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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후를 찾아요
    서재를쌓다 2017. 10. 24. 22:30




        한밤중의 SNS 탐독은 위험하다. 그곳에는 넘치게 잘 사는 사람들 뿐이고, 한밤중의 나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 된다. <모든 요일의 기록>의 김민철 SNS에 올려진 책 추천글을 보고, 저자의 SNS로 넘어갔다. 그곳엔 고운 아내와 귀여운 딸, 자상한 남편, 아름다운 집이 있었다. 모두 따뜻한 사진들에 담겨 있었다. 다음날 그 분위기를 계속 떠올리다가 결국 책을 주문했다. 제목이 <오후를 찾아요>. 언젠가부터 현실적인 이유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없어져 버린 오후. 그 오후를 온전히 찾을 수 있었던 여행지에서의 이야기이다. 여행지에서 경험한 이야기가 좀더 많았으면 싶었고, 눈이 엄청나게 쌓인 한겨울의 시라카와고에 가고 싶어졌다. 중간중간 멈칫, 하게 되는 문장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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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부터 아빠와 따로 살게 되었다고 털어놓던 친구가, 진짜진짜 비밀이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울먹였던 오후.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되려 친구보다 더 크게 울어버린 그 오후. 그 애틋한 오후들이 나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박 대리가 되고, 아내가 되고, 심지어는 서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도... 내가 그 무엇이 되어도, 그때 그 오후는 다시 볼 수 없었다.
    - 22-23쪽

       솔로 연주자와 첼로 연주자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 둘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고, 연주가 조금 흔들렸다. 어쩌다 눈을 마주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둘 사이에 오랜 농담들이 쌓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주는 계속되었지만 이번엔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드디어 나의 파리 여행이 특별해지고 있다는 것을. 연주회가 끝나고 성당을 나오며, 나는 오래 기억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파리로 출발하기 전, 내게 밤마다 성당에서 열리는 작은 연주회를 추천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 38-39쪽

    ... 누군가 파리에 간다고 하면 나는 기쁨이 충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겠다, 잘 다녀와." 파리에 가면 뭘 해야 하느냐고 혹시라도 물어봐준다면, 나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낼 것이다. 성당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에 대해. 그리고는 그 사람이 좋은 여행을 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파리에 도착하거든, 본인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보세요. 평생 더 좋아할 수 있도록, 파리가 도와줄 거예요."
    - 41-42쪽

       누구에게나 이런 수영장 같은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내가 못하는 것을 대놓고 못할 수 있는 곳. 시원하게 넘어지고, 미련 없이 삑사리를 내고, 계산을 마음껏 틀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래야 마음의 근육이 이완되고, 영혼에 살도 좀 붙어서 표정에 윤기가 흐르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누군가가 헛발질을 할 때 의외로 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껴왔다. 얄미울 정도로 완벽하게 끝난 문장의 마침표에서가 아니라 하나 정도 귀엽게 틀린 맞춤법 같은 곳에서 웃곤 했다.
    - 60쪽

       나는 400년이라는 시간이 보여주는 멋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쌓여 있는 시간만큼 무겁고 또 커다란 것이 있을까. 시간을 꼬박꼬박 모아둔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하루가 지나고, 그 하루가 쌓이면 시간은 어제보다 더 두꺼워져 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면 그 하루만큼 더 두꺼워진다. 그렇게 400년을 지나면 아무도 따라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감탄하기 시작한다.
    - 73쪽

    ... 그래서 마음을 다르게 고쳐먹었다. 하루하루를 지내며 칭찬도, 성과도, 명성도 아닌 친구를 남기기로 다짐했다. 홀로 버텨낸 100점짜리 하루보다는 친구와 함께 보낸 70점짜리 하루가 더 갖고 싶었다. 일을 더 잘해내려는 욕심이 날을 세우는 날이면 홍콩의 오후를 생각하며 마음에 보드라운 이불을 덮었다.
    - 101쪽

    ... 어쩌면 나는 그때, 두고두고 배울 점이 많은 친구 하나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저런 남자 만나면 고생한다는 편견에 흔들려, 생에 한 번 뿐인 사랑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선입견이라는 것은 참 아찔하다. 불안한 마음의 냄새를 맡고 찾아와서는, 시야를 가려버린다.
    - 121쪽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 가지 방법을 추천하려 한다. 함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여행이 사람의 밑바닥을 보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지는 못한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가늠해볼 만한 진지한 토론의 자리 또한 되지는 못한다. 그저 함께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먹고,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물건을 사는 일을 함께 할 뿐이다. 하지만 참 신기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반드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인지 아닌지를.
    - 156쪽

    ... 물건도 사람도 행동도 조용하고 심플할수록 나의 마음을 끌었다.
    - 158쪽

    ... 문제집보다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고, 시험을 잘 치기보다는 여행을 더 잘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게 더 멋지다.
    - 207쪽

    ... 다만 이 웃기고 창피한 재주에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들의 가장 빛나는 오후를 나의 가장 어두운 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하루 종일 빛날 수는 없으니까. 그들의 빛 좋던 오후도 시간이 지나면 깜깜한 밤이 될 것이니까. 덮어놓고 부러워할 일만은 아니다. 
    - 244쪽

       학생이 될 로엘아, 공부 못해도 돼. 그러니 성적표 때문에 속상해서는 안 된다. 어른이 될 로엘아, 돈 많이 못 벌어도 괜찮아. 그러니 주머니 때문에 주눅들어서는 안 된다. 네 인생의 모양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너의 선택이야. 성적표나 주머니가 함부로 그것을 결정하게 내버려두지 마라.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 아침의 상쾌함을 알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재미를 느끼는 오전을 보내며, 오후를 날려버리지 않는 인생이기를. 저녁을 더 다정하고 맛있게 누리며, 밤이 와도 초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자신을 사랑하고 또 자랑스러워 하며, 오늘이 즐거워서 내일이 기다려지는 사람으로 살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말들을 이렇게 하나로 모아본다. 사랑한다, 로엘아.
    -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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