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53 체실 비치에서 - 서늘하고 아득한 이언 매큐언의 결말 책을 다 읽고 양장 위에 덮여진 파아란 표지를 빼냈다. 4면으로 접혀져 있었던 표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푸른 체실비치 풍경이 길다랗게 펼쳐졌다. 아니, 푸르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뭐랄까. 아득해지는 빛깔이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표지를 펼쳐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릴게 분명하다. 해가 거의 진 후, 바닷가에 홀로 서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서글프다는 말로도, 시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득하다는 말로도, 저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저기 앞에 하늘하늘 걸어가는 여인. 플로렌스. 나는 에드워드 대신 그 뒷모습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단번에 달려가 말해주고 싶다. 당신 마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에드워드 마음도 그게 아니예요. 이렇게 끝내고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하지만 소설은 그렇게.. 2008. 4. 14. 속죄 - 누구를 위한 속죄인가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문학동네 영화가 개봉한 뒤에 붙여진 띠지일 거다. 영화를 보고 급히 주문한 의 띠지에는 의 포스터가 새겨져 있었다. 보통 책을 읽는 데 걸리적거려서 띠지는 책꽂이로 사용하거나 그냥 버려 버린다. 의 띠지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유명한 소설가와 어느 신문사의 극찬 문구와 함께 있었던 한 독자의 문구. '통곡하듯 울렸던 10월의 어느 가을 아침 9시', '문자 그대로 걸핏하면 울었다'. 이 문장들 그대로 를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책 표지에는 얼룩진 컵받침같은 무늬가 나뭇잎 사이로 새겨져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영화를 먼저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영화를 상당히 '좋게' 먼저 봐버린 내 머릿속에는 이미 등장인물의 체형과 얼굴, 옷들까지도 생생하게 그려.. 2008. 3. 11. 악인 - 요시다 슈이치가 맞습니까? 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 . . 지금 당장 거짓말을 죽이지 않으면 진실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p.347 惡人. 요시다 슈이치가 악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슈이치 이름으로 국내에 발간된 책 제목들을 쭉 훓어보니 나는 그의 책을 반쯤은 읽었다. 그의 소설들이 좋은 이유는 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일요일들'의 느낌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항상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는 그 한 명 한 명의 평범한 일상을 엇갈리듯, 무심하게, 스쳐가듯 이야기한다. 마치 어젯밤 건대입구역에서 탄 7호선의 4-1에서 지하철에 올라탄 나와 4-1에서 내린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한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2008. 2. 23. 대성당 - 그의 문장은 빵집 주인 같아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문학동네 커피를 내렸다. 친구가 싸 준 원두커피. 브라우니 한 조각을 냈다. 친구가 만들어 준 초코 케잌. 그것들을 야금야금, 홀짝홀짝 먹어치우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다시 읽었다. 레이먼드 카버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 이 두 단편이 살아남는다면 자신이 정말 행복할 거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이 두 단편을 읽으면서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읽게 해준 것에 정말 행복해했다. 지상의 말이 하늘까지 닿는다면,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고마워요. 당신은 글은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정말 도움이 되었답니다. '대성당'의 마지막 부분도 뭉클했지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마지막 부분.. 2008. 2. 15. 엄마의 집 - 나는 소년이 되었다 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열림원 갑자기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내 머리카락들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것들을 당장 잘라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가는 길 모퉁이에 작은 동네 미용실이 있다. 늘 눈여겨 보았던 곳.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컷트를 하러 왔다고 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니 이건 너무 짧지 않냐고 한다. 그럼 그냥 컷트로 잘라주세요. 그러고보니 자르는 컷트와 짧은 머리 모양의 컷트의 말이 같다. 잘려나가는 내 머리카락들을 보며 한창 읽고 있던 전경린의 을 떠올렸다. 의 스무 한 살의 주인공은 엄마가 골라주는 예쁜 여자용 옷이며 신발을 거부한다. 나랑 어울리지 않아. 정 원한다면 언젠가 입고 싶어질 때 입을게. 서른 살쯤? 아니, 마흔 다섯 살쯤? 핸드폰에 저장해 온 머리보다 조.. 2008. 1. 31. 외출, 영화와 책 사이 아침에 신문을 뒤적거리다 이 금요일 MBC 주말의 영화인 걸 봤어요. 의 성공적인 종영과 의 개봉에 힘 입어 편성된 거 아닌가 혼자 생각하면서요. 2년 전 영화네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친구와 지금은 친구의 시누이가 되어버린 이와 함께였고, 영화를 보기 전에 명동에서 감자탕을 먹었고, 커피를 들고 컵홀더가 없던 2관에서 보았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허진호 감독의 영화라 보기 전부터 설레였고, 약간의 실망을 했지만 사람들 반응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섰지요.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면 처음에 보이지 않던 세세한 것들이 보여요. 일상적인 소품이나 사소한 배우의 표정, 스쳐 지나갔던 대사 하나. 오늘도 을 보면서 2년 전 극장에서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2008. 1. 19.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