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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를쌓다 2021. 5. 10. 02:36

     

     

      주말에는 동생이 자고갔다. 친구가 보내준 흑돼지소라찜과 식빵을 나눠 먹고 밤 12시까지 수다를 왕창 떨었다. 12시까지 와인 세 병을 비운 남편과 동생은 금새 자고 나는 또 혼자 한 시간 뒤척이다 잠들었다. 한 시간이면 금새 잔 거다. 자다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배를 만져봤다. 한쪽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깜짝 놀라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뭉친 게 풀린 걸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 오늘은 어제 먹다 남은 소고기로 미역국을 끓였는데 고기가 적어서 그런지 깊은 맛이 나지 않았다. 다음엔 고기를 왕창 넣고 끓여봐야겠다. 엄마가 사준 거제산 미역은 좋은 상품인 걸 확인했다.

     

      요조 책은 소소하고 담백해서 좋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이 그랬고, 제목부터 끌렸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도 그랬다. 나는 이렇게 소소한 일상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게 좋더라. 92페이지는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었는데 읽으면서 막 설레였다. 아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게 언제지. 또 언제쯤 느낄 수 있을까 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동네의 음식점에 가서 술 한 잔 마시며 수다를 떠는 일. 그 계절 공기의 흐름을 들뜬 상태에서 느껴보는 일. 

     

      서울 망원동에 '강동원'이라는 중국집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매거진 <PAPER>의 정유희 편집장이었다. 진즉부터 유명한 가게였던 것 같은데 나는 이제야 그런 가게가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강동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선한 가을 밤바람을 맞으며 친애하는 몇 사람과 함께 맛있는 중국 요리에 고량주를 한잔 걸칠 계획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실제로 간판을 보니까 더 웃겼다. 강동원이라고 적힌 가게 간판을 핸드폰으로 연신 찍고 있는데 정유희와 이제석(광고천재)이 함께 도착했다. 안녕, 활짝 웃으며 다가와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앉는 정유희의 손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 p.92

     

      동생이 가고 남편과 오후 2시부터 시작하는 야구 경기를 봤다. 남편은 한화가 큰 점수차로 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도 글렀다며 방으로 들어가 게임을 했다. 요즘 그는 컴퓨터로 용을 훈련시키고 성도 짓고 그런다. 나는 요새 야구에 관심이 부쩍 많아져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경기를 본다. 오늘은 일요일 오후 청명한 날씨 아래 펼쳐지는 경기를 보니 야구장에 가고 싶어졌다. 야구장에 가서 맥주보이가 쏴주는 시원한 생맥을 먹으며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이 좋은 날씨를 즐기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늘은 야구장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로 시작하는 담백한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얼마 전 나는 거실 창에 붙어서 성산일출봉을 또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이종수에게 말했다.

      "나도 성산일출봉에 올라가보고 싶어."

      이종수는 "허벅지 터질 텐데" 하고 말했지만 뒤이어 좋다고 했다. 

      "그래. 한번 같이 올라갔다 오자."

      우리는 각자 필름 카메라를 하나씩 챙겨 들고 오후 늦게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고 천천히 완만한 들판을 걸어 올랐다. 이윽고 계단이 등장했고, 이종수는 또 한번 허벅지 이야기를 했다. 터지지 않게 조심해!

      정상에 올랐다. 우리는 둘 다 허벅지가 터지지 않았다. 이종수는 놀라운 듯 말했다. 

      "진짜 이상하다. 혼자 올라왔을 때는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왜 오늘은 하나도 안 힘든 거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중간중간 엄청 쉬었잖아."

      우리는 오르는 중간 충분히 쉬었다. 일출봉 초입에 있는 유일한 휴게소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도 보고, 조금 오르다가 바다도 보고, 또 조금 오르다가 탁 트인 성산 일대에서 우리 집도 찾아보고 책방도 찾아보았다. 정상에는 폭신해 보이는 분화구가 오목하게 펼쳐져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모국어를 쓰면서 정상에서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조용히 서서 여기까지 올라온 태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모든 걸 이렇게 하자. 책방도 음악도 글도, 내 나머지 인생 속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다 이렇게 하자.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눈을 오랫동안 꾹 감았다. - p. 156-157

     

      한화 야구는 남편의 예상대로 큰 점수차로 졌다. 나는 두 시간 정도 푹 자다 일어났는데 티비에서 여전히 경기 중이었다. 오른쪽 상단에 LIVE 표시가 있었다. 지난번 경기가 미세먼지 때문에 취소되었던 터라 두 게임을 연달아 하는 거란다. 두 번째 경기 후반부에 저녁으로 비빔면을 먹었다. 어제 남은 차돌박이를 조금 굽고 오이를 총총 채썰었다. 계란은 삶지는 못하고 후라이를 했다. 한화는 9회까지 1점 차이로 이기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했다. 남편은 9회 말 게임을 예상하며 이번에도 질 거라고 했다. 9회 말 처음에는 남편의 예상대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결말은 달랐다. 결국 한화가 1점을 지키며 이겼다. 3루까지 주자가 진출한 터라 점수 내기 쉬운 상황이었는데 병살타로 경기는 마무리되었다. 남편은 싱글벙글 웃었다. 내년에는 선선한 바람 맞으며 야구장에서 맥주 마시면서 야구 볼 수 있겠지. 캬- 생각만 해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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