 금요일 밤에 친구를 또 불러내 우리가 애정하던 양재닭집에서 닭을 양껏 먹고, 시원하고 쏙 쏘는 생맥을 양껏 마시고, 어쩐지 용기가 나는 수다를 양껏 떨고 들어올 수 있겠다 싶었다. 버스를 타고 여행온 듯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집에 도착하겠지. 아, 이 날 단풍잎이 흥건했다. 한밤에도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환히 보일 정도로. 다시 가야지. 기다려라, 양재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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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킹

from 모퉁이다방 2019. 11. 7. 17:16




  막내의 결혼식이 있던 시월의 일요일에 보경이가 놀러오기로 했다. 영종도에서 군포까지. 네이버 지도앱으로 검색해보니 대중교통만 이용했을 경우 두시간 남짓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냐고 하니 여행하는 기분으로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온다고 했다. 고맙고 미안했다. 산본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고 했다.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전자레인지 겸 오븐을 선물해줬는데 오븐 덕분에 삶의 질이 1도 정도 높아졌다. 갓 지은 밥을 냉동실에 얼려놓고 금방 해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생선도 냄새 걱정 없이 구울 수 있게 되었다. 고구마도 적당히 구워 단맛이 한껏 오른채 버터를 살짝 녹여 맛나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베이킹. 오븐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보자는 생각에 베이킹에까지 이르렀다. 보경이는 케이크도 구워 판매한 실력자. 마들렌을 같이 구워봐줄 수 있냐고 하니, 남은 베이킹 도구들을 가져온다고 했다.


  우리는 두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여기저기 기스가 난 원목식탁에 앉아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시켜 먹었다. 보경이는 새집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언니, 풍경이 좋다. 책장도 잘 샀네. 딱 좋다, 는 말을 여러 번 해줬다. 점심을 먹고난 뒤 마주 앉아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결혼식 이야기, 신혼여행 이야기. 신혼여행 갈 때 보경이는 튜브를 빌려준다며 부러 공항에 나와 우리를 배웅해줬다. 신혼여행에서 옆사람이 그 튜브를 탄 이야기,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생리가 터져 물에는 발만 담근 이야기, 긴 출퇴근길 이야기, 직접 본 적 없지만 친숙한 서로의 친구들 이야기,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까지. 그리고 더 늦기 전에 해야겠다며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왜 마들렌을 만들어보자고 했을까. 마들렌이 내가 아는, 작은 크기의 빵 중에 가장 간단해보이면서도 고급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빵집에서 꽤 비싸게 팔고.


  버터와 달걀은 실온에 미리 꺼내놓았다. 저울도 꺼냈다. 이럴 때 쓸지는 몰랐는데 이제보니 베이킹용인 커다란 스텐볼도 꺼냈다. 보경이가 적당한 크기의 거품기와 반죽을 알뜰하게 긁어모을 수 있는 주걱, 완성된 빵을 식힐 수 있는 판을 가져다줬다. 나는 마들렌 틀과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짤주머니를 사뒀다. 모든 가루는 체에 두번씩 걸러 주었고, 저울에 정확하게 용량을 단 뒤 섞었다. 설탕이나 달걀을 넣을 때는 한 번에 모두 넣지 않고, 조금씩 나눠서 넣어 주라고 했다. 그래야 잘 섞인단다. 버터는 전자레인지에 녹였다. 모든 재료를 순서에 따라 섞어둔 뒤 흐물흐물한 반죽을 짤주머니에 넣어 냉장고에 1시간 정도 두었다. 제법 단단해졌다. 마들렌틀에 버터를 바르고, 밀가루를 살살 뿌린 뒤 냉동실에 잠깐 넣어두고 오븐을 예열했다. 냉동실에서 꺼낸 틀에 반죽을 적당히, 80퍼센트 정도 채우고 예열된 오븐에 넣었다. 그렇게 15분 남짓을 기다렸다. 


   5분이 지나자 열어둔 베란다 문 너머로 빵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우와, 보경아, 빵냄새가 나. 오븐 안을 들여다보니 조금 전까지 반죽일 뿐이었던 그것이 제법 모양을 내며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보경이는 오븐을 열어 쇠젓가락으로 마들렌을 푹 찔러봤다. 반죽이 묻어나오지 않으면 다 된 거야. 틀에서 마들렌의 형태를 한 그것들을 멋지게 빼낸 보경이는 조금 식고 난 뒤에 냉동실에 바로 넣어두라고 했다. 그래야 먹을 때마다 갓한 것처럼 맛나게 먹을 수 있다고. 그렇게 베이킹의 세계에 나를 입문시킨 보경이는 올 때 그랬던 것 처럼 택시를 타고 산본까지 가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영종도까지 갔다. 


   그 뒤로 주말마다 무언가를 구웠다. 마들렌을 구웠고, 치즈후추쿠키를 구웠고, 스콘을 구웠다. 보경이가 주고 간 기초 책 외에 베이킹 책을 한 권 더 샀고, 머핀틀, 파운드케이크틀, 원형케이크틀도 샀다. 너무나 신기한 세계인 것이다. 정확하게 잰 재료들을 이리저리 반죽했다 냉장고에 잠시 두고 오븐에 구우면 빵 비스무리한 그것이 되는 것이. 동생에게 빵을 두 번 가져다줬는데 제2의 우스블랑이 되란다. 우스블랑은 오픈하자마자 줄을 서는 2층으로 된 빵집이다. 이번 주에는 생일축하용 밀크티 파운드케잌에 도전해 볼 거다. 두근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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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이었다. 종로에 반지를 보러 가는 날이었는데, 일찍 도착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카페 뎀셀브즈에 갔다. 아주 예전엔 종로에 오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었는데. 맥주도 한 잔 하고. 스폰지하우스가 있고, 이런저런 작은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아주 예전에. 카페 뎀셀브즈에 가면 언제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내가 첫 손님인 듯 했다. 매장에 직원들만 있었다. 출출해서 샌드위치를 먹어볼까 케잌을 한조각 먹어볼까 고민하다 그냥 커피만 시켰다. 곧 점심을 먹을 거니까. 차가운 커피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2층으로 가 아무도 없는 넓은 홀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다시 읽기 시작한 책. 처음에 잘 읽히다가 중간쯤 진도가 나가지 않자 덮어두었는데, 몇개월이 지난 그 날 다시 들고 나왔더랬다. 그 곳, 그 시간이어서 그런가. 무척 잘 읽혔다. 그렇게 술술 후반부까지 읽었던 책.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면 그 날 혼자였던 종로가 생각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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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나서는 순간, 모험이 시작되니까요. 

- 20쪽


   번역가로서의 경력은 폴러의 말처럼 미국식 나쁜 남자 친구였다. 아무리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가끔은 애태우며 나를 보아달라고 말해도 나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때 사랑한다 말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연락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혼자여도 상관은 없고 외롭지도 않다. 누가 날 사랑해주건 그러지 않건, 청혼 반지를 꺼내건 말건 내가 매 순간 그 대상을 진심으로 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적어도 한 번은 괜찮은 여자였으니까. 괜찮은 여자는 홀로 있어도 빛이 나고,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고 당당히 걷는 법이니까.

- 31쪽


   down to earth는 '소박한, 허세가 없는'의 뜻도 있지만 '진실한, 진짜인,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솔직한'의 의미도 있다. 

   이 단어는 아무리 봐도 우리 가족을 한마디로 묘사하는 단어였다. 허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어떤 잘난 척도 하지 못하고 남들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에 솔직하고 실속 있고 현실적이고 선량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정 많은 사람들.

   이제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일요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데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탄 엄마와 아빠가 나를 발견하고 마냥 좋아서 웃던 장면을 기억한다. 사장님이라 불리던 시절에도 주머니에 늘 토큰을 가지고 다닌다며 자랑하던 아빠의 미소를 기억한다. 방송 작가 시절 새벽 방송을 할 때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 부엌으로 가던 엄마의 등을 기억한다. 목소리 크고 성미 급한 언니와 심리학 박사 학위가 있지만 자기 말투가 '쌈마이' 같다는 동생과 한 번도 돈 문제로 다투거나 서운해한 적 없었던 걸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변변치 못한 직업들을 전전하고 결혼 생활에 위기를 겪을 때도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해준 부모님과 자매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들이었는지, 학벌이나 취향 따위가 얼마나 인간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지를 이해한다. 

- 37-38쪽


   내가 번역한 <자존감이 바닥일 때 보는 책>의 저자 나다니엘 브랜든은 예순쯤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대체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 10년 단위로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10대, 20대, 30대에 내가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40대인 지금은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만이 가득하다. 50대나 60대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부모님이 내 곁에 오래 계시기만을 기도할 것이다. 

- 38쪽


   나 같은 일급 변덕쟁이가, 나처럼 손해 보면 발끈하는 사람이, 때론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보상도 적고 다른 곳에 눈도 못돌리게 하고 능력에 매번 좌절하게 하고 아무리 해도 절대로 쉬워지지 않는 이 작업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어떤 내용이든(내 기준에서는) 한 권 한 권 최대한 꼼꼼하게, 완벽하게 해내는 동안 나도 조금은 변화했다. 

   나와 내 삶이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때로 망할 것 같아도 일단은 앉아서 버텨보는 능력이 조금은 발달한 것이다. 좋은 것만 쏙쏙 단물 빼먹듯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배우고 투자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인생의 진리를 깨치고 버티고 버틴 끝에 찾아오는 정당한 자유의 맛을 알았다. 

- 85쪽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하지 않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실수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우리 내면의 불안과, 우리의 숨겨져 있는 의도와, 우리의 실패들을. 그래서 내년 나의 소망은 나 자신에 조금 더 여유를 주는 것이다. 나쁜 점은 덜 보고 좋은 점은 더 보길. 그냥 나 자신에게 여유를 주고 싶다."

-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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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

from 모퉁이다방 2019. 10. 23. 00:39



  오늘은 커피필터를 사야했다. 주말에 필터가 떨어져 월요일과 화요일 커피를 못 내리고 출근을 했다. Y씨가 셔틀 안에서 저녁 먹고 갈래요? 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합정 안쪽 골목길로 들어갔다. Y씨가 감바스를 먹고 싶다고 해서 감바스와 문어머리 튀김을 시켰다. 감바스는 무척 맛났지만, 살이 많이 찔 것 같았다. 새우와 야채를 다 먹은 뒤에 스파게티 면을 추가해서 먹었다. 맥주도 두 잔 마셨다. 살이 더 찔 것 같았다. 8시 반쯤에 시계를 보고 9시쯤 일어서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9시 반이었다. 읔. 내일은 꼭 커피를 내려 마셔야 하므로 합정에 있는 다이소에 들렀다. 올해 안에는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넉넉하게 샀다. 올해가 벌써 두달 밖에 남지 않았다. 아침 일찍 뜨끈뜨근한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고 피곤이 가득한 아침 지하철 안에서 뚜껑을 조심히 열어 한모금 마시면 아,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일 꼭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려가야지, 생각한 화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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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from 모퉁이다방 2019. 10. 14. 22:05



   욕심이 쌓이고 쌓이기만 한다는 이유로 요즘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생이 어느 날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책 읽는 것도 명상 같아. 집중해서 그 안에 있잖아. 좋은 책이 내가 가고 싶은 마음상태나 모습으로 가게 해주는 거 아닐까." 동생에게 명상을 알려주시는 분이 그러셨단다. 명상이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상상하고 그려보고 그 안에 머무르는 거라고. 욕심을 버리고 싶으면 욕심을 버리는 내가 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차를 마시고 생각을 비워가면서. 동생이 저 메시지를 보낸 뒤로부터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명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땅 밑으로 들어가 모험을 하기도 하고, 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아내를 둔 남편이 되어 하와이의 일상을 살아보기도 한다. 내 몸은 지하철에 있지만 마치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사는 듯한 착각을 잠시 하다가 다시 평범한 출퇴근길 일상으로 돌아온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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