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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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릿파크 - 살얼음판을 건너는 일에 대하여서재를쌓다 2008. 8. 19. 17:24
불릿파크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문학동네 이 소설을 읽고 기억에 남은, 아니 마음에 남은 두 가지. 마법과 노란방. 이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벅차 올랐다. 아, 이건 내가 찾아 헤맨 마법, 그리고 노란방이야. 미국 교외 중산층에 대한 반어적인 풍자와 코미디 이런 해석은 이미 멀리 보내 버렸다. 토니의 마법, 해머의 노란방. 어제 술자리에서 동생은 인생이란 살얼음판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튼튼해보여도 언제 내 밑의 얼음이 깨져 풍덩 차가운 물 속으로 빠져버릴지 몰라. 동생은 일주일 전만 해도 다닌지 한 달이 채 안 된 회사에서 돌아와 매일 울었다. 나와 동생의 남자친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내내 따라가겠다고, 그러다 니가 빠지면 재빠르게 밧줄을 휘둘러 구해주겠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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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서재를쌓다 2008. 8. 18. 14:55
동행 함정임 지음/강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김소진이라는 작가를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제는 이 땅에 없는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있다기에 찾아본 책이었다. 을 읽으며 정작 그의 글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주제에, 30분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주제에, 나는 몇 번인가 울었다. 제일 크게 울어버린 건 아마도 성석제의 글을 읽으면서였다. 나는 성석제가 그려주는 김소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깡마르고 선하게 웃는 츄리닝을 입은 소설가. 그가 내어오는 찻잔을 생각했다. 찻잔을 담은 쟁반을 든 소설가의 정직한 손을 생각해봤다.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 그를 기억하는 문인들의 글과 비평들로 이루어진 을 나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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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키핑 - 이건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서재를쌓다 2008. 8. 6. 02:20
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을 한 군데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두 소녀, 언니와 동생, 그러니까 루스와 루실이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외로웠으므로 아주 늦게까지, 어둠이 꽁꽁 언 호수 위에 소리 없이 내려 앉을 때까지 빙글빙글 스케이트를 탔다. 같이 타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을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이 부분이다. 루스와 루실이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위에서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하는 생각들. 이건 정말이지 따'듯'한 문장이다. p.49-50 은 외로움에 관한 책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책에는 온갖 외로움들이 나열되어 있다. 외로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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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 2006년과 2008년의 서울티비를보다 2008. 8. 5. 16:25
아직도 이따위 일에 가슴이 먹먹해지다니. 서둘러 익스플로어 창을 닫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달콤한 나의 도시'를 펼쳐놓고 통통 튀어다니는 문장들을 때려잡아 머릿 속에 꾸역꾸역 집어 넣었다. 결국 은수는 김영수를 떠나보냈다. 서른 둘, 다시 혼자가 된 은수는 내리는 비를 맛 보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맛이라고 했다. 때마침 책을 다 읽은 이 곳의 서울에도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 밖으로 손을 뻗어 비를 맛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맛. 이건 2006년 8월의 나의 흔적. 2006년 8월의 나의 말이다. 2006년.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 아이는 또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나는 여전히 연애를 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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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서재를쌓다 2008. 7. 25. 15:41
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문학동네 지난 가을 을 읽었다. 아직도 나는 그 소설집을 생각하면 조건반사마냥 입 안의 침이 고인다. 수십마리의 생선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죽의 빛깔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뽈찜이 무슨 맛일까 궁금하고, 김치볶음밥을 만들 때 김치의 반은 먼저, 반은 나중에 넣게 되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권여선의 단편을 만났다. 그러다 을 읽을 때에 나는 권여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자, 고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놓았다. 그녀의 장편소설 를 읽었다. 이번 여름호의 젊은작가특집에 권여선이 실렸다. 아직 자전소설은 읽지 못하고 '미인 작가 권여선을 말한다' 제목의 작가초상만 먼저 읽었다. 이런 식의 구절이 있었다. 그녀가 소주를 마시는 걸 보면 소주는 본래 저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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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 스무살의 그 길서재를쌓다 2008. 7. 23. 18:39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문학동네 왜 형,에서 민,으로 바꿨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지형,이라고 발음했을 때의 입 안의 울림이 작가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데.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이지민,은 너무 여성적인 느낌이다. 여리고 흔한. 그러고보니 우리 사촌동생 꼬맹이랑도 같은 이름이네. 표지가 예쁜 문학동네 책. 이 소설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단편들은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와 '오늘의 커피', '키티 부인' 정도.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책 표지와 차례를 놓고 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오늘의 커피'에서는 번쩍거리는 카페에서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빛나는 주인장 자리에 어떤 손님이 서서 카페의 주인이 되어 씨디를 고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모습. '키티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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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이곳에 살면서 구멍에 빠지는 곤충을 기다려 잡아먹는다서재를쌓다 2008. 7. 18. 03:37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아베 코보의 , 제1장 첫번째 이야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 제1장 첫번째 이야기, 9페이지에서 11페이지에 걸쳐 짧게 요약되어있다. 아니, 나는 그렇다고 본다. 실종된 '진정한' 이유는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를 읽지 않은 누군가가 그래, 7년이 지나게 그 남자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란 뭐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요,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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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불러 터져도 좋을 행복한 만찬서재를쌓다 2008. 7. 6. 03:25
행복한 만찬 공선옥 지음/달 사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공선옥 작가가 다 차려놓은 행복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열심히 떠 먹은 것밖에, 라며 배를 두드리기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이 기분 좋은 포만감.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산문집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따땃한 아랫목에 자리잡고 앉아 작가의 흙내나는 밥상을 염치없게 내어주는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됐다고, 배부르다고, 이제 더이상 못 먹겠노라고 손사래 치는 일 없이 나는 그녀가 내어주는 음식을 그릇소리가 나도록 싹싹 긁어가며 맛나게 비웠다. 그러면 그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아, 이것도 있다며 구수한 냄새 그득한 오래된 부엌으로 달려가 금세 무치고 부쳐 땅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을 뚝딱 만들어왔다. 그녀의 음식들은 값비싼 재료로 만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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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 2000년의 너와 마주하는 일서재를쌓다 2008. 7. 1. 11:40
7번 국도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까지 마쳤다. 속 나와 재현이 포항에서 속초까지 7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갔듯이 나도 김연수의 책들을 거슬러 읽었다. 절판된 과 는 조금 멀리 떨어진 도서관까지 땡볕에 걸어가 빌려왔다. 처음 가는 길이라 무작정 버스 노선을 따라 걸어 빙 둘러가 도착해보니 늘 가던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바보같이. '2001년 문학 활성화를 위해 문예진흥원이 뽑은 좋은책'이란 동그란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를 펼치니 놀랍도록 어린 김연수가 불테안경에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채 이 보다 더 활짝 웃을 순 없다는 듯 아주 방긋 웃고 있었다. 초판의 인쇄가 1997년 11월 17일. 그러니 그는 1997년의 김연수. 무려 십여년 전. 김연수를 거슬러 읽으며 감탄했던 책은 과 . 설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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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내력 - 고독한 주문을 외자서재를쌓다 2008. 6. 27. 14:00
돌의 내력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박태규 옮김/문학동네 나는 이 책을 '돌의 내력'을 담은 장편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44페이지에서 뚝 끊겼다. 그래서 큰 챕터가 나눠진 것이라 생각하고 '세눈박이 메기'를 읽었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돌의 내력'은 144페이지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은 '돌의 내력'과 '세눈박이 메기' 두 중편소설을 담은 책이다. '돌의 내력'을 읽다 가슴이 시릴대로 서늘해진 나는 갑자기 밝아진 분위기의 '세눈박이 메기'를 그냥 덮어버리고 읽지 않으려 했다. 이건 순전히 '돌의 내력'의 서늘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돌의 내력'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냈다. 그러다 이 문장을 발견했다. 279페이지. "세계는 그야말로 웅대하고 산뜻했다." 이 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