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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참기 4 2019.07.10
  3. 군포 2 2019.07.09
  4. 다정한 구원 2019.07.03
  5. 두 달 뒤 25 2019.06.25
  6. 여행의 이유 2019.06.17
  7. 꼬치집 4 2019.06.15
  8. 마흔 6 2019.06.05
  9.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019.05.24
  10.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2 2019.05.16

위로

from 모퉁이다방 2019. 7. 18. 23:11

 

    엄마랑만 싸우고 아빠랑만 싸우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엄마랑도 싸우고 아빠랑도 싸우면 내가 정말 구제불능같다. 어쩌면 이렇게 못나서 이러나 싶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오늘은 아빠랑만 싸웠지만 얼마 전에 엄마랑도 싸웠으므로 구제불능과 같은 상태가 되어 운동을 하러 갔다. 땀을 닦고 눈물을 닦으며 러닝머신 위에서 임경선의 <다정한 구원>을 읽어나갔다. 임경선은 아버지가 마흔일 때 자식 셋과 아내와 나이든 부모를 두고 혼자 낯선 이국에 포르투갈어를 배우러 와 1년을 보냈던 리스본 대학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거닌다. 그곳에서 그 시절 아버지가 보았을 풍경들, 걸었던 길들, 먹었던 음식들을 상상해본다. 아버지는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마흔살의 남자가 자신의 어깨에 가득했던 짐들을 잠시 걷어내고 이국에서 혼자 살아가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지난주에는 남희언니를 만났다. 언니랑은 누룽지치즈콘닭을 시켜놓고 생맥주 여러 잔, 자몽소주 두 병을 마셨다. 2차를 가게되면 언니가 돈을 쓸까봐 이곳에서 끝을 내자고 했는데, 나와서 걸으니 바람이 통하는 괜찮은 2차 장소가 많아 후회했다. 분기 혹은 한 해에 한두 번 보게되는 언니는 늘 지난 여행 이야기를 해준다. 이번에는 친구들과 함께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고 했다. 아이슬란드는 물가가 무척 비싸서 먹을 것들을 잔뜩 싸갔단다. 오로지 오로라를 보기 위한 여행. 오로라가 나타날 곳을 예측하는 어플이 있는데 그걸 따라서 계속 갔단다. 산장 같은 곳에서 한국에서 싸간 얼큰한 음식들로 한끼 식사를 만들면서 오로라가 보이나 안보이나 점검하고, 그러다 오로라가 보이면 모두 하는 일을 멈추고 숙소 밖으로 나와 오로라를 올려다 보는 여행. 나는 늘 언니가 말해주는 여행을 언니와 만난 뒤에 가만히 떠올려보는데, 오늘 그 풍경을 다시 떠올려 보니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됐다. 언니는 북유럽풍 그릇을 선물해줬는데, 쓸 때마다 언니의 오로라가 그려질 것 같다. 

 

    운동 가는 길에 맥주 냉장고가 바깥에 나와있는 편의점이 있는데, 얼마 전에 오키나와 오리온 맥주가 진열되어 있는 걸 봤다.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가면 다 수입이 되는구나 생각을 하며 언젠가 세 캔을 사야지 생각을 했더랬다. 세 캔에 구천구백원이다. 오늘이다 싶어 편의점 맥주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불매운동 생각이 나서 그 옆의 익숙한 라벨에 눈이 갔다. 바르셀로나에서 마셨던 이네딧담이 있었다. 혜진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있는 줄도 몰랐던 맥주. 진짜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가면 다 수입이 되는구나! 세 캔을 샀다. 이것 역시 세 캔에 구천구백원. 그러고 집에 와 씻고 설거지를 하며 즐겨찾기 한 블로그 이웃님이 최근에 올린 효리네 민박 영상을 들었다. 요즘 곧 따로 떨어져 살 생각에 마음 한켠이 시큰해질 때가 있는데, 아빠랑 싸우고 울다 나간 못된 언니는 돌아와서, 인생은 혼자다, 라는 못된 말을 했더랬다. 동생의 훌쩍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물을 더 세게 틀었다. 동생은 요즘 어떤 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그 타들어가는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한다. 동생도 그리 티내질 않는다. 내가 계속 지켜봐줄테니까. 이제 두사람이 되어서 엄청나게 잘 지켜봐줄테니까. 어떤 선택이든 결국엔 응원할 거니까.

 

    들어오는 길에 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았다. 책을 당분간 사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 책은 팔월 말이 되기 전에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주문했다. 이 책으로 내가 이해하는 세계가 조금 더 넓어졌음 좋겠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반지를 녹여 우리 두 사람의 결혼반지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는데, 무심하고 심플하고 두께가 얇은 반지를 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무척 기대가 된다. 내일은 잘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금요일이니까. 아, 한 캔 맥주가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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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

from 모퉁이다방 2019. 7. 10. 23:19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첫번째로 먹는 사람과 아끼고 아끼다 제일 마지막에 먹는 사람 중 나는 후자다. 어제는 소중한 친구의 엽서를 받았다. 언제 연락을 주나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우편함에 엽서가 꽂혀 있는 걸 본 순간 너무나 반가웠다. 익숙한 글씨체. 심플한 수박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단번에 읽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며 참고 참다가 읽었다. 그동안 잘 지냈던 거죠? 흑흑. 얼마나 궁금했었는데요. 오늘은 보경이가 좋은 글을 읽었다며 그 글을 복사해 메일로 보내준 걸 받았다. 실은 월요일에 보냈던 거였는데, 오늘에서야 봤다. 유진목 작가가 등장하는 글이었는데, 조금 읽다 점점 좋아져 창을 닫았다. 조금 뒤에 좋은 시간일 때 읽자, 생각했다. 그때 읽음 더 좋은 글이 될 것이다. 좋은 글을 읽고 내 생각을 해준 마음이 더 고마웠다. 오늘은 운동을 하러 가기 정말 싫었는데, 문자 한 통이 왔다. 스윽 읽고 다시 닫았다. 아아, 어쩌지. 이런 고마운 사람을. 천근 같은 몸을 끌고 가 간단하게 걸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힘차게 걸을 힘이 없었다. 예상했던 시간이 되었을 때 더이상은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문자를 열었다. 천천히 다시 한번 읽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니 더 다정한 답변이 왔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헬스장을 나왔다. 덕분에 좋은 날에,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남희언니를 만나 누룽지통닭에 시원한 생맥을 한잔 하기로 했다. 언니에게 전해줄 청첩장에 짧은 편지를 쓰는데, 우리가 처음 여행한 제천이 생각났다. 무척 덥기도 하고, 무척 시원하기도 했던 그 때. 팔월이었다.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이렇게나 나이 들어버렸지만 그때 그 사람들이 여전히 함께여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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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from 모퉁이다방 2019. 7. 9. 22:53

 

 

   지난주에는 같이 살 집엘 갔다. 사전점검 기간이었는데, 처음 내부로 들어가 보는 거였다. 여기서 회사를 다니려면 멀고 또 멀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잘 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거실에서 나무들이 잔뜩 보였거든. 가까이에 낮은 산이 있었다. 숲이 보이는 집이었다. 단번에 방의 용도를 정했다. 나머지 숲이 보이는 방에는 책상과 책을 두기로 했다. 나즈막한 편안한 의자도 하나 사야지. 주문진에서 딱 한번 함께 펴본 캠핑의자를 가져와 숲이 보이는 창문 앞에 나란히 뒀다. 창문을 열어두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아, 좋다. 동시에 말했다. 여기에 소파를 두고, 여기에 식탁을 두고, 여기에 책상을 두고, 여기에 침대를 두고. 최대한 심플하게 살자고 말했다. 친구는 새집에 이사한 뒤 꼭 해가 질 때 자기네 집에 와야 한다고 했는데, 몇 번의 방문 뒤에 그 이유를 직접 목격했다. 집에서 보는 노을이 무척 아름다웠거든. 군포 집은 되도록이면 낮에. 바람이 나뭇잎에 출렁일 때 손님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처음 이 집에 들어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의자를 내어주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그래야지. 이 풍경이 이 집의 자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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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구원

from 모퉁이다방 2019. 7. 3. 23:16

 

 

  요즘은 평일 저녁에 꼬박꼬박 헬스장엘 간다. 약속 있는 날과 의욕이 없는 날을 제외하고. 후자의 날들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살이 빠져야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간다. 가서 핸드폰을 보면서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걷더라도 가긴 간다. 요일별로 헬스장에 오는 사람들 수가 차이 나는데, 확실한 건 금요일에는 좀 절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나를 포함해서. 갈 때 꼭 이어폰을 챙긴다. 8시 즈음에 시작하는 뉴스를 보고 나오면 딱 좋다. 어떤 우울한 날에는 너무나 괴로운 뉴스들이 많아 이 세상은 왜 이모양인가 하며 절망하지만, 대부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빨리 40분이 지나길 바라면서. 이번주에 가지고 다니는 이어폰이 고장이 났다. 헬스장에는 동그란 단자로 된 이어폰만 연결이 가능한데, 그게 집에 딱 하나 남아 있었다. 그제는 자막이 나오는 티브이를 봤고, 어제는 그냥 화면만 보며 걸었다. 오늘은 어떻게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딜까 고민하다 얼마 전에 동생이 공유한 전자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생애 첫 이북이다. 

 

  몇 년 전에 갑자기 발 뼈가 부러져 포르투갈에 가지 못한 동생은 포르투갈에 대한 온갖 연정이 있다. 이 책도 리스본 이야기라고 해서 구입했단다. 하루 만에 다 읽었고, 기어코 포르투갈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그리고 내게도 권했다. 언니가 읽으면 혼자 갔던 그 시간들이 떠오를 것 같아. 오늘 8시 넘어 헬스장에 가서 회원증을 내고 수건과 락커키를 받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러닝머신 위에 섰다. 티브이를 켜지 않고 이어폰도 끼지 않고 핸드폰의 이북 앱을 열었다. 핸드폰을 가로로 누이고, 러닝머신 시작 버튼. 손가락을 스윽 움직이니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렇게 응암동 헬스장 한 켠을 걷고 있는 내 앞에 몇 년 전 리스본 풍경이 펼쳐졌다. 한밤에 도착했던 공항, 잔뜩 긴장하며 탔던 택시, 그 안을 가득 메우던 라디오 소리, 트램의 시작점에 있었던 혼자 자기 아까웠던 숙소, 첫날 교통카드 사기 전 실렁실렁 걷다 만난 코메르시우 광장, 이어폰을 끼고 혼자 행복하게 앉아 있는 한국 사람을 보았던 테주강, 소매치기가 많다고 해서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28번 트램 나무소리, 소매치기를 만나 소심해져 결국 가지 못했던 상 조르즈 성까지. 몇 년 전의 일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행 직후에도 깨달았지만, 그 경험들이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 코메르시우 광장을 가로질러 테주강 변에 다다르니 물가에 얕은 계단이 나 있다. 강물이 철썽이는 잔잔한 소리가 들리고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수평선뿐이다. 눈부신 햇살은 따뜻하고, 강물과 바람은 기분 좋게 차다. 사람들은 강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사진을 찍는다.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자기 사진을 찍어달라고 낯선 사람에게 웃으며 부탁한다. - 임경선 <다정한 구원>

   

  동생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다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건 정말 '다정한 구원'이라고. 천천히 읽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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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뒤

from 모퉁이다방 2019. 6. 25. 21:56





   작년 팔월에는 울릉도를 여행했었다. 아침 일찍 강릉에서 출발해 세 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울릉도에 도착했다. 걱정했던 멀미는 없었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비현실적인 쨍-한 느낌이 있었다. 하늘은 새파랬고, 나무들은 짙은 녹색 그대로, 해도 짱짱했다. 무더웠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 땀이 한순간 훅-하고 식었다. 바다색깔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체가 원시적인 느낌이었다. 울릉도에서 하룻밤만 잘 계획이었다. 첫째 날은 해안도로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섬을 완전히 연결해 줄 마지막 구간의 도로가 공사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끝까지 갔다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해물이 잔뜩 나오는 짬뽕을 먹고 나와 커다란 지도를 보고 있는데, 주차비를 정산해주던 아저씨가 어떤 코스로 돌거냐고 물어봤다. 그냥 한 바퀴 쭉 돌려구요. 아저씨는 천천히 돌면서 멈춰서고 싶은 곳에 멈춰서서 구경하라고 했다. 그리고 렌트카를 빌렸으니 관음도에는 꼭 가라고 했다. 해안도로의 끄트머리에 있다고. 아저씨의 말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근사해 보이는 곳에 차를 대고 멈춰서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바닥의 구멍 틈으로 파도가 뿜어져 나오던 거북바위를 구경했고, 거의 일직선으로 올라가던 모노레일도 탔다. 등대까지 숲길을 자박자박 걷기도 했다. 아기자기한 커다란 하늘색 기둥이 있어 가보았더니 해중전망대였다. 입장권을 내고 아래로 들어가 바닷속을 구경했다. 창 너머 물고기가 많았고, 지하의 전망대는 시원하고 습했다. 


   그렇게 도로를 돌다보니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관음도. 아저씨가 차가 있으면 꼭 가봐야 한다고 한 곳. 그 때 너무 지쳤었다. 아침부터 움직였고, 울릉도의 해는 날 것 그대로라 땀도 엄청 흘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 맛난 밥을 먹고, 땀을 씻어내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저씨가 비싼 돈 들여 렌트했으면 관음도는 가봐야 한댔으니까. 그래서 갔는데, 차가 있으면 가면 좋은 곳이라 했으니까 우리는 당연히 차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차를 입구에 대고 다리를 건너 가는 거였다. 해가 지기 전 오후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입장 마감시간이 있었는데, 1시간 정도 남았더라. 망설이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가보기로 했다.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리 입구까지 올라갔다. 다리를 건너고 보니 어마어마한 높이의 계단이 있었다. 단과 단 사이도 높고, 층고 자체도 엄청 높았다. 정말 더운데. 그리고 너무 지쳤는데. 절망하는 그 애를 두고 내가 먼저 힘을 냈다. 쪼리를 신고 있었는데 남아있는 힘을 잔뜩 내서 폴짝폴짝 올라갔다. 내가 단번에 올라가니 그 애도 힘을 내서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힘들다는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중간쯤 와서 풍경을 보고 쉬고, 또 힘을 내서 나머지 계단을 올라왔다. 그렇게 펼쳐진 풍경이 장관이었다. 사람들도 없어 더더욱. 이 원시 그대로의 섬, 그 안의 또다른 자그만 섬에 우리 둘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느낌. 그게 조금은 황량하고 조금은 외롭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작은 섬을 오르내리며 한 바퀴 또 돌았다. 바람이 불었고, 그동안의 땀을 훅-하고 식혀 주었고, 이제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간에 기대 한참을 내려다 봤다. 바다와 하늘과 풀들. 바위들, 섬들. 우리가 온 길이자 다시 갈 길. 이번에는 갈 수 없는 길. 막힌 곳 없이 뻥 뚫린 작은 섬이라 다 볼 수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한 모두 다. 두 달 뒤에 관음도에 같이 갔던 그 애랑, 엄청난 계단을 함께 오르고, 그곳의 바람에 땀을 함께 식혔던 그 애랑, 결혼을 하게 됐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그 관음도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금은 황량하고 조금은 외롭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는. 딱 그 정도였음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한 번 멈춰섰는데, 거기서 노을을 봤다. 아주 근사한 노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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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from 서재를쌓다 2019. 6. 17. 22:30



  에피소드로 가득한 바르셀로나의 나홀로 놀이동산 체험기를 페이퍼로 써갈 생각이었다. 제목이 <여행의 이유>인 줄 알면서도 나는 이 책에 김영하의 여행체험담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을 했더랬다. '추방과 멀미'에는 기대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중국비자가 필요한 줄 모르고 출국을 한 뒤 바로 추방당한 작가의 생생한 경험담. 이런 에피소드가 그득하면 <여행의 이유>를 절로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튼 여행담이 적어 아쉬웠다. 오월의 시옷의 책은 내가 선정했는데, 제일 큰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읽어오기. 독서모임이면서 그동안 안 읽은 책들이 많았다. 얇고 잘 읽힐 것 같아서 선정했는데, 잘 읽히지 않았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이가 과반수 이상. 일단의 성공. 김영하 작가가 <대화의 희열>에 나와 여행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들이 좋더라. 이 책에서 제일 좋은 부분은 책을 끝까지 읽어야만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말에 있었기 때문. 


  바로 이 부분이다. 나와 함께 여행했던 여러 동행들에게 직접 써서 건네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고맙고 미안했다고. 앞으로의 동행에게도. 고마울 거고 또 그만큼 미리 미안할 거라고. "이 책에 도움을 준 고마운 이름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여행에서 내가 만난 모든 이들, 돈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간에, 재워주고 먹여주고 태워준 무수한 타인들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특별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이들은 있다. 바로 긴 여행길에서 나를 참아준 동행들이다. 가끔은 별 것 아닌 일로 다투기도 하고, 날선 말로 감정을 다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함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느낌을 공유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던 이들. 이들이 없었더라면 여행은 그저 지루한 고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지구에서의 남은 여정이 모두 의미 있고 복되기를 기원해본다." (p.213-214)



(...)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 18쪽

 

(...)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다. 

- 23쪽


(...) 마이너리그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원래 추구하던 것과 다른 것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불행했을 리는 없다. 그들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자기 인생을 살아냈다. 경기에 출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은퇴한 후에는 코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거나 다른 일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래 얻으려던 것('메이저리거 되기')보다 더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거나 최소한 얻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남 보기에는 보잘것없을지언정 평생을 들여 이룬 작은 성취가 있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 24쪽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51쪽

 

(...)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나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81-82쪽


(,,,)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 109쪽


(...) 여행을 거듭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작가는 '주로 어떤 글을 쓰'는지를 굳이 설명해줄 필요가 없는 이들, 즉 그 글을 읽은, 다시 말해 독자에게만 작가라는 것을. 

- 168쪽


   비슷한 일을 소설이 한다. 부부관계의 파경을 다룬 소설을 읽고 나면 독자 자신의 부부관계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탁월한 문장력으로 맥주의 맛을 묘사한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 냉장고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그때 마시는 한잔은 늘 경험하던 그 맛이 아니다. 문득 새롭다. 

-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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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집

from 모퉁이다방 2019. 6. 15. 08:26



   요즘 동생은 집 계약 문제로 고민이 많다. 세상 일이라는 건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퇴근길에 합정역에서 6호선을 타려는데, 상암에서 축구 하는 날이라 사람이 정말 미어터지게 많았다. 그 와중에 누가 잘못 건드린 건지 화재경보기도 울렸다. 이렇게는 도저히 못 타고 갈 것 같아 을 빠져나왔다. 하늘과 바람이 무척 좋은 날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초여름 날씨. 고민 많은 동생(답답할 땐 수다와 걷는 것이 최고다)과 6호선을 타지 못한 나(그 날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는)는 마포구청역에서 만나 함께 걷기로 했다. 불광천 길은 올곧아서 옆에서 냄새로 유혹을 하는 고깃집도 없고, 자주 멈춰야 하는 횡단보도도 없다. 그냥 쭉 걷기만 하면 된다. 


   그 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동생이 집 건너편에 공사를 하던 집이 일본식 우동집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집은 예전에 꼬치를 팔았었는데 제일 처음엔 친구부부가 공항 가기 전에 하룻밤 자러 와서 함께 갔었고, 이후에는 만나는 사람과 동생과 함께 갔었다. 친구부부에게는 말을 이쁘게 하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생겼고, 그 날 동생과 만나는 사람은 두 번째 만났는 거였는데 그 사람이 취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동생이 하고픈 말을 하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나는 그 날 그 사람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말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사람과의 수다는 여전하다. 


   아무튼 동생이 그 꼬치집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찾아보니 유명한 집의 체인이란다. 주로 우동을 파는데, 꼬치도 파는 것 같다고.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그러면서 다 걷고 거기 가서 꼬치에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 하면 그리 살이 찌지 않을 거라 제안했다. 그래, 인생 뭐 있나. 그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집 고민이 사라졌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 길의 끝에 꼬치와 시-원한 생맥이 기다리고 있다구. 길을 다 걸었고, 고급스럽게 바뀐 우동집에 입성했다. 활짝 열린 창가에 나란히 앉는 넓직한 좌석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꼬치와 생맥 두 잔을 주문했다. B꼬치 세트에는 닭껍질이 없어 베이컨방울토마토 닭껍질로 바꿔달라고 했다. 


   맛있더라. 꼬치도 생맥도. 생맥은 카스인데 맛있었다. 초여름 날씨가 카스 생맥 맛도 살려주는구나. 숯불에 구운 꼬치도 맛났다. 염통도 쫄깃하고, 베이컨을 두른 아스파라거스도 아삭아삭 짭조름하고, 소스를 얹은 치킨살도 통통하니 맛났다.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닭껍질은 말할 것도 없고. 짭조름하게 간이 된 것이 어찌 이리 바삭한 것인가. 생맥 한 모금을 하고 닭껍질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입 안에서 살살 녹네. 역시 유명한 집이라 다르구만, 생각하는데 어찌 이상하다. 내가 아는 껍질 맛이다. 어째 여러 번 먹어본 맛인데, 닭껍질은 죄다 이렇게 맛있는 것인가. 아닌데. 나는 이 집이 그 집 같다고 말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친구네와 온 곳. 쉴새 없이 말을 쏟아냈던 그 사람과 온 곳. 동생은 그럴리가 없다고 다른 집으로 바뀐 거라고 했는데, 결국 계산을 할 적에 물어봤다. 혹시 전에 그 집....인가요?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전기 등 안전 문제로 리모델링이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알아봐주셨네요오- 동생은 어쩐지 맛있더라구요, 라고 응하며 카드를 받았다. 닭껍질 맛도 몰랐으면서! 


   아무튼 다행이다. 내가 이 집 닭껍질 꼬치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 얇디 얇고 작디 작은 꼬치가 두개에 칠천원이라는 게 너무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바람을 마주할 수 있는 근사한 창가 자리까지 생겨서. 많이 걷고 꼬치 먹으러 또 가야지. 시원한 카스 생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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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from 모퉁이다방 2019. 6. 5. 23:32



   유월의 첫째주 토요일에 망원동의 너랑나랑호프에 있었다. 예약은 안된다고 했는데, 8시 즈음에 손님이 나가게 되면 그 테이블을 받지 않고 있을테니 잽싸게 오라고 했다. 그렇게 8시에 테이블에 안착했다. 고민을 거듭하다 갓김치와 파김치가 있는 육전과 국물떡볶이와 오백 다섯 잔을 시켰다. 맛난 맥스 생맥주였고, 김치들은 먹기 좋게 가지런히 잘라 주셨다. 육전은 따끈할 때 먹을 수 있도록 조금씩 나왔다. 길다란 떡이 들어간 떡볶이가 무척 맛있었다. 호프집은 손님들로 꽉 찼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나, 마시려고 하고 있었나 하는데 늦게 도착한다고 했던 소윤이가 가게 바깥에서부터 케잌에 불을 붙이고 환한 얼굴을 하고서 들어왔다. 마치 짠 것처럼 호프집 사장님이 생일축하음악을 틀어주셨고, 진짜 짠 것이 맞는 맞은 편에 앉은 조림이가 해피버스데이라고 새겨진 왕관을 내밀었다. 꽉 차 있던 손님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축하해줬다. 와와- 이런 서프라이즈라니. 놀랍고, 고맙고, 행복하고, 그런 상태에서 소원을 빌고 촛불을 껐다.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알고보니) 호프집의 또 다른 사장님이 노래가 나오는 초가 있다면서 원하냐고 물어봤다. 네네, 그럼요- 장난감 같이 생긴 초에 불을 붙이자 촛불이 달린 꽃잎들이 열리고 빙글빙글 돌았다. 생일축하노래가 계속계속 나왔다. 또 한번 소원을 빌고 촛불을 껐다. 이번에도 잘 살게 해달라고 했다. 촛불을 꺼도 노래는 계속계속 나왔다. 사장님이 일회용 초라 내일 아침까지 노래가 계속 나올 거라고 했다. 조림이는 임시방편으로 케잌상자에 초를 집어 넣었다. 맛난 것을 사려고 건너편 투썸까지 다녀왔다던 소윤이의 생일케잌은 8조각으로 공평하게 나눠서 함께 축하해준 손님과 사장님들과 나눠 먹었다. 맥주는 맛있었고, 건배도 여러 번 했다. 해피버스데이 왕관은 계속 쓰고 있었고, 이후에 시킨 치킨과 소라숙회, 쭈꾸미 소면도 맛있었다. 만나는 사람에게는 실버스타라는 별명이 생겼고, 그날 모임에 실버스타가 와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마흔의 생일은 이리도 행복하구나, 싶었던 그런 밤. 유월의 시옷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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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어떤 책을 읽고 그 작가의 책을 한 권 빼고 연이어 구입해 읽은 적이 있다. 처음 읽은 책이 무척 좋아서 푹 빠졌었다. 나머지 책들도 나쁘지 않았고, 더 출간되는 책이 없나 기다리게 됐다. S와 이야기를 하다 둘 다 그 첫번째 책을 읽었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S는 그 작가의 블로그를 알고 있었는데, 오래전에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 친구목록에서 지웠다고 했다. 내가 블로그가 궁금하다고 하니 추적에 추적을 거듭해서 찾아줬다. 나는 몇달정도 블로그를 구독하다가 친구목록에서 지웠다. 내가 상상했던 작가와 거리가 있었다. 물질적인 것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분 같았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 달랐다. 나는 그런 밥을 그렇게 자주 사먹을 수 없다. 왠지 조그만 배신감이 들었다. 


  한수희 작가님 책은 지금까지 세 권을 읽었다. 제일 처음은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다음은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그리고 이번 달에 신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읽었다. 출간순대로 읽긴 했는데,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전에 출간된 책이 여러 권 있다.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은 씩씩했다. 세계 이곳저곳을 혼자서, 친구와, 남편과, 아이들과 씩씩하고 활기차게 돌아다니는데, 시원시원한 문장들에 속이 뻥하고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음 책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은 차분했다. 나이가 들고, 사색이 많아지고, 세상일에 지치기도 하고. 그런 사람이 위안을 찾기 위해 교토를 여러 해 반복해서 찾는 이야기였다. 같은 작가가 맞나 생각이 되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이 작가의 완전한 팬이 되었음을 알았다. 한때 왕성한 여행욕을 자랑했던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새벽에 동네를 산책해본 적이 있냐고, 운동화를 질끈 묶고 해가 뜨기 전 좋은 기운들로 가득한 공기 속을 천천히 걸어보라고. 매일매일 조금씩 뛰어본 적이 있냐고, 본인이 뛸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뛰었을 때 몸의 변화를 직접 느껴보라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속옷 말고 정말 나만을 위한 팬티를 입어본 적이 있냐고, 이름하야 엄청난 사이즈의 맥시팬티. 얼마나 편한 줄 아느냐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매번 핑계를 찾고 있지 않냐고, 어디서든 언제든 조금씩 글을 써 내려가면 결국 쓸 수 있다고, 장소와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고. 유명한 작가들도 다 그렇게 했다고. 한때 커피집을 열었는데 결국 망해버렸지만 괜찮다고,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시간을 결코 허투루 쓰지는 않았다고, 배운 것들이 있다고. 그러니 실패해도 괜찮다고. 


  작가의 신간이 출간되면 알림이 뜨는 서비스를 신청해 놓았는데, 아마 해지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에세이를 줄기차게 읽고 있자 친구가 남의 일기를 왜 그렇게 열심히 읽느냐고 했다. 나는 남의 일기를 읽으면 다름 아닌 내가 잘 살아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잘 해왔고, 앞으로 더 잘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남의 일기가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고 했다. 2016년에 출간된 <온전히 나답게>도 읽고 싶었는데, 6월에 개정판이 출간된단다. 6월이 되면 새 책을 사야지. 그리고 또 남의 일기를 열심히 읽고, 힘을 얻어야지.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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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이 이 책을 무척 좋아해 호텔에서 하는 북토크 신청을 했다. 언니와 함께 살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적었다고 한다. 동생이 먼저 읽고, 다음에 내가 읽고, 그렇게 둘다 읽고 북토크에 갔다. 북토크에 가서 좋았던 점은 책과 인스타로만 보았던 두 작가님의 실물을 직접 보았다는 것. (김하나 작가님은 정말 자그마한 사람이었다) 그 날의 북토크는 책에 있던 에피소드를 한번 더 이야기하는 거여서 좀 아쉬웠다. 어쨌든 북토크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독자의 질문은 "그 아파트는 어디에 있나요?"였다. 동생은 창밖으로 플라타너스 잎이 물결 치는 두 작가님의 망원동 집을 무척 궁금해해 인터넷으로 망원동 아파트를 검색해 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분이 또 계셨다! 김하나 작가님이 "그냥 아파트예요. 어느 동네에나 있는 평범한."이라는 답변을 했는데, 그 말이 선명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의 집을 어떤 집으로 만드느냐는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다. 한없이 작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집이지만, 사람도 그렇듯 모든 집도 장단이 있다. 예전에 살던 면목동 집은 낡은 다가구 주택이었다. 번듯한 대문이 없었다. 검정색 페인트로 칠해진, 잠금장치가 단 한번도 작동하지 않았던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 가게 뒷마당이 나왔다. 그 옆으로 작은 통로가 있었는데, 그 통로 안의 계단을 올라가면 첫번째에 있는 문이 우리 집 문이었다. (2층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고, 한 개의 문은 3층 주인집으로 이어졌다) 화장실과 부엌이 따로 있는 투룸이었는데, 처음 이사왔을 때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는데 오래 살수록 오래 산 티가 났다. 청소해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집이었다. 나중에 동생은 그 동네와 그 집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집이 나쁘지 않았다. 길 건너에 전통시장이 있었고, 지하철 역까지 걸어서 3분이면 충분했다. 2층이라 해가 잘 들었고, 투룸이라 방 하나에는 책과 옷을 보관할 수 있었다. 길 모퉁이에 있는 집이어서 옷방 창문 하나를 활짝 열어놓으면 초여름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창문 앞에 컴퓨터 책상을 두었는데, 거기서 바람을 맞으며 블로그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백수 시절 매일 도서관에 가 책을 읽었더랬다. 물론 그것은 추억이고, 다시 그와 같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겠냐라고 하면 흠, 흠, 흠 그러지 못하겠다. 그래,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다른 이유로 플라타너스 출렁 집이 있을 수 있다는 거다. 고가의 집이 아니더라도, 넓지 않더라도, 모두 각자의 플라타너스 출런 집을 가질 수 있다. (흠. 그래도 고가의 넓은 집에 살게 된다면 정말 좋겠지.)


  아무튼 책은 무척 재밌었다. 깔깔거리며 재미나게 읽었다. 인스타에서 김하나 작가님의 일상을 구경하곤 했었는데, 늘 정돈된 좋은 집에서 쿵짝이 잘 맞는 룸메이트와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부러웠었다. 내 일상은 싸우고 멍드는 투성인데.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었더라. 그래, 사람 사는 거 다 비슷비슷하지. 잘 싸우고 잘 화해해야 잘 살 수 있지. 남녀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김하나 작가님은 집이 무척 깔끔하다는 독자의 말에 인스타에 매번 같은 곳만 올라오지 않나요? 저희 집에도 보여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보여질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또한 집 뿐만이 아닐 거다. 



   강습을 마친 저녁에는, 동해안이니 역시 회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코스를 1인분으로는 내지 않는 곳도 많아서, 몇 군데 횟집에 전화를 한 다음 겨우 예약에 성공했다. 혼자 차를 몰고 가서 맛있게 먹은 다음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모든 게 예정대로 순조롭고, 착착 빠르게 돌아갔으며, 새로운 경험으로 꽉 찬 2박 3일을 보냈다. 경탄의 순간에도, 좌절의 순간에도 언제나처럼 혼자였다. 그러고 나니 이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라서 못하는 일이 있는 게 싫어서 뭐든 혼자서도 해왔고 또 꽤 잘해왔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럿이 해야 더 재밌는 일도 존재한다는 걸.

- 16-17쪽


   "친구들은 사회적 정서적 안전망이다." 김하나가 늘 강조하던 이야기처럼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고 있다. 다른 온도와 습도를 가진 기후대처럼, 사람은 같이 사는 사람을 둘러싼 총체적 환경이 된다. 상대의 장점을 곧잘 발견하고 그걸 복돋아주는 김하나의 '칭찬 폭격기(김하나가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에서 얻은 별명이기도 하다)'적인 면모에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술을 마시고 어처구니없는 추억들이 쌓인다. 요리를 잘하고 또 잘 얻어먹는다. 이런 데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는 사실을 나는 동거인에게서 배워간다. 김하나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서 열린 새 세계다.

- 26-27쪽


   어떤 차이는 이해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나는 김하나를 통해 세상에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잊어버리고 살다가 같이 장을 볼 때마다 새롭게 놀란다. 그리고 한 알 한 알 먹어치우는 동안 의아하다가 조금 슬퍼진다. 어떻게 이런 게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같은 걸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서 꼭 가까워지지 않듯,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곁에 두며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는 건 공존의 첫 단계다.

- 34-35쪽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과연 함께 살기 좋은 대상이었을까? 아마 가슴속 깊이 이해하면서 진절머리를 내고 도망쳤을 것 같아. 참 다른 김하나와 함께 살면서 나는 조금은 욕심이 줄고, 얼마간 정돈되었고, 약간은 느긋해졌다(고 믿고 싶다). 이렇게나 다른 나와 같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 그렇듯이 김하나에게도 때때로 찾아오면 기쁘겠다. 과육이 단단하고 탱글한 육볼보라든가 달콤하고 새콤한 향이 조화로운 죽향 같은 딸기 종류를 새로 알게 된다거나, 치킨을 같이 먹을 때 내가 좋아하는 다리, 김하나가 좋아하는 날개와 목을 서로 양보라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거나, 그런 작은 여백이 채워지는 것처럼.

- 36-37쪽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 좋은 점은, 세상이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거다. 그게 뭐냐면, 결혼을 안 해도 별일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결혼 안 해봐서 아는데, 정말 큰일 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생길 수 있을 별일 큰일을 곰곰 생각해봐도, 앞으로 점저 더 결혼할 확률이 낮아질 것 같다는 정도 외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 78쪽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불안하고 초조했던 건 결혼을 못 해서라기보다 '결혼 못 한 너에게 문제가 있어' '이대로 결혼 안 하고 지내면 너에게 큰 문제가 생길 거야'라고 불안과 초조를 부추기고 겁을 줬던 사람들 때문이라는 걸. 오지라퍼들이 아무리 까아내린다 해도 나는 내가 하자가 있는 물건도, 까탈스럽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안다. 다만 몇 번의 연애가 잘 되지 않은 시간이 있었고, 일이 너무 바쁘거나 재미있어서 새로운 사람 만날 시간이 없던 시기가 있었고, 결혼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소개팅을 나갔지만 번번이 상대와 가치관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와 이제 결혼하지 않은 채로도 잘 살아가고 있음을. 나만이 나는 나의 길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나는 남의 입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는 사람이며, 미안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행복하다.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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