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동안

from 티비를보다 2016. 10. 5. 23:57



할머니의 먼 집

립반윙클의 신부

다가오는 것들

바다의 뚜껑

물숨


   연휴 동안의 나의 목표였다. 하지만 연휴 내내 씻기도 싫고, 나가기도 귀찮아서 이틀 내내 집에만 있었다. 집에서 보쌈도 시켜먹고, 통닭도 시켜먹었다. 아, 맥주 사러 마트에 한 번 나갔다. 그래서 살도 쪘다. 집에 있으면서, 책도 읽지 않고, 영화도 보지 않고, 내내 티비만 봤다. 아, 한심하다. 티비를 끄고 책을 읽자, 티비를 끄고 밖으로 나가자, 생각만 수십 번 하고. 마침 비가 내려주었던 순간도 있어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마지막 날에는 너무 심한 것 같아, 상암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영화 한 편을 보고, 불광천을 걸어 집으로 왔다. 저 리스트 중 <다가오는 것들>만 성공했다!


  그래도 연휴 동안 건진 게 하나 있다. 드라마 <공항가는 길>. 이 드라마에 푹 빠지게 됐다. 연휴 때까지 4회가 방영되었는데, 그 전에 잠깐씩 스쳐 지나가며 보긴 했었다. 그렇게 잠깐씩 보면서도 마음에 남는 대사들이 있어서, 이번에 3, 4회를 재방송해주길래 유심히 봤더니 꽤 괜찮은 거다. 불륜드라마이고, 상황들이 꽤 억지스럽고, 대사들이 문어체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음악이 좋고, 문어체스러운 대사도 꽤 근사하고, 김하늘과 이상윤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검색해보니 <봄날은 간다>, <사랑해 말순씨> 작가의 드라마 입봉작이었다. 드라마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나는, 참지 못하고 1, 2회를 돈 주고 결제를 해서 찬찬히 보았다. 그리고 재방해주는 시간을 체크해두고 3, 4회도 다시 보았다. 그러니 그 전에 보이지 않던 이야기들이 보였다. 아, 좋으다 생각했다. 


   오늘은, 김하늘과 이상윤이 삼무사이가 되었다. 바라는 것, 만지는 것, 헤어지는 것이 없는 사이. 김하늘이 말했다. 우리 애매한 사이가 되요. 사랑한다, 좋아한다, 감정이 확실해져도 말하지 말아요. 그래야 오래갈 수 있어요. 이상윤이 말했다. 이상하게 설득이 되네요. 예고편을 보니 이 삼무는 바로 깨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래는 연휴 동안 내가 건진 대사들. 마음들이다. 잊지 않으려고 메모해뒀다.


- 혹시 제가 보입니까?


- 제가 보여요?

지금 만날 수 있어요?

만나고 싶어요.


- 매뉴얼대로 움직이다 보면 매뉴얼대로 느끼게 돼.


- 한번이라도 누굴갈 좋아해봤음 다행이죠.


- 그러게. 힘들지가 않네요.


   그리고, '비 그친 뒤 파란 자동차 위의 빗물들'이라고도 메모해뒀다. 설마 출발이 무척 좋았던 <달콤한 인생>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 수목은 공항에 가는 걸로- 아, 연휴에 가을맥주도 마셨다. 말할 것도 없이 맛났다. :)




,

오렌지 데이즈

from 티비를보다 2014. 10. 19. 20:38

 

 

 

    연인이 된 카이와 사에. 사에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몇년 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우연히 둘은 만나게 되고, 모난 성격의 사에를 카이는 때로는 이해하고, 때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마음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사에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노력한다. 사에는 그 마음을 잘 알지만, 그래서 너무 고맙지만 자신의 현실 때문에 행여 그에게 누를 끼칠까봐 더 모나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해가고, 좋아하는 마음을 키워간다. 카이에겐 똑 부러진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음만 각자 키워간다.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바라는 미래가 달라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카이. 두 사람은 그 마음을 대놓고 들켜버리고, 어느새 연인이 된다.

 

    어느 날 레코드 가게에 가게 된 두 사람.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카이를 사에는 멀리서 지켜본다. 레코드 가게를 나서며 사에가 카이에게 묻는다. 그 곡 어떤 느낌이야? 카이는 당황한다. 어떤 느낌이지? 어떤 느낌. 밴드 곡이었는데, 카이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한다. 애절한 느낌이 드는 곡이야. 사에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카이인지 사에인지 누군가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손가락을 아래로 하고 코까지 일직선으로 떨어뜨린다. 그건 일본어로 소-. 그래, 라는 뜻의 수화다. 그날부터 카이는 그 곡의 느낌을 그림을 그린다. 사에를 위해. 나중에 완성된 그 그림에는 커다란 유리병이 있고, 그 병에 빨간 장미꽃이 꽂혀 있다. 그 병 안에 남자와 여자와 등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쿠루리의 곡이다. 드라마를 보고 이 곡을 계속 듣고, 가사도 찾아봤다. 그러다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그 그림이 완전히 이해가 됐다. 아, 하고 혼자서 지하철 안에서 웃었다. 마음이 이상해졌다. 막 설레였다.

 

    이 드라마를 왜 이제 보게 된걸까. 예전에 한번 보려고 했었는데, 사에가 너무 모난 성격이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1회만 보고 그만두었던 것 같다. 끝까지 보니 그건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항상 노심초사했던 착한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왜 나한테만 이런 불행이 와야 하냐고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도 했던 현실적인 아이였다. 어떤 순간은 좋아한다고 말하고, 금방 마음을 돌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그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 카이는 그 마음을 다 알았다. 좋아한다고 말할 때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도 그녀를 다 이해했다. 그런 사람이 있는 사에가 부러웠다.

 

    카이. 그러니까 사토시는 이 드라마에서 어찌나 빛나던지. 진짜 최고. 사토시는 진짜 사랑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에에게 지었던 그 표정들. 안타깝고 서운하고 서글퍼하던 그 표정들. 너는 이제 나랑 헤어지고 서른 두살이 되었을 때, 20대에 이런 저런 여자들을 만났고 그 중에 귀가 아픈 아이가 있었지, 라고 회상하게 될 거라며 이별을 통보하는 사에에게, 그럴리는 없다고, 귀가 아픈 아이가 있었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없다고, 스물 두살의 그 이야기만 무한반복할 뿐일 거라고, 말하며 지었던 그 진짜 스물 두 살의 표정. 그 표정들 때문에 지난 일주일 간 마구 설레였다. 사에, 카이.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야. 사에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어 수화를 조금씩 배워오던 오렌지 데이즈의 친구들도. 이제라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수화는 외국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 나라에 가기 위해, 그 나라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 처럼. 사에를 만나기 위해 배우는 또 하나의 언어. 손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언어. 드라마에서 수화를 쓸 때 무척 좋았다. 덕분에 사토시의 목소리도 더 좋게 느껴졌다.

 

 

 

,

아내의 자격

from 티비를보다 2014. 4. 12. 17:15

 

 

 

   이십 대에 꿈꾼 사랑이 있었다.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래서 내 생활이 망가지는 것도 개념치 않는 그런 사랑이었을 거다. 삼십 대에 꿈꾸는 사랑도 있다. 이십대의 사랑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게 무모하게 아프고 싶지는 않다. <아내의 자격>을 보고 사십 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십 대 때는 어리석게도 삼십 대의 사랑은 없을 것만 같았다. 삼십 대가 되니 사십 대의 사랑 같은 건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사십 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사십 대에도, 오십 대에도, 육십 대에도 사랑은 계속될 거라는 사실. 그게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새롭게 만나게 될 사람일 수도 있고, 짝사랑일 수도 있고.

 

   김희애가 이성재와 동거를 시작하게 됐을 때, 함께 살면서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 말한다. 조곤조곤 따박따박, 극 중 김희애의 성격대로 그렇게 말한다. 각자 방을 하나씩 두고 생활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해 그 날만 합방해요. 그게 말이 되냐는 이성재의 말에 김희애가 그런다. 솔직히 매일매일 한 방에서 부인이랑 자는 거 좋았어요? 나는 아니었어요. 책 읽다, 하고 싶은 것 하다 그렇게 각자 자고, 일주일에 한번씩 한 방에서 자요. 김희애의 그 대사에서 사십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 사랑은 계속되겠지.

 

   <밀회>를 봤다. 꽤 괜찮았다. 그러다 김희애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아내의 자격>에서 감독과 작가와의 만남이 참 좋아서 이번에 제의가 왔을 때 무조건 오케이를 했단다. 그래서 다시 찾아봤다. 예전에 이 드라마의 캠핑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김희애의 캐릭터가 너무 답답해보여 더 보질 않았었다. 다시 보니 그 캠핑 장면이 이 드라마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보니 김희애의 그 답답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주말에 보기 시작했는데 1회부터 시작해서 연속으로 쭉 봤다. 평일에는 퇴근하고 한 회씩 아껴 봤다. 순식간에 16부작을 모두 다 봐버렸다.

 

    마음에 많이 남았던 장면들은 책이었다. <밀회>에서도 유아인에게 김희애가 책을 보낸다. 하고 싶은 메세지와 닮은 문장에 밑줄을 그어서. 그게 참 좋았다. <아내의 자격>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나는 이혼을 결심한 김희애가 잠자리에 든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 나지막하게 책을 읽던 김희애가 갑자기 흐느낀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아들에게 말한다. 슬픈 장면이잖어. 그 문장은 김희애가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대변하는 문장들이었다. 나중에 아들은 그 문장을 혼자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엄마의 흐느낌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더 굳건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보였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문장이었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어머니는 한참동안 조용히 걷기만 하다가 말씀하셨다. 종종 낙심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네 일에 충실했지. 나는 너를 깊이 믿는다. 그러니 용기를 내렴. 너라면 국경을 너끈히 넘고 결국엔 저 넓은 세상에 닿을 수 있을거야."

 

   또 하나는 이성재가 전 부인 이태란에게 보여준 밑줄이다. 둘은 함께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CC. 세상은 변했고, 여자도 변했다. 이태란은 대치동에서 잘나가는 학원 원장이다. 이성재는 너무 속도를 내는 이태란을 항상 염려했었다. 이태란은 부를 얻었고, 더 큰 부를 쫓았다. 이성재는 그게 불만이었다. 이성재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희애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러다 자신과 비슷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랑은 예전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학원 비리로 감옥에 수감하게 된 이태란을 찾아가 어떤 문장을 보여준다. 그건 두 사람이 학생운동을 할 때 열심히 읽고 밑줄을 그었던 문장이다. "속도가 한계를 넘어서면 누군가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시간 손실을 강요하게 된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문장이다. 이태란은 이제 자신에게 필요없는 문장이라고 한다. 자신은 이미 속도의 쾌감을 맛 보아서 멈출 수가 없다고.

 

   좋은 장면들이 많았다. 위로가 필요한 김희애가 이성재에게 전화를 해 휘파람을 불어달라고 한 장면, 김희애가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아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 자신 때문에 어른스러워버린 아들이 미안하고 안타까워 꼭 안아주는 장면 등등.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김희애는 너무 예쁘고, 이성재처럼 너무 멋지다. 김희애의 시댁은 왜 결혼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저질이고, 두집 살림을 하는 남자는 참으로 당당하다. (사실 얄밉지만, 몰락하는 모든 사람은 불쌍하다. 그렇게 저질이었던 시댁도 몰락해 엉엉 우는 장면을 보니 좀 측은하더라.)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이 드라마에 딱 들어맞는다. 모든게 너무 드라마적이지만 그래도 사십대의 사랑이 있다는 걸 믿고 싶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는 걸.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드라마였다. 간만에 한국드라마로 행복했다. 이성재가 이태란에게 보여줬던 그 문장의 책 제목으로 이 드라마를 요약할 수 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금요일, 홍대의 한적한 커피집에서 이 책을 끝냈다. 저녁이었고 해가 지고 있었다. 일이 끝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한참을 가만히 밖을 내다봤다. 이 책은 좋아서, 정말 좋아서 빨리 읽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아껴 읽고 싶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 많아 자주 멈췄다. 책이 두꺼워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루키가 아내와 함께 3년 여동안 유럽에서 지낸 이야기이다. 그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지에 집을 빌려 그곳에서 단기, 혹은 장기적으로 '생활'했다. 장을 봐 와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싱싱한 연어를 사와 회로도 먹고, 초밥으로도 만들어 먹고 머리쪽은 국으로 끓여 먹는다는 이야기에서 침이 꿀꺽) 주변의 마음에 드는 레스토랑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며 (아주 자주 유럽의 맛있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 곳에서 여행을 한 게 아니라, 살았다. 매일 동네 주변을 뛰고, 집에서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고, 에세이를 쓰며 지냈다. 이 책은 그 3년 동안의 기록이다. (<상실의 시대>도 유럽에 있는 동안 쓴 소설이었다.) 하루키는 계속 투덜거린다. 그 곳의 못 말리는 날씨에 대해, 그 곳의 천하태평인 사람들에 대해, 그 곳의 이해할 수 없는 체계에 대해.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게 행복한 투덜거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 이 사람. 이 때 행복했구나, 그렇게 행복하게 이때를 추억하고 있구나, 하고.

 

   오늘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투스카니의 태양> DVD를 꺼냈다. 이 영화의 배경도 이탈리아. 영화의 주인공 또한 토스카나를 잠깐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300년도 더 된 오래된 저택을 '운명의 계시를 받은 것마냥' 무언가에 이끌려 구입하고 그 집을 수리해가며 살아간다. 내가 아끼는 영화다. 이 영화에 다이안 레인도 예쁘고, 이탈리아 토스카나도 예쁘다. 정말 이탈리아는 축복받은 땅이라는 걸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토요일을 보냈다.

 

 

    <먼 북소리>에서 밑줄 그은 구절들. 아주 아주 많다.

 

...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내가 외국으로 나가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에 그대로 있다가는 일상생활에 얽매여서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그런 생활은 일본에서는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p.15-16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먼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목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p.17

 

....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야, 하고 그들은 내게 말한다. 아무리 멀리 가도 소용없어, 붕붕붕붕. 어디로 가든 우리는 끝까지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흔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이만 먹어갈 거야. 아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테고, 그건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질 거야 ...

p.35

 

... 추운 밤에는 난로에 불을 지핀다. 난롯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은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기분 좋게 지나간다. 전화도 걸려오지 않고 마감 날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서 타닥타닥하고 불꽃이 튈 뿐이다. 기분 좋은 침묵이 사방에 가득하다. 포도주를 한 병 비우고 위스키를 한 잔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슬슬 잠이 온다. 시계를 보니 이제 10시다. 그대로 포근하게 잠 속으로 빠져든다. 뭔가를 열심히 했던 하루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 같기도 하다.

p.125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길을 달리는 일은 즐겁다. 주변 풍경을 보며 달리기에는 시속 10킬러미터 전후가 이상적인 속도이다. 자동차는 너무 빨라서 작은 것을 놓치기 쉽고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달릴 때의 기분도 각각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길모퉁이의 모습, 발자국 소리, 보도의 폭, 쓰레기 버리는 습관 등도 모두 다르다. 정말 재미있을 정도로 다르다. 나는 동네의 그런 정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도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자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지만.

p.207-208

 

... 그 조깅화는 아무도 잊어주는 사람이 없는 과거의 작은 실수처럼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할 수 없이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종이꾸러미를 받아 든다.

p.274

 

  누군가가 우리를 그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서른여덟 살의 작가와 그의 아내. 테이블 위의 맥주, 그저 그런 인생, 그리고 때로는 오후의 양지바른 곳을.

p.304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며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p.502

 

 

 

 

 

   오늘 <신사의 품격>에서 김정란이 다른 거는 필요없고, 자기가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 해 달라고 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고. 팔베개를 해주는 것 (이건 좀 힘들듯), 토닥토닥해주는 것, 아침에 잠든 얼굴을 보이는 것. 그러면서 그랬다. "당신 미워하다 한 계절이 다 갔네." 김하늘은 이제서야 자신이 장동건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장동건의 친구들 앞에서 장동건에게 한 행동은 정말 잘못된 거였지만, 어쩌면 나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만 같다. 김하늘의 행동은 분명 이기적이었지만, 그걸 장동건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 같다. 그런데 장동건은 차가워진 얼굴로 짝사랑의 종결을 선언했다. 그러자 김하늘은 불현듯 깨닫는다. 벚꽃비 내리는 길에서 키스를 하고 돌아와 반신욕을 하며 물방울이 방울방울졌던 그 로맨틱했던 욕실 안에서 김하늘은 엉엉 운다.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거였어. 이제 어떻게 해. 그 장면, 너무 슬퍼서 나도 같이 울 뻔 했다. 이상하다, 이 드라마. 뭔가 무지 사치스럽고 무지 과잉되어 있는데, 이런 감정들은 사치스럽지 않고 과잉되어 있지 않다. 백퍼센트 그대로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내게 좋은 드라마. 케이블에서 <연애의 목적> 해준다. 이거 보고 자야지. 오늘은 토요일 밤.

 

 

 

,

지난 여름, 영화

from 극장에가다 2011. 9. 20. 21:23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왔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더라. 예전에는 커피 자판기랑 캔음료 자판기만 있었는데, 이제 우유 자판기가 생겼다. 들여다보니 흰우유, 커피우유, 초코우유 다 있고, 플라스틱 커피 음료도 들어있다. 신기하다. 유통기한을 잘 맞출 수 있을까. 하긴 여긴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많으니 우유 많이들 사 먹을 것 같다. 4층에서 대출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서 시장 초입에 있는 만두집에서 고기랑 김치랑 반반 섞어 만두 1인분을 샀다. 다시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 집에 들어와 밥 먹고, 씻고, 창문 활짝 열어놓고 설겆이 하고 가스렌지 때도 간만에 문질러주고. 아, 정말 가을이다. 이렇게 추워지다니. 긴팔 추리닝을 꺼내 입으면서 이건 반칙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버리는 건. 이런 식의 이별은.

    이번 주는 가을. 지난 주는 여름. 늦여름에 내가 본 영화들 정리. 다시 다이어리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를 어디서 누구랑 썼는지 기록하고, 읽은 책 제목도 써 둔다. 영화를 본 날은 제목이랑 영화관이랑 몇 시에 봤는지, 누구랑 봤는지 적어둔다. 오늘 같은 날은, '간만에 도서관에 가다', '시장에서 벌써 군밤을 판다', 'UV 새노래가 나왔다' 정도.
 
  

    이제야 봤다. 역시 여러 사람에게 들은 바대로 인도 편에서는 조금 지루해서 나도 자 주었다. 책은 어떤가 궁금했고, 이탈리아 음식은 내가 더 맛있게 먹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는 생각, 줄리아 로버츠는 뭘 입어도 예쁘구나 하는 생각과, 하비에르 바르뎀은 역시 너무 느끼하게 생겼다는 결론을. 줄리아 로버츠는 뭘 먹길래 나이 들어도 이렇게 예쁘지. 나이 드니까 더 예뻐지는 것 같다! 흠.



    이건 박해일 때문에 본 영화. 박해일은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저 포스터는 꼭 다른 사람 같네. 영화는 그냥 볼 만 했다. 김무열도 멋지고, 박기웅도 연기 잘 하더라.



    <북촌방향>도 보았지. 여전한 감독님. 하지만 점점 여유로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밌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다이어리에 이런 문구들을 오려 붙였다. '홍상수의 겨울영화', '그해 겨울이 품었던 사람냄새', '키스를 나눈 밤이 지나고 작별인사와 함께 북촌을 떠나려는 성준. 그날 아침 북촌에는 눈이 내리고 그 길 위에서 과거에 알았던 사람,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 낯선 사람들과 계속 마주친다.' 이건 씨네21 <북촌방향> 프리뷰에 있었던 글귀들이다. 이 문구들은 오려서 북촌방향 포스터 옆에 붙여뒀다. 그 날 감독님이 내게 당부하신 세 가지. 세상 살아가면서 이것 세 개만은 꼭 지키라 했던 그것. 첫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라. 둘째, 술 마실 때 취하지 마라. 셋째, 일기를 써라.

*

    그리고 seyo님 덕분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챙겨봤다. 디지털 TV VOD 목록 뒤져보니 있었다. 더군다나 무료. 8부작인데 길쭉길쭉한 모델같은 아이들이 나오고, 김상경도 나오고. 대본도 훌륭하다. 수재들만 다니는 강원도 어딘가의 고등학교. 산 속 깊숙이 있는 학교. 일곱 명의 아이들, 아니 일곱 명이 8일 간의 방학을 앞두고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받은 일곱 명과 편지를 보낸 한 명만이 모두 떠나버린 학교에 남는다. 누가 편지를 보낸걸까.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고립된 학교. 그리고 누군가가 학교로 찾아온다. 시 같은 편지 문구들과 산 속 깊이 있는 학교의 분위기와 내리는 눈, 쌓인 눈. 으스스하고 쓸쓸한 드라마 초반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아, 그리고 흐른의 '그렇습니까'라는 노래도.

계속해서 생각해 봤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너는 나를 비참하게 물들였고,
너는 나를 구석괴물로 만들었고,
너는 내가 아는 것을 침묵했어.
너는 내 가망 없는 희망을 비웃었고,
너는 내가 가진 단 하나를 빼앗아 목에 걸었고,
너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가 놓아버렸고,
그리고 너는 눈 앞에 나를 지워버렸고,
마지막으로 너는 나를 가로챘어.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8일간의 휴일이 지나고
느티나무 언덕길을 올라와
시계탑 아래에 서면
죽어있는 누군가가 보일거야.
아기 예수가 태어난 밤에
나는 너를 저주한다.

,

그들이 사는 세상

from 티비를보다 2009. 2. 8. 02:11

   우리는 짧은 지름길을 걷고 있었다. B가 말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렇게 헤어질 수 있느냐고.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한다 말했던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갑자기 어떠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서는 바이바이, 해버렸다고. 우리는 그래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그렇지만, 송혜교는 어떻겠느냐고. 얼마나 힘들겠냐고. 얼마나 답답하겠느냐고. 이건 B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세사>의 송혜교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B는 말했다. 왜 현빈이 송혜교랑 헤어진지 알겠어요? 왜 내가 그 자식이랑 헤어지게 된 건지 알겠어요?
 
   나는 그 때 술 마시는 일에, 사람 만나는 일에 바빴던 월요일과 화요일을 보내느라 애청하던 <그세사>를 여러 회 놓쳤다. 나는 B에게 내가 안 본 사이 그렇게 사랑했던 둘이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 쉽게 헤어져버렸냐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놓쳤던 회들을 챙겨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술 마시는 약속이 없고, 사람 만나는 약속이 없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놓쳤던 회들은 그냥 두고, 당일 방영하는 회를 닥본사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었는지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헤어진 후의 두 사람의 마음만 알 뿐. 상황만 알 뿐. 현민이 그렇게 귀엽고 예뻐했던, 그야말로 호주머니 안에 넣어두고 다니고 싶어했던 송혜교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했는지 몰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봤다. 놓쳤던 <그세사>. 둘이 어떻게 이별했는지. 현빈이 송혜교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했는지. 그 날은 아주 슬펐다. 그래서 엉엉 울었다. 동생과 함께 보면서 둘이 나란히 앉아 엉엉 울었다. 그리고 놓쳤던 회들을 거슬러 보면서, 나는 두 사람이 왜 헤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드라마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였다. 드라마니까. 내가 두 사람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까. 현실과는 다르니까. 이별의 순간은 아주 미묘하게, 그리고 천천히 오고 있었다. <그세사>의 현빈과 송혜교는 보통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아니었으니까. 둘 다 예쁜 집에서 살고 있는 드라마 속 인물이긴 했지만. (심지어 조금 궁핍한 설정으로 나왔던 옥탑방 현빈의 집도 예뻤다고.) 내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져도 아닌 척 마음 좋은 사람인양, 외롭고 슬퍼도 나는 안 울어,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으니까. 상대방에 비해 모자란 내 상황이 화나고, 짜증나고, 그렇게 표출할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캐릭터였으니까. 바로 나였으니까. 너이기도 했고.

    토요일. 오늘은 맥주를 잔뜩 사 놓고 <그세사> 마지막 회를 봤다. 마지막 회 역시 내가 놓쳤던 시간. 해피엔딩. 15회도 다시 봤다. 현빈이 송혜교 집에 몇 달만에 나타나 계속해서 입을 맞추는 장면. 아, 난 이 장면에서 눈물이 난다. 심장이 오그라든다. 이건 이별을 경험한, 하지만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꿈꾸는 장면이니까. 나도 한때 꿈꾸었던 장면이었으니까. B는 그랬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현빈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B 역시 꿈꿨던 장면이었을 거다. 응. 그랬을 거다. 그러니까 해피엔딩. 이별은 다시 사랑으로 이어졌다. 이건 드라마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던 B가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 이렇게 말했다. 난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애요. 이제는. 그 아이가 왜 날 떠났는지. 그건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해된 일이라고 B는 덧붙였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야만 이해되는 사랑의 기묘한 감정들. 누군가를 다시 만나야만 생각나는 어떤 순간들. 그래서 아프기도 하고, 내가 성장하기도 하는. 연애. 아, 연애. <그세사>를 보는 내내 왜 그렇게 시청률이 안 나오는지 속상했었다. 이렇게 괜찮은 드라마를 안 보고, 다들 이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에 귀기울이는지.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송혜교를 포함한 여자 캐릭터들이 모여서 수다떠는 장면들. 그렇게 서로 미워하고 저주를 퍼부었던 이들이 친구가 되어가는 장면들. 새초롬했던 송혜교가 들뜬 표정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야기를 누구보다 재미나게 들어주던 작가와 배우, 조연출. 이제 친구가 되어버린 사람들. 난 그런 순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손발이 오그라들면서 설렌다. 사랑이야기보다 더. 자, 건배. 우리도 그들처럼, 건배.



,
아직도 이따위 일에 가슴이 먹먹해지다니. 서둘러 익스플로어 창을 닫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달콤한 나의 도시'를 펼쳐놓고 통통 튀어다니는 문장들을 때려잡아 머릿 속에 꾸역꾸역 집어 넣었다. 결국 은수는 김영수를 떠나보냈다. 서른 둘, 다시 혼자가 된 은수는 내리는 비를 맛 보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맛이라고 했다. 때마침 책을 다 읽은 이 곳의 서울에도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 밖으로 손을 뻗어 비를 맛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맛.


이건 2006년 8월의 나의 흔적. 2006년 8월의 나의 말이다.
2006년.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 아이는 또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나는 여전히 연애를 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비가 내릴 뿐.


2006년. 이런 문장은 오려두었다.                                                                 


사랑이 저무는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누군가와 이별할 순간이 도래하면 엉뚱하게도 오래전 운동회가 생각난다.  줄다리기 시합. 청군과 백군이 동아줄 하나를 마주 잡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때 불현듯 한쪽에서 동아줄을 홱 놔버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든 것이 덧 없다는 듯.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될까. 게임의 승자가 되겠지만 그걸 진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임이 끝나버렸는데 누가 승리자이고 패배자인지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08년. 달콤한 나의 도시가 끝났다. 나는 마치 연애하듯 이 드라마를 보았다. 처음에는 무척 아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방영시간을 기다렸다. 남유를 응원하고 그녀가 꽤 멋지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친구는 드라마를 보다가 너무 좋아서 뛰쳐나가 남유와 오은수가 마시는 맥주잔과 비슷한 잔을 사들고 들어와 혼자 꿀꺽대며 마셨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러다 나는 오은수가 조금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더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웠다. 한 순간에 이 드라마를 향한 내 마음은 심드렁해져버렸다. 금요일 밤에 약속을 잡았다. 기다리지 않았다. 가끔 지나가다 드문드문 봤다. 나의 연애는 항상 그렇다. 있을 때 잘할 것을. 늘 후회투성인 것을. 가고나면 그리운 것을.


마지막 장면의 대사. 참 좋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은수예요. 반가워요. 윤태경입니다.


영수와 헤어진 은수는 태경과 봄날같은 연애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쨍쩅한 여름 햇살만이 그득했다. 은수가 스쿠터를 타고 달릴 때 볼을 스치는 바람처럼 기분 좋은 연애가 펼쳐질 게 틀림없는 해피엔딩이었다. 이제 변덕스런 마음으로 안타깝게 놓쳤던 이야기들을 다시 봐야겠다. 이건 2008년 8월의 나의 흔적, 나의 말이다.  


,


   나는 이 드라마를 아주 열심히 봤다. 주말 밤, 집에 있을 경우 꼬박꼬박 챙겨 봤다. 거의 대부분의 주말 밤에 집에 있었기때문에 거의 다 본 셈이다. 그건 전적으로 드라마의 초반, 오타루에서의 화면들 때문이었다. 언젠가 혼자, 혹은 누군가와 단둘이 홋카이도를 여행하고 싶은 소망이 내게 있다. 그건 영화 <러브레터>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을 더 움직이게 만든 건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읽어서 이 소설의 배경이 정확하게 어디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눈이 아주 많이 왔고, 이미 눈이 아주 많이 쌓였던 곳. 소설 속 소설가는 어느날 그 곳으로 떠나고, 그 곳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거품 많은 일본 맥주를 마셨다. 아니,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내 기억이 완전히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 그 하얗고 깊은 눈밭을 헤매기도 했었다. <눈의 여행자>를 겨울에 읽은 게 확실한데, 그건 이 책 앞에 보라색 하이테크 펜으로 적어놓은 나의 메모때문이다. "04년2월14일토요일밤, 유키로 가득한 책 한 권을 끝내고 잠바를 주섬주섬 챙겨입고 집 앞 수퍼에 들린다. 카스 맥주 2캔, 김, 소세지, 초콜릿, 아폴로, 꿀맛 쫀드기. 마셔야지."

   그러니까 나는 이 드라마를 아주 열심히 봤다. 2004년 겨울밤에 읽었던 윤대녕의 소설처럼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해 줄 풍경들이 1,2화 내내 펼쳐졌으니까. 이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에 나는 내가 무더운 여름밤 한가운데에서 눈을 기다리고, 뜨거운 온천을 꿈꾸고, 거품많은 맥주 한 잔이 간절하기를 바랬다. 뭐.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뜨리는 이유는 결국 그게 아니였으니까. 어쨌든 잔뜩 기대하고 보았고, 결말은 1화 제일 첫부분에 나온 상태였고, (이 드라마는 그야말로 '미스터리 멜로'였으니깐) 신비로운 오타루의 겨울에서 시작되었던 드라마는 점점 정신병자들의 향연(동생님의 표현)으로 물들어갔다.

   동생과 나는 이 드라마를 둘이서 나란히 앉아서 챙겨봤는데, 처음에 우리의 감탄사는 이를테면 너무 좋다, 아, 좋아라, 식이었다. 그러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동생이 먼저 말했다. 이거 정신병자들 드라마야. 나는 콕 째려보며 나무랬다. 너는 인간이 원래 저렇게 갈등하고 끊임없이 변하게 생겨먹을 걸 아직도 모르겠냐, 쯧쯧, 역시 어리다. 그러다 어느 날, 드라마가 아주 심각해져 있는 순간이었는데 (하긴 이 드라마에 심각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둘 다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는 심지어 이런 대화까지 나눴다. 역시 정신병자들이야. 일단 제일 심각한 이동욱부터 병원에 집어넣어야 되겠다. 또 저런다. 코미디 시청하듯 그렇게 까르르 웃으면서 마지막회를 시청했다. (그래도 마지막씬은 좋더라)

   내가 이 드라마에 가장 빠져있었던 건 그 씬이었다. 오연수와 이동욱이 미술관에서 만나는 장면. 우아하고 기품있는 오연수 아줌마가 서투르고 무모한 이동욱을 지나쳐 걸어가던 장면. 어리고 상처투성이인 이동욱이 오연수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다가 그녀가 자신을 모른척 스쳐지나가자 온 몸에 새겨져 있던 상처들이 일제히 따끔거리던 순간. 컷트머리 S라인 오연수는 이동욱의 해맑은 손을 잡아주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아줌마의 심정으로 그를 지나쳐가며 멈춰설까, 그냥 지나칠까를 1분동안 백만번 고민했던 순간. 결국 오연수가 뒤돌아보고, 이동욱이 없어졌던 순간. 그렇게 엇갈리던 심장이 두 번은 따끔거리던 순간. 

   내가 이 드라마에 가장 실망했던건 오연수가 가정을 버리면서부터였다. 정보석을 버린 건 이해하더라도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이들까지도 버리겠다고 말하던 순간이었다. 이유는 사랑.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정보석이 마지막에 그런 말도 했다. 어떨 땐 오연수가 부럽다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 아, 믿었던 정보석까지 이런 말을 한 거다. 이 드라마는 마지막에 네 주인공이 동시에 발음했던 것과 같이 오직 '사랑'이야기였다. 사랑해. 아이러뷰, 미투. 사랑이라. 사랑? 이 끊임없는 동어반복. 이동욱의 과거에 대한 회상씬은 또 얼마나 반복되었던가. 타 방송국에서 훈남으로 나오던 이동욱의 부잣집 친구분은 미친듯이 웃어제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꼬.    

   뭐 아무튼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궁금해서 매주 닥본사했고, 처음에는 열광했으나 나중에는 참으로 실망했다. 오연수가 무릎을 꺽고 사랑,을 외치던 순간부터. 이동욱이 박시연을 절벽 끝으로 몰고가 자신의 예전 과오를 똑같이 반복하면서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고 그녀를 살려줌으로써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순간에 더더욱. 이동욱과 부잣집 친구분의 절벽씬과 자동차 사고씬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간에. 먹고 살기 넉넉해 (심지어 이혼해 돈 많이 벌어야만 했던 오연수까지) 먹고 사는 생존을 위한 생활따위는 상관없이 나를 봐달라고, 나를 사랑해달라고, 내게 돌아와달라고 울부짖었던 주인공들때문에. 사실 드라마는 현실이 아닌데,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놓으면 누가 드라마를 보겠노라고 생각하는 주의지만, 결국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들을 발견하면 나는 이 드라마는 너무 현실적이지 않다면서 오목조목 그런 구석들을 찾아내고 있다.

   아무튼. 안녕, 달콤한 인생. 그래도 오연수 아줌마의 우아한 몸짓은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갑자기 급 예뻐진 박시연의 외모도 내 눈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몰매맞다가 결국 가장 이해되는 캐릭터로 급 부상한 정보석 아저씨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었고. 이동욱은 어제보니깐 드라마 초반에 비해 살이 많이 빠졌더만. 그래서 다크서클은 더욱더 진해져주시고. 아무튼. 안녕이다. 달콤한 인생. 징글징글한 안녕이다.

 
 

,

   고백하건데 나는 10화의 어떤 부분을 술에 취해 열 번 이상 되돌려봤다. 한 때는 꿈과 희망만 가득했던 만화가와 그의 부인이 있었다. 만화가는 성공했고 돈도 많아졌지만 점쟁이의 말을 맹신해 자신은 곧 죽을 것이고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걱정한다. 그의 부인은 꿈과 희망과 사랑이 가득했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정전이 찾아온 순간, 도시는 어둠에 휩싸인다. 성공한 만화가도 과거가 그리운 부인도. '우린 아직 어두운 길을 둘이서 걷고 있어'라고 만화가가 말하는 순간,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길 위의 사람 앞에 마법처럼 스르르 불을 밝힌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 성공한 만화가는 탄성을 낮게 내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비친 네모난 창문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꿈과 희망과 사랑과 열정이 가득했던 과거를 생각한다. 네모난 건 뭐든지 좋았다는. 네모난 것 안에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느낌에 좋아하기 시작했다던 수족관, 만화, 그리고 네모난 창문 안에서 살아가는 형광등 아래의 우리들. 만화가는 탄식한다. 모두가 네모란 틀 안에 있구나.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던 거였구나. 죽고 다시 올 다음 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네모난 창문 아래 살아가고 있는 나를 너를,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거구나. 11화까지 다 보고 난 지금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이 드라마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건 10화였다고.

    <수박>을 보고 이름만 아는 이 작가들과 사랑에 빠졌다. 내 소개로 <수박>을 뒤늦게 보고 나와 같이 <수박>을 사랑하게 된 언니는 알아보니 작가가 두 명인데 알려진 게 거의 없다고 했다. 카레를 먹으러 가서는 <섹시 보이스 앤 로보>를 꼭 보라고 했다. 나는 지식인 어딘가에서 추천을 받았는데 제목이 유치해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언니는 제목따위는 개념치말고 1화를 끝까지 보라고, 그러면 니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언니는 히레까스를 나는 돈까스 카레를 먹고 있었다. 그렇게 1화를 끝까지 봤다. 혹시나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섹시 보이스 앤 로보>라는 제목이 왜 이렇게 유치하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1화를 끝까지 보시길. 이것이면 이 드라마의 최고의 추천 멘트라고 나는 확신한다.  

    1화에 나카무라 시도가 나온다. 그의 배역이름은 '작심삼일'. 3일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가엾은 병에 걸렸다. 그는 두 사람을 만난다. 섹시 보이스를 가진 니코. 목소리에 관한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아주 멀리 있는 목소리까지도 알아 들을 수 있다. 누가 말하는 건지, 어떤 심정으로 그러는 건지. 그리고 한번 들은 목소리를 정확하게 성대 모사 해내는 14살의 어른같은 귀여운 여자아이. 그리고 또 한명, 여자와 로봇을 사랑하는 오타쿠 로보. 맥스 로보를 항상 외치며 귀여운 몸 동작을 선사하는 아이같은 남자어른. 작심삼일은 1화에서 '잊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노트에 '남의 집에서 먹는 카레, 이유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써 넣는다. 이것이 이 드라마 전체가 말하는 바다. 살아있다는 느낌. 우리는 왜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살아있다는 게 왜 행복한 것인가. 이걸 생각해보라는 거다. 느껴보라는 거다. <수박>에 이어서 이런 대단한 메세지를 작은 이야기들에 실어서 우리들에게 띄워보내는 거다. 이 사랑스런 작가들이. 


   옴니버스 드라마다. 11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매번 니코와 로보가 스파이처럼 출동하고 니코와 로보의 가족과 이들에게 스파이 일을 의뢰하는 골동품 가게에 <수박>의 출연진들이 숨어있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수박>의 출연진이 왕창 등장한다. 결국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거다. <섹시 보이스 앤 로보>에서는 뉴스에 오를 끔찍하고 아리송한 이야기들이 매번 등장하지만 결국 그것들을 파헤쳐보면 우리들이라는, 뉴스 보도로는 냉혈한 무엇이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사연이 있는 우리들이라는, 그러니까 함께 귀를 기울이며 현재를 살아나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어려운 이야기라는 거다. 때론 기막히고, 때론 유치하고, 때론 기상천외한 작은 이야기들이 뭉클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거다.

   마트에 갔는데 일본 하우스 바몬드 카레가 있었다. 나는 그걸 <수박>을 생각하면서 <섹시 보이스 앤 로보>를 생각하면서 샀다. 이 카레를 요리해 먹으면 그들처럼 작은 것에 행복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감자와 양파 당근을 썰었다. 집에 고기가 없다. 10화에서 니코의 가족들은 질겅질겅 딱딱한 카레의 고기를 씹어댔는데. 할 수 없다. 야채로만 된 카레를 만들었다. 물을 많이 넣은 탓에 오래 졸인 후에 접시에 예쁘게 담아냈다. 간만에 예쁘게 세팅도 했다. 먹었다. 나도 니코처럼 조금만 웃어도 싱그러울 수 있을까. 나도 로보처럼 매사 긍정적이고 밝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처음 만든 일본 카레는 조금 느끼했다. 치즈맛이 나는 것 같고, 버터맛이 나는 것 같았지만 깻잎 반찬을 얹어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은 것' 수첩에 무엇을 적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이렇게 적을 거다. 잊고 싶지 않은 것 : 조금은 느끼한 일본 카레를 먹으며 니코와 로보를 생각하는 일. 세상은 의외로 간단히 따뜻하고 살만하다는 걸 알려준 유치한 제목을 지닌 <섹시 보이스 앤 로보>.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섹시 보이스 앤 로보>의 10화 이야기. 오래된 벽화에 커다란 벽보가 붙여져 있다. 벽보가 붙여진 지도 오래다. 니코가 그걸 떼어낸다. 벽화의 색은 오랜 세월에 처음의 색을 잃었다. 떼어낸 벽보 뒤 벽화의 색은 처음 그대로다. 니코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원래의 예쁜 색을 찾아내고 싶은 사람. 찾아내서 세상이 아직 제법 살만하다고 믿음을 주는 사람. 아, 너무 멋지지 않은가. 바래지 않은 세상의 색을 찾아낼 사람. 그래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사람. 모두가 바라는 사람. 나는 울어버렸다. 이렇게 가슴 벅찬 드라마라니.

   11편의 에피소드. 항상 드라마의 마지막에 반복되는 게 있다. 섹시 보이스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한 템포 쉬었다가 가장 중요한 걸 말해준다. 마지막 11화의 끝은 이렇다. '난 평생 내 편에 서려고 한다. 천주교 신부, 연근, 토마토는 맥스, 맥스 우정 파워! 왜냐하면 날 구할 수 있는 건 (한 템포 쉬고) 우주에서 나 자신뿐이니까' 천주교 신부, 연근, 토마토는 맥스, 맥스 우정 파워는 뭐냐고? 헤헤. 궁금하시다면 직접 보시라. 후회하지 않으리. 힌트를 주자면 이건 용기다. 행복해질 수 있는 용기.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용서할 수 있는 용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영애씨가 돌아왔다. 금요일 11시. 3시즌 첫 회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영애씨가 돌아와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막돼먹은 채로 말이다.

   내가 영애씨와 사랑에 빠진 순간은 바로 그 때. 명절 때 여전히 뚱뚱한 채로, 여전히 노처녀인 채로 남아있다고 나무라는 친척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온 영애씨가 놀이터에서 꺼억꺼억 울던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 반해버렸다. 어쩜 이렇게 리얼한지. 어쩌면 내 이야기같은 에피소드들인지. 나도 영애씨를 따라 찔끔거리면서 울어버렸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을 때 나도 두근거렸고, 그녀가 서러워하며 술을 마셔댔을 때 나도 함께 마셨다. 아, 나의 영애씨. 영애씨와 더불어 돌아온 몸만 청결한 도라이 지원씨, 양다리에 빠진 그녀를 사랑하는 윤과장, 기러기 아빠 사장님, 귀여운 원준씨, 자유영혼 혁규씨, 영애씨의 귀여운 동생 영채, 귀엽고 듬직한 엄마, 아빠까지 모두모두 돌아와서 정말정말 반가워요.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영애씨의 매력은 리얼리티다. 실제로 3시즌 제작발표회에서 영애씨 김현숙은 <막돼먹은 영애씨>는 일상이라고, 주조연의 차이도 없고 배우들 모두가 사람냄새나는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각오를 밝혔다고 한다. 실제로 3시즌을 통해 배우 김현숙 자신도 운전면허를 따게 되었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막돼먹은 영애씨> 3시즌을 통해 보여줄 것이라고.

   새해 들어서 금주하고 재태크에 매진하겠다는 이름만 이영애와 같은 영애씨의 결심은 모두의 예상대로 작심삼일이 되었다. 영애씨는 영채의 신혼방에 술이 잔뜩 취한 채 동생 부부네 침대 위에서 잠을 잔 지 벌써 두번째고, 새로 들어온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애교작렬 셀카쟁이 신입사원의 소매에 볼펜을 그은 죄로 백만원이 넘는 돈을 물어주기로 했다. 냉장고 깊숙이 숨겨져 있던 딸기를 찾아먹고는 매부에게 핀잔만 당하고, 독립하겠다고 엄마에게 결혼비용을 미리 땡겨달라고 말하고는 바로 욕 먹어 먹은 영애씨. 여전히 31년째 삼재인 그녀가 나는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하다. 통통한 다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옷을 갈아입고, 두툼한 뱃살을 그대로 드러내보내주는 영애씨. 나는 언젠가 그녀가 행복해질 걸 안다. 물론 지금도 그녀는 행복하지만. 곧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건강한 사람인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3시즌에서 영애씨는 독립준비를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돈도 없고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지만 3시즌 언제쯤 정말 영애씨는 독립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본 반짝반짝 빛나는 복층의 E-뉴스 작가의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는 그녀가 언젠가 꿈꿔온 독립을 한번쯤 이루길 바란다. 그 생활들도 지금의 생활들과 마찬가지로 힘들고 험난하더라도 영애씨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니깐 오뚜기처럼 벌떡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또 그것을 보고 우리들도 그럴 것이고. '우리는 비가 그쳤다고 해서 우산을 버릴 수 없고, 내일을 살기 위해 어제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한 영애씨를 잊지 않길 잘했다. 정말. 영애씨,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