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404건

  1. 집밥 8 2020.04.05
  2. 빙하 맛의 사과 2 2020.03.30
  3. 따아와 라떼 4 2020.03.21
  4. 치통 2 2020.03.04
  5. 작년, 바다 2 2020.03.03
  6. 삼월 2020.03.02
  7. 5 to 7 2 2020.02.13
  8. 20200202 6 2020.02.05
  9. 2020 영화처럼 2 2020.01.15
  10. 출국 2020.01.05

집밥

from 모퉁이다방 2020. 4. 5. 19:05

 

  집에 가려면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한번 타야 한다. 버스정류장까지는 일단 하늘다리식의 긴 통로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요즘 자주 기웃거리는 화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지나고 나무길을 오분여 걸으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류장이 있는데, 정류장 가기 직전에 마트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데 없는 게 없는 마트다. 마트 밖에는 세일하는 식재료와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다. 나는 매번 그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회원으로 전화번호를 등록해 놓은 덕분에 일주일에 두세번 세일 품목을 정리한 문자도 받는다. 한돈암돼지삼겹살 1근 9900원, 노르웨이자반 1팩(1손 2마리) 3980원, 시금치 1단 990원, 백오이(특) 1봉(5개) 2980원. 나는 이 정도의 소규모 마트가 딱 맞다. 큰 마트는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게 된다. 당장 필요없는 걸 너무 많이 사게 되고. 이 마트는 들어서면 제철 채소가 한 눈에 보인다. 연근이 나올 때는 연근을 사다가 조림을 해먹었고, 무가 싸게 나올 때는 인터넷을 검색해 깍두기를 해먹었다. 요즘에는 달래도 나오고, 냉이도 나오고, 미나리도 나온다. 달래와 냉이는 사다가 된장찌개에도 넣고, 간장에 넣어 잘 구운 곱창김에 찍어 먹었다. 봄이 왔구나, 마트를 들어서면서 느낀다. 요즘 싱싱한 봄채소들이 그득하다. 금요일에는 빵빵하게 채워진 미나리 한 봉지를 990원에 사서 귀가했다.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일대일로 섞고 얼음물을 넣고 살짝 데친 새우도 넣었다. 미나리는 따로 손질할 필요없이 싱싱하다. 찬물에 씻어 적당한 크기로 잘라 반죽에 넣었다. 남편이 머리를 자르고 8시쯤 온다고 했으니 그때 딱 부치면 되겠다. 귀리를 넣은 밥도 30분 전에 좋은 냄새를 풍기며 취사가 완료되었다. 어제 남은 미역국도 꺼내뒀다. 오늘 숙모가 전화를 주시면서 다음주에 잘 익은 파김치를 보내주신다고 했다. 어제는 계속 생각났던 알찜을 둘이 느즈막히 나가 먹고 왔다. 이번주에 다퉜는데 어제 외식을 하며 얘기를 많이 하고 말끔하게 풀었다. 처음 해보는 미나리 새우전은 어떤 맛이려나. 배가 슬슬 고파오네.

 

 

 

 

 

 

 

 

,

빙하 맛의 사과

from 서재를쌓다 2020. 3. 30. 22:05

 

  많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아질 때가 오지.

  오래 전, 여행 선배들이 말했다. 그 말은 신묘한 점쟁이의 예언처럼 딱 맞았다.

  많이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시간 들여 천천히 보고 싶다. 먹는 것과 머무는 곳에 좀더 돈을 쓰고 무엇을 보기 위해 조바심을 내거나 안달 내지 않고 싶다. 전전긍긍과 근심걱정은 돌아가면 차고 넘치게 할 수 있다.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 p. 64-65

 

   아비뇽에서 묵은 곳은 오래된 작은 호텔이었다.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아침마다 주인 할아버지가 내려주는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라는 리뷰 때문이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작고 사소한 것일 때가 많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잊힌 채로 선반 위에서 담담히 익어가는 과일이나 빛이 미처 닿지 않는 그늘에 눈과 마음이 기운다. 조금 비뚤어진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정한', '주인 할아버지'나 '맛있는 커피' 같은 것에 마음이 약해지는 타입이다.

  빵과 커피, 약간의 잼과 주스 뿐인 소박한 아침상에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들어요." 라는 다정한 말이 곁들여졌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마음이 가만히 움직였다.

- p.123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마트로 달려갔다. 좋아하던 요거트는 금방 찾았다. 건포도가 들어있는 시나몬 향 그래놀라를 즐겨 먹었는데 똑같은 제품은 찾을 수 없어 비슷한 것을 골랐다. 그리고 잼과 치즈, 햄과 빵에 과일과 채소 등을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한동안 빌린 집에서 매일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워 간소하지만 든든한 아침을 먹을 것이다. 물론 시나몬 향 시리얼을 듬뿍 올린 바닐라 맛 요거트도 먹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생각해보면 여행 후에 문득 생각나는 것들은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박물관보다는 아주 사소하고 극히 사적인 것들이다.

- p.240

 

-

 

   '여행자의 조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빙하 맛의 사과>의 첫 글 '볼로냐' 이야기를 읽을 때 그 밤이 생각났다. 혼자떠난 첫 유럽여행에서 맞이한 혼자인 밤. 난생 처음 비행기를 바꿔타고, 아주 긴 시간 비행한 뒤, 영화에서나 보았던 리스본의 공항에서 내려 동생과 함께 예약한 호텔을 홀로 찾아가는 밤. 택시를 타는 것도 무서웠는데 한밤 중이라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택시 아저씨에게 행선지를 말했지만 어디로 가는지 불안했던 밤. 과묵한 택시 아저씨와 타국의 라디오 소리, 낯선 풍경들.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던 그 밤. 다행히 무사히 도착한 호텔 앞에서 안도의 숨을 내뱉고, 체크인을 하고 침대 두개가 나란히 놓인 방에 입성했던 밤. 테라스의 야경에 감탄하고 씻고 잠들었는데, 잠이 잘 왔었나 설쳤었나. 그렇게 낯선 여행지에서 비몽사몽 밤을 보내고 맞이한 첫 아침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침의 테라스 밖 풍경은 눈부셨다. 밤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활기차고 빛났다. 낯선 햇볕이 그득했다. 밤에 멈췄던 것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침의 활기찬 기운으로 식당으로 내려가 방 번호를 말하고 접시 한 가득 음식을 담고, 잔에 까만 커피를 가득 채워 혼자 조식을 먹었더랬다. 맛있더랬다. 다리가 아픈 동생에겐 미안했지만, 긴 시간 걸려 혼자서라도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 생각하다보니 여행가고 싶어졌다. "호텔에 도착한 건 늦은 밤이었다."로 시작해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로 끝나는 책이다.

 

 

 

,

따아와 라떼

from 모퉁이다방 2020. 3. 21. 10:43

 

  매번 혼자 남겨지는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다. 고등학교 때는 혼자 있는 아빠에게 그랬고, 최근에는 동생에게 그랬다. 대학교 때 나도 혼자였는데 그건 괜찮았다. 지난 주에는 치과 때문에 하루 연차를 냈다. 남편이 동생집이 치과와 가까우니 하루 자고 바로 가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내 아침 출근길 지하철 역까지 운전을 안해도 되는 것이다! 역시나 술약속을 잡았더라!) 마침 그날 휴가자가 많아 야근을 했고 동생집에 느즈막히 도착했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자 통닭을 파는 트럭이 보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전기구이 통닭트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는 응암역 길 건너에 있던 할아버지 통닭이다. 아주 바삭하고 아주 부드럽고. 포장해주실 때도 세심하게 까만봉지를 묶어 꽉 조여주신다. 가는 길에 냄새가 많이 날까봐, 라고 나는 생각했다. 2주 정도 안 나오셨을 때는 기다렸다고 고백까지 했을 정도. 전기구이 통닭을 사고 편의점에 들러 3개에 9900원 하는 빅웨이브 캔을 샀다.

 

  동생네 집은 골목을 여러 번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길이 여러가지인데 나는 늘 길이 헷갈려 멀리 돌아간다. 신축빌라에 방이 하나 있고 거실겸 주방이 하나 있다. 동생이랑 한달 넘게 돌아다니면서 집을 봤는데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여기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은 반신반의했지만 나는 확신했다. 방에는 나무침대가 있고 까만색 행거가 있고 티비가 있고 길쭉한 화장대가 있다. 티비를 제외하고 거의 다 새로 샀다. 동생은 이 집을 꾸미기 위해 엄청난 검색과 돈과 시간을 들였다. 거실 겸 주방에는 나와 남편이 사준 커다란 나무책상과 의자가 있다. 이렇게 큰지 모르고 주문했는데, 공간의 1/3 정도 차지하는 것이다. 처음엔 너무 큰 것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은 동생의 힐링포인트라고. 블라인드를 살짝 올려놓고 창밖의 야경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고 한다. 라디오가 동생의 말벗이라고. 틈새 빈 공간은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뒤 딱 맞는 수납장을 샀다. 방과 거실 겸 주방을 연결하는 문은 반투명 유리인데 거기에 와인을 좋아하는 동생이 와인산지 지도를 두 개 나란히 붙여뒀다.

 

  나는 통닭 봉지를 뜯었고, 동생은 맛난 화이트 와인이 남았는데 먹을겨? 하더니 잔을 내왔다. (이 와인을 어제 이마트 트레이더스 가서 총 다섯 병 구매했다. 세 병은 구매대행이지만. 진짜 맛났다.) 우리는 금요일 밤 동생이 그러듯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블라인드를 살짝 올리고 창밖의 야경을 내다보며 와인을 마시고 통닭을 먹었다. 맥주도 마셨고, 나중에 동생이 치즈와 올리브 와인을 내와서 그것들도 먹었다. 반년 정도 혼자 살아 본 동생이 혼자 사는 삶의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얘기해줬다. 좋은 점은 언니가 좋아하는 티비를 억지로 같이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고 (-_-;), 좋지 않은 점은 역시나 외로움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주말에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이것이 자신의 노년의 삶 아닐까 생각을 한다고.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명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고 했다. 11시가 되자 동생은 침대 밑에 요를 깔아줬다. 나는 예의 티비를 억지로 같이 봐야하는 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티비를 켰다. 그렇게 가습기 두 개를 켜놓고 함께 잠들었다.

 

  다음 날 동생은 출근을 하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차가운 라떼를 만들어 각각 텀블러 안에 넣어두고 갔다. 전날 회사에서 받아온 수제김밥 두 톨과 함께. 나는 어제치의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이곳저곳 동생에게 보이지 않는 집안 때를 조금 제거해 준 뒤에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바꿔 입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는데 집 전체가 한 눈에 보였다. 순간 동생이 잘 살고 있다, 이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확신이 맞았다. 안락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동생에게 커피가 맛났다고 말하니 이렇게 답이 왔다. "또와 코지하우스. 모닝커피저녁와인 제공."

 

 

 

,

치통

from 모퉁이다방 2020. 3. 4. 23:30

 

   주말부터 왼쪽 이가 욱신거렸다. 낮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데, 밤에 자다가 너무 아파 깨곤 했다. 치아 상태가 엉망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이런 치통을 느낀 적은 없어서 주말 내내 불안했다. 다니는 치과에 전화를 했는데 화요일 야간진료 예약이 꽉 찼다고 했다. 아파서 잠을 못 잔다고 하니 와보란다. 얼마나 아픈가, 온도에 따라 통증이 있는가, 음식을 씹을 때도 아픈가 등등의 질문이 이어지고 결국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씨티를 찍었다. 왼쪽 윗쪽 사랑니 앞의 이가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뿌리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고. 아무래도 신경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흑- 치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또 후회된다. 정말이지 치아가 튼튼한 것은 복이다. 큰 복- 평일 오전에만 가능하다고 해서 날짜를 잡고 치통을 가라앉혀줄 약을 처방받았다. 약 먹고 잤음에도 어제 아파서 또 깼다.

 

   집에 화분이 여섯개 있다. 둘은 입주가 끝날 무렵에 떨이로 팔던 화분이고 셋은 선물받은 화분, 하나는 삭막한 집에 제일 처음 들인 로즈마리 화분. 로즈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개의 화분은 큼지막하다. 제일 큰 화분은 파키라였는데,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에. 화분만 남아있다. 무성했던 잎은 진작에 다 떨어졌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나무기둥만 남겨두었는데 뿌리벌레가 계속 생기는 통에 지난 주말에 기둥과 흙까지 모두 버렸다. 결국 커다란 화분만 남았다. 원인은 과습. 잎이 무성해서 볼 때마다 뿌듯했는데 시드는 건 한순간이더라. 나머지 커다란 아이들은 잘 자라주고 있다. 파키라의 교훈으로 물은 주 주지 않는다. 겨울에는 좀 부족한 게 오히려 낫더라. 스투키는 물을 언제 줘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는데 몸통이 어쩐지 너무 홀쭉해보인다 싶어 이때다 하고 주니 다음날 몸통이 굵어지고 단단해지더라. 주말이 되면 여인초와 몬스테라의 커다란 잎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준다. 어쩐지 간지러운 등 긁어주듯 시원해하는 것 같다.

 

   파키라는 갔지만 남은 아이들에게는 새잎이 올라오고 있다. 잎이 넓은 식물들의 새잎은 신기하더라. 잎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 솟아나는 게 아니라 동그랗게 말린 채로 솟아나더라. 돌돌 꼬여있는 잎들이 조금씩 커지면서 지금의 모양대로 사르르 펴진다. 여린 연둣빛을 하고서 새내기 티를 잔뜩 내다가 어느새 옆의 언니오빠들을 따라 원숙한 초록색이 된다. 그리고 누가 언니오빠이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게 어느새 잘 어우러지더라. 치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새벽이면 통증을 조금 가라앉히려고 거실로 나간다. 차가운 물을 떠놓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천천히 물을 마신다. 그러다보면 그 새잎들이 보인다. 진짜 이쁘구나 싶다. 니네는 치통이 뭔지도 모르지?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통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다음 주면 말려있는 새잎이 예쁘게 펼쳐지겠지. 오늘은 약이 좀 받기를 바라며. 밤새 잘 자라, 얘들아. 오늘밤은 우리 만나지 말자.

 

     

,

작년, 바다

from 여행을가다 2020. 3. 3. 18:58

 

  지난해 시월에는 태안을, 십일월에는 주문진을 다녀왔다. 여럿이서 갔다. 나의 교우관계는 늘 나의 지인들, 조금 더 넓히면 친구의 지인들까지였는데 이제 남편의 친구들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남편과 내가 다른 사람이듯 내 친구들과 그의 친구들 역시 무척 다른 사람들인지라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친숙해지고 있다. 어떤 조심의 끈은 놓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관계란 좋지만 어려운 것이기도 하니까. 실컷 보지는 못했지만 두 군데 다 바다가 있었다. 서해와 동해. 올 상반기에 어딘가 놀러 갈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의 장거리 항공권 예약취소가 이어지고 있다. 오랜 고민 끝에 날짜를 정하고 돈을 지불한 건데. 집순이라 집에 있는 게 좋지만, 강제적인 거라 답답하기도 하다. 사진들을 돌이켜보니 아, 바다보다는 대게네. 대게. 또 대게 먹으러 가고 싶다-

 

 

 

 

 

,

삼월

from 모퉁이다방 2020. 3. 2. 22:07

 

   남기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삼월이 왔네. 어느 날, 출근길인가 퇴근길에 가산디지털단지역 지하철 문이 열렸는데 순간 깨달았다. 이 역이 연애시절 남편네 동네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정차했던 역이었다는 걸. 주말 오전의 열차는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멈췄다. 이곳까지만 운영하는 열차라고 했다. 곧 기다리면 또다른 열차가 올 거라고. 그 열차는 멀리까지 갈 거라고 했다. 날씨가 흐렸다.  역사  바깥인지 안인지 그 경계선 즈음에 커다란 벚꽃나무가 있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모두 그 벚꽃을 찍어댔다. 흐렸는데도 가득했던 벚꽃 때문인지 환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매일 지나는 역인데도 핸드폰을 보느라 잠을 자느라 그 흐린 봄날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핸드폰도 보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나뭇잎도 꽃잎도 없이 덩그라니 서 있는 나무를 보고 깨달았다. 아, 그곳이 이곳이었지! 이 나무에도 곧 꽃이 피겠구나. 하나 둘 피기 시작하다 꽃잎이 떨어질 정도로 가득해지겠구나. 사람들은 또 멈춰서서 너도나도 꽃사진을 찍겠구나. 그러다 열차가 오면 또 무슨일 있었냐는 듯 우르르 열차를 타고 멀리들 가겠구나. 저 멀리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봄이 오고 있구나.  이런 저런 소소한 생각들을 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중에 우리들, 이렇게 말하리라 상상하면서. 2020년 늦겨울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잘 견디고 있길. 그런데 <디디의 우산>은 좀 힘겨웠다.

 

 

 

,

5 to 7

from 극장에가다 2020. 2. 13. 22:33

 

   어느 주말에 <5 to 7>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소개 프로그램 중 SBS를 제일 좋아하는데, 영화 제목을 제일 마지막에 공개하는 '이 영화 제목이 뭐지?', 흥행하지 못한 명작을 소개하는 '미안하다 몰라봐서' 코너가 있기 때문에. '미안하다 몰라봐서' 코너에 소개된 영화였을 거다.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불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영화의 배경이 되는 뉴욕이 근사해서 혹시 있을까 하고 왓챠를 찾아봤다. 있었다. 한낮에 소파에 누워 혼자 봤다. 얼마 전 친구는 뉴욕을 짧은 기간 여행했는데, 그곳의 공원들이 기억에 남았단다. 도심 곳곳에 있었던 공원들. 여름 즈음에 갔다면 분명 초록초록했을 거라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영화에 친구가 보았다던 뉴욕의 공원이 나왔다. 특히 벤치. 벤치의 등받이 부분에 문장들을 새긴 팻말이 있었는데, 그 문장에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혹은 한 가족의 희망과 사랑, 일생이 담겨 있었다. 영화는 그 팻말을 중간중간 보여준다. 아직 어떤 문장도 담기지 못한 빈 팻말도 있었다. 거기에 남여 주인공의 인생이 새겨진다면 어떤 문장일지 생각해봤다. 함께 새겨지지는 못할 거다. 잡시동안 만난 서로의 이야기를 남기게 될까. 평생을 함께 한 가족에 대한 인사를 남기게 될까. 영화에는 친구가 보고 오지 못한 푸르른 뉴욕의 녹음도 보였다. 뉴욕의 풍경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남자주인공은 작가지망생인데, 외톨이다. 작가지망생이니까, 외톨이니까 집에서 글을 쓴다. 그리고 출판사와 잡지사에 그 글들을 보낸다. 그들은 꾸준히 거절의 편지를 보내온다.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에... 같은 형식적인 글들. 남자주인공은 그 편지들을 작업실이자 집인 자신의 공간 한 벽면에 붙여둔다. 멀리서 보면 근사한 인테리어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거절과 실망과 좌절의 시간들이다. 그러다 오른쪽 끝에 거절이 아닌 긍정의 편지가 붙여진다. 작가가 된 것이다. 5시부터 7시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정이 있는 여자와의 만남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글을 통 쓰지 못하다가 실연을 겪게 되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책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겪은 시간들을 글로 옮겼을 거다. 여자주인공은 길을 걷다 그의 새 책이 서점의 메인 매대에 놓인 걸 본다. 남자주인공 벽면의 제일 오른쪽에 붙여진 편지처럼 그녀는 웃어보인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글을 써서, 성공하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런 성공의 위치에 오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장면을 떠올리다가 다른 영화의 어떤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타인의 삶>의 마지막 장면. 도청을 하면서 타인의 삶에 빠져들었던 비밀경찰이 결국 그를 도와주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점의 매대에서 그 타인의 책을 발견하는 장면. 그 첫장에 자신에게 바치는 책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미소를 짓는 한때의 비밀경찰. 그도 영화 <5 to 7> 벽면 오른쪽 편지와 같은 미소를 짓는다. 작가가 된다는 건 누군가에게 그런 미소를 선물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비밀경찰과 타인은 뉴욕 벤치에 각각 어떤 문장들을 새길 수 있을까. 또 내가 새기게 될 문장은 어떤 것일까. 흠. 왼쪽의 수많은 편지들 말고 오른쪽 편지와 같은 문장이었으면 좋겠다.

 

 

 

,

20200202

from 모퉁이다방 2020. 2. 5. 22:20

 

 

 

  주례를 대신한 아버님의 말씀이 시작되고서야 알았다. 그날이 2020년 2월 2일이었다는 걸. 2를 살짝 돌리면 하트가 되는 예쁜 날 우리 아이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은경이는 2월 2일에 결혼을 했다. 8월의 결혼식에 예의 그 발랄함으로 폴랑폴랑 뛰어와 언니 혼자 오기 그래서 남자친구와 같이 왔어요, 라고 해서 나를 놀래켰는데 그 뒤 6개월이 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은경이 아버님은 단상에 올라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사위,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남편으로 살지 말고 본인의 이름 그대로 살라는 것이었다. 그 이름들은 부모님들이 몇 달 며칠을 고심해서 지은 소중한 이름들이라고. 그러니 그 이름으로 불리면서 살라고 했다. 은경이가 참 멋진 아버지를 두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신랑 아버지의 축사가 아니라 신부 아버지의 축사가 틀림없구나도 생각했다. 내가 아는 은경이는 아버지의 당부처럼 자신의 이름 그대로 살아 갈 수 있을 사람이다.

 

  1월에는 남편과 크게 싸웠다. 결론이 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일이 언급될 때마다 서로 기분이 상했다. 어제는 이러기로 했는데, 오늘 다시 얘기하면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결국 막내의 집들이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싸웠다. 나는 집에 돌아와 책방 문을 잠그고 이불을 펴고 누웠다. 밖에서 문고리를 돌리고 노크를 하는 소리가 났지만 열어주지 않고 울다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그새 들어와 장난처럼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문을 꽝하고 닫고 안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러고 학원으로 출근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꼼짝도 않고 누워 잤다. 혼자 집에 있으면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본 친구가 했다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동생이 전해준 친구의 말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다음날까지. 그러자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네, 정말 우리는 서로 자기 얘기만 하고 있었던 거네. 나는 내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에 서운했고, 남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저 말만 계속 하는거지 생각했다. 남편은 자신의 말에 동의해주지 않아 무척 속이 상했단다. 단지 그래, 그건 니 말이 맞아, 라는 말을 듣고 싶었단다. 우리는 그렇게 삼사일을 싸우다 내 말만 계속 해서는 결국 똑같은 사람만 되고 싸움이 끝이 나지 않는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 템포 멈춰보기로 했다. 그리고 쉽지 않겠지만 서로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입장을 좀더 이해해보기로, 그렇게 노력해보기로 했다. 우리도 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투는 문제로 다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다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였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같은 문제로 다시 싸우지 않는 것.

 

  그 일은 설 연휴에 언제 고성집에 내려가는냐로 시작이 된 건데, 결론은 잘 다녀왔다는 것. 버스를 타고 통영에 가서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뜨근한 돼지국밥을 먹고, 대통령이 나올 동네라는 말이 돌 정도로 풍수지리가 좋다는 마을을 걸었다. 조용한 동네였다. 앞으로는 바다가 뒤로는 산이 있었다. 나즈막한 산길을 오르는데 이런 곳에 별장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말했다. 아빠는 안산에 안산땅 오천평이 있다고 급고백을 해서 우리를 설레게 했다. 남편은 속으로 안산땅이 있다면 이곳에 별장은 짓고도 남겠다고 생각했단다. 우리가 왜 지금껏 말을 하지 않았냐고 소리 높이자 안 산 땅 오천평이란다. 안 산 땅. 아...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피랑도 올랐다. 서피랑은 꼭대기에 오르면 가슴 속이 시원해진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 바람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하다. 통영 시내도 훤히 내려다보이고. 그렇게 만오백보 넘게 걸은 뒤에 예약해 놓은 다찌집에 가서 해산물을 먹고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건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잘 삐져서 좀 힘들거다고 사위에게 말했고, 맞은 편에 앉은 사위와 동생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차를 타고 고성에 와 축구 볼 사람은 보고 졸린 사람은 일찍 잠들었다. 통영의 조용한 마을을 걸을 때 이제 맺기 시작한 콩알만한 꽃봉오리들을 보았는데, 엄마는 지금이 가장 이쁠 때라고 했다. 남편은 4월이나 5월 즈음 그 봉오리들이 활짝 피었을 때 다시 가자고 군포에 와서 말했다. 천천히 봄이 오고 있다.

 

 

 

 

 

 

,

2020 영화처럼

from 기억의기억 2020. 1. 15. 14:41

 

두 교황.
5 to 7.

영주.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히트맨.

벌새.

컨테이젼.

 

작은 아씨들.

청년경찰.

남산의 부장들.

천문.

 

해치지 않아.

포드 vs 페라리.

히트.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더 원 아이 러브.

인비저블맨.

 

조디악.
그날, 바다.

썸원 그레이트.

 

-

 

미스 함무라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 P.S. 여전히 널 사랑해

빅 리틀 라이즈 시즌 1.

 

빅 리틀 라이즈 시즌 2.

인스턴트 패밀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출국

from 모퉁이다방 2020. 1. 5. 17:40

 

 

   S씨는 남편이 내게 처음으로 소개해준 친구다. 팀장님 부부와 S씨 부부와 여섯이서 연애 초반에 만났더랬다. 그 날 S씨는 남편이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분이 너무 좋다고 자기가 결혼식에서 축가를 꼭 부르겠다며 방방 뛰었더랬다. 그때 결혼생각도 없었지만 만일 결혼식을 한다고 해도 축가로 S씨는 안되겠다고 노래방에서 생각했다. 그 뒤에는 내 생일에 만났다. 회사에서 몇달동안 안 풀리던 업무가 극적으로 해결된 밤이라고 했다. 남편네 동네에서 둘이서 한잔 하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함께 이 기쁨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후배와 둘이 와서 결국 노래방까지 갔는데 그날의 S씨는 얌전했다. 남편 말이 술이 덜 취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 뒤 결혼을 하기 전에, 결혼을 한 후에 가끔 만났다. 어떤 날은 S씨 혼자, 어떤 날은 S씨와 와이프랑 같이, 어떤 날은 민망하고도 고맙게도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는 귀염둥이 큰 딸, 작은 딸과 함께. 어떤 날 S씨는 지난 번에 그렇게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사과했고, 어떤 날은 제수씨, 내 생각이 틀린 건지 들어봐요, 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과 자신은 평생 함께 할 거고, 그러니 우리 두 가족이 친해야 하고, 나중에도 가까이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당연하게도 S씨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가 다소 보수적이긴 하지만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S씨가 오늘 출국을 한다. S씨는 미국행이 결정나고 난 뒤에 늘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부인과 미국행 때문에 트러블이 있을 때도 자신의 결정이 맞다고 확신했다. 출국 전에 S씨 가족을 대접하고 싶어 지난 주말에 집으로 초대했다. 그 날이 마지막일 줄 알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까지 했는데, 어쩌다 두 번을 더 만났다. 옆 아파트에 동료의 깜짝 집들이가 있어서 또 한 번, 어제 출국 전에 진짜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다고 또 한 번. 지난 주말, S씨와 둘만 거실에 남게 되었을 때 S씨가 말했다. 날짜가 가까워지니 실은 불안하다고.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고. S씨는 일년 간 혼자 지내보고 가족들을 부르기로 했다. 남편은 S씨가 강해 보이지만 실은 여리다고 했다. 어제 대리기사를 부른 우리를 함께 기다려주며 S씨는 남편을 계속계속 안았다. 두 사람이 군대를 다녀온 이후 가장 오래 못 본 건 각자의 신혼여행 기간이란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방황하는 친구를 지켜봐주고 이끌어주고, 그 뒤로는 쭉 함께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늘 옆자리에 앉았고 이직도 함께 했다. 둘이 계속계속 안는데 왠지 내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은 남아서 잘 해내고 있으라고 했고, 한 사람은 가서 절대 바로 돌아오지 말고 금방 돌아올 거라고 비웃었던 사람들 생각하며 열심히 하라고 했다.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오늘 남편은 학원에 가고, 엄마가 보내준 무우로 김치를 담그고 나서 침대에 누워 책을 뒤적거리는데 지금 공항에 있을 S씨 생각이 났다. 7시 출국이라고 했으니 곧 진짜 혼자가 될 텐데. S씨는 내게 처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수씨,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해보는 게 낫다고요." S씨가 멀리까지 긴 다짐을 하고 갔으니 꼭 잘 해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