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핸드폰 중독이다. 특히 인스타그램 중독. 출퇴근할 때 연락해보면 인스타를 보고 있고, 집에서도 엄청 일찍 이부자리를 펴는데 누워서 하는 건 인스타 보기. 그렇게 보면서 맛집도 발견하고, 괜찮은 커피집도 발견한다. 간혹 좋은 책도 발견하는데, 김민철 씨의 <모든 요일의 기록>도 동생이 발견한 책이다. 그렇게 발견하면, 꼭 자기가 사지 않고 이거 재밌겠다! 하고 링크를 슬며시 건넨다. 나는 그렇게 좋으면 니가 사지! 하면서 링크를 열고, 결국 현옥되어 주문한다. 그렇게 동생도 읽고, 나도 읽는다. 이 책 <제가 이 여자랑 결혼을 한 번 해봤는데요>도 그렇게 주문한 책이다. 부천에서 오키로북스라는 서점을 운영 중인 오사장님이 자신의 신혼생활을 인스타그램(!!)에 기록했고, 그것이 재미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이 기록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까지 한 것. 


    책의 시작은 이렇다. 


    결혼식은 외국에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많은 축하 부탁드립니다. 


    신부  이은지

    신랑  김병철


    5:00pm, Saturday 15th Oct 2016

    160/7 Moo.5 T.Sutep A.muang J.Chiangmai 50200


    감사합니다. 


    (다음페이지)


    결혼 후 18개월 간의 기록.


   인스타그램 기록을 그대로 엮은 거라 엄청 술술 넘어간다. "귀엽다." 이것이 나의 총평. 처음 발견한 동생보다 내가 더 재미나게 읽었다.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으면, 두 사람의 추억 속에서나, 그것도 어쩌면 아주 희미하게 남았을 일들이,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또렷한 시간들로 남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 많은 노력과 애정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아니까. 응원하고 싶어지더라.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결혼생활과, 부천 서점의 무한한 발전과 (꼭 부자되세요!), 은지 씨의 다이어트를! 물론 이 귀여움이 결혼생활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귀엽고 웃기기만 하던 책의 마지막에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이 그대로 적혀 있어 위안이 되기까지 했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늘 불안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너만 그런 게 아니고, 나도 그렇고, 당신 옆에 사람도, 지금 당신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그렇다. (141쪽)"



   이것은 은지가 해준 이야기 ㅡ

   누군가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 친구를 데리고 평양냉면 집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게 놀스 코리아 트레디셔놀 콜드 누들이야. 베어리 훼이머스."라고 소개를 했더니 그 외국인 친구가 전에 이 누들을 먹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서 먹어 보았냐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인 피용양" #평양냉명 #외국인 #평양

-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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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회사를 그만두면 무얼 해야할까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게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곤 한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다른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왜 기술이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돈은 계속 벌 수 있을까. 지금 너무 낭비하고 사는 게 아닐까. 아끼고 아껴 좀더 모아야 하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 지금까지 해 봤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 아니,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일이 좋을까. 책을 좋아하니까 조그만 책방은 어떨까. 어느 월요일, 조금은 울적한 마음으로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 이 책이 떠올랐다. 장바구니에 오랫동안 담아놓고, 매번 주문 때마다 슬쩍 빼버린 책. 지금이야말로 주문해서 읽을 때라고, 책방을 운영하는 일이 어땠을지, 왜 책방 문을 닫아야만 했는지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은 술술 잘 읽힌다. 퇴사를 결심하고, 희망으로 가득찬,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책방을 여는 것에서부터 운영을 중단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최종 정리를 하기까지의 일들이 소소하게 담겨 있다. 현실적인 문제들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역시 책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운영을 하면 저녁과 주말이 없어지는 거였어, 책 몇 권 팔아서는 책방 유지를 할 수 없는 거였어, 그래서 책방들이 죄다 커피며 맥주까지 파는 거였어, 등등의 작가가 직면했던 현실적인 어려움을 내 것인양 안타까워하며 읽어나갔다. 언젠가 조그만 책방을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금세 접혔다. 나는 망할 게 틀림없었다. 역시 월급을 받는 편이 훨...ㅆ


   어디선가 보고 이대에 있었던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꼭 한번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계속 생각에만 그쳐 결국 작가가 말한 것처럼, SNS로만 염탐하는 손님에 그치고 말았지만. 가이드북과 여행에세이들이 그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소설도 있었네. 그래, 여행하는 소설도 있지. 작가가 책방 공간에 어떤 책을 주문할 지 고심하는 에피소드를 읽고 내가 작가의 입장이 되어 잠시 생각해봤는데, 참 좋더라. 책방 주인이 되면 그게 참 좋을 것 같다. 책방과 어울리는 책을 고심해서 주문하고, 예쁘게 진열하고, 볕 좋은 날 한 손님이 들어와 그 책을 만지작거리고, 뒤적거리다 끝내 구입해가는 풍경. 흠. 나는 커피를 파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맥주도.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 읽은 책을 그대로 사가지고 온 경험이 내게 있으니.


   나는 실패가 늘 두렵지만, 모든 실패가 진짜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수많은 실패를 하는 것이 어떤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 성공이 크든 작든간에. 언젠가 할 수 있지도 않을까. 작가가 책의 말미에 말한 것처럼. 그때 또 실패해도 상관없지. 어떤 성공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 가고 있는 거니까. 끝내 가보지 못한 이대 책방의 처음과 끝을 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역시 모든 책은 때가 있는 거였어.




    북토크를 세 시간이나 앞두고 책방에 도착한 작가 부부의 손에는 커다란 솥과 가스버너, 식재료 상자가 들려 있었다. 미리 삶아온 쌀국수 면에 판매용 육수를 부을 거란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는 각종 향신료를 넣은 솥에다 생닭을 흐드러지게 끓여낼 작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작가의의 '큰 그림'에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책방에서 닭 육수를 고아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의 엉뚱한 상황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북토크 신청자들이 하나둘 책방에 도착했다. 두 시간 동안 팔팔 끓인 육수 냄새가 바깥의 찬 공기와 뒤섞이면서 푸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드나들 때마다 꼭 웃풍이 심한 어느 시골 식당에 놀러 온 것만 같다. 고명으로 얹을 고수와 으깬 땅콩, 매끈하게 익은 면까지 준비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난로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금방 퍼올린 쌀국수 그릇이 손에서 손으로 옆 사람에게 전달됐다. 더운 나라에서 건너온 음식은 서울의 추운 겨울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날 저녁 우리는 여름날의 치앙마이를 함께 추억했다. 
-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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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from 서재를쌓다 2018. 7. 1. 09:36



   아주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아일리시를 생각한다. 2016년 봄에 보았던 영화를, 2017년 겨울 책으로 다시 읽었다. 2017년 겨울,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 아일리시였다. 아일리시는 아일랜드 소도시에서 미국 뉴욕 브루클린까지 간 사람이다. 1950년대에. 똑똑하지만 시대상황 상 그럴듯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던 아일리시에게 어느 날 신부가 제안을 해 온다. 브루클린에 가면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기 싫었던 아일리시는 아일랜드를 떠나기 싫어한다. 아일리시를 단호하게 보낸 건 그녀의 친언니였다. 동생의 미래를 위해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힘이 들었다. 향수병도 깊었다. 짙은 향수병 덕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이탈리아 청년 토니도 만나게 된다. 다정하고 배려깊은 토니를 사랑하게 되고, 점점 브루클린 생활에 애정이 생기게 된다. 야간학교에서의 우수한 성적, 공부가 끝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희망, 하숙집 주인의 신뢰, 토니의 깊은 사랑. 그런 시기에 아일랜드에서 소식이 들려온다. 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언니를 잘 보내기 위해, 그리고 슬픔에 빠져있는 엄마를 챙기기 위해 고향으로 잠시 돌아온 아일리시는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유일하게 미국 브루클린에 다녀온 사람인 것이다. 오랜시간 배를 타고 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이곳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활을 한. 혼인신고까지 한 토니의 존재를 지워버리며,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자신감이 한껏 상승한 아일리시. 그곳의 부유한 집안 아들의 애정공세를 즐기던 아일리시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진다. 브루클린에서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 아일리시는 그 길로 아일랜드를 떠난다. 아마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토니와 결혼을 하고, 잠시동안 다시 머무른 아일랜드에서의 시간들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새로운 직장을 갖고, 아이들을 낳고 생활해 나갈 것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일리시가 아일랜드로 돌아오고, 토니의 존재를 잊어버리며 고향 친구들 사이에서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즐길 때. 이런 나쁜 년이 있나 생각했다. 그렇게 착한 애였는데, 미국물이 이 아이를 이렇게 나쁘게 만들어 버렸네, 생각했다. 혼인신고를 한 사실이 발각되자 후다닥 떠나버리는 것을 보고도 나쁜 것 나쁜 것, 돌아가서 토니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 보고싶었다고, 너밖에 없다고 속삭이겠지, 욕했었다. 소설을 읽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는데, 여전히 나쁜 행동이긴 했지만, 아일리시는 본능에 충실했던 보통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인 것이다. 다른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동생을 위해 헌신하는 언니, 첫눈에 반해 끊임없는 사랑을 펼치는 토니,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늘 외로운 엄마. 아일리시는 비록 타의에 의해 자기 일생의 굵직굵직한 일들을 실행했지만, 그 일들에 적응해가면서 그때그때의 감정들에 지극히 충실했던,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처음 브루클린을 떠날 때 배 위에서의 시간, 언니의 부고를 듣고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로 돌아가며 겪은 시간, 도망치듯 아일랜드에서 또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며 보낸 배 안의 시간. 아일리시는 지난 겨울, 내가 아는 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었다. 멀리 다녀온 사람은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알아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아일리시는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교구 사제관까지 걸어가서 플러드 신부에게 그 공문을 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키호 부인에게 메모를 남기고 거리로 나선 아일리시는 저녁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나무는 잎이 무성했고 거리엔 사람들이 나와 있었으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건물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브루클린에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 편지가 기운을 주고 새로운 자유를 준 것 같았다.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아일리시는 플러드 신부가 사제관에 있다면 이 편지를 보여줄 생각에, 다음 날 약속대로 토니를 만나면 토니에게도 보여줄 생각에, 그리고 편지로 이 소식을 집에 알릴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1년 후면 정식 부기원이 되어 더 나은 일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 1년 동안 날씨는 점점 찾을 수 없을 만큼 더워지고 다시 열기가 수그러들면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릴 것이며 그러면 브루클린에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겨울 또한 봄으로 녹아들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햇빛이 남아 있는 초여름이 되었다가 그녀는 다시, 브루클린 칼리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을 것이다. 

   다가올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갈지 꿈꾸면서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일리시는 미소 짓는 토니의 존재, 그의 관심,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들,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그의 손길, 키스해 오는 숨결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냄새, 그가 그녀에게 집중할 때 느껴지는 소중한 기분, 그녀를 감싼 그의 팔, 그녀 입에서 느껴지는 그의 혀를를 상상했다. 아일리시는 그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이 편지까지 받게 된 지금, 그녀가 가진 것들은 처음 브루클린에 도착할 때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아일리시는 걸으면서도 자꾸 웃음을 참아야 했다. 

- 223~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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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먹지?

from 서재를쌓다 2018. 6. 14. 22:06




   홈플러스에서 야키소바면과 소스를 샀다. 면 세개와 소스 세개가 한 묶음이다. 순한맛과 매운맛이 있었는데, 고민하다 둘다 샀다. 두 번 해 먹었는데, 두 번 다 2인분이었다. 순한맛과 매운맛을 하나씩 섞었다. 마트에서 천원짜리 컷팅 양배추와 붉은색 초생강도 샀다. 컷팅 양배추는 딱딱한 것과 보슬보슬한 것 두 종류가 있었는데, 보슬보슬한 배추로 골랐다. 집 건너편에 야채가게가 생겼다. 자주 애용하는 역앞 가게보다 훨씬 싸다. 거기선 작은 당근 세 개를 샀는데, 역시 천원이었다. 좋아하는 정육점에서 대패삼겹살도 샀다. 대패삼겹살은 늘 이 집이다. 두 번 해 먹고 딱 한 번 더 해 먹을 만큼 남았다. 재료 준비는 끝. 이제부터는 간단하다. 야채는 모두 채썰어두고, 대패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자른 뒤 기름을 두르지 않고 익힌다. 돼지기름이 살포시 나왔을 때 야채를 넣는다. 야채와 고기가 적당히 익었을 때 면과 소스를 넣고 면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뒤적거려 준다. 작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장자리가 바삭한 반숙 계란 후라이를 후다닥 만들어 둔다. 소스가 면과 야채에 잘 어우러지면 후라이를 얹고 맛나게 먹어주는 거다. 싱거우면 굴소스를 약간 넣어준다. 맥주도 빠질 수 없지. 맥주는 예쁜 유리잔에 따라 마신다. 


    히라마쓰 요코는 야키소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해 질 녘 시원한 바람. 정원에 뿌리는 물. 땀띠분 냄새. 유카타의 촉감. 멀리서 축제의 북소리가 들려오면 귀를 기울인다. 또는 온 가족이 전철을 타고 나가 해수욕. 들뜬 마음에 수영을 너무 오래해 새파래진 입술을 햝으면 바닷물 맛이 나고, 목이 타고, 배는 등에 붙는다. 여름 축제도 해수욕도 야시장도 본오도리도 그리운 그 여름과 함께 떠오르는 맛, 그것이 야키소바다. 좋아했는데, 소스 야키소바. 건더기라곤 양배추와 숙주 정도, 몇가지 들어 있지 않아 오히려 파래와 빨간 생각절임이 주연을 맡는다. 드문드문 발견하는 튀김옷 부스러기가 기쁘다. 고소한 소스 뒤범벅의 야키소바는 이벤트 기분이 가득 들게 한다. 진하고 짠 소스의 맛과 향, 이것 또한 일본 여름의 맛이다."


   오늘 뭐 먹지? 제목에서 촌스러운 느낌이 마구마구 드는 이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권여선과 안주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더도 말고 딱 한 가지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서 맛난 맥주와 함께 먹고 싶어졌다.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실은 대단한 음식(이라고 쓰고 안주라 부른다)들이 이 책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들깨가 듬뿍 든 순댓국, 해장에 좋은 만둣국, 집필할 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속을 각각 다르게 말아두는 김밥, 따끈따근할 때 바로 먹는 육전, 설명이 필요없는 누룽지와 명란달걀찜 (명란은 사랑입니다), 해장엔 또 이것이지 물냉면, 동해안의 싱싱한 물회, 여름에 쌈 싸먹기 좋은 땡초 가득 들어간 깡장, 여름나기에도 좋고 안주로도 좋은 밑반찬들, 혼자서 한 그릇 독차지 할 수 있는 찬바람 불기 시작할 때 먹으면 좋은 냄비우동, 문학관의 심심한 급식 탓에 급 마련된 두부와 김치제육볶음 안주 술자리, 단골 시장에서 사온, 단골이라 게다리까지 덤으로 받아와서 국까지 끓인, 쌀밥과 찰떡궁합 갈치조림, 추운 계절에 더 생각나는 칼칼한 감자탕,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맛난 꼬막조림, 추운 겨울 동네 시장에서 먹는 어묵 한 꼬치와 짭조름한 국물 한 컵, "내가 앞으로 집밥을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내 손에 달"린 집밥집밥, 마른오징어를 물에 불린 뒤 고소하게 튀겨먹는 오징어튀김, 쇼핑몰에서 두 상자를 잘못 배송해 그날 저녁에 조림도 해 먹고, 구워서도 먹은 고등어, 먹고 싶은 것만 해 먹는 부러운 명절상 (명절음식재료가 다 떨어지면 치맥을 시켜먹는다는!), 그리고 끝내 져버린 간짜장까지. 


    권여선은 소설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고, 요리도 잘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단식을 한 번 경험해 본 작가는 그 뒤 종종 단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는 자의였고, 나는 타의였고, 작가는 여러번이지만, 나는 달랑 한번 뿐이지만. 입원을 하는 동안 며칠 단식을 하며 몸이 굉장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관장도 했겠다, 몸에서 나쁜 것은 모두 빠져나가고 정화되는 느낌. 그리고 못 먹는 탓에 예민해져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는데 (마음을 잡기 위해 먹고 싶은 음식들 목록을 적어보기도 했다), 결론은 오늘보다 나은 인간이 되자, 였다. 세상에 단식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다니. 그리고 단식 후 먹게 되는 음식이 간이 일도 없는 흰죽일 지라도 엄청나게 맛있게 느껴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미각이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인 것이다. 아, 책의 제일 마지막에 작가가 좋아하는 중국집 에피소드가 있는데, 정말 읽다 빵- 터졌다. 이건 실제로 읽어 보아야 합니다. 하하하. 요리 귀차니즘에 빠져있는 나를 두 번이나 야키소바를 만들게 한, 이 책의 기억해둘만한 구절들도 옮겨본다. 정성껏 만들어서 맛나게 먹는 즐거움을 잊지 말자.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26쪽


   첫 단식 이후로 나는 몇 년에 한 번씩은 단식을 한다. 단식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오래된 서랍을 열어 이것저것 하나씩 꺼내 들여다본다. 내가 살아온 과거들은 차근차근 짚어보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들은 곰곰이 따져본다. 그러다 문득 달걀을 푼 라면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행복한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과오를 떠올리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 곁을 떠난 사람들 생각에 슬퍼하기도 한다. 열무김치에 고추장 넣고 맵게 비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에 서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따위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이 쓸데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속에 웅크린 채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뒤돌아 보아주고 쓰다듬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고아처럼 어리고 상처 입은 감정들이다. 내가 그렇게 해준 뒤에야 그것들은 비로소 조용히 잠이 든다. 

- 74-75쪽


   (...) 병치레를 많이 했던 내가 어렸을 때 몹시 앓고 난 후면 어머니는 부엌 처마 밑에 걸어두고 아끼던 굴비 두름에서 한 마리를 꺼내 연탄불에 구워 살을 발라내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시곤 했다. 연탄불에 구운 옛날 굴비의 맛이야 뭐라 말을 보태고 말고 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특히 굴비 살을 따뜻한 밥 위에 얹어 먹는 게 좋았다. 유년에 먹던 그 맛과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이다. 정말 이렇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밥과 무와 갈치가 어울려 내는 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게다리를 넣어 구수한 단맛이 도는 무된장국을 한술 떠먿는다. 그러면 내 혀는 단풍잎처럼 겸허한 행복으로 물든다. 

- 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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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나파크의 웹툰과 글을 열심히 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루나의 친구로 등장하는 노난이라는 특이한 별명의 사람이 이 노란 책을 출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 남유럽에서 열여덟 명의 사람을 여행한 기록. 표지 색깔이며, 길다란 제목이 따뜻한 책일 것 같았다. 바로 주문했다. 읽어보니 역시 따뜻한 책이었다. 노난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윤주 씨는 따뜻하고, 용기 있고, 느긋하고, 삶의 순간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작가 소개에 의하면 네 번 회사를 옮겼고, 회사를 자주 그만둔 덕분에 길고 짧은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단다. 겁이 많지 않은 덕분에 낯선 사람들을 따라가 숨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단다. 가장 쓰고 싶은 것은 언제나 일기란다. 나는 이런 여행들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이렇게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더랬다. 무척 잘 쓴 글은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마음들이 좋아서 잘 읽혔다. 편안한 글이다. 스페인에 가져가 여행 중 이 책을 읽은 동생에게 어땠냐고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너무 미화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라는 동생의 말에 우리의 여행이 우리의 추억 속에서 모두 미화되어 있지 않냐고, 그래서 온갖 일을 겪고 와서는 또다시 떠나는 꿈을 꾸지 않느냐고,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그녀가 지금까지처럼 용기 있고 느긋한 여행을 계속 해서, 그리하여 다정한 일기를 열심히 써서, 언젠가 또다른 다정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 좋겠다. 




   "있잖아, 윤주.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정말 많은데도 그 생각을 말하려고 하면 겁이 나. 덜덜 떨려. 이 수업이 너무 좋아서 매일 이 수업하는 날만 기다렸는데도 막상 수업에 가면 말하는 것이 힘들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겁없이 혼자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부러워.

   뭐든 하고 싶은데 소심하고 생각이 많고 착하고 여린 라우라에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가장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추천했다.

  "<조르바>를 읽어, 라우라. 나는 <조르바>를 읽고 용기가 생겼어. 난 조르바처럼 살고 싶어."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좋아하는 라우라는 다른 책은 봤지만 아직 <조르바>를 못 봤다고 했다. 어떤 책이냐고 묻길래,

   "조르바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틀이 없는 사람이야. 용감하고 동시에 다정한 사람이야. 하고자 하는 것을 해버리는 사람이야."

   라고 취기에 흥분해서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라우라가 대답했다.

   "윤주, 그게 조르바라면 넌 이미 나한테 조르바야."

- 36-37쪽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나도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 번째 좋은 살사람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다니다가 좋은 사람 '한 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다음은 볕 좋은 날 목 좋은 곳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것처럼 순조롭다. 

   좋은 사람 곁에는 약속한 듯이 좋은 사람들이 있기 떄문에, 첫 번째 좋은 사람을 슬쩍 당기는 노력만으로도 두 번째, 세 번째 좋은 사람들이 줄지어 매달려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동안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야?'라고 감탄하며 웃을 수 있게 된다. 기억해두자. 첫 번째 좋은 사람은 두 번째 좋은 사람을 몰고 온다. 

- 84쪽


   "윤주, 나는 다른 나라로, 아니 다른 도시로 여행을 해본 적이 거의 없어. 그래서 이렇게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걸 정말 좋아해. 사람들을 통해서 여행을 하는 거야. 나와 필립한테 너는 가장 멀리서 온 손님이니까 우리 둘은 오늘 가장 먼 나라로 여행을 간 거야. 우리는 네 덕분에 오늘 많이 행복했어."

-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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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일본의 맛

from 서재를쌓다 2018. 6. 8. 22:13



   진짜 일본은 어떤 모습일까? 이동하기는 편할까?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정처럼 맑은 계곡과 콘크리트 숲,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정리된 정원, 눈 덮인 산, 고딕 로리타 패션의 소녀, 게이샤....... 이 모든 것이 혼재된 곳에 과연 유럽에서 온 호기심 많고 평범한 가족이 (환대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이라도 있을까?

- 26쪽


   자욱한 숯불 연기 속에서 아이들이 꼬챙이에 꽂힌 닭 내장을 기분 좋게 우적우적 씹어 먹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콘플레이크와 토스트로 시작한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다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꿈이 아닌가 싶으면서 한편으로 이상하게 흐뭇하고 행복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일본에 연착륙했다. 

- 46쪽


   우리 가족은 후쿠오카에 도착하자마자 편안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방문한 모든 도시 중 다시 와서 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후쿠오카는 감당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충분히 작으면서 한편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컸다. 또한 이곳은 좋은 의미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편안하고 따뜻하며 재미를 추구하고 가식 없이 진솔한 그런 분위기. 좋은 기후, 최고의 상점, 미술관, 공연장, 항상 인파로 붐비는 유흥가 등은 덤이다. 아무튼 이곳 후쿠오카에서 우리는 도시에서 기대 가능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 404쪽


    작년 여름에 시작한 책인데, 이제야 끝났다. 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끝낼 수 있다. 일본인 요리사 친구가 있는, 그렇지만 일본 요리에 무지했던 영국 요리 작가가 가족과 함께 일본 전역을 몇달동안 여행하며 경험하고 맛본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반부에는 유머러스한 면이 많아 책장이 잘도 넘어갔는데 (작가의 새 책이 나왔는데, 출판사에서 '빌 브라이슨'과 맞먹는다고 홍보하더라) 어쩐지 중반을 넘어갈수록 지루해져서 (취재 내용이 많아졌다) 한참을 쉬었다 다시 읽었다. (잠자기 전에 읽다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는) 좀더 생생한 경험을 원했는데, 그런 경험들은 초중반에 몰려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500페이지의 책을 끝냈다는 뿌듯함! 서양인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 요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책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박상현의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주에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트파이터> 후쿠오카 편을 볼 때도. 좋아하는 책인데, 이 책을 읽으면 작가의 일본 요리에 대한 사랑, 진심으로 아끼는 것들을 먹기 위해 기꺼이 투자해온 정성스런 시간과 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 이런 메모를 해뒀다. 오키나와에 가면 사올 것. 누치 마스 소금. 다량의 미네랄이 함유되어 몸에 아주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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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여행 전에 읽은 책. 미식 여행을 하고 싶어서 였는데, 귀찮아서 숙소 근처만 다녔다. 비록 낙지도 먹지 못하고, 한정식 부럽지 않다는 백반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맛난 음식들을 먹고 다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함양에서 먹은 오동통한 길거리 소라. 책에 소개된 음식 중에 하나는 먹었다. 목포에서 유명하다는 유달콩물. 어릴 땐 휴일 아침에 시장에서 얼음 동동 띄워진 콩물을 곧잘 사다 마셨는데. 콩국수를 시켜먹고, 콩물은 한 통 사가지고 와서 집에서 아껴 마셨다. 진하고 고소했다. 책은 여행을 앞두고 있어 나름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다. 포스트잇 붙여둔 페이지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행지에 가서 주로 보고 듣는다. 관광(觀光)이라는 한자어가 뜻하듯 어디 놀러간다는 것은 그곳의 빛, 풍광을 보는 일에 방점이 있다. 차를 타고 달리든 두 발로 걷든, 새로운 경치를 보고 만끽한다. 거기에 소리가 더해진다. 대숲에서 스며 나오는 바람 소리, 이름 모를 산새의 소리, 계곡의 물소리, 유적지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사찰의 향불, 옛 한옥의 오래된 나무 향, 편백나무 숲의 피톤치드가 더해진다. 경치, 소리, 냄새의 삼위일체가 여행지의 주변 환경, 앰비언스를 이룬다.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욕심을 내어 감각 하나를 더 보태자. 손끝으로 결이 갈라진 문설주를 만지거나, 맨발로 간드러진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는 낙엽을 밟는다. 그러면 요즘 유행하는 4D 극장에서 즐기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현장 체험이 이뤄진다. 

- 7쪽


   산정동에 위치한 '웰빙 조개구이 집', 부부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옆집카센터 주인을 불러 무화과를 나눠주었고 내게 살아있는 새우며, 민어, 운저리 등을 보여주었다. 나는 상행길 도시락에 담아갈 요리를 주문했다. 사장의 제안은 장산도에서 기른 활새우구이, 나는 좋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틈틈이 무화과를 입에 넣었다. 사장은 나를 목포역에 데려다주었다. 기분 좋은 여행이 끝나가는 시간. 나는 무척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기차에 올랐다. 서대전까지 학회 세미나 토론문을 읽다가 새우구이를 꺼냈다. 맥주와 새우구이의 환상적 궁합. 도시락은 기차여행의 완성이다. 목포 여행의 필수품 하나가 빈 도시락이다. 맛있는 백반이나, 민어, 새우 등을 반찬이나 안주로 담아오면 나만의 에키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인생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없으면 내가 만들어도 좋은 법이다. 

- 222쪽


서용하 : 일본으로 출장을 가면 저녁에 숙소 가까운 곳의 선술집 들르는 게 참 좋잖아요. 주택가에 아주 조그맣게 자리 잡은 유명하지 않은 선술집인데 머리에 하얀 손수건을 매고 일하는 할아버지가 주인인 경우가 많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취 있는 분위기. 가격도 비싸지 않고 맛도 있고.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 40년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또 놀랍고. '자식한테 물려주면 애들이 할지 모르겠네' 하는 이야기도 나누곤 했어요. 목포에도 오래된 식당이 꽤 있는데 자꾸 도시가 재개발되면서 밀려나고 있잖아요. 그런 식당 주인이 한 자리에서 40년씩 자부심을 느끼면서 장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겠다 싶어요. 

- 235-236쪽




  콩은 가뭄이 닥쳐도 벼, 보리보다 잘 견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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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맛집산책

from 서재를쌓다 2018. 5. 1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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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마츠 요코의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가 무척 좋아서 새 책이 출간되면 때맞춰 읽어야지 다짐했었다. 신간 알리미 신청을 안 해놔서 몰랐는데, <일본맛집산책>이라는 촌스러운 제목의 책이 히라마트 요코의 새 책이라는 걸 알고 바로 주문했다. 그림이 조금 나오는데, <고독한 미식가>의 다니구치 지로가 그렸다. 히라마츠 요코가 출판사 편집자 Y군과 함께 맛집을 찾아가 음식을 먹는 내용인데, 흠. 뭐랄까 뒤로 갈수록 기사 느낌이랄까. 딱딱한 글도 있고, 잘 읽히지 않기도 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그래도 다시 일본을 가게 된다면 방문하고 싶은 가게가 몇 생겼다. 중고서점에 팔기 전에 적어둬야지. 그나저나 나는 '비어홀'이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좋을까. 비어홀. 듣기만 해도 넓직한 곳에서 왁자지껄하게, 삼삼오오 커다랗고 튼튼한 맥주잔을 부딪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 생각만해도 좋은 것!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용산의 고깃집에 출몰했다고 해서 용산이 시댁인 친구에게 맛집이냐고 물어봤다. 친구도 아직 못 가본 곳이라는데, 분명 이제는 갈 수 없겠지. 새벽까지 운영하는 곳인데, 고로상이 다녀간 후 저녁 9시에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어제 아침에 보았다는. 흑-




   사람의 몸은 정말로 잘 만들어졌다. 추울 때는 그렇게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따뜻해지면 용기를 내어 먹고 싶어지는 맛이 있다. 싹이 튼 채소나 산나물의 알싸하고 쓴맛에는 추운 겨울 동안 쌓인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몸이 원하는 것이다. 

   경칩에서 춘분, 춘분에서 청명, 청명에서 곡우로 바통을 넘기면서 지금도 봄은 움직이고 있다. 채소와 산나물을 맛보며 계절을 받아들이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주위는 온통 봄의 싱그러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 26-27쪽


  히야시 토마토, 아츠아게, 모로큐.

  이것이 '오늘 신바시 아저씨들의 베스트 3 안주'인 모양이다. 신바시 역전 빌딩 1호관 B1 '타치노미 긴'은 초저녁부터 손님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셀프서비스 안주, 한병 300엔 균일, 생맥주 500cc 한 잔 380엔.

  꿀꺽꿀꺽꿀꺽, 캬아.....

  여기저기에서 환희에 찬 신음소리가 쏟아진다. 옛 추억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건물은 1층과 지하에 술집과 작은 음식점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아저씨들의 성지다. '탄포포' '오후쿠로' '샤샤' '칸자시' '사쿠라코' ...... 저마다 스트레스를 풀러 오라고 유혹하고 있다. 건물 입구의 안내 지도판에 쓰여 있는 한 줄 문구도 마음에 꽂힌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기가 바로 논스트레스 공화국!"

- 28-29쪽


   군만두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말투를 따라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극장을 나와 그대로 직진해서 빨리 들어간 곳은 늘 그렇듯 '텐코 만두방'이다. 이곳은 군만두가 생각날 때마다 달려가고 싶어지는 가게 중 하나, 물론 생맥주와 함께다. 

   세상에는 '절묘한 조합'이라는 것이 있다. 마리아주 같은 멋 부리는 말은 시건방지다. 쌍방이 정면으로 맞잡고 다짜고짜 승부를 겨루는 씨름은 이것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군만두와 생맥주.

   '텐코 만두방' 니시키초 점은 1953년 창업한 '간다 만두 가게'가 시초다. 그만큼 만두는 대표 메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작은 '원조 만두'도 버리기 어렵지만,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흑돼지 만두'는 견딜 수 없는 맛이다. 조금 적은 듯한 양배추와 듬뿍 들어간 부추. 흑돼지의 진한 맛이 응축되어 있는 큼직한 놈이다. 바삭하게 구워서 노릇하게 눌은 갓 구운 만두를 한입 물면 도톰한 만두피가 씹히는 맛이 남다르다. 우선 한 개를 다 먹어치운 뒤 차가운 생맥주를 쭉 들이킨다. 감동에 겨워 가게 구석자리에서 TV를 올려다보니 한가로운 오후 와이드쇼가 방영중이다. 아, 행복하구나.

  군만두, 생맥주, TV.

- 30-31쪽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얼음덩어리를 꺼내 옛날부터 쓰던 빙수기로 얼음을 갈아 만드는 빙수는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다. 빙수를 다 먹을 때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고, 그 후 깜짝 놀랄 정도로 시원한 딸기 우유 한잔을 곁들였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가 포렴을 젖히고 불쑥 들어왔다. 

    "여기 빙수요. 그리고 딸기 우유 주세요."

    여름 참배의 즐거움은 얼음, 가을과 겨울은 구운 경단. 봄은 쑥 경단. 이 가게도 참배객들을 부지런히 맞이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오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간다. 장어도 훌륭하고, 빙수도 훌륭하고, 게다가 참배까지 마쳤으니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언젠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귀엣말로 말해주었다.

    "나리타산으로 참배하러 가면 꼭 좋은 일이 생겨요. 이거 정말이에요."

- 60-61쪽


    젓가락을 놓고 볼이 발그레해진 왕씨가 종잇조각에 뭔가를 적었다.

    "주봉지기천배소."

    "소중한 친구와 마시는 술은 천 잔으로도 모자란다는 뜻이에요. 중국 속담이죠." 왕씨가 가르쳐주자 일동은 환희로 들끓었다. 좋구나, 맛있어요, 자자 또 건배! 술잔을 비우면서 만석인 가게 안을 둘러보니 손님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왁자지껄, 시끌벅적. 중국 둥베이가 웬 말이냐, 이건 우주 비행이지 않은가.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지며 공간 전체가 가까운 미래의 한 장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89쪽


    세 개를 안주로 기쿠마사무네를 데워서 마신다. Y군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다. "마구로누타, 참 맛있네요. 시라코폰즈도 맛있어요." 술을 꿀꺽꿀꺽 비우고 이따금 입으로 가져가는 이타와사의 선뜻하고 싱싱한 식감이 또 즐겁다. 처음엔 일 얘기만 하더니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 아이 이야기, 만난 사람들 이야기, 작은 배를 타고 흔들거리며 가는 듯한 기분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이 또한 고아가리의 마법이다.

    "안주 좀 더 시킬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 143-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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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원의 벨로주에서 친구와 나란히 본 정밀아 공연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곡은 '심술꽃잎'이다. 정밀아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안에 사정이 있어 형제 중 자신만 잠시 시골 할머니집에 맡겨졌는데, 그때 서럽고 슬펐던 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생각이 났다고 한다. 이 아이를 잘 달래서 노래로 만들어 잘 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심술꽃잎'은 그렇게 만든 노래라고 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큰 나무, 풀잎, 바람 모두 실제의 것이니, 노래를 들을 때 그것들을 직접 눈앞에 그려보라고 했다.


    노동절에는 혼자 광화문에 가 와인영화를 봤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와인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다 보니 아버지와의 어긋난 관계로 집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던 주인공이 집에 돌아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어린시절의 자신을 껴안는 이야기였다. 어린시절의 자신을 잘 보듬아 준 다음에야 주인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린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런 장면이 늘 뭉클하다. 


   그리고 어느 목요일에는 그 사람 집 앞 커피집에서 이 책을 읽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연애를 잘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오는 어떤 고약한 부분이 있다. 지난 연애에서도 그랬었다. 그게 상대방을 슬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잡고 다잡지만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한 짧은 글을 봤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다음 독자에게 남긴 말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잘 되지 않았는데, 헤어지면서 자신은 불안형 애착을, 상대방은 회피형 애착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고.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단계부터 차차 성장해나가 건강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그리하여 좋은 엄마도 되고 싶다는 글이었다. 


   중간쯤 읽다 잘 읽히지 않아 덮어뒀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이 나 책을 들고 전철을 오랫동안 타고 집 앞까지 갔다. 야근이 언제 끝나는지 모르지만 놀래켜 주려고 몰래 커피집에 자리를 잡았다. 야근이 늦어지고 늦어져서 결국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성인의 애착 유형에 관한 설명이 있다. 200페이지부터 202페이지까지, 거기에 내가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릇된 행동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 페이지들을 읽어나가는데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아이였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결국 자정 넘게 야근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는 동안 가슴이 벅찼다. 


    시옷의 모임에 가기 전, 나는 지금보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던 것 같다. 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겸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언젠가 이 사람이 나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어 결국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네, 생각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도 이 페이지에 있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어린 아이들이 이 언니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렇지 않다고, 더 알게 되어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하다고 자꾸자꾸 얘기해줬다. 그리고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에 계속계속 얘기해줬다. 그것들이 나의 못난 면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는 것 역시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247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거든. "치료와 성장은 일생 어느 시기에도 가능합니다." 고마운 사람들.


    나는 내 안에 있는 이 아이를 잘 달래고 오래 들여다 볼 것이다. 보듬아주고, 손잡아주고, 괜찮아 질 때까지 곁에 있어줄 거다. 그 사람에게도 그런 아이가 있다면 힘들었지, 고생했지, 무섭고 쓸쓸하지는 않았니, 말 걸어 주고 싶다. 그리고 괜찮다고, 이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안아 줄 거다.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지만 다들 실수는 하는 거라고,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자고 다독여 줄 것이다. 상처는 누구에게든 있다고, 그 상처를 어떻게 아물게 하는 지가 중요한 거라고. 우리는 상처를 잘 아물게 할 수 있다고. 보경이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튼튼하고도 단단한 애착 상대가 되는 것이다.




   애착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입니다. 아기는 혼자 상황을 이해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돌봄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호 간의 연대감 없이는 애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즉, 돌봄을 주고받는 사람이 서로 즐겁고 행복감을 느껴야 애착이 잘 형성됩니다. - 105쪽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애착 도식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애착 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놀라운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저는 심리 치료 중에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본인이 긍정적 변화를 원하는 것과, 상담자와 함께 자신의 변화와 성장에 대해 실존적 책임을 지는 것이 정서적 금수저로 거듭나는 관건입니다. -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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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무척 좋아서 기대했는데, 흠. 이 작가의 소설을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아마도 꽤 오랫동안 베스트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소개에 의하면, "마흔여덟살, 이혼 후 다시 독신이 된 남자 주인공이 새 동네, 새 집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이야기. 내내 동경하던 단독주택에서의 우아한 삶, 그리고 옛 연인과의 오랜만의 해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늙은 뒤에 혼자 혹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모두가 일찍 세상을 뜨지 않는 한, 언젠가는 늙으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노년의 삶일까, 하는 생각. 어쨌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주인공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 할머니처럼, 우아하고 여유있게 살지는 못할 거다. 주인공의 여자친구처럼 병이 들었을 때 헌신적인 자식도 없을 거다. 그렇지만 간소하면서도 행복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때의 나는 누구와 함께 살까. 어떤 요리를 해 먹고, 어떤 책을 보고, 어떤 영화를 보게 될까. 어떤 생각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그때도 지금처럼 아주 풍요롭진 않아도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맥주 브랜드가 있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그나저나 마쓰이에 마사시의 다음 소설에도 건축 이야기가 나올까.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일 관계로 인터뷰한 노인은 무수히 많다. 소설가, 철학자, 피아노 조율사, 요리 연구가, 조각가, 양조 장인, 조산사, 성서 연구가, 외과의, 전당업자 등등. 일부를 제외하면 경험의 총량과 이야기의 재미는 비례한다. 정년을 앞둔 점잖은 남자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사락사락 내리는 눈 같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면 나 같으면 분명히 듣는다. 금세 잠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 

- 15쪽


   "이혼했다죠?"

   "네."

   나는 황급히 차를 마셨다. 달고 맛있다.

   "혼자 사는 거 쉽지 않아요."

   "네에."

   "쓸쓸하거든, 마음은 편하지만." 소노다 씨는 쿡 웃고 말을 이었다. "애니웨이, 웰컴 투 아워 킹덤 어브 소로."

- 21-22쪽


   꼭 빗나간 추론도 아니다.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하루새 쌓인 앙금이 잡념이 되어 되살아나 차츰 안개처럼 흩어진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과 있었던 일, 불쾌한 사건, 정산하지 못한 영수증 다발, 직원 식당의 삼색 덮밥, 오늘도 쓰지 못한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굳었던 어깨도 풀린다. 호흡이 깊어진다. 하루의 끝에 목욕을 하면 자신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 든다. 착각이라 해도 고맙다. 목욕은 위대하도다.

- 76쪽


   내 입사 동기인 영원부원이 사내 결혼을 했을 때 사쿠라자키 씨가 중매인 역할을 했다. 나는 피로연 사회를 맡았다. 신랑신부의 소개 글을 읽는 사쿠라자키 씨의 손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바스락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나는 그때부터 내심 사쿠라자키 씨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 77쪽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청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 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가나를 우연히 만난 국숫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라고 한다) 공원을 산책하고 그 김에 동물원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거나 가나가 부탁한 장을 보거나 한다. 저녁이 되면 마음에 든 동네 주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가볍게 마시고, 가나가 집에 올 즈음에는 직접 물을 받아 목욕하고 NHK의 <뉴스워치 9>를 보고 나서 취침.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가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했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이라기보다 셰어하우스의 주민 같은, 어딘지 모르게 담백한 관계였다. 
- 103쪽

   아들에게도 언젠가 배우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제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호감 가는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 뒤 식사에 초대하고, 두 사람의 개인사며 취향,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맞춰보고, 메일 등등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전할 생각을 하면 다소 귀찮다. 타인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자신도 별로 없다.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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