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녹사평, S
    모퉁이다방 2016. 3. 19. 07:00

     

     

     

       원래 일요일에 수제맥주 만드는 강의를 들으려고 했다. 이태원의 탈이라는 맥주공방에서 맥주를 함께 만들어보고, 맥주도 4잔이나 마셔보고, 그날 만든 맥주는 일주일 후에 찾아갈 수 있는 수업이라고 했다. 내게는 그야말로 대박 강의. S랑 신청을 했는데, 인원 미달로 폐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맙소사. 우리는 잠시 절망했지만, 변함없이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탈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기로 했다.

     

        S는 맨들맨들한 까만색 애나멜 구두를 신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연갈색 가방을 메고 왔다. 밝고 긍정적이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많은 S는 맥주 강의는 취소되었지만, 언니랑 만나 맥주를 마실 수 있어서 좋다며 웃었다. 탈은 문이 닫혀 있어서 녹사평에서 이태원까지 한적한 골목길에 있는 술집을 찾아 걸었다. 한적한 골목길의 술집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모르는 골목길들을 걷다보니 다시 녹사평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찾은 한적한 골목길의 술집에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한적한 술집이었다. 너무 한적해서 구석자리는 몹시 춥기까지 했다.

     

       결국 그 날 우리는 각각 맥주 2잔밖에 마시질 못했다. 맥주 2잔씩을 마시고, S가 추천하는 카사블랑카 샌드위치집에 갔고, 그곳에서 주문한 샌드위치 반쪽을 끝내 먹지 못했다. 지금에와서 돌이켜보니 이날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S를 만나기 전부터. 그런데 나는 왠만하면 아프지 않는 사람이라 내게 장염이 왔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아침부터 화장실을 들낙거렸는데,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맥주집에서 속이 이상해 한차례 게워내고, 샌드위치집에서도 화장실을 가게 되자 무언가 몸이 이상해졌다고 느껴졌다. S에게 샌드위치를 다 먹게 한 뒤 말했다. 몸이 좀 이상하다고.

     

       이번 주 내내 장염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어제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좀더 강력한 약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하루종일 잤더니 몸이 괜찮아졌다. 흠. 그건 그렇고. 이 글은 나의 생애 첫 장염 이야기가 아니라 S의 책 이야기다. 나는 S와 만나 두 번의 가게에서 화장실을 꽤 여러번 들낙거렸는데, 화장실에 있는 동안 S는 조그만한 책을 읽었다. 내가 테이블로 돌아오면 그 책을 조그만 연갈색의 가방에 넣었다. 범우사의 주황색 책이었다.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S는 맥주집에서 이런저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책을 꺼냈다. 언니, 이건 내가 몇번이나 읽었던 책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와. 정말 버릴 문장이 하나도 없는 책이야. S가 보여준 페이지는 밑줄로 꽉 차 있었다. S가 보여준 문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당신의 친구가 멀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의 세계가 더 넓어진 것이라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S는 써야만 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도 보여줬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 페이지 읽으면서 언니 생각이 났어.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S가 책을 보고 있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날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과 함께 릴케의 책을 주문했다. 화요일, 휴가를 내고 첫번째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죽집에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S의 말처럼 그냥 지나칠 문장들이 없었다.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쓴 시들이 좋은 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번에는 나한테 묻고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물었겠지요. 당신은 그 시들을 잡지사에 보내겠지요. 당신은 당신의 시를 남의 시와 비교해보기도 하고, 잡지의 편집인들이 당신의 노력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겠죠. (당신이 내게 충고를 부탁했으므로 감히 말씀 드리건대) 나는 이제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제발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눈길을 외부로만 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단 한가지 길 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없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p. 13-14

     

        장염에 걸려 있는 동안 '몹시' 먹고 싶은 음식들의 리스트를 적어놓았는데, 그 중에 카사블랑카의 모로코 치킨 샌드위치도 있다. 곧 다시 먹으러 가리라. 장염이란 질병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슬픈 질병이었다. 먹지 않으면 몸이 괜찮은, 먹으면 몸이 즉각 반응하는. 하지만 먹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드는. 정말이지 다시는 걸리고 싶지 않다. 건강이 최고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