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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릿파크 - 살얼음판을 건너는 일에 대하여
    서재를쌓다 2008. 8. 19. 17:24
    불릿파크
    존 치버 지음, 황보석 옮김/문학동네


        이 소설을 읽고 기억에 남은, 아니 마음에 남은 두 가지. 마법과 노란방. 이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 마음이 벅차 올랐다. 아, 이건 내가 찾아 헤맨 마법, 그리고 노란방이야. 미국 교외 중산층에 대한 반어적인 풍자와 코미디 이런 해석은 이미 멀리 보내 버렸다. 토니의 마법, 해머의 노란방. 어제 술자리에서 동생은 인생이란 살얼음판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튼튼해보여도 언제 내 밑의 얼음이 깨져 풍덩 차가운 물 속으로 빠져버릴지 몰라. 동생은 일주일 전만 해도 다닌지 한 달이 채 안 된 회사에서 돌아와 매일 울었다. 나와 동생의 남자친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내내 따라가겠다고, 그러다 니가 빠지면 재빠르게 밧줄을 휘둘러 구해주겠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소주잔을 채우고 살얼음판을 위하여, 라고 외친 뒤에 원샷했다.

       이 소설을 설명하자면 <위기의 주부들>을 떠올려봐, 라고 하면 될까. 언젠가 EBS에서 해 주는 걸 넋 놓고 보다가 울어버렸던 로버트 레드포드의 <보통 사람들>을 생각해봐, 라고 하면 될까. 진주에 처음 올라온 여름 방학에 집 앞 비디오 가게에서 매일 테잎을 빌려봤던 그 때, 우리 자매가 세네번이나 빌려 꼭 병에 든 코카콜라에 빨대를 꽂아두고 보았던 <나우앤덴>을 생각해봐, 라고 하면 될까. 배경은 그런 미국의 교외, 똑같이 생긴 2층집(잘 가꾸어진 잔디밭이 있는) 거리를 떠올리면 된다. 풍요로워 보이는 삶. 넘칠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을 것 같은 가정들이 양 옆으로 가지런히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듯한 그런 동네. 그 곳이 불릿파크다. 탄환저장소. 모두들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듯이 물질적으로는 꽤 풍요롭지만 언제 튀어나갈지 모를 위험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 그곳에 살아가는 탄환들, 네일즈와 해머(못과 망치), 그리고 네일즈의 아들 토니. <불릿파크>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에 네 개의 노오란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첫 번째 포스트잇에서 네일즈는 어느 흐린날 아침 타임스를 읽으며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p.99)  그는 어느 날 출근길의 기차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다. 어느 날은 두 정거장도 채 가지 못하고 기차에서 자꾸만 내린다. 도심으로 가는 출근길의 기차역. 모두들 바쁘게 기차에 뛰어오르는데 혼자 절망적인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의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외롭다는 건 그런 풍경이니까.


       두 번째 포스트잇에는 내가 이 책에서 무척이나 좋아했던 마법이 등장한다. 네일즈의 아들 토니는 어느 날 아무 이유도 없이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내려오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 네일즈 부부는 하루, 이틀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했지만 그 병은 한 달이 넘게 지속됐다. 그런 토니에게 두 명의 의사가 다녀가지만 그들 누구도 토니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 그리고 마법. '힌두교 도사랄까 신앙요법사'라고 소개받은 스와미 루투올라가 마법의 집행자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토니 방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향을 피워도 될까 동의를 구하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볼티모어에서 태어났어,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는 또 토니의 이야기를 듣고 이제 그들이 함께 하게 될 기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마법의 주문, 마법의 기도를 외기 시작한다. 그건 아주 간단한 주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행복해, 나는 괜찮아, 나는 행복해질 거야, 나는 괜찮아질 거야를 반복해서 외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나는 이 페이지를 읽으며 토니와 함께 스와미의 기도를 함께 외었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때론 서로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나누며, 너는 잘 될 거야를 열 번 진심으로 외쳐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박차고 나가 우울증을 떨칠 수 있는 일이다.

    (p.209-210)


       세 번째 포스트잇은 해머의 어머니 이야기다. 그녀는 미국의 끔찍한 자본주의를 증오했다. 결국 그녀의 어떤 생각은 아들 해머로 하여금 소설의 말미에 끔찍한 살인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도는 호텔 생활을 했는데, 자신이 쓰기 전에 침대를 사용했던 사람의 특징들을 꿈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적어 아들에게 보냈다.

    (p.236)


       내 네 번째 노란 포스트잇은 노란방 위에 붙였다. 해머는 술로 이 빌어먹을 삶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술이 그의 하루의 전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처럼 노란방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첫 눈에 그 방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노란방의 따스한 기운. 그 안에 있으면 두통없이, 술 없이 꽤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머물게 된 노란방에서의 밤. 

    (p.278-279)

     
        소설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나는 듯 했다. 아니, 비극으로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자신의 마법, 자신의 노란방을 잘 찾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노란 삶이라고. 그건 분명 남을 해치지 않는 마법이고 노란방이여야 한다. 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위기의 주부들>에서처럼, <보통 사람들>에서처럼, <나우앤댄>에서처럼 외롭고 힘들고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 어느 단 한 사람도 외롭고 힘들고 어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라는 위로를 나는 <불릿파크>에서 받았다. 퍼즐처럼 맞춰진다고 해야 하나. 지금 나는 우울증에 관한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불릿파크>의 토니와 해머와 네일즈를 자주 떠올린다. 나도 토니도 해머와 네일즈도 모두 크고 작은 우울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얼음판. 내가 딛고 있는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살얼음판 위에서 이런 책을 만나는 일 또한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마법과 노란방에 좀더 가까워지는 일이니. (아니, 이건 나의 조그마한 마법이며, 노란방이다) 내게는 풍덩 빠져도 밧줄을 금세 던져줄 사람들이 있으니. 외로운 사람들이여, 우리 모두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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