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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
    서재를쌓다 2021. 7. 3. 08:45

     

     

      불금. 남편에게 약속이 있었고,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아기를 맡기고 잠들었다. 다행이 모유양이 많아 밤에 한 번을 제외하곤 모유를 먹이고 있다. 모유가 소화가 잘돼 자주 배고파하는 것 같아 밤에는 푹 자게 분유를 한 번 먹인다. 남편이 혼자 저녁시간을 즐긴 게 미안하다고 제때 분유를 먹이고 재운단다. 덕분에 3시 반까지 푹 잤다. 3시 반에 모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는데 트림은 나오지 않는 시간을 보내다 침대에 눕혔다. 새벽 4시가 지나고 아가도 남편도 자는데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해졌다. 육아만 온종일 하기보다 아기 자는 시간 틈틈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엄마도 살 수 있다고 낮에 이모님이 말씀하셨다. 마침 오늘부터 단편 하나씩을 읽어보자 결심을 했더랬다. 거실 소파에 앉아 낮에 읽다만 백수린 작가의 '첫사랑' 단편을 읽어나갔다.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 오래간만에 만날 약속을 한 주인공이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건 선배를 만날 때 괜찮은 옷을 입기 위해서였다. 

     

     

      "꼭 벚꽃잎 같네."

      선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선배는 고향에 쌍계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근처 십리 길을 따라 죄다 벚나무가 심겨 있다고 했다.

      "그 벚꽃길을 같이 걸으면 백년해로를 한다더라."

      선배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선배, 선배는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거예요,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엄마에게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아이처럼 선배에게 자꾸만 묻고만 싶었다. 먹색에 가까운 어둠속에서 겨우 형체만 가늠할 수 있던, 본관 앞 벚나무의 새까만 가지 위로 함박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배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망설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선배의 발끝만 보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지? 선배와 결국 맥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배 손에서 나던 은은한 담배 냄새. 내가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불도 켜지 않고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J선배와 통화를 하던 밤들이 떠오르면 나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 선배도 알았을 텐데. 그날 선배 옆에 서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질 4월의 눈을 맞으며, 십리를 선배와 하염없이 걷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내가 속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 122쪽, <참담한 빛>

     

     

       새벽 4시. 해 뜨기 전, 비몽사몽이 아닌 채로 깨어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첫사랑'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아득해졌다. 포슬포슬 내리다 손바닥에 닿으면 금새 사라지는 4월의 눈 느낌을 떠올려 봤다. 아, 좋구나 싶었다. 간만이네 이런 감정, 싶었다. 작가가 소설에 쓰지 않은 선배의 근황은 그래서 좋았다. 써버렸으면 여운이 덜 했을 거다. 역시 좋구나, 백수린 작가, 싶었다. 남편은 마치 어디서 해본 것처럼 육아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잘 해내고 있다. 나는 조리원에서 이모님께 배우는 데도 서툴고 실수투성이다. (이모님 앞에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때가 여러번) 그래서 주눅들어 있기도 했는데 서툴고 실수투성이고 배워도 잘 못하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느는 사람이라고. 남편과 내가 함께 가서 남편이 아이를 안고 남편이 능숙하게 똥기저귀를 갈고 있는데도 병원에서는 늘 엄마가 트림을 잘 시켰네요, 엄마가 잘했네요, 엄마가, 라고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 같다. 트림을 잘 시키지 못하는 나는 그 칭찬이 불편했다. 아빠가 더 잘해요, 말하고 싶었다. (왜 말하지 못했는가) 당연하게 엄마가, 로 시작되는 칭찬과 당부가. 더 내 시간을 갖고, 더 내 것을 만들어 가야지. 한수희 작가가 육아를 하며 살기 위해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고 한 것처럼. 아기와 나, 아빠. 우리 세 사람이 각자, 그리고 동시에 잘 살아가기 위한 것들을 찾아나가야지. 아가와 아빠는 아침잠을 자고 있고 나는 어제 좋았던 글귀를 컴퓨터 한글파일에 키보드를 두드려 옮겨 적는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고 삶아 두었던 달걀 하나를 소금에 콕 찍어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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