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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빅 리틀 라이즈 2020.10.11
  2. 페코짱 2 2020.10.09
  3.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2 2020.10.04
  4. 오래 준비해온 대답 2020.09.29
  5. 나눔 5 2020.09.29
  6.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2020.09.27
  7. 4호선 2020.09.24
  8. 재택 2 2020.09.13
  9. 비가 와요 2020.09.03
  10. 선셋요트투어 2020.08.26

빅 리틀 라이즈

from 티비를보다 2020. 10. 11. 18:08

 

 

   시즌 1을 끝내고 '몬터레이'를 여러 번 검색해 봤다. 이 드라마에는 니콜키드 만, 리즈 위더스푼 등 화려한 스타들이 줄이어 등장하는데 그들보다 나는 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오는 마을의 분위기에 마음을 뺏겼다. 몬터레이는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항구도시로 옛 건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고 자연경관이 뛰어나며 일년 내내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어 해안 휴양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된 재즈 축제가 열리고, 유명한 수족관도 있는 곳이란다.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사는 어마어마한 저택 뒤로, 혹은 앞으로 몬터레이 바다가 보인다. 집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바다가 연결되어 있어 백사장을 밟을 수 있기도 하고, 집 안 수영장에서 바다를 내다볼 수도 있다. 통유리창인 안방에서 파도가 생생히 느껴지기도 한다. 등장인물 모두가 거의 어마어마한 부자들인데 유일하게 형편이 좋지 않은 제인도 답답한 마음이 생길 때마다 항상 바다로 나간다. 이어폰을 끼고 백사장을 달리거나 파도가 무성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드라마 속 몬터레이 바다는 강하다. 파도가 바위를 향해 힘차게 몰려와 세차게 부서진다. 미련없이, 거침없이. 꼭 동해 바다같이.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그들도 그렇게 거침없이 돌진하는 파도를 매일 들여다보면서 힘을 냈는지도 모른다.

 

    어제 시즌 2 마지막회를 봤는데 엉엉 울고 말았다. 그동안의 드라마 전개상 울지 몰랐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터졌고 멈추지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잘 살고 있든 못 살고 있든 지금의 내가 된 것에는 반드시 과거의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말해준다. 그게 아낌없이 받았던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버틸 수 없이 힘들었던 상처일 수도 있다. 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던 아득함일 수도 있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도 한번 무릎이 꺽이게 되면 그 상처들이 어김없이 튀어나오니 상처가 났을 때 소독을 잘 하고 약을 잘 바르고 치료를 잘 해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그걸 인정하고 사과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외롭지만 외로운 사람들이 모이면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안의 아픈 어린아이를 잘 위로하고 보듬어주고 웃으며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울고나니 개운해졌다. 이제 그녀들은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아, 이 드라마 음악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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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짱

from 모퉁이다방 2020. 10. 9. 05:26

 

    하얀색 페코짱 일러스트 에코백을 메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할머니를 봤다. 에코백도, 할머니도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이었는데 왠지 힘이 났다. 나도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에코백을 메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주에는 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 오래 마시고 있다.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마셨던 차라는데, 붉은 덤불이라는 뜻이란다. 면역력에 좋다고. 텀블러에 담아 놓고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호로록 한 모금씩 마시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차는 정말 커피와 다른 것 같다. 커피도 좋지만 차도 좋다. 다 쓴 길쭉한 토마토 소스 병을 잘 씻어 말린 뒤 티백 하나를 넣고 냉장고에 냉침도 해두었다. 오래전 읽은 책들의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데 어디 메모를 남겨두지 않으니 느낌들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이번 달 시옷의 책이 몇 달 전 좋게 읽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인데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이번엔 꼭 기록을 남겨야지. 문득, 가을이다. 연휴 첫날 가만히 밖을 내다보니 하늘도 좋고 바람도 좋고 공기도 좋다. 오늘 아침에는 식물들 흙을 체크하고 바싹 마른 아이들에게 물을 듬뿍 주었다. 시원하라고 잎들도 분무해주었다. 얼마 전에 <나의 아저씨>를 다시 봤는데 눈물나는 대사가 있어 그건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두었다.

 

- 우리도 아가씨 같은 이십대가 있었어요. 이렇게 나이들 생각하니까 끔찍하죠?

- 전 빨리 그 나이 됐음 좋겠어요. 인생이 덜 힘들거잖아요.

- 감사합니다.

- 생각해보니 그렇다. 어려서도 인생이 안 아프진 않았어.

 

   안 아프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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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희 작가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다 신뢰하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새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서 읽겠다고 다짐한 작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다이나믹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이제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 생활의 고단함, 그럼에도 괜찮은 삶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이번 책도 따끈따끈한 상태로 구입했다. 책와 영화에 대한 작가의 긴 추신글이다. 책도 읽는 사람의 기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지 월요일부터 시작해 금요일에 끝냈는데, 월요일에는 무던하게 읽히다가 금요일이 되니 두근거리는 구절이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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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마음속의 빛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영원히 청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로 내 마음의 이랑과 고랑을 가다듬는다. - 81쪽

 

   60대 나이에 동년배의 작가를 이토록 열렬히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 어쩌면 큰 용기가 아닐까? 심지어 그 작가와는 개인적인 친분조차 없는데도. 바로 그래서 나는 우치다 타츠루가 좋다. 좋아하는 마음은 씩씩하게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왜 좋아하는지를 자신의 지성과 관점과 삶으로 풀어내는 자세가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아하는 마음조차 그의 고유한 개성과 자산이 되어버린다. 바람직한 팬이란 이런 것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 94쪽

 

   나는 폴과 그의 친구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나 역시 20대를 겪어냈다. 무언가 엄청난 것을 뚫고 지나온 느낌인데, 그것이 크게 자랑스럽지는 않다. 무엇을 뚫고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젊음의 느낌이겠지. - 102-103쪽

 

  결혼 후 10년쯤 지나니 이제야 서로 손잡을 여유가 생겼다.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면, 그 사람이 내 손을 잡아줄 때면 사람은 겸손해진다. 곁에 누가 있어서 내 손을 잡아준다는 이 현실이 고맙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아서, 가끔 힘을 주어 꽉 쥐어주어서 고맙다.

   쇼코는 남편의 손이 좋다고 말했다. 딱히 눈에 띄지 않는 부위. 눈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입도 아닌 손.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왜 노부부들이 어깨나 허리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는지 알 것 같다. 열정이 사라진 후 남은 담백한 형태의 사랑은 손으로 전해진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네 옆에 서서 네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것. 계속 네 곁에 함께 있겠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이다. 열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따뜻하고도 단단한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의 무게는 10킬로그램이다. - 115쪽

 

   그 괴물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기 전의 일요일 밤이면 모습을 드러낸다. 환한 옷가게의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볼 때도 있다. 누군가를 질투할 때,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타난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회오리바람 같은 의심에 휩싸일 때도 나타난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것만 가진다면 내가 더 괜찮은 인간이 될 것 같다고 느낄 때, 사탕발림에 혹하고 비난에 좌절할 때 나타난다. 사는 게 버겁다고 느낄 때,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다 느낄 때도 나타난다. 그 괴물은 충동구매나 과소비나 무절제나 방탕함의 이름을 하고 있다.

   나는 내게도 그놈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기회가 되면 그 놈 때문에 패가 망신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럴 뻔한 적도 있었다.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해가며 옷과 구두를 사들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미워했다. 커다란 여객선이 아니라 작은 파도에도 출렁이는 조각배를 탄 것처럼 살았다. 지금 나는 중간 크기의 여객선에 탄 것처럼 살고 있지만 실은 언제 조각배로 옮겨 탈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살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나 역시 어느 날 리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 122-123쪽

 

   소개팅으로 만난 그 남자와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극장에서 알렉산더 페인의 <사이드웨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나는 이 남자를 어떻게 떼어놓을지만 궁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실패의 역사가 몇 번 있었다. 내 스타일인 남자들,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이 결국 나와 상극인 걸로 판명이 난 역사가. 그래서 나는 이 남자의 평범함과 단순함과 무딤을 세 번만 참아주기로 했다. 딱 세 번만.

   결국 나는 그 남자를 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떼어놓지 못했다. 그 15년간 수없이 많은 위기가 있었다. 대부분은 내 성격 탓이었다. 사실 남자들과 사귈 때마다 불안정한 내 성격은 극에 달했다. 그들을 멋대로 휘두르려 하면서도 그들이 나를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종종 지나치게 화를 냈고 그들의 사소한 결점을 하나하나 트집 잡으며 괴롭혔다. 그런 연애들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남편 역시 나와 6개월쯤 사귀었을 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 명상센터 같은 데라도 가봐.

   그러나 나를 구원한 것은 명상이 아니라 책이었다. 내게 도움이 된 책들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 과거와의 힘겨운 결별, 새 출발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 책이었다. 고통을 과장하고 스스로 동정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위안이 되었다. 아,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내가 괴물이 아니구나. 다들 자기 자신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가는구나. 그것만으로도 분노와 불안으로 날뛰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나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나이는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고백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 157-158쪽

 

   내 안에는 굼뜨고 눈치 없고 모든 것에 미숙한 어린 여자애가 있다. 요즘도 그 여자애는 종종 외친다. '나는 이걸 할 수 없어!' '나는 이 인생을 도무지 살아낼 수가 없어!' 나는 그 여자애와 함께 달아나 버리고 싶다. 어딘가로 숨고 싶다. 술을 마시거나, 누군가에게 매달리거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고 변명하며 방문을 닫아걸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학교를 모두 졸업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직장에 들어갔고, 그 모든 전화를 걸어냈다는 사실을.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아서 길렀다는 것을. 심지어 나에게는 내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내가 이 세상의 부적응자가 아니라는 표식이 되어주는 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 이제 나는 그 여자애를 다독일 줄 알게 되었다.

   '알아, 나도. 내가 무섭다는 걸. 하지만 지난번에도 해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어. 처음엔 당황하고 무섭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늘 그랬던 것처럼.' - 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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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작가님이 SNS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 팔로우를 했다. 다행히 책의 느낌과 그 곳의 느낌이 같았다.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었기에. 작가님은 안양에서 살다 얼마 전 동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비록 차이나타운 근방이긴 했지만 인천을 몇 시간 걸어온 경험이 내게 있다. 잠깐이지만 인천을 둘러보니 옛날의 멋을 현대의 것과 어울려 잘 보존한 느낌이어서 언젠가 인천에 숙소를 잡고 하루 둘러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 인천에 작가님의 시선이 더해지니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가족들과 달을 보며 산책하는 오르막 길도, 오래된 맛집들도, 걸어서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는 점도. 동인천에서의 소소한 삶이 또 다른 좋은 책을 만들어줄 거라 기대하며 또 새 책을 기다려야지. 추신이 가득한 책을 읽고 혼자 있는 날에 조용히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을 봐야지 생각했고, 지금은 품절인 <인숙만필>을 중고책으로 주문해야지 생각했다. 좀더 많이 읽고 봐야지 라고도 생각했다. 아,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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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 번화한 리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조금만 올라가면 깊은 협곡을 피해 발달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과 포도밭, 레몬나무, 드문드문 서 있는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를 만날 수 있다. 화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은 마치 판타지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의 달콤한 고독을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능선 위로 해가 넘어가고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스쿠터를 몰아 중턱에서 숨을 고르는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상쾌한 습기가 얼굴에 감겨들었다. 안개를 뚫고 해발고도 제로의 아파트로 돌아오자 아내가 이제 오냐며 반색을 한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우리는 한 스쿠터에 앉아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치 낯선 사람처럼 서먹했다. 아내도 그렇게 느꼈는지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 위에 뭐가 있어?"

- 123~124쪽

 

   기대하지 않았던 책인데 잘 읽혀 신이 났다. 출퇴근 시간이 기다려지는 책을 만나는 건 귀중하니까.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읽고 옮겨 적는데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영화 속 풍경이 마음에 남아 언젠가의 소망으로 간직하다 어느 날 긴 비행 끝에 도착한 여행지. 그곳에서 '달콤한 고독'을 느끼며 올라간 탑. 이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느껴지던 순간. '여기 오기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깨닫고 나도 모르게 흘렀던 눈물. 그 탑에 오르지 못한 사람도 있고, 그 탑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날, 그 순간 느낀 감정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었던, 그 여행. 누군가 "그 탑 위에 뭐가 있어?"라고 물어 자세히 설명한다고 해도 온전히 나만이 알 수 있는 그 날의 경험.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아주 작은 성장. 아, 이게 여행이구나 깨달음이 왔다. 나만의 아주 작은 성장점이 쌓여 실제의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 먼 거리를 시간과 돈과 마음을 들여 떠나는 구나. 김영하 작가 역시.

 

    리파리에서 경험한 이 이별은 나로서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행복이었고 그것은 그후로 이어질 힘든 여행을 달갑게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리파리를 떠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선장수 프란체스코 할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조심스레 내밀던 젖은 주먹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다시 리파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 132쪽

 

   (...) 왜였을까? 시칠리아에는 내가 상상하던 시칠리아 대신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도대체 뭘까? 내 마음을 이토록 잡아끄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칠리아에서, 그리고 그곳을 떠나와서도 나는 가끔 그것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칠리아에서 찍어온 화면들이 방영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삶,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석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팔레르모공항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그 섬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49~50쪽

 

    타오르미나의 그리스극장에서 나는 이천여 년 전에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익숙한 발성의 그리스어로, 그 배경을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당대의 관객들을 향해 자신 있게 연기했을 배우들을 떠올려본다. 모든 것을 바싹 말려버리는 햇볕과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숨막히는 열풍이 그 위세를 거두고 잠시 물러간 시칠리아의 여름밤, 최고의 배우들이 선보이는 멋진 드라마를 느긋한 마음으로 즐겼을 타오르미나의 관객들을 또한 상상해본다.

-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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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from 모퉁이다방 2020. 9. 29. 19:42

 

읽으면서 흠집이 많이 난 책이라 나눔합니다.

필요하신 분 주소, 전화번호, 비밀글로 남겨주시면 택의점 택배 착불로 보내드릴게요.

 

 

하와이 여행에서 가지고 다녔던 책인데, 론리플래닛보다 더 많이 들여다 본 것 같아요.

뭘 빠듯하게 한 여행이 아니여서, 소개된 편집샵 찾아가보고 그랬어요.

사진도 있고 편집도 귀여워서 책으로 하와이 여행하기에 좋은 책 같아요.

 

 

사인본이에요. 내게 더이상 도망은 가지 말자, 하면 는다!의 깨달음을 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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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켓 컬리를 며칠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하다가 결국 주문했다. 내 생애 이렇게 비싼 치즈들을 그것도 다량으로 구매해 본 것은 처음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억지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은 어느샌가 개인의 역사가 되어 있곤 한다. '시간을 내서' 하지 않아도 그것에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은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고도 넘친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없이, 이걸 이용해 뭔가를 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냥 좋은 것, 그저 끌리는 것.

  그것이 내겐 치즈다. 대단하지 않아도,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어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나는 종종 스스로 부자라고 느낀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좀 더 단단히 쥐어본다. 그렇게 내 삶을 조금 더 좋아하는 쪽으로 이끌어본다.

- 10~11쪽

 

   최근에 와인을 두 번 과하게 마셨는데 처음에는 그 날 바로 뻗었고, 두번째에는 다음 날 머리가 아파 하루종일 혼났다. 물론 과하게 마신 탓이지만, 아직 와인의 맛을 잘 몰라서 그런가 아직까지는 벌컥벌컥 음료처럼 들이킬 수 있는 맥주가 내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맥주와는 다른 그 찐-한 맛을 계속 알아가고 싶다. 치즈 하나로 책을 낼 정도의 김민철 씨처럼 동생은 커피와 와인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로스팅을 잘하는 지방의 커피집이 있다고 하면 주문을 해보고, SNS에 올려진 커피집 사장님의 남다른 커피사랑에 감탄하며 언젠가 그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한다. (동생은 커피와 전혀 관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맛난 와인을 사기 위해서 강남을 왔다갔다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동생이 그동안 고른 좋은 커피와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진하고 강한 이탈리아 와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곡예사 언니는 생일에 최근에 맛난 와인을 맛보았다며 보내주었는데 이탈리와 와인이었다. 어쩜! 아직까지는 맥주를 더 사랑하지만 와인에게 부러운 것은 와인에게는 대개 오래된 역사가 있는 것. 어느 지역에서 재배되는지 땅의 역사가 있고, 재배하는 사람들, 가문의 역사가 있고, 얼마나 오래전의 것인지 빈티지의 역사가 있는 것. (맥주도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부럽고 근사하다. 이야기를 듣고 맛을 보면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신의 물방울> 수준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최근에 와인을 과하게 마시고 뻗은 첫 날. 동생과 친구와 나는 랜선 술자리를 하기로 했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2.5단계의 시기라 대면하지 않고 술자리를 하기로 했다. 동생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의외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고 분위기도 꽤 좋았더랬다. 그 날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에 있었고, 군포집에서는 초대받지 않은 한 사람이 불쑥 끼어들어 네 사람의 술자리가 되었다. 남편은 드디어 사직서를 냈다고 모두에게 이야기했고, 친구는 강원도의 숙소에 잔디가 있어 좋다고 말했다. 친구 아들은 신기해하며 엄마 옆에서 껌딱지 모드로 이모들과 레고 삼촌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동생은 동네 가게에서 육회를 포장해와 와인을 땄다. 나는 이 술자리를 생각하며 들어갔다 말았다 한 마켓컬리의 치즈들을 주문했는데 다른 안주를 먹느라 마지막에 느즈막히 치즈를 가져왔다. 김민철씨가 말한 것 처럼 치즈를 깎는 최고의 도구 감자칼로 깎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터라 치즈의 맛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고 그냥 이 코로나의 밤이, 우리의 토요일 밤이, 다시 오지 않을 이 여름밤이 무르익는 것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남편이 일으켜 앉혔는데 웃으며 조금 앉아있다 다시 누워버려 작별의 인사를 하고 방안으로 끌려 들어간다고 한다. 정말 오래간만의 만취였다.

 

   치즈의 맛을 잘 모르는 나는 사놓은 치즈를 요리에 드문드문 넣고 있는데, 계란과 감자로 만든 프리타타에 넣었더니 향이 꼬리꼬리하고 맛이 더 풍성해졌다. 아직까지는 단독으로 먹는 것보다 곁들여 먹는 것이 더 맛난 것 같다. 책은 술술 잘 읽혔고, 나는 김민철 씨의 치즈처럼, 내게도 일생을 두고 좋아할 수 있는(좋아하고 있는), 그냥 좋고 그냥 끌리는 것,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부자라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는가 생각해봤다. 아직 찾지 못했지만 분명히 있을 거다. 아마도. 오늘도 냉장고에서 치즈통을 꺼내 꼬리꼬리한 냄새를 맡으며 감자칼로 조금씩 깍아 맛을 음미해본다. 흠, 이것이 치즈의 맛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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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from 모퉁이다방 2020. 9. 24. 07:38


   4호선 안이었다. 자유로가 막힌터라 지하철 안에 자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 날 나는 작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다리 위에 올려뒀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핸드폰 메세지가 계속 와 책을 봤다 핸드폰을 봤다 했다. 다시 책을 읽는데 아주머니가 왼쪽 팔을 만지며 혼잣말로, 그러나 내게 다 들리게 아씨 뭐라뭐라하면서 짜증을 냈다. 그제야 아차, 내 가방 끈이 팔에 닿았구나 싶었다. 사과를 할까 싶었지만 너무 기분 나쁘게 짜증을 내서 말았다. 마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대신 끈이 안닿게 얼음상태로 있었다. 왠지 끈위치를 바꾸는 것도 싫었다. 아주머니는 씩씩거리며 주위 빈 자리를 둘러보다 (빈 자리는 많았다) 두어 정거장을 더 앉아있다 마땅한 자리가 생겼는지 내 앞을 지나 자리를 옮겼다. 평소 같으면 아 왜 끈이 옆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도 몰랐지 하고 미안해했을텐데, 이번에는 앞으로 그 아주머니처럼 행동하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어떤 상황을 유연하고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티비에 나오는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지하철 안에서 옆사람 때문에 짜증이 많이 났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나는 티비 속 인상좋은 아주머니처럼 사소한 짜증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재치있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힘들겠지만, 이미 내가 옆자리 짜증내는 아주머니지만, 언젠가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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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

from 모퉁이다방 2020. 9. 13. 17:14

 

    2주간의 재택근무가 끝났다. 지난 금요일에는 운동 할겸 동네 산책을 했는데 새로 생긴 삼겹살집에 사람들이 그득했다. 2주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외식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은 잘도 돌아다니는 구나. 출퇴근시간이 아예 없어지니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네. 동생이 추천해 줘서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귀엽고 두근두근했다.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에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리다니. 김민철 씨의 치즈책을 읽고 거금을 들여 치즈 네 개를 주문했고, 보경이는 이웃의 책이라며 연두색 책을 보내줬다. 상주로 내려간 서울아가씨의 이야기다. 텀블벅에서 한수희 작가님의 새 책도 구매예약했다. 어느 저녁에는 대패 삼겹살을, 어느 저녁에는 LA갈비를 구워먹었다. 동생과 친구와 랜선술자리를 갖기도 했다. 거실에 있는 여인초의 새잎은 몇개월동안 돌돌 말린채 미동도 없더니 갑자기 커다란 잎을 짠하고 펼치기 시작했다. 동료가 생일선물로 준 마지막 바스볼로 반신욕을 하고 선풍기로 머리를 말리던 날에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버스씬이 생각이 났다. 수영을 하고 젖은 머리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첫째. 버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바람을 느끼던 그 표정. 군포에 오고 낮 풍경을 오래 보질 못해 아쉬웠는데 그 꿈은 이뤘다. 초록초록한 낮의 풍경을 자주 내다보았다. 내일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나. 재택근무 하는 사이에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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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요

from 모퉁이다방 2020. 9. 3. 19:35

 

 

    쏴아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제는 비가 오고 있었고, 오늘은 숲 속 나무들이 엄청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는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었고, 오늘은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풍에 스친 바람은 얼마나 센지 나무들이 쏴아하고 대나무 소리를 냈다. 멀리서도 그게 들렸다. 속이 시원했다. 그 바람을 다 맞고 싶어 방마다 창문을 다 열어두었다가 방문 하나가 쿵하고 큰소리를 내며 닫혀 황급히 모두 닫았다. 책방 문만 남겨두고.

 

    이번주는 재택근무 중이다. 생애 처음이다. 재택근무는. 정말이지 재택근무 체질이라고 느껴지는 일주일인데, 다음주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니 몸이 이 편안함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아침에도 원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난다. 그러고 나면 꽤 많은 시간이 남는데, 아침을 만들고 점심을 만들어 둔다. 책을 몇 장 읽고 정성스레 드립커피를 내린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샤워도 한다. 8시 40분 즈음이 되면 메신저로 출근 보고를 하고 일을 시작한다. 원격 속도가 느려 힘들지만 할 만 하다. 출퇴근 시간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손목이 아파 마우스패드도 쿠팡으로 주문해서 바로 받았다. 12시 반 즈음이 되면 아침에 만들어 놓은 점심을 데운다. 2인분이다. 남편도 이번 주는 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고 해서. 첫 날은 카레밥을 먹고, 둘째 날은 짜장밥을 먹었다. 큰 손이라 음식은 늘 많이 만드는데 이번주는 딱 2인분씩만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은 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이라 밥 먹고 후식이나 음료를 먹으면 끝. 오후 업무를 하고 5시 50분이 되면 역시 메신저로 퇴근보고를 한다. 칼퇴해도 집, 조금 더 일하고 퇴근해도 집이다. 파주에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두 시간 걸리는데. 별 움직임이 없어 (방-화장실-부엌이 전부) 배가 별로 고프지 않은데도 남편이 퇴근해오면 뭔갈 챙겨먹는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이른 출근 걱정 없이 놀다 잔다. 살 찐다고 둘이 나가서 딱 하루 운동했네.

 

   회사에는 창문도 없고 조용한데, 집에는 책상 바로 옆에 창문이 있고 대체로 활짝 열어둔다. 너무 조용해서 라디오를 틀어둔다. 주로 CBS를 틀어두는데 어제는 비가 와서 그런지 좋은 음악들이 줄줄이 나왔다. 어떤 곡을 듣다가 이현우 노래인데 제목이 뭐였지, 너무 좋은데 하고 네이버를 검색 해보니 이현우의 비가 와요, 였다. 오늘 퇴근을 하고 동네 수퍼에 우유와 피자치즈를 사러 나가면서 이어폰을 끼고 이 노래를 들었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에 커다란 구름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 구름도 빠르게 움직였다. 구름이 지나간 자리가 보였다. 해가 지고 있어 구름 색깔도 묘했다. 이현우가 노래했다. 또 비가와요 널 보고싶게 잊을만하면 또 비가와요. 그리고 또 노래했다. 너에게는 잘해주고 싶었는데. 아, 이 가사에 뭔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십대로 돌아간 듯한 몽글몽글한 마음. 다시 느낄 수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 그리운 마음. 태풍이 지나간 거리를 걷는데 태풍이 지나간 마음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아, 내일 재택 마지막 날이다. 점심으로 뭘 해 먹을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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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요트투어

from 여행을가다 2020. 8. 26. 19:12

 
   가이드북을 보니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마을 곳곳에 컬러풀한 색감을 한 장소들이 있어 걷는 재미도 있고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온단다. 오늘은 이곳으로 결정했다. 처음으로 조식을 챙겨먹었다. 수영장을 내려다보기만 했는데 곁에 두고 아침을 먹었다. 좋아하는 계란요리, 우유, 요거트, 빵을 든든히 챙겨먹었다. 씻고 단장을 하고 차를 탔다.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출발. 오늘은 싸우지 말자 다짐했다. 보조석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대박. 혹시나 싶어 남편에게 말은 하지 않고 어제 놓친 요트투어 업체에 글을 남겼는데 오늘 오면 투어를 할 수 있다고 원하면 회신을 달라는 답변이 왔다. 그럼요, 그게 얼마짜리 투어인데요. 우리는 당장 일정을 바꿨다. 빠르고도 친절한 답변이 왔다. 시간을 보니 바로 출발지로 가면 딱 되었다. 이것으로 오늘은 절대 네버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달려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제의 일을 다시 한번 사과하고 오늘의 일을 끝없이 칭찬했으니.

    어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헤매지 않고 출발지에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요트용 선글라스도 구입했다. 기다리고 있으니 스텝이 우리쪽으로 왔고 이름을 확인해줬다. 앱에 가입한 그대로 한글로 명단이 올라가서 스텝이 단번에 우리를 알아봤다. 동양인은 우리 둘 뿐이라. 어떻게 읽는 거냐며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다. 신발과 가방은 따로 보관한다며 가져갔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에 맨발로 한참을 서 있었는데도 마냥 즐거웠다. 어제 놓쳤던 요트를 탄다구. 발이 너무 뜨거워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바닷물에 발을 담궜다. 오늘은 요트 위에서 해지는 걸 본다구.

    승객은 스무명 남짓. 요트에 타자 주의사항과 배 위에서의 일정을 설명한 뒤 출발했다. 바다를 잘 보기 위해 갑판 위로 나왔다. 출렁이기 시작하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느라 섰다 앉았다 줄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잠시 뒤 음료가 준비되었다고 해 생맥주와 화이트와인을 받아 다시 올라왔다. 갑판 위에서 건배를 했다. 한 모금 마신 뒤 눈 앞의 바다를 바라봤다. 배의 속도만큼 세진 바닷바람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이 흥겨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걸 해보지 못하고 마우이를 떠날 뻔 했다구-

    이 투어는 선셋요트투어. 그러니까 하이라이트인 해가 지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술과 음료를 제공했다. 처음엔 함께 할 수 있는 간식을 줬고, 나중에는 배를 든든하게 채울 저녁을 줬다. 그러는 동안 출렁거리는 배의 리듬에 몸도 마음도 적응 되어 갔다. 남편은 운전해야 해서 맥주 한 잔만 마시고, 나는 이 흥겨운 배의 리듬에 부흥하기 위해 계속 잔을 리필해가며 마셨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 바다 너머로 해가 늬엿늬엿 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갑판 위로 올라왔고 카메라를 들었다. 음악은 부드럽고 로맨틱한 음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전까지는 각자의 일행들끼리 시간을 보냈는데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옆에 서 있는 낯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와 감탄사를 공유하고 어디에서 왔냐고 묻기 시작했다. 갑판 위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우리도 웃었다. 아주 행복하게. 이건 직접 해 본 사람들만이 얼마나 근사한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특히 우리같이 바보같이 놓치고 깜짝선물 받은 것마냥 마지막 승차한 사람에게 더더욱 그렇다고, 무척 좋았다고 덕분이라고 이야기했다.

    배에서 내릴 때까지 맨발이었다. 해가 져 조금 차가워진 바닷물에 발을 내딛으니 두 시간 남짓 배에 익숙했던 몸이 기우뚱했다. 그 느낌도 좋더라. 바로 해변을 떠나버리긴 아쉬워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모래사장에 앉아 좀더 머물렀다. 해변에 서서히 어둠이 물들고 해변가에 자리한 음식점 여기저기 음악이 울려퍼졌다.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의 행복감이 마구마구 느껴졌다. 이제 돌아가자. 남편이 말했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 깜깜해진 길을, 그러니까 어제는 싸워서 잔뜩 뿔이 난 상태로 갔던 그 길을, 오늘은 기분 좋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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