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길상사에 다녀왔다. 꽃이 피기 시작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더라. 가벼워 보이는데 꽤 무거운 녀석이다. 봄이란 녀석. 개나리는 조금 피어 있었다. 내려와서 꽃집에서 후리지아를 샀다. 우리 동네는 한 단에 오천원인데, 여기선 두 단에 오천원이다. 법정스님이 쓰셨던 필립스 면도기, 소니 라디오, 조그마한 연필깎이도 보고 왔다. 오월에는 연등꽃 보러 가야겠다.
성북동 길상사에 다녀왔다. 꽃이 피기 시작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더라. 가벼워 보이는데 꽤 무거운 녀석이다. 봄이란 녀석. 개나리는 조금 피어 있었다. 내려와서 꽃집에서 후리지아를 샀다. 우리 동네는 한 단에 오천원인데, 여기선 두 단에 오천원이다. 법정스님이 쓰셨던 필립스 면도기, 소니 라디오, 조그마한 연필깎이도 보고 왔다. 오월에는 연등꽃 보러 가야겠다.
머리를 자르고 이소라의 공연에 갔다. 머리를 자르러구요. 짧은 단발루요. 그러니까 아, 더워 보여서요? 시원하게? 그랬다. 내 머리 더워보였나보다 생각했다. Y언니랑 이대에서 만나 명란젓 스파게티와 오늘의 초밥을 먹고, 걸어서 서강대까지 갔다. 메리홀 앞의 벤치에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시면서 서강대 축제소리를 들었다. 쟤네들은 젊어서 좋겠다, 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공연을 보고 투다리에 가서 깻잎말이 꼬치에 맥주를 마셨다. 언니에게서 도쿄에 다녀온 이야기, 새로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또 쓸데없는 말들을 언니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여름이 되면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여기가 전주였음 좋겠다, 언니가 말했다. 걸어서 집에 막 가구요, 내가 그랬다. 아멘, 티어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봄. 이 날 들었던 좋았던 노래들의 제목들도 읊었다.
화장실에 갔는데 곡예사 언니에게 메세지가 왔다. 오늘 김연수의 신작단편을 읽고는 조금 울었어. 이소라는 오늘 너를 울렸을까.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세계의 문학 봄호를 주문했다. 아침에 주문한 책은 늦은 오후에 도착했다. 일요일 낮. 소나기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김연수의 새 단편을 읽었다. 이소라 공연을 가기 전, 나는 울 준비를 끝냈는데 그 날은 덜컹거리기만 하고 눈물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김연수의 새 소설은. 좋았다. 언니 말대로, 좋았다. 언니에게 나도 메세지를 보냈다. 언니, 내게도 그랬어요.
언젠가, 가까운 날에 뭔가에 덜컹하고 걸려 한바탕 펑펑 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연휴가 가고 있다. 엄마와 돈을 합해 고향의 어느 작은 절에 연등을 하나 달았는데, 직접 보지 못한 그 연등을 생각하고 있다. 연등으로 만들어지는 연등. 절의 작은 마당에 걸리는 연등. 연등 사이에 걸리는 연등. 새벽을 맞이하는 연등. 소나기를 맞는 연등. 5월의 햇살을 받는 연등. 저녁을 맞이하는 연등. 불이 켜지는 연등. 환하게 밝아지는 연등. 밤새 꺼지지 않는 연등. 6월의 어느 날 내려지는 연등. 내려지고 나면 그 연등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연등 사진 하나를 마음 속에 찰칵 찍어둔다. 아무 날도 아닌데, 생일이 지나고 나니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든다. 오늘은 좀 걸어야지.
그때 내 귀에 그 노랫소리가 들렸다. 분명하게 들렸다. 주쌩뚜디피니라고, 또 쥐빼리다꾸피앙상이라고. 그건 엄마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옆에 앉은 큰누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큰 누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는 뭘 하고 있었느냐 하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뮈옴마주뜨빠리라고, 또 너마카르데마샹송이라고. 프랑스 사람들이 들어도 전혀 무슨 소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이제 나는 분명히 그 뜻을 아는, 그러니까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안다. 사랑은 떠났으니까. 한 번만 더 둘이서 사랑할 수 없을까'라는 내용의 노래를.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며 나도 주쌩뚜디피니, 하지만 모든 게 거기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고 생각했다. 아니, 노래했다.
p.321-322, 세계의 문학 봄호.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中
아멘.
수많은 밤을 남 모르게 별을 헤며 날 위로해
강해지길 기도하고 지나간 이별로 울기도해
날 떠난 그댄 잘 있는지
다가올 만남을 빌기도 해
끝이 없는 미련들 소리없는 바람들
나의 어둠 속에 빛 되도록
날이 가기 전에 별이 지기 전에
나의 방황을 나의 가난을
별에 기도해 다 잊기로 해
나의 욕망을 나의 절망을
다 잊기로 해 나를 믿기로 해 아멘
*
그녀와 나의 두번째 봄.
그녀가 살아주어서 다행이다. 그녀와 사랑하고, 그녀와 이별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
아멘.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이성미 지음/문학과지성사 |
도서관에 들렀다. 시를 잘 읽지도 않는 주제에 시를 읽고 싶은 날이란 생각에 시집을 빌렸다. 이성미 시인의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라는 시집이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시간은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 제일 빠른 길은 이렇게 가는 길이다. 대문을 나서 '오이마트'에서 좌회전해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내가 순간적인 판단으로 '컷트머리로 잘라달라고 한 미용실'에서 좌회전해서 2분정도 걸어가면 도서관이 있다. 4층이 내가 늘 가는 종합자료실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도서관 가는 길에 우리 자매가 종종 이용하는 술집이 즐비해 있다. '황룡성'이라는 중국집을 닮은 치킨집은 얼마 전 '푸닥푸닥'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하며 떡이며, 머릿고기를 돌렸다. 이 집은 조명이 푸른 색이다. 역시 '황룡성'이란 중국집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뒷모습
번데기 안주가 3000원도 안 하던 술집이 있었다. 술집 이름은 원샷. 우린 늘 이 집에서 생맥주를 시켰기에 원샷하지는 못했지만 저렴한 안주 가격 때문에 이 집이 망하지 않길 바랬는데, 이 집도 곧 문을 닫고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봄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이사올 즈음부터 돼지갈비 전문점이었던 그 곳은 얼마 안 가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그 길고 긴 공사 끝에 이제야 5층짜리 건물로 재정비되었으니. 그 돼지갈비집은 아마도 3층짜리 가게로 재개업하는 듯하다. 오픈하면 이번에는 꼭 가봐야지. 맛있으니깐 넓힌 것일테니깐. 돼지갈비엔 맥주가 최고지.
나는 쓴다
새로운 동네 맥주집을 발견했다. 이 집은 고래고기를 파는 집인데, 시험삼아 먹어본 고래고기에는 비릿맛이 강해 한 점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대신 이 집은 맥스 생맥주가 정말 맛있다. 그러니 2차로 가기 좋은 곳.
여기 시들을 만들어준 모든 이에게
이 모든건 이성미 시인의 시이다. 여름이 간다. 가을이 온다. 모두들 아는 사실이지만, 무더운 여름 다음에 서늘한 가을이 온다. 여름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내겐 정말 반가운 일이다.
이마트에서 잔뜩 먹을 것을 산 뒤 한강고수부지로 갔다. 가지고 온 돗자리를 깔고 우리는 마주 앉아 카스 2캔과 웨팅어 2캔과 스타우트 패트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마셨다. 술에 취하는 대신 강바람과 뒤섞인 봄바람에 취했다. 화장실을 세 번씩 다녀오고, 요즘 보는 TV 프로그램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신정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마치 만나본 사람인 것처럼 말했고, 쾌도홍길동의 성유리 대사를 자꾸 흉내냈다. 난 역시 운이 좋소. 당연히 친구의 얼굴에서 성유리를 떠올릴 순 없었다. 난 역시 운이 좋소. 통통오리배의 페달을 늦은 밤에도 열심히 저어대는 사람들이 있었고, 놀랍게도 통통오리배 옆에 진짜 오리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강바람에 바다 내음새가 났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며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대학 시절을 기억해내며 깔깔거렸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우리를 스쳐 지나간 남자들을 기억해내며 껄껄거렸다.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봄바람은 사람을 참 설레이게 만들더라.
투표를 하고 롯데리아에 들러 거품이 풍성한 아메리카노를 마셔줬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이바디를 들었다. 가만히 창 밖을 바라봤다. 비가 내리는 풍경이 꽤 근사했다. 담배를 피우며 운전하는 한진택배 트럭이 지나갔다.. 한진택배 아저씨도 꽤 근사했다. 비에 젖은 횡단보도도 근사했다. 사람들은 내가 앉은 창 밖의 좁은 처마 밑에 자주 머물고 갔다.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2분동안 담배를 피우고, 5분동안 누군가를 기다리고, 1분동안 비를 피했다. 나는 이 모든 게 정말 근사하게 느껴졌다. 봄비가 오는 날, 집에 쳐 박혀 있지 않고 창가 자리에 앉아 이천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는 너덜너덜한 츄리닝의 떡진 머리를 질끈 묶은 나도 꽤 근사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갔다. 봄비는 사람을 참 근사하게 만들더라.
이바디 앨범을 다 듣고, 커피를 리필해 집으로 돌아왔다. 롯데리아에서는 이천원에 갓 내린 따끈따끈한 커피를 두 번 마실 수 있다. 개표방송은 시작됐고, 나는 사표를 던지고 온 게 분명해졌다. 빗소리가 참 좋구나.
나는 목련꽃이 너무 예뻐 꽃이고 싶어요, 라고 말했다.
언니는 한참 있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나는 니가 꽃 사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줄 알았어, 한다.
그러니까 언니 말은 너는 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빨강머리앤 DVD를 어떻게 사게 되었는지 말했다.
너무 비싸서 남자친구 생기면 사 달라고 할 작정이였는데 그냥 사 버렸어요.
언니는 잘 했어, 언제 생길지도 모르잖아, 한다.
그러니까 언니 말은 당분간 니가 남자친구 생길 일은 결코 없다는 뜻이다.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따닥따닥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커피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우산을 펴들고 집 앞에서 거품이 소복히 얹혀진 커피를 사고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은어가 살던 곳'이 생각이 납니다. 당장 집에 가서 그 단막극을 다시 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따딱따딱.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엠피쓰리 속의 음악보다 더 훌륭합니다. 아, 요즘 루시드 폴의 '삼청동'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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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켜니 샛노란 봄 빛깔의 현미씨가 저를 맞아줍니다. 나풀거리는 롱 스커트를 입고 샛노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그녀는 하동 터미널에서 내립니다. 높은 샌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어째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다구요. 결국 그 샌들 덕분에 기가 막히게 눈부신 여행을 했지요. 나풀거리는 롱 스커트의 샛노란 현미씨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다닙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그 길을 햇살을 마주하며 걸어갑니다. 벚꽃이 밤의 조명이 되기도 하는군요. 하얀 벚꽃을 조명삼아 술집 오두막에 떡하니 앉아 김광석 노래를 들으며 동동주도 한 잔 합니다. 벚꽃 향내 그윽한 새벽 공기도 빨간 스니커즈를 신으며 깊이 들이 마셔봅니다. 지리산 노고단에도 올라갑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경치가 기가 막히네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벚꽃길을 설레이는 사람과 함께 걸어봅니다. 현미씨, 그 사람 정말 괜찮은 사람 같아요. 노을이 지는 강가에서 현미씨가 그 사람과 달콤한 첫키스를 나누는 것은 훔쳐 봅니다. 아, 이런 곳에서의 키스라니. 그 사람과 영영 만나지 못해도 이 키스만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아요.
드라마의 중간쯤 그 사람이 우연히 현미씨 이름을 알아내고 뒤에서 부르잖아요. 현미씨. 현미씨 맞죠? 라구요. 아, 그 말, 왜 그렇게 떨리던지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렇게 설레는 일인가 잠시 생각했어요. 뭐 특별한 사건이 없었지요. 그저 친구들이 어떤 남자와 현미씨를 잘 엮어주려고 시작했던 여행이였고, 현미씨는 그 남자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죠. 그러다 붙임성 좋은 한 남자를 알게되고 그 사람과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게 되면서 왠지 사랑에 빠진듯한 느낌. 이게 다잖아요. 봄을 담은 이야기들은 늘 여기까지더군요. 맞아요. 사랑의 설레임. 딱 봄다운 이야기예요. 사진을 포기하려는 남자에게 현미씨가 한 말이요. 나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어쩌면 다른 드라마 같으면 억지처럼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꿈을 포기하지 말라며 어쩌구 저쩌구 했을텐데. 현미씨는 그냥 심드렁하게 카메라 렌즈로 하늘을, 나무 위를 올려다보면서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욕심이 많은 거 아니예요? 그러면 그만두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 거기서 현미씨한테 완전 뽕 갔을 거예요. 장담해요. 그 순간 그 남자의 표정을 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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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똑같은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현미씨는 너무 귀여웠어요. 그 나풀거리는 샛노란 옷이라면 어디서든 눈에 띄였을텐데 왜 그렇게 그 사람은 현미씨를 못 찾은 걸까요. 정말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현미씨가 인연이였던 걸까요. 그 남자는 사진을 포기했을까요. 더 열심히 찍어대고 있을까요. 벚꽃길은 어찌 그리 아름다울까요. 흩날리는 벚꽃처럼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순간들은 왜 그리 많을까요. 빠알간 벤치 위의 사진을 그 남자는 발견했을까요. 우리는 다시 사랑하게 될까요.
현미씨. 우리 내년 만우절날 다시 만나요. 은어가 살던 곳에서요. 기다릴께요. 만우절 약속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요. 봄은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였군요. 발개 벗겨지는 느낌에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게 약간 부담스러웠거든요.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봄을 알 것 같아요.
이렇게 봄이 찾아와 주셨으니 <4월이야기>를 봐줘야 한다. 작년 인터넷 서점에서 <4월이야기> DVD를 발견하고는 당장 주문했다. 그리고 책장 안에 고이 꽂아두고는 봄이 오기만 기다렸다.
대학교 1학년 즈음이였던 것 같다. 집에 내려가 있던 여름방학, 우리집은 우즈키를 닮은 내 친구의 동네로 옮겨져 있었다. 친구와 나는 여름 밤에 자주 만났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금방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나는 자주 복도 창 밖에 고개를 내밀고 수다를 떨었다. 저녁시간에 훌쩍 여럿이서 야자를 빼먹고 학교에서 가까운 노래방에 놀러 가곤 했다. 노래방 언니는 늘 요구르트 하나씩을 줬었다. 의자 위에서 몸을 떨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학교로 걸어오는 길에 방금 부른 노래를 흥얼거리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반짝거렸다. 교실로 잠입하는 시간은 늘 쉬는 시간. 신발을 손에 쥐고 사뿐사뿐 복도를 걸었다. 남은 야자시간에 공부가 될 일이 없었다. 라디오를 자주 들었고 서로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을 주고받았다. 스티커 사진을 자주 찍었고, 구름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는 자판기 냉커피를 하루에 두, 세 잔씩 뽑아 먹었다. 정말 그 커피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방학 때마다 만나게 된 우리는 자주 그 날의 일을 추억했다. 어느 날 친구는 동네에 멋진 곳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갔다. 높은 곳에 대학교가 있었다. 헥헥거리며 올라가 보니 시내의 불빛들이 발 밑 아래 가득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캔맥주를 마셨다. 모기가 몰려다니며 우리를 공격했지만 이 정도면 무척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에게 니가 나한테 페이퍼를 소개해줬었다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뜨금없이 말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우리는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뛰어서 동네 비디오 방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뽑아들었나, 내가 뽑아들었나. 그 날 우리가 본 건 <4월이야기>였다.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화사한 봄의 화면을 봤다. 영화 속 우즈키는 지독하게 말이 없었다. 비디오 방을 나서며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버리다니, 나는 주인공이 벙어린줄 알았다고 투덜거렸다. 친구는 그냥 씨익 웃었다.
그리고 한 번쯤 더 보았었나. 두 번째 보았을 때 나는 친구가 우즈키와 많이 닮았다고. 생김새도, 행동들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쯤이겠다. <4월이야기>를 봤다. 아, 이 영화가 이렇게 웃겼었나. 이삿짐을 나르고 정리하는 장면에서 정말 혼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좋아하던 벚꽃장면이 나왔다. 우즈키가 작은 나무의자를 들고 옷을 스르르 털어내면 벚꽃이 우르르 떨어지는 모습. 아, 이렇게 금방 지나가버리다니. 나는 이 장면을 분명 슬로우 모션으로 기억했는데. 5초도 되지 않아 우즈키는 새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플라잉 낚시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의 풍경은 너무 따스해서 스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 시절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던 스무살, 나는 왜 이 영화가 답답하게 느껴졌을까. 벙어리라고 생각했던 우즈키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혼자 지내고 있어 쓸데없는 말이 없었을 뿐, 할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였다. 오히려 내 기억에서보다 무척이나 적극적인 아이였다. 이사한 날 이웃들에게 선물을 돌리고,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같이 먹자고 청하고, 좋아하는 선배때문에 아무도 없는 도시에 진학을 하고, 매일 선배가 일하는 서점을 찾아가 염탐하는 적극적이고 밝은 아이였다.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그 애의 머리 위에는 봄 햇살이 가득 뿌려져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아름다웠다. 그 아이가 살고 있는 그 시간들이. 싱그럽고 눈부셨다. 그리고 그리웠다. 마음이 아릴 정도로.
역시 짧았다.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역시 아쉬웠지만 부족하진 않았다. 원래 봄은 짧으니까. 우리의 스무살은 그렇게 아쉬운 거니까. 넘치듯 부족한 계절이니까. 그렇게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절이니까. 영화가 끝나고 Special Features 메뉴로 넘어갔다. 뒤적거리다 Shoot Picture를 눌렀다. 거기에 눈부신 우즈키가 있었다. 마츠 다카코가 슬레이트를 들고서 큐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우산을 들고서, 비에 흠뻑 젖어서, 밥을 먹으면서, 화사하게 웃으면서. 너무 예뻤다. 우리들의 스무살도 저랬을까. 예쁘고 빛나고 부러웠을까.
작년에 DVD를 사면서 친구에게도 따로 보냈는데, 친구는 봤을까. 영화 속에서처럼 애태우던 우리의 스무살 짝사랑을. 그때 우리가 늦게까지 밤을 지새우며 짝사랑했던 것은 어떤 남자아이였지만, 지금 나의 짝사랑은 우리의 스무살이 되어버린 걸. 오랜만에 메일을 써야겠다. 손편지가 좋을까. 지금 봐도 친구와 우즈키는 닮았다. 말이 그리 많진 않지만 할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 밝고 적극적인 아이. 앞에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잘 어울리는 아이. 내가 보장하건데 니 스무살은 우즈카처럼 빛났었어. 물론 지금의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