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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월의 책, 밑줄긋기
    서재를쌓다 2011. 9. 27. 21:42


        창가에 있는 빨간 소파에 걸터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목이 말라 곁에 두고 마시는 물통을 흘끗 바라본다. 말간 물이 반쯤 차 있는데 어쩐지 물이 해갈해줄 갈증은 아니다. 주머니에 1파운드짜리 동전 서너 개를 대충 챙겨 넣고,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옆구리에 낀 채 집 밖으로 나선다.
        슬리퍼를 신고 쉬엄쉬엄 걸어가도 3분 거리에 펍이 있다. 수없이 열었던 갈색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 수없이 시켰던 맥주를 시킨다. 정성스레 따라 준 맥주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종종걸음으로 구석 자리로 가 앉는다.
        손가락을 찔러 넣었던 페이지를 그대로 열어 아까 읽던 구절을 찾는다. 더듬더듬 단어를 헤매며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머릿속엔 문장이, 입안엔 맥주가 쏟아져 들어온다. 책과 맥주에 빠져든다. 술이 술술 넘어갈수록 책장도 흐르르 넘어간다. 취기가 오르니 재미난 구절은 더 재미지고 애달픈 구절은 더 짠하다.
    - p.133


        이런 책을 읽었다. 요즘은 먼 나라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런던의 이야기였고, 걷기 좋은 유럽의 길을 소개한 김남희의 책도 내게 왔다. 알래스카에서 살다가, 그 곳의 자연을 무척 사랑하다가, 불곰의 습격에 사망한 호시노 미치오의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 인터넷에서 그가 찍은 마지막 사진을 봤다. 불곰이 어느 텐트 안을 위협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 사진. 그는 그 시간, 그 텐트 안에 있었다. 결국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그는 도망가지 않고 이 생의 마지막, 그 사진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가 사랑한 알래스카가 보고 싶었다. 역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책이 잘 읽힌다. 어느 리뷰를 읽고 독일 소설 한 권도 구입했다. 간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랑 이야기다.

        비가 온다지. 오늘 중고서점에 올려놓은 책이 네 권 팔렸다. 모두 읽은 책이고,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내놓은 것인데 박스에 담으니 왠지 아쉽다. 그래서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 허브차도 두개 함께 넣는다. 이렇게 보내고 또 보고 싶은 책 맞이해야지. 오늘도 찜해둔 책 하나 있다. 이번주에는 비가 온단다. 그러면 또 추워진단다. 그렇단다.

        '책꽂이'라는 어플이 있다. 동생이 추천해준 건데 꽤 괜찮다.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목록을 만들 수 있고, 읽기 시작한 날과 다 읽은 날도 표시해둘 수 있다. 나만의 별점도 매길 수 있고, 메모도 남길 수 있다. 나는 주로 좋았던 부분들을 남기는데,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상을 남겨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드는 기능은 내가 남긴 메모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누군가에게 문자로 보낼 수 있고, 카카오톡으로 보낼 수도 있고, 트위터로도 남길 수 있는 것. 그 사람에게 내 메모랑 그 책 제목이랑 몇 페이지인지가 함께 간다.


         아, 나 차마고도에 관한 책도 읽었다. 그러고보니 이번 달에 책 많이 읽었구나.

    차마고도
    KBS 인사이트아시아 차마고도 제작팀 엮음/예담

        이 책은 최불암의 나레이션으로 방송되었던 다큐라고 하는데, 나는 못봤다. 뒤늦게 이 책을 읽었는데, 아침 출근길에 자주 훌쩍였다. 차와 말이 다녔던 옛길. 이 책을 읽으면서 세 개의 메모를 남겼다. 

    1.
    마치 지상에 눕혀놓은 거대한 거울처럼 고원의 한가운데 누워있는 소금호수, 짜부예차카. 이 기적 같은 일 역시 지구의 생명활동과 연관이 있다. 히말라야와 티베트 땅은 오래전에 바다였다. 약 4000만 년 전에 인도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 가늠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바다 밑의 땅이 솟아올랐다. 실제로 대륙의 융기를 목격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p. 165

    2.
    파드마삼바바에게 비나이다. 모든 중생을 지켜주소서.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중생들이 가는 길이 평안하도록 돌봐주소서
    중생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해주소서
    중생들이 재난에서 멀어지도록 해주시고
    그들이 늘 평안하도록 돌봐주소서

    바람과 검은 하늘과 차가운 별빛뿐인 해발 4000미터의 고원. 모닥불 가에서 모든 중생의 평안을 비는 드룩파들의 기원은 감동적이다.
    -p. 177

    3.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몇 자루인가?"
    중요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거래로 지난 여정에 대한 보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올해 후리코트 농사는 어떤가?"
    "그저 그렇다."
    "옥수수 농사가 풍년이라고 소문이 났다."
    팽팽한 신경전 겸 탐색전이다.
    "풍년이라지만 큰 풍년은 아니다."
    "봐라, 소금은 최상급이다. 차도 아주 좋은 차다. 비를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얼마를 원하는가?"
    돌포파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다. 적어도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세 자루는 받아야 한다. 네 자루를 받을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차 한 덩이에 옥수수 두 자루를 받아야 한다. 몇 자루를 부를 것인가? 고심하던 돌포파가 마침내 가격을 제시한다.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세 자루, 차는 두 자루다."
    후리코트 사람이 돌포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돌포파가 긴장한다.
    "록보! 우리는 록보가 아닌가?"
    '록보'는 티베트말로 '친구' 라는 뜻이다. 돌포파의 록보라는 말에 후리코트 사람의 얼굴이 환해진다.
    "좋다, 록보. 올해는 옥수수가 아주 풍년이다. 소금 한 자루에 옥수수 다섯 자루, 차는 세 자루를 주겠다.
    - p. 226


    그리고 박솔, 저 잔에 담긴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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