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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행 -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서재를쌓다 2008. 8. 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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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
    함정임 지음/강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소진의 기억>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김소진이라는 작가를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제는 이 땅에 없는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있다기에 찾아본 책이었다. <소진의 기억>을 읽으며 정작 그의 글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주제에, 30분 전에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주제에, 나는 몇 번인가 울었다. 제일 크게 울어버린 건 아마도 성석제의 글을 읽으면서였다. 나는 성석제가 그려주는 김소진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깡마르고 선하게 웃는 츄리닝을 입은 소설가. 그가 내어오는 찻잔을 생각했다. 찻잔을 담은 쟁반을 든 소설가의 정직한 손을 생각해봤다.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 그를 기억하는 문인들의 글과 비평들로 이루어진 <소진의 기억>을 나는 끝까지 읽지를 못했다. 김중혁의 소설이 끝나고 '2000년대 비평이 김소진에게'라는 다섯번째 챕터 앞에서 책을 덮었다. 이 다음 글들은 김소진의 소설을 읽은 후에 읽으리라. 그런 다음에 내가 읽은 글은 김소진의 글이 아니라 그의 아내, 함정임의 글이었다. 이 땅을 떠난 사람이 이 땅에 머물렀을 적에 썼던 글보다 이 땅에 이제 없는 사람을 그리며 이 땅에 홀로 남겨진 뒤에 쓴 자기 치유적인 글은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보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때 나는 그녀의 슬픔을 빌려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살았고, 199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동행>은 93년 그와 결혼한 소설가 함정임의 소설들을 모은 책이다. 93년과 98년 사이에 그녀가 쓴 소설들이다. '함정임 소설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이건 분명 수기에 가까운 글들이야, 나는 생각했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표지의 사진을 여러 번 들여다봤다. 93년 마라도로 가는 신혼여행 길, 배 위에서 찍은 김소진과 함정임의 사진. 그야말로 새 신랑과 새 신부. 그들 앞에 펼쳐질 새로운 삶. 이 사진에서 김소진의 표정은 얼마나 푸근하고 산뜻한지. 그는 행복을 입꼬리에 가득 머금고 있어서 이 사진만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첫 번째 소설은 표제작인 '동행'이다. 나는 '동행'을 읽으며 그야말로 엉엉 울었다. 취기가 살짝 오른 후이기도 했는데 눈물이 자꾸 고여 글자가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동행'에서 소설가 소진은 병을 얻는다. 죽음을 선고받는다. 침대 위에 누워 사경을 헤매며 두 사람의 처음을 생각한다. 1992년 영상자료원.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그때 우리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막 외출하려던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날 만나고 싶으면 예술의 전당에 나가려던 참이니 영상자료원으로 오라고 그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또 그리고 그날 밤 그가 느닷없이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우리는 지금쯤......  (p.14)" 그리고 어느 날 저녁, 그는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 되었고, 그녀는 이 땅에 여전히 살아갈 사람이 되었다. "벽이 갈라지듯 세상이 쪼개지듯 쩡!하는 소리(p.38)"만 들리던 그날 밤.

       남겨진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게 되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구석구석에 있다. 남편과 뱃 속의 아이를 함께 보낸 여자, 연달아 두 명의 자식을 병으로 잃은 어머니, 남편을 잃고 혼자된 딸 아이가 안타까운 어머니, 언니, 그리고 또 다르게 사랑하는 이를 사고로 잃은 미경씨. 이 얇은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끝까지 엉엉 울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냈지만 마음을 다 잡으며 살아나가는 소설가처럼 내 마음도 그러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녀가, 그와 그녀의 아들이, 그의 어머니가 이제는 씩씩하게 그를 추억하며 꽤 잘 살아나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여전히 뻐근했지만 눈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병신 손가락'이란 소설을 읽으면 그와 그녀가 살았던 신혼집이 나온다. 튼튼한 벽돌로 둘러쌓인 2층집이었는데, 주인집인 1층에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노처녀 언니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살았다. 그 따듯한 2층의 신혼집에서는 드뷔시의 음악이 흘러 퍼지고, 그는 그녀에게 불구자,라고 놀리며 발톱을 깍고, 그녀는 새 에이프런을 두르고 요리를 한다. 집 뒤로 산이 있고, 마당에는 나무가 있어 새들이 쉴새없이 지저귀는 그늘 같은 신혼집. 늦잠을 자고,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듣고, 야근 때문에 늦는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는 평온한 곳. 나는 소설집을 덮고 난 뒤에도 며칠을 그 집을 생각했다. 그야말로 따스한 신혼집의 풍경을 말이다.

        아마도 나는 자주 이 책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주 들춰볼 것이라고. 어느 날은 엉엉 울고, 어느 날은 울지 않을 거라고.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남자와 전에 사귀었던 여자에게 소설가가 하는 말이다. "그냥 그렇게 거기서 견디라고. 누구도 오래 행복할 수는 없고 아주 잠시 행복한 순간만이 스쳐지나갈 뿐이라고.(p.137)" 나는 이 문장을 자주 들춰 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행복해하고, 오래 견딜 것이다. 이 땅에 김소진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지금도 이 땅을 살아가는 소설가, 함정임이 있다. <동행>의 소설들은 그가 떠난 후, 그와 함께 열심히 살아나가기 위해 씌여진 글들이다. 아, 그리고 위의 저 문장이 씌여진 짧은 소설의 제목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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