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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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서재를쌓다 2020. 12. 13. 16:56
추위에도 익숙해졌나 생각했던 어느 아침, 일어나 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창문으로 내다보니 밖은 새하얗다. 이미 4월도 끝나려 하는데 완전한 설경이었다. 깜짝 놀라서 곧바로 딸에게 말해줬다. 딸은 당시 열 살. 겨울을 좋아하고 눈도 무척 좋아하는 딸이다. 몹시 기뻐하며 둘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옆집 사람이 이미 스키복을 껴입고 집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웃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눈에 신바람이 난 우리를 보고 "맞다, 잠깐 기다려봐요" 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시럽이 들려 있었다. 그릇은 비어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걸까 싶어서 지켜보고 있었더니 갓 쌓인 새하얀 눈을 펐다. 그릇에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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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서재를쌓다 2020. 11. 7. 06:47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시시때때로 나타났으나 포스트잇을 가지고 다니지 못해 표시하질 못했다. 집에 가서 얼른 붙여둬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붙이려고 하면 그 구절들을 찾질 못하겠는 거다. 지난 남해여행에 가져갔다 앞부분만 살짝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어느 시인이 SNS에 무척 좋다는 글을 남긴 걸 보고 책장에서 꺼내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짤막한 글들이라 읽기 좋았는데, 한참을 읽다 생각했다. 시와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구나. 제목이 시와 산책인 줄도 모르고. 이 책을 읽는동안 이소라편을 봤는데 예능 보면서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다. 참가자들은 이소라에게 눈물섞인 진심을 전했고 이소라는 이런 마음을 받아본 지 무척 오래되었다고, 노래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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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서재를쌓다 2020. 10. 4. 07:24
한수희 작가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다 신뢰하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새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서 읽겠다고 다짐한 작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다이나믹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이제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 생활의 고단함, 그럼에도 괜찮은 삶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이번 책도 따끈따끈한 상태로 구입했다. 책와 영화에 대한 작가의 긴 추신글이다. 책도 읽는 사람의 기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지 월요일부터 시작해 금요일에 끝냈는데, 월요일에는 무던하게 읽히다가 금요일이 되니 두근거리는 구절이 꽤 많았다. -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마음속의 빛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영원히 청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로 내 마음의 이랑과 고랑을 가다듬는다. - 81쪽 60대 나이에 동년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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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서재를쌓다 2020. 9. 29. 19:43
나름 번화한 리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조금만 올라가면 깊은 협곡을 피해 발달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과 포도밭, 레몬나무, 드문드문 서 있는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를 만날 수 있다. 화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은 마치 판타지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순간의 달콤한 고독을 나는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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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서재를쌓다 2020. 9. 27. 16:40
마켓 컬리를 며칠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하다가 결국 주문했다. 내 생애 이렇게 비싼 치즈들을 그것도 다량으로 구매해 본 것은 처음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억지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은 어느샌가 개인의 역사가 되어 있곤 한다. '시간을 내서' 하지 않아도 그것에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은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고도 넘친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없이, 이걸 이용해 뭔가를 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냥 좋은 것, 그저 끌리는 것. 그것이 내겐 치즈다. 대단하지 않아도,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어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나는 종종 스스로 부자라고 느낀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좀 더 단단히 쥐어본다. 그렇게 내 삶을 조금 더 좋아하는 쪽으로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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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서재를쌓다 2020. 8. 11. 22:27
를 구입했을 때 함께 온 사은품 달력을 8월로 넘기니 훌라춤을 추고 있다. 저자들과 고양이 한마리가. 그렇다면 8월은 훌라춤을 출만큼 신나는 달인 것인데, 올해는 비에 비에 비네. 종일 장마다. 1호선을 타며 제일 좋은 점은 내내 바깥이 보인다는 것. 겨울에는 출근길에는 해가 뜨기 전이라 퇴근길에는 해가 진 후라 어둠 뿐이었는데 여름이 시작되자 출근길도 퇴근길도 온통 밝고 푸르러졌다. 나뭇잎들이 여리여리한 연두빛이었다가 단단한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날 퇴근길에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해가 마침 불그스레 지길래 영상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멋있네~ 좋은 길로 다니네~" 메시지가 왔다. 바깥이 보여 제일 좋은 순간은 고개 숙여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을 만나고 가슴이 벅차올라 고개를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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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는다서재를쌓다 2020. 7. 19. 16:50
내 직업 인생은 팟캐스트 을 맡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런저런 곳에서 말할 자리들이 있기는 했지만 을 맡고서야 비로소 '말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새로 시작하는 도서 팟캐스트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섭외를 받았을 때, 처음엔 망설였다. 일단 이름이 괴상한 느낌이었다. 또 난 이미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있었고 장기 여행도 곧잘 떠나는 편이라 2주에 한 번 고정 스케줄이 생기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이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이었기에 나의 모토인 '하면 는다'를 되새기며 한번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하면 된다'는 말은 싫어하지만 '하면 는다'는 말은 좋아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일단 해보면 조금은 늘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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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맛의 사과서재를쌓다 2020. 3. 30. 22:05
많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아질 때가 오지. 오래 전, 여행 선배들이 말했다. 그 말은 신묘한 점쟁이의 예언처럼 딱 맞았다. 많이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시간 들여 천천히 보고 싶다. 먹는 것과 머무는 곳에 좀더 돈을 쓰고 무엇을 보기 위해 조바심을 내거나 안달 내지 않고 싶다. 전전긍긍과 근심걱정은 돌아가면 차고 넘치게 할 수 있다.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 p. 64-65 아비뇽에서 묵은 곳은 오래된 작은 호텔이었다.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아침마다 주인 할아버지가 내려주는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라는 리뷰 때문이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작고 사소한 것일 때가 많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잊힌 채로 선반 위에서 담담히 익어가는 과일이나 빛이 미처 닿지 않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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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닭집서재를쌓다 2019. 11. 14. 22:46
제주도에서 온 친구와 위례에 사는 친구, 파주에서 퇴근을 한 나. 이렇게 셋이 금요일 밤에 양재에서 만났다. 검색을 해보니 양재에서 집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거의 끝과 끝이었지만, 버스를 한 번만 타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오래전 아지트 양재닭집에 갔다. 한때 이곳에 정말 자주 왔었다. 바삭바삭한 옛날 통닭에 양도 푸짐하고 장사가 잘되서 그런지 생맥주도 맛났다. 시원하고 톡 쏘는 맛. 여기만 오면 얼큰하게 취했더랬다. 시장 한 켠에 자리잡은 닭집은 여전했다. 맛도 그대로였고, 인기 있는 것도 그대로였다. 우리는 후라이드 치킨 하나와 닭똥집 튀김 하나를 시키고, 맥주와 사이다를 마셨다. 이날 방광염 약을 먹는 바람에 그 시원한 맥주를 마시지 못했더랬다. 간만에 셋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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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서재를쌓다 2019. 10. 23. 17:39
7월이었다. 종로에 반지를 보러 가는 날이었는데, 일찍 도착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카페 뎀셀브즈에 갔다. 아주 예전엔 종로에 오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었는데. 맥주도 한 잔 하고. 스폰지하우스가 있고, 이런저런 작은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아주 예전에. 카페 뎀셀브즈에 가면 언제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내가 첫 손님인 듯 했다. 매장에 직원들만 있었다. 출출해서 샌드위치를 먹어볼까 케잌을 한조각 먹어볼까 고민하다 그냥 커피만 시켰다. 곧 점심을 먹을 거니까. 차가운 커피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2층으로 가 아무도 없는 넓은 홀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다시 읽기 시작한 책. 처음에 잘 읽히다가 중간쯤 진도가 나가지 않자 덮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