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다방'에 해당되는 글 450건

  1. 달리기 일지, 두번째 6 2016.04.06
  2. 달리기 일지, 첫번째 4 2016.04.05
  3. 모네, 빛을 그리다 2 2016.04.04
  4. 파주, J 2 2016.03.24
  5. 2015년 가을 혹은 첫눈 4 2016.03.22
  6. 녹사평, S 6 2016.03.19
  7. 2015년 늦여름 혹은 가을 2 2016.03.15
  8. 아이보리 10 2016.03.10
  9. 이월의 시옷 2 2016.03.08
  10. 익선동, E 6 2016.02.23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갈까 말까 갈등하며 밍기적대고 있을 때, 동생은 순환운동을 하러 갔다. 우리는 1월부터 열심히 순환운동을 하고 있는데, 자매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트레이너들이 항상 쌍으로 챙긴다. 내가 먼저 가면, 동생분은 안 오세요? 동생이 먼저 가면, 언니는 오늘 야근이에요? 동생이 독감에 걸렸을 때 이번 감기 독하다며 걱정을 해 주었고, 내가 장염에 걸렸을 때도 동생에게 소식을 듣고 아무 것도 못 먹겠다며 걱정해주었다. 

 

   이번주는 순환운동을 하지 않고, 불광천을 뛰기로 했다. 언니분은 왜 안 오세요? 라는 물음에 동생은 고민하다 말했다고 한다. "사실은요. 언니 지금 불광천 뛰고 있어요. 이번 주말에 마라톤 나간대요." 운동하는 곳에 두 명의 트레이너가 있는데, 한 명은 머리가 길고 섬세하고 자상해서 이것저것 소소한 것도 챙겨준다. 우리가 토요일에도 오픈시간에 맞춰 운동을 하러 가자, 결심이라도 한 듯 '한달동안 꾸준히 하면 허리가 2인치 주는 마법의 운동 방법'도 따로 알려줬다. 또 한 명의 트레이너는 짧은 머리에, 우렁찬 목소리에, 성격도 털털하다.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지금은 귀엽다. 이 트레이너가 구렁을 붙여주면 '그 정도까지는 도저히 못합니다' 정도까지 기구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월요일은 둘 다 운동을 가지 않았고, 화요일날 동생은 트레이너에게 나의 마라톤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집에서 전해들으며 5키로라고 해야지, 마라톤이라고 하면 엄청 달리는 줄 알겠다, 고 했고, 오늘 운동을 가서 나의 마라톤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5키로예요. 5키로, 라고 몇 번을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섬세한 트레이너는 준비를 많이 하고 뛰어야 하는데, 마라톤 하는 사람 중에 다리 부러진 사람 많은데, 우리 엄마도...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열심히 운동을 하는) 동생에게 계속 해댔다고 한다. 그러자 우렁찬 트레이너가 다가오더니 "아니, 이금령 회원님이 마라톤을 한다구요?"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서, 동생은 또 5키로예요, 5키로, 라고 (열심히 운동을 하고 싶어하며) 대답을 했고, 우렁찬 트레이너는 "아니, 마라톤에 5키로가 어딨어요?"라며 자신이 장거리 달리기 선수였다는 이력을 말하며 그러면 그렇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동생은 "언니는 그냥 완주하는 게 목표인 것 같애요."라고 말했고, 두 트레이너는 나의 5키로 마라톤의 날짜와 준비상태와 현재의 위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걱정과 응원을 동시에 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불광천에 있었다. 벚꽃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초반에 빨리 뛰었더니, 2키로 때부터 힘이 들었다. 3키로까지 뛸 수 있을까 싶었는데, 뛰었고. 4키로는 아무래도 힘들겠다 싶었는데, 지금까지 뛴 게 아까워서 이를 악물고 뛰었다. 속도는 점점 늦춰졌지만 오늘도 무사히 쉬지 않고 5키로까지 뛰었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면 빨리 걷을 예정. 바람에 비의 기운이 묻어 있어 촉촉했는데 봄비에 봄꽃이 다 져버릴까봐 걱정이다. 오늘은 아홉 곡을 들었다.

 

1. 달리기 / S.E.S

2. 비키니 / 페퍼톤스

3. 바이킹 / 페퍼톤스

4. 더 로맨틱 / 투개월

5. So Pra Contrariar / O Irene (live) / Grupo Fundo de Quintal

6. 위시리스트 / 페퍼톤스

7. 어땠을까 / 싸이

8. 좋은 아침이야, 점심을 먹자 / 가을방학

9. 어느 날 문득 / 에코브릿지

 

2016.4.6

5.05km

34:58

 

 

 

,

 

 

 

   일요일에 마라톤을 신청해뒀다. 비록 5키로이긴 하지만. 살이 빠지기 시작하자 뭔가 더 열심히 움직여보고 싶어서 주말에도 뭘 해보자 궁리했다. 요가도 생각해보고, 훌라를 배우는 것도 생각해봤다. (훌라는 강습까지 알아봤는데 내가 가능한 시간의 강좌는 너무 비쌌다 ㅠ) 그러다가 작년에 포기한 마라톤이 생각났다. 친구는 나한테 딱 한번만 같이 뛰어보자고 말했다. 뛰고 나면 너무 힘들고 뿌듯한 것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게 너무너무너무 좋다고, 나도 느껴봤음 좋겠다고 했다. 그때 신청을 하고 연습을 나름 하다 독감에 걸려 버려서 친구만 뛰었었다. 신청한 거리가 10키로인가 7키로였는데, 잘 뛰어지질 않았다. 거리가 부담스러워 감기가 와 주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엔 좀더 가볍게 5키로로 신청했다. 5키로를 뛰고, 좋으면 7키로, 그 다음엔 10키로를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혼자 뛰는 일이지만 달리기가 끝나면 누군가와 함께 맛있는 걸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혼자 가서 혼자 뛰고 혼자 돌아오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S에게 같이 뛰자고 했다. 고맙게도, S가 그러겠다고 했다. 얼마 전 S를 만났는데, 사실 자신은 단거리 달리기 선수였다고 했다. 장거리는 젬병인데 요즘 조금씩, 길게 뛰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요일인데, 화요일인 오늘에서야 첫 달리기를 했다. 퇴근 후 옷을 갈아 입고 불광천에 나가 스트레칭을 하고, 멜론 플레이어를 켰다. '뛰자' 폴더의 음악들을 재생시켰다. 나이키 러닝 어플도 켰다. 알파고를 닮은 무뚝뚝한 남자 트레이너가 말했다. '운동을 시작합니다.' 일 년 만에, 아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알파고 트레이너가 1키로가 되었다고 말해주기 전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사람들이 많네, 벚꽃이 폈는데 안경을 안 쓰고 나와서 하나도 안 보이네, 동생은 순환운동 잘 하고 있을까, 트레이너가 언니는 이번주에 안 오냐고 찾을텐데, 내일 아침에는 삼계탕을 먹자, 삼계탕 국물에 견과류를 갈아 넣을까, 그런데 나 너무 천천히 달리고 있는 거 아닌가 등등. 알파고 트레이너가 1키로가 되었다고 말해주자 단번에 걷고 싶어졌다. 아, 걷고 싶다. 달리고 있지만 걷는 거랑 비슷한 속도인데, 힘은 들고. 걸어 버릴까. 그냥 걸어 버릴까. 수십 번을 고민하다가 그냥 달렸다.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지만 걸어버리면 다시 뛸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계속 뛰었다. 그러다 2키로가 되었고, 3키로가 되었다. 내 머릿 속은 벚꽃이니, 야경이니 이딴 것도 없이 계속 걸을까, 뛸까, 걸어 버릴까, 뛸까, 이 생각 뿐이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목표한 거리를 끝까지 뛰었다. 다리가 풀리고 어질어질했지만, 뿌듯했다. 그제서야 벚꽃들도 보였다. 세어보니 뛰는 동안 모두 열 곡의 노래를 들었다. 랜덤 재생이었는데, 마지막 곡이 기가 막히게 '벚꽃 엔딩'이었다.

 

1. 뱁새 (Live) / 선우정아

2. 여름 밤 탓 / 슈가볼

3. Everybody's Changing / Keane

4. 뜨거운 안녕 (워리어스) / 유희열

5. Farewell / 박경환

6. Highway / 쿠쿠리

7. La Mitad de Nuestras Vidas / La Buena Vida

8. I don't know what to do / Pete Yorn, Scarlett Johansson

9. Bikini / 페퍼톤스

10. 벚꽃 엔딩 / 버스커버스커

 

2016.4.5 

5.01km

37:17

 

 

 

,

모네, 빛을 그리다

from 모퉁이다방 2016. 4. 4. 22:42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미술관처럼 관람하면 되는 줄 알고, 숫자가 적힌 화면 앞에서 오디오 가이드가 말하는 그림이 나오길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설명하는 그림이 나오질 않길래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다음 화면도 그랬다. 그래서 또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어느 화면에서인가 한참 뒤에 오디오 가이드가 설명하는 그림이 나왔다. 전시관은 삼면이 화면으로 가득차 있었고, 중앙에 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앉아서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찾던 그림들이 차례로 나오더라. 이렇게 보는 거구나 싶었다. 다음 전시관에서는 바로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오디오 가이드를 순서대로 들었다. 윤상의 목소리였다. 화면에는 모네의 그림이 나왔는데, 정지된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이 그려지기 전부터 그림이 된 순간까지, 그동안의 움직임이 담겨 있었다. 모네는 그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때다 싶은 순간을 캔버스에 그렸을 거다. 그 찰나의 순간을 스케치하고, 채색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서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 거다. <모네 빛을 그리다>는 그 순간에 대한 전시였다.

 

   나는 전시를 보면서 화면에 새겨지는 모네의 말들을 손으로 메모했다. 어떤 말은 다 적기도 전에 지나가버려 화면 앞에 서서 그 말이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런 말들이었다.

 

 

   나는 위대해 질 것이다.

 

   실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번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 이 말은 모네의 말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말.

 

   순간의 때를 포착하는 것.

 

   아직도 나는 날마다 새롭게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한다.

 

   방을 하나 빌려 창 밖의 성당의 빛을 관찰하였다.

 

   성당이 내 위로 무너지는데 푸른색이나 분홍색, 혹은 노란색일 때도 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하찮은 돌도차도. 

 

   이때 가장 중요한 일은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항상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될 것으로 확신했던 모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의 가치를 이끌어냈습니다.

 

 

   제일 좋았던 전시관은 모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들판의 꽃을 주로 그렸던 시기를 소개한 관이었다. 커다란 숲에 꽃들이 흐드러지고,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소년이 멀리서 걸어 온다. 그 뒤에 다른 여자도 있다. 숲 속에 앉아 있는 여자 곁으로 소년이 오기까지, 그 움직임을 화면은 보여줬다. 그 움직임 끝에, 모네가 실제로 그린 그림이 보였다. 정지된 그림.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 모네는 이 사랑하는 아내를 너무 일찍 떠나 보내야만 했었다고 한다. 

 

 

 

,

파주, J

from 모퉁이다방 2016. 3. 24. 23:20

 

 

 

   "금령아, 결혼하지마." 언니가 그랬다. 언니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도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나는 알지. 이 말은 새댁들의 단골 멘트인 것을. 언니는 새댁이 되었다. 우리는 간만에 파주에서 만났다. 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나는 언니네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다 새로운 빵집이 생긴 걸 발견했다. 구경하려고 들어갔다가 이것저것 샀다. 두개씩 사서 각각의 봉투에 담았다. 하나는 내 봉투, 하나는 언니 봉투.

 

    언니는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시작으로 그간의 안부를 건넸고, 나는 외롭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그러는 사이, 언니의 동생이 왔다. 언니는 그동안 동생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했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만나게 해줬다. 그리고 언니의 신랑도 왔다. 이렇게 넷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언니네 동네 치킨피자집에서 함께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언니네 집에 가서 언니가 준비해놓은 맥주를 마셨다. 언니는 만났을 때 뭐 먹을지 내게 고르게 했는데, 나는 치킨을 좋아하니까 치킨을 먹자고 했다. 언니가 집에서 먹게 될 경우를 대비해 닭봉을 사 놓은 지도 모르고. 언니네 집에서 맥주도 마시고, 마른오징어도 먹고, 계란말이도 먹었다. 안타깝게도 닭봉구이는 많이 남겼다. 흑-

 

    오빠는 언니가 싫다는 데도 기어코 결혼식 영상을 틀었다. 거기엔 당연하게도 언니가 있었고, 오빠가 있었고, 언니와 오빠를 축하해주러 그 날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언니는 결혼식 전에 결혼식 같은 거 하기 싫다고 했었는데, 영상을 보더니 저 날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하루종일 모든 게 나를 위한 날이었다고. 그 느낌이 무척 괜찮았다고.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오빠는 언니가 싫다고 하는데도 신혼여행 사진도 보여줬다. 언니는 호주의 맥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이야기해줬다. 마지막으로 한 잔의 맥주를 더 마시기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결론은 이런 것이다. 결혼은 할만한 것이다.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이런저런 즐거움이 있으니까.

 

   언니의 동생은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해했는데, 언니가 그랬다. 언니가 몇 번이나 만나자고 했는데 내가 몇 번이나 거절했다고. 그랬나. 나는 단번에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정말 그랬다. 인터넷 뱅킹도 못하던 언니와 만나자고 하면 매번 거절하던 내가 만나 그것도 언니의 동생과 언니의 남편과 함께 언니의 신혼집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언니의 결혼식을 지켜봤고, 어쩌면 언니도 나의 결혼식을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았던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벅찼던, 그런 밤이었다.

 

 

 

,



이 시간.



지난 계절부터 샤브샤브.



바람.



무화과 타르트.



망원지구.



나의 치맥.



우리의 하늘.



당신의 밤.



사은품.



지금은 없어져 버린, 사은품 2.



아침.



불광천.



앉기.



동네 스시.



시옷의 책.



신도림.



혼자, 토요일의 칼국수.



모과와 모란이.



아빠와 헤밍웨이.



동네 삼겹살.



심플하지만 맛은 일품.



가득한 오늘의 커피.



보고싶은 민정이.



아침.



토요일 삭 포장.



막내 회사의 봄워크샵 후에는.



여의도.



야근.



파주.



늦가을, 커피스트.



전시 후 비어할레.



전봇대.


 

녹사평, 시옷의 책.

 

 

인사동 전시.

 

 

베테랑 칼국수.

 

 

무지개.

 

 

마음.

 

 

덕수궁.

 

 

돌담길.

 

 

친구와 오빠.

 

 

사랑한다.

 


아주 오래된 메모. 박민규 작가와의 만남.



겨울에 만나는 가을방학.



그리운, 크리스마스티라떼.



비밀의 공간.



걷기.



모모세, 여기를 봐.



파주 휴게소.



커피 앤 도넛.



지금은 사라진, 커피나무.



고구마.



감사하다, 집밥.



동네 초밥집.



오이시이-



아가.



그리고 언니.



타버나 드 포르투갈.



몽로.



집밥.



달, 빛.



메모.



파랑과 파랑.



내게 온 책들.



꿀벌이랑 꿀벌이 엄마랑 꿀벌이 아빠랑.



조승우.



시옷의 책.



비.



간바리마시타네-



동생의 오징어튀김 김밥.



프릳츠.



청송회.



조카.



김포.



사촌동생네 식탁.



마지막 영화.



안녕, 씨네코드 선재.



즉석 떡볶이, 너는 사랑.



에일맥주, 너도 사랑.



친구가 좋아하는 캐릭터.



만두에는 단무지이지 말입니다.



응응.



고마운 아이.



친구에게 준 드림캐쳐.



시옷.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그리고, 내가 본 2015년 첫눈.




,

녹사평, S

from 모퉁이다방 2016. 3. 19. 07:00

 

 

 

   원래 일요일에 수제맥주 만드는 강의를 들으려고 했다. 이태원의 탈이라는 맥주공방에서 맥주를 함께 만들어보고, 맥주도 4잔이나 마셔보고, 그날 만든 맥주는 일주일 후에 찾아갈 수 있는 수업이라고 했다. 내게는 그야말로 대박 강의. S랑 신청을 했는데, 인원 미달로 폐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맙소사. 우리는 잠시 절망했지만, 변함없이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탈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기로 했다.

 

    S는 맨들맨들한 까만색 애나멜 구두를 신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연갈색 가방을 메고 왔다. 밝고 긍정적이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많은 S는 맥주 강의는 취소되었지만, 언니랑 만나 맥주를 마실 수 있어서 좋다며 웃었다. 탈은 문이 닫혀 있어서 녹사평에서 이태원까지 한적한 골목길에 있는 술집을 찾아 걸었다. 한적한 골목길의 술집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모르는 골목길들을 걷다보니 다시 녹사평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찾은 한적한 골목길의 술집에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한적한 술집이었다. 너무 한적해서 구석자리는 몹시 춥기까지 했다.

 

   결국 그 날 우리는 각각 맥주 2잔밖에 마시질 못했다. 맥주 2잔씩을 마시고, S가 추천하는 카사블랑카 샌드위치집에 갔고, 그곳에서 주문한 샌드위치 반쪽을 끝내 먹지 못했다. 지금에와서 돌이켜보니 이날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S를 만나기 전부터. 그런데 나는 왠만하면 아프지 않는 사람이라 내게 장염이 왔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아침부터 화장실을 들낙거렸는데,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맥주집에서 속이 이상해 한차례 게워내고, 샌드위치집에서도 화장실을 가게 되자 무언가 몸이 이상해졌다고 느껴졌다. S에게 샌드위치를 다 먹게 한 뒤 말했다. 몸이 좀 이상하다고.

 

   이번 주 내내 장염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어제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좀더 강력한 약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하루종일 잤더니 몸이 괜찮아졌다. 흠. 그건 그렇고. 이 글은 나의 생애 첫 장염 이야기가 아니라 S의 책 이야기다. 나는 S와 만나 두 번의 가게에서 화장실을 꽤 여러번 들낙거렸는데, 화장실에 있는 동안 S는 조그만한 책을 읽었다. 내가 테이블로 돌아오면 그 책을 조그만 연갈색의 가방에 넣었다. 범우사의 주황색 책이었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S는 맥주집에서 이런저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책을 꺼냈다. 언니, 이건 내가 몇번이나 읽었던 책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와. 정말 버릴 문장이 하나도 없는 책이야. S가 보여준 페이지는 밑줄로 꽉 차 있었다. S가 보여준 문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당신의 친구가 멀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의 세계가 더 넓어진 것이라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S는 써야만 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도 보여줬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 페이지 읽으면서 언니 생각이 났어.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S가 책을 보고 있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날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과 함께 릴케의 책을 주문했다. 화요일, 휴가를 내고 첫번째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죽집에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S의 말처럼 그냥 지나칠 문장들이 없었다.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쓴 시들이 좋은 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번에는 나한테 묻고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물었겠지요. 당신은 그 시들을 잡지사에 보내겠지요. 당신은 당신의 시를 남의 시와 비교해보기도 하고, 잡지의 편집인들이 당신의 노력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겠죠. (당신이 내게 충고를 부탁했으므로 감히 말씀 드리건대) 나는 이제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제발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눈길을 외부로만 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단 한가지 길 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없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p. 13-14

 

    장염에 걸려 있는 동안 '몹시' 먹고 싶은 음식들의 리스트를 적어놓았는데, 그 중에 카사블랑카의 모로코 치킨 샌드위치도 있다. 곧 다시 먹으러 가리라. 장염이란 질병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슬픈 질병이었다. 먹지 않으면 몸이 괜찮은, 먹으면 몸이 즉각 반응하는. 하지만 먹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정말이지 다시는 걸리고 싶지 않다. 건강이 최고다!

 

 

 

,

 

2015년 늦여름 혹은 가을 동안의 기록.

순서는 뒤죽박죽.

 

 

 

서른 다섯이 넘은 언니에게 서른 다섯이 코앞인 동생이 보내준 구절.

 

 

 

시옷에 동생을 초대했다.

 

 

 

연남동의 시옷.

 

 

 

화양연화와 소라닌.

 

 

 

가을에는 출근 전에 스타벅스에 자주 갔었다.

 

 

 

가을에 읽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어느 날의 도시락.

 

 

 

아마도, 퇴근.

 

 

 

친구에게 작가의 약력을 적어 엽서로 보냈다.

트럭 운전수를 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아침, 오늘의 커피, 스콘, 그리고 나를 보내지 마.

 

 

 

아침, 메세나폴리스 스타벅스.

 

 

 

아마도, 퇴근.

 

 

 

이제는 배가 제법 나온 임신 중인 친구와 먹었던 그리스 음식.

 

 

 

아침, 커피, 앤드루 포터, 어떤 날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에게 얼마 전에 메일을 보냈었다.

앤드루 포터의 새 책을 읽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고.

그 분은 언젠가 내가 썼던 공간을 가끔 떠올린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 곳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면서.

 

 

 

아마도, 퇴근.

 

 

 

새 이불을 샀다. 안 빨아도 티 나지 않게 어두운 색깔로.

 

 

 

확실히, 퇴근길. 합정.

 

 

 

아침 토스트, 드립커피도. 파랑과 파랑의 조합.

 

 

 

친구 임신 선물로 사주고 나도 가졌던 제주바당 캔들.

불 안 붙이고 오래 간직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켜버렸다.

초에 제주바다가 담겨 있다.

 

 

 

8시 프로젝트를 활기차게 시작했으나,

매일 내가 8시에 하는 일이란 게 기록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어느 날의 8시. 걷다가 불광천의 분수쇼를 봤다.

동의 그것처럼 음악에 따라 물줄기가 바뀐다. 하지만...

 

 

 

어느 날의 8시. 집에 도착.

 

 

 

지난 가을에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자주 먹었다. 여기 맛있다.

햄을 추가하고 스팸과 치즈, 통조림 콩을 가져와 넣으면 부대찌개가 될 것 같았다.

셋이서 재료를 하나씩 가져와 몰래 넣었다. 

결과는, 그냥 오묘한 김치찌개.

 

 

 

오피스텔 고지서 봉투에 반해 문구점에 가서 같은 걸로 샀다.

봉투만 사고 카드결제하기 그래서 좋아하는 과자도 함께 샀다.

 

 

 

이때만 해도 불금을 즐길 수 있었다.

막내가 치맥하자고 해서 야외 테이블에서 먹었다.

 

 

 

일본어 공부 열심히 해보겠다고, 설거지할 때마다 보려고 붙여놓았지만.

다 소용없더라.

 

 

 

아마도, 아침사과.

 

 

 

언니의 결혼식.

얼마 전에는 언니의 신혼집에서 형부랑 언니 남동생이랑 맥주도 마셨다.

 

 

 

다시 본, 걸어도 걸어도. 역시 좋았다.

 

 

 

한때 동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문구들을 모아

경진매거진을 만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했다.

 

 

 

확실한, 퇴근길.

 

 

 

친구랑 주말의 연남동. 

여기 스파게티 양도 많고 맛있었다.

 

 

 

제주도 여행모임.

제주 고기를 먹고 연남동 잔디밭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도 마셨다.

 

 

 

아침, 라떼, 파니니, 스타벅스.

 

 

 

서울대 입구, 시옷.

 

 

 

기석이가 보내준 엽서.

 

 

 

집밥. 나는 미역국이 좋다. 특히 해물 넣은 미역국.

 

 

 

친구에게 꽃을 선물 받았다. 꽃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영화보러 가서, 이대.

 

 

 

귀여운 모과. 그녀는 거꾸로 쓰기 능력자였다.

 

 

 

나도 친구에게 주려고 손수건을 샀다. 그런데 이게 써보니 흡수가 잘 되지 않는다는;

 

 

 

아마도, 구름.

 

 

 

종로의 회는 맛이 없다.

 

 

 

동생 회사 지인분이 일본여행 갔다가 사다준 원두. 유명한 것이라고.

 

 

 

아마도, 퇴근. 나는 밤하늘이 좋은가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언젠가, 가마쿠라.

 

 

 

또, 하늘.

 

 

 

또, 하늘. 이건 어마어마한 구름.

 

 

 

내게 온 책들.

 

 

 

꿈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시옷의 책. D에게 보낸 편지.

 

 

 

라떼와 리스본 책갈피.

 

 

 

,

아이보리

from 모퉁이다방 2016. 3. 10. 23:48

 

 

 

    1월부터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 이 운동의 처음은 동생 회사에서 선물해준 1개월 무료 이용권 덕분이었는데, 당시에는 등록만 하고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가 올해가 시작되고 이런저런 소소한 시련들을 맛본 후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땀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꽤 괜찮았다. 내일도 나가볼까, 하고 나갔고. 내일은 나가지 말아보자, 하면 그 다음날 아침 몸 컨디션이 영- 엉망이었다. 그러니 다음에는 꼭 나가자, 가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고, 인바디를 쟀는데 모든 몸이 '적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트레이너도 지표를 보더니 놀라면서 칭찬해줬다. 이렇게 딱 5월까지 열심히 하면 몸이 엄청 좋아질 거라고 했다. 이번주 월요일에도 운동을 했고, 화요일에도 했고, 수요일에도 했다.

 

    하지만, 오늘 목요일. 칼퇴의 계획이 실패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오늘도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운동을 갔어야 했는데. 오늘, 잡생각이 많아 일의 속도가 느려졌고, 하물며 오후에는 차장님과 잡담 시간도 가졌기에 칼퇴에 실패했다. 오늘은 퇴근셔틀버스가 없는 목요일. 7시 조금 넘어서 Y씨랑 2200번을 타러 나갔다. 원래는 회사 앞 정류장에서 타는데 버스 시간을 보며 출판단지 안쪽으로 한 정거장 걷기로 했다. 한 정거장 가보니 시간이 어중간해서 한 정거장을 더 가려고 하는데,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에서 2200번이 지나가는 걸 봤다. 다음 버스는 15분 정도 기다려야 했고, 우리 앞에는 새로 생긴 맛있는 빵집이 있었다. 지난 주 목요일날 우리는 여기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고야 말았다. Y씨, 우리 빵 먹고 갈래요? 내가 살게요. 운동, 그래, 하루 정도 쉬어줘야 해요. 너무 열심히 했어.

 

   햄치즈 파니니를 먹고 싶었지만 파니니는 마감되었단다. 감베리 샌드위치를 시켰다. 일주일 전에 우리는 감베리가 뭔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했더랬다. 감베리는 이탈리아어로 어린 새우. 스팀 우유도 시키고, 프레첼도 하나 시켰다. Y씨는 따뜻한 우유가 아니라 스팀우유라니 뭔가 된장녀가 된 기분이에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통통한 새우가 꽉 차 있는 감베리 샌드위치를 반씩 나눠 먹고, 아무 맛이 안나는 無맛있지만 짠맛이 묘하게 맛있는 딱딱한 프레첼을 먹었다. 미지근한 스팀우유도 마셨다. 그리고 막 떠나려는 2200번을 용감하게 막아세웠다. 그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버스 안에서 말했다. 나는 파주에서는 못 살 것 같아요. 일산도 좀 그래요. 파주와 일산에는 회사 사람들이 아주아주 많다.

 

   그렇게 Y씨랑 헤어져 6호선을 탔는데, 그때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트레이너 님이 말하셨지. "밀가루는 안되요. 절대!" 내가 이렇게 말했었다. "아침에는 먹고 싶은 걸 먹어요. 제일 먹고 싶었던 거요." "오늘 아침에는 뭘 드셨는데요?" "피자요!" "밀가루, 안되요! 빵, 안되요! 그래서 그랬어. 회원님 뱃살이요." 흑- 1월 말의 일이다. 그래, 밀가루는 다이어트의 적이었는데. 오늘 나는 아침으로 만두와 김밥을 먹고, 점심으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먹고, 저녁으로 새우 샌드위... 그렇지만 맛있었으므로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는 새빨간 거짓말. 김사랑 님이 말씀하셨다. "세 끼 다 먹으면 살쪄요." 제시카 님도 말씀하셨다. "죽을 만큼 운동하고 죽지 않을 만큼 먹었어요." 김민희 님은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는 거요? 귀찮아요." 젠장! 옥주현 님의 명언도 있지. "먹어봤자, 내가 아는 그 맛이다." 아, 욕 나온다.

 

   그리하여 나는 저녁으로 밀가루를 먹은 내 몸에 대한 죄책감을 잔뜩 끌어 안은 채 월드컵경기장에서 내렸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재생시키고 최대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만두야 안녕! 돼지고기야 안녕! (너는 참으로 맛있었다. 내가 제일 나중에 젓가락 내려 놓은 거 알지?) 통통한 새우를 머금은 빵아, 밀가루야 안녕! 이별은 참으로 힘든 것. 그렇게 걷다 보니 별도 보이고, 밤도 보이고, 이제 곧 떠날 늦겨울도 보였다. 때마침 이어폰에선 가을방학의 노래가 나왔다. 계피가 노래했다. 이렇게.

 

모든 게 다 잘 될 것만 같다가

한순간 무너지는 맘을 알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엔

울고 싶어

사랑에 실패하는 건 괜찮아

자신에 실망하는 게 싫어

그런 나로 살아가야만 하니까

 

   이런 계피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아이보리'가 생각났다. 그래서 들었다. 듣다가 그래 '아이보리'가 이런 가사였지, 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아이보리'를 찾은 것이다. 3월에는 뛰어보기로 했다. 천천히 뛰어볼 것이다. 불광천은 봄이면 걷는 게 신날 정도로 고운 벚꽃길이 펼쳐진다. 벚꽃나무가 경쟁하듯 아름답게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벚꽃은 찰나라 더 보고 싶다 싶을 때 사라진다. 올해는 그 길을 뛰면서 보려고. 그래 보려고 한다. 봄아, 얼른 와라. 겨울아, 너는 이제 가자. 이별은 힘들지만 우리, 그만 헤어지자. 응? 그러니까, 결론은 내일 꼭 운동을 하기로. 그리고 오늘, 심사숙고 끝에 과감하게 포기한 그 하나에 후회가 없기를.

 

   3월, 또다시 화이팅이다!

 

 

 

,

이월의 시옷

from 모퉁이다방 2016. 3. 8. 23:02

 

 

 

   2월의 시옷의 책은 로베르트 무질의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였다. 기석이가 선정한 책이었다. 나는 거의 읽질 못하고 모임에 갔다. 다들 많이 읽지 못했노라고 고백했다. 소윤이만 다 읽었다. 소윤이는 힘들게 읽었는데, 무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바로 하지 않고 빙빙 둘러서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런데 그런 무질의 이야기를 빙빙 둘러 따라가보면 그곳에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더라고 이야기했다. 무질이 일부러 그렇게 쓴 것 같다고. 그러니 그렇게 읽어야 했다고. 그게 무질이 원한 거였다고. (소윤이의 말을 적어두질 않아서 내 멋대로 해석했다) 봄이는 성격 없는 인간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의 자신의 성격이 정확하게 무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시옷에서 이렇지만, 회사에서는 또 전혀 다른 모습이야. 또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습이고. 어떤게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  (봄이의 말을 적어두질 않아서 내 멋대로 해석했다) 모과는 책을 한 줄도 읽지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듣다보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요즘 자신의 고민들이 이야기들 속에 있어 마음이 덜컹- 했고, 그러니 책 속에 요즘의 자신이 있을 것 같다고. (두 번째 모과의 말은 정말 내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 소윤이는 기석이에게 시집을 선물받았다. 받을 만 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곱창을 먹으러 갔다. 모듬곱창과 알곱창을 섞어 시키고, 각자의 맥주와 각자의 소주를 마셨다. 곱창이 나오기 전에 아르바이트를 마친 솔이가 왔고, 다같이 건배도 했다. 오래간만에 테이블이 아닌 바닥에서 여럿이 모여 곱창도 먹고, 술도 마시고, 밥도 볶아 먹었다. 뭔가 조금 옛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오밀조밀하게 느껴졌다. 밥배를 채웠으니 맥주배를 채워줄 차례. 기석이의 단골이었던, 우리가 지난해 늦봄 즈음에 함께 갔던 소굴로 갔다. 가는 길에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누군가 개워놓은 흔적을 발견했다. 어떻게 딱 그 순간 개워냈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굴에 도착. 우리는 맥주를, 기석이는 (맞을 것이다) 보드카를 시켰다. 병맥주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병규에게 맥주란 모름지기 정성을 다해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소윤이는 대장 자리에 앉아 열심히 셀카를 찍어댔고, 모과와 병규는 그런 소윤이를 찍어댔다. 우리는 다 같이 건배를 했다. 한달동안 재밌는 일이 없었냐고 물었고, 몇몇 사람에게는 재밌는(혹은 그렇지 않은) 일이 있었다. 2월의 화두는 뽀뽀였다. 뽀뽀는 언제든 어디서든 좋으니, 그 순간이 짧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자고 (나 혼자)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성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3월에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일을 각자의 입장에서 심각하게 (혹은 눈물날 정도로 재미나게) 생각해줬다. 3월에는 재밌는 일을 많이 하고 만나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밤은 깊어갔고, 체력이 고갈되는 이들이 있어 (특히 나) 기운이 남아도는 아이들도 그만 헤어져야 했다. 소굴은 두 번째인데 두 번 다 시옷과 간 거다. 나는 첫번째로 소굴에 갔을 때를 떠올려봤다. 아, 우리 꽤 많이 친해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새멤버들은 거의 처음이라 많이 어색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시간들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좀더 서로에게 친숙해져 간다. 좋으다.

 

 

 

,

익선동, E

from 모퉁이다방 2016. 2. 23. 22:33

 

 

 

    세어보니 거의 일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E와 나는 작년 이맘 때쯤 전주 여행을 갔었다. 오직 가맥집을 가기 위해. 금요일 퇴근을 하고 만나 고속도로를 달려 한밤에 전주의 복작복작한 가맥집에 마침내 앉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설레였었나. 그때의 즐거움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서울에 괜찮은 가맥집이 있다고 해서 간만에 E와 만났다. 우리는 클라우드 맥주병으로 테이블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먹태도 먹고, 과자도 먹고, 사발면도 먹었다. E는 역시 맥주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맥주는 어떻게 이렇게 질리지 않을까. 맥주를 마시다보니 비가 왔다. 술맛이 더 났다. 우리의 목표는 잔뜩 마시고 취하지 않기였다.

 

   익선동은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언니, 요즘 이 골목길이 뜨고 있대요. E가 말했다. 지도를 따라 낙원동의 오래된 골목길로 들어왔는데, 거기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새롭게 리모델링한 가게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었다. 열두 달이라는 한옥 가게에서 맥주를 팔길래 2차를 하러 들어갔다. 마당에 앉았는데 ㅁ자의 건물에 피라미드 모양의 유리 지붕이 씌어져 있었다. 비가 조금씩 오다가, 갑자기 억수같이 쏟아졌다. 마당에 앉은 덕에 그 소리와 모양을 그대로 듣고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훈제햄이 들어간 오일 스파게티 하나와 각각 다른 맛의 수제 맥주를 시켰다. 

 

   언니. 연애는 많이 했고, 적게 했고를 떠나서 그냥 힘든 것 같애요. 모르겠어요, 정말. 그때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하면 웃어줬는데, 지금 이 애는 안 웃어줘요. 그때 그 사람은 이렇게 하면 귀여워해줬는데, 지금 이 사람은 이렇게 하면 귀여워 안 해줘요.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거예요. 연애는.

 

    요즘 나의 주된 관심사는 연애다. 내가 언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인연들을 만났는지. 지난 토요일에는 함께 일본어 공부를 하는 분이랑 점심을 단둘이 먹었는데, 나의 올해 목표가 애인 만들기 임을 아시는 분이 물었다. 금령씨는 왜 올해 목표가 연애예요? 올해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그냥 사랑받고 싶어서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듬뿍 받고 싶어서요. 말하면서 알았다. 나 사랑받고 싶은 거구나. 1월의 어느 일요일, 광화문에서 혼자 <이터널 선샤인>을 봤다. 무척 좋아해서 극장에서 다시 보길 바랐던 영화인데,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이제 혼자 영화 보는 거 그만 하고 싶다는 거였다. 십년이 넘게 혼자 영화를 수도 없이 봐 왔고, 그게 너무나 좋다고 느끼던 사람인데. 이번 겨울, 내가 변하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맥주가 약간 부족했다. 그래서 한 잔을 시켜 나눠 마시려고 했다. 주문을 하자 직원 분이 그렇게 나눠 마시면 맥주가 맛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반 잔을 공짜로 주겠다고 했다. 이런 친절하고 고마운 가게가 있나. 한 잔 같은 반 잔이었다. 맥주를 마시다 둘 중에 누군가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가서 슬픈 노래들만 내내 부르자고 했다. 그러다 울어버리자고 했다. 우리는 낙원동이 내려다보이는 2층의 노래방에서 슬픈 노래만 불렀다. E는 내가 모르는 사이 슬쩍 울었다고 했다. E는 에코 브릿지의 <부산에 가면>을 부르고 싶어했는데, 없었다. 나는 자우림의 노래를 불렀는데, E가 칭찬해줬다. 1시간으로 모자라 30분을 추가했는데, 주인 아저씨가 1시간을 더 넣어주셨다. 낙원동은 정말이지. 겁나 친절하고 겁나 고마운 곳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2시간 동안 슬픈 노래만 불러댔다. E가 지드래곤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내 멜론 재생목록에 그 노래를 추가했고. 그리고 우리는, 그 날의 목표를 이뤘다. 취하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무사히 집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에서 <부산에 가면>을 들었다. 아, 낮술은 위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