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쌓다'에 해당되는 글 341건

  1. 2023.04.16
  2. 돌발진 2022.06.23
  3.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2 2021.12.02
  4.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 2021.11.18
  5. 밝은 밤 2 2021.10.26
  6. 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 2021.10.03
  7. 베개를 베다 2021.09.07
  8. 박완서 2 2021.08.29
  9. 안녕한,가 2021.08.24
  10. 중국인 할머니 1 2021.07.08

from 서재를쌓다 2023. 4. 16. 22:38

 
   부모님은 입버릇처럼 우리에게 돈을 물려주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이미 자신들의 풍요로운 기억을 물려주었다고 믿는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주렁주렁 송이 지어 매달린 등나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경탄의 순간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알게 되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우리가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고 무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두 다리를 주었다. 그것이면 스스로 여행하기 위한 짐 가방으로 충분하다. 그보다 많으면, 들고 다녀야 하고 지켜내야 하고 항상 살펴야 하는 재산들이 우리의 여정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베트남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만 겁날 게 많다. 머리카락이 없으면 잡아당길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내 몸에 지닐 수 있는 물건들만 가지고 다니려 노력한다. 
- 66~67쪽
 
 
 

,

돌발진

from 서재를쌓다 2022. 6. 23. 12:02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다. 금요일부터 가지 못했으니 금, 월, 화, 수. 주말 이틀을 제외하면 4일을 단 둘이서 낮시간을 보냈다. 금요일은 다음 날이 주말이니 괜찮다 했고, 월요일에는 아이가 열이 다시 오를까 전전긍긍했다. 두 번째 낮잠은 내가 쓰러질 것 같아 부러 재웠다. 화요일은 내일은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힘이 났고, 수요일에는 아침잠을 너무 오래 자서 아무래도 오늘도 안되겠구나 했다. 힘이 많이 들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아이 컨디션이 괜찮아 많이 보채지 않았다. 주말에는 셋 다 힘들었다. 아이 열이 39도를 넘었고 밤에 자주 깨서 울었다. 생전 처음 이렇게 몸이 아픈거니 많이 놀랬을 거다. 열이 계속 오르니 힘도 없고 입맛도 없고. 그래도 잘 지나갔다. 금요일에 아니 지금 코로나? 하며 병원에 갔는데 신속항원검사 하기도 전에 의사선생님이 돌발진 같아요 하셨다. 열이 나고 잘 먹던 애가 갑자기 밥을 안 먹는다고 하니. 열이 39도까지 올라가도 탈수만 되지 않으면 괜찮다며 콧물약과 해열제를 처방해주셨다. 주말 지나니 아이 컨디션이 괜찮아지며 얼굴과 몸에 열꽃이 피었다. 1년 전에 아이에게 두차례 돌발진이 왔던 남편 지인 부부가 열꽃이 피면 끝난 거라고 며칠 지나면 싹 없어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갑자기 기침을 해서 병원을 한 번 더 갔는데 의사선생님도 열꽃이 피었어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하셨다.

 

   신기하게 아이는 앓는 동안 쑤욱 컸다. 오늘 어린이집 등원할 때 선생님도 그러셨다. 지안이가 왜 이렇게 컸지? 하시면서. 매일 부수고 던지는 놀이만 했는데 구멍 사이로 모형을 모양에 맞춰 넣어보려고 한다. 걸음마 보조기도 앞부분에 버튼만 눌러대며 놀았는데 이제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 밀며 걷기 시작한다. 뽀로로와 친구들을 던지기만 해서 먼 곳에 치워뒀던, 자석판 위에서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난감도 이제 뽀로로를 친구들을 세워 보려고 한다. 저녁밥 달라고 난리치던 표정도 달라졌고. 소파 위에 앉혀 놓으면 싱긋싱긋 웃는다. 조심조심 내려가야지 잡아주면 조심조심 내려간다. 나가고 싶을 때는 양말을 내민다. 자기가 양말을 신고 엄마가 마스크를 쓰고 찍찍이 소리를 내며 힙시트를 허리에 매면 나가는 줄 안다. 등원할 때 선생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두 손을 있는 힘껏 아주아주 크게 힘들며 지안아, 재미나게 놀아. 재미나게 놀고 있어, 반복하니 선생님이 소리내어 웃으신다. 네, 선생님. 힘들었어요. 또르르; 지안이도 속으로 앗싸 어린이집이다! 집이랑 다른 장난감! 하며 환호성을 지르는지 품에 안겨 웃고 있다. 안심하고 어린이집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밭에 가서 수염이 나오기 시작하는 키카 큰 옥수수, 줄기 여기저기서 새잎이 돋기 시작하는 레몬나무, 제법 줄기가 올라온 모닝글로리, 궁채를 보고 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단디 단 흑임자 라떼를 주문했다. 음료가 만들어지는 동안 손님이 아무도 없는 카페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가만히 보았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집에 가서 반신욕 해야지. 향이 좋은 오일 풀고 오래 앉아 있어야지 생각했다. 

 

   그동안 오지은의 새 책을 읽었다. 이런 문장을 지나며 아이가 훌쩍 큰 것이다. 

 

 

   에세이는 삶을 직시하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든, 괴로워도 바라봐야 한다.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글로 만들려면 아주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용감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생각이 가는 대로 써 내려간 글'을 뭐라고 부르든, 그것이 산문이든 수필이든 에세이든, 글에 담긴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팬으로서 그렇게 생각한다. 

- 10쪽

 

(...) 언제까지고 잘 지낼 순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기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다. 이것이 현재 나의 가장 큰 목표이자 소원이다. 

- 84쪽

 

   록 음악계에는 '27세 클럽'이라는 말이 있다.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만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음악을 하는 친구들끼리 만 27세, 한국 나이 29세가 되었을 때 "어 우리 이제 만 27세 넘는 거네. 천재는 아닌가 봐?" 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웃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27세 클럽이라는 말은 잔인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스물일곱에 죽었지?" 하고 눈을 빛내면서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더욱 그렇다. 천재의 요절은 간단히 미화되고 소비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27세를 넘겼든 아니든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한 행복하게. 

- 91쪽

 

(...) 여럿이 모이면 마음이 강해진다. 어쩌면 팀 스포츠여서 용기를 내기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니스는 개인 종목이기에 오사카 나오미는 코트 위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그는 출전한 경기에서 전부 이겼다. 그래서 준비했던 일곱 개의, 각각 다른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마스크를 전부 쓸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21세기의 영웅의 모습은 이렇다. 흔들리고, 고민하고, 때때로 무너져도, 계속 달려가는 사람.

- 142~143쪽

 

 

   창문을 다 열어놓고 장마 전 바람을 맞으며 정밀아 음악을 듣고 있다. 아이 방으로 만드려고 서재 방 책상을 빼 안방에 두었다. 그저 구석에 큰 스피커가 있는 긴 티비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안방에서 티비 볼 일은 없다) 의자를 가져와 앉으니 노트북 책상이 되었다. 이것대로 좋네. (늘 결심 뿐이지만, 정말로) 일기를 자주 쓰고 싶다. 

 

 

 

,

 

    어느 후기 때문에 샴푸를 샀다. 로즈마리 샴푸인데 머리를 감을 때마다 숲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재활용할 수 있는 투명한 용기에 연두빛 샴푸액이 담겨 있었다. 사실 향 만으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샴푸를 쓸 때마다 그 후기글이 떠오른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 머리를 감으면서 숲에 가 있다는 분. 그 후기를 생각하며 머리를 감으면 나도 슬쩍 숲에 한 발 내딛는 것 같다.

 

   김남희 작가님의 새 산문을 읽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시대의 여행작가 글이다. 여행을 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걱정,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며 겪게 된 경제적인 어려움, 십 년 넘게 산 부암동 집을 떠나는 이야기, 새로 이사한 집에서 시작하는 에어비앤비 이야기, 새집에서는 숲이 무척 가깝다는 이야기, 매일매일 숲을 산책하는 이야기, 그렇게 꾸리게 된 방과후 산책단 이야기, 그 속에서 위로받고 위안이 되어주는 이야기, 경제적으로 어려운 작가를 배려해 세심하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그의 든든한 가족 이야기. 작가는 여행이 빠진 글을 쓰는 게 걱정된다고 했지만 나는 여행이 빠진 글이 더 좋았다. 일상을 걱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가득했기에. 인상적이다 생각한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는 부분이 많았고, 그 미래들이 대부분 희망적이고 따스했다는 것이다. 여행이 작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그동안 무게를 잡아주기도 흔들기도 했다며, 열려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구절에는 허리를 단단히 세우고 배에 힘을 주고 나의 중심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어제는 강풍을 맞으며 좋아하는 동네꽃집에 가 곧 생일인 친구의 선물을 샀다. 잔뜩 골라 유모차 짐칸에 놓고 또 강풍을 맞으며 돌아오는데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었고 좋아할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가는 여행 뒤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걸 두고 이렇게 썼다. "미루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고마움을 매 순간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게 되었다." 공감. 완전 공감이다. 책을 읽으면서 샴푸 후기처럼 작가와 작가의 지인들이 만들어가는 따스한 기운 속에 한 발 내딛는 느낌이 들었다. 따스하게 읽었다.  

 

 

 

,

 

 

   예전에 어떤 마음으로 외국의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정기후원을 했었다. 후원을 하면 그 아이의 사진과 좋아하는 것 등이 적힌 간략한 프로필,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도착했는데 어느 날 후원하던 아이가 갑자기 바뀌었다. 단체에 이유를 물어보니 현지에서 연락이 끊긴 거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후원을 중단하고 싶었는데 어찌어찌 이어나갔다. 남편과 연애 중일 때 남편이 내가 하는 후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비슷한 성격의 다른 단체에서 후원받은 돈을 아이들을 위해 쓰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다른 형식의 후원을 알려주며 이건 사연을 보고 직접 후원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망설이다 정기후원을 중단했다. 그런데 소파에서 나란히 티비를 보다 남편이 갑자기 그러는 거다. 아, 나 2만원짜리 정기 후원 시작했어!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 안나냐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단다. 사진을 봤단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 보육원 선생님은 한 사람이고 안아줘야 할 아이는 여러 명. 지안이 또래의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자신이 안길 차례를 기다리고 있더란다. 그 사진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후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동물에 관한 내용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내게 무척 소중한 한 사람을 생각했다. 너무너무 소중한데 무척이나 연약해서 잘 보살펴줘야 하는 존재.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너무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이 아이가 커나가는 세상이 지금보다 좀더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존재. 많은 경험을 해야겠지만 너무 힘든 사람은 만나지 않았으면 싶은 존재. 세상을 넓게넓게 보고 깊이있게 사랑했으면 좋겠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자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그 소중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물을 많이 사랑하는 주위 사람도 생각이 났다. 동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소중한, 하지만 어떤 이유로 연약한, 그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그런 자신만의 존재를 떠올리며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뒤의 이야기보다 앞의 이야기들이 좋았다.  

 

 

 

,

밝은 밤

from 서재를쌓다 2021. 10. 26. 21:57

 

 

  아이가 백일이 되기 전이었다. 몸과 마음이 한창 지쳐있던 때. 조금 외로웠던 밤이었는데 완전히 혼자 있고 싶어 반신욕을 했다. 그 즈음 매일 밤 반신욕이 간절했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봄이가 선정한 시옷의 책이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읽으려고 사두었었다. 책을 가지고 들어가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오래 있었다. 두번째 챕터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증조모는 열일곱일 때 살기 위해 엄마를 버려야 했다.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 분명한 엄마를 자신이 살기 위해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간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의 딸, 그러니까 주인공의 할머니는 병에 걸린 자신의 엄마 증조모가 자신을 보며 두 팔을 쭉 내밀며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마이, 어마이 왔어?"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증조모, 자식의 딸로 다시 태어난다는 고조모, 병에 걸려 딸을 엄마라고 부르는 증조모. 서럽게 외롭고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 정말 환생된 걸까. 이런 생각에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위안이 되는 밤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책이었다. 

 

  추석에 남편이 거래처에서 주었다며 커다란 멜론 세 개를 가져왔다. 남편은 과일을 좋아하지 않고 이 세 개를 제때 맛있게 다 먹기란 불가능한 일. 가까이 있었으면 나눠 주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새삼스레 참 멀리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쉬웠지만 내가 좋은 것을 얻었을 때 아직도 그들을 생각한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 내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밝은 밤>을 떠올렸다. <밝은 밤>은 곁에 있는, 혹은 멀리 있는 힘이 되는 사람들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이다. 좋았고 좋았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이 작은 책을 얼마동안 가만히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수고했어,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

  나는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엄마. 사람들이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네. 무언가를 심으려고 하나봐. 여름이랑 가을에는 바깥 풍경이 볼만하겠다. 재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아무도 겨울 밭을 억지로 갈진 않잖아. 

- 16쪽

 

  며칠 지나지 않아 마트 앞에서 할머니와 우연히 만났다. 나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아파트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에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할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았다. 바람에 할머니의 짧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렸고 천변에는 꽃들이 한창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주현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공기에 옅은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 온전한 봄밤이었다. 할머니는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했다. 

- 70쪽

 

  연재를 앞두고도 내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 무렵 어느 작가 레지던스에 머물 기회를 얻었다. 방에 짐을 풀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를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창밖으로 보이던 눈 쌓인 벌판과 한없는 고요함. 그곳에 앉아서 나는 <밝은 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날 나는 다시 쓰는 사람의 세계로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삼천이를 만났다. 

- 341쪽, 작가의 말

 

 

 

,

 

 

  구도심 주택에 살아보니 집을 '산' 것은 동네를 '사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집은 삶 그 자체이고 내 집이 위치한 동네는 브랜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관계망이다. 구도심 작은 동네의 좁은 관계망이 어떨 땐 불편하기도 하고 어떨 땐 즐겁기도 하다. 불행히도 아파트에 살 때 내게 이웃은 얼굴 없는 층간소음의 장본인일 뿐이었다. 혹여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같은 공간을 사는 이웃이 되었다. 집 앞에 낙엽이 뒹굴면 낙엽을 쓸고 눈이 오면 눈을 같이 치워야 한다. 좋건 싫건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가족만 잘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다. 

- 10쪽

 

 

  단독주택은 남편의 소망이 되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만이 쇄도하는 아파트 주민들, 재활용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는 사람들, 무엇보다 층간소음이 힘들다고 한다. 입주하고 초기에 누가 걷는듯한 큰 소리의 층간소음이 있었다. 누군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다 들리는 그런 소음이었다. 우리는 메모와 함께 슬리퍼를 윗집 문앞에 놓아두었고 윗집은 과일과 메모를 우리집 앞에 놓아두었다. 윗집은 자기네 소리가 아닐 거라며 집에 언제 주로 계시는지 궁금해서 이야기해보려고 왔는데 아무도 없어 메모를 남긴다고 했다. 윗집이 집에 있는 시간대는 우리와 비슷했다. 그 뒤 소음이 점차 줄어들더니 이제는 거의 나지 않는다. 아이가 크면 우리가 낼 소음도 걱정이다. 조심한다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내게도 단독주택에 대한 소망이 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지금의 아파트 생활에 큰 불만은 없어 그 소망은 조금 나이가 든 뒤에 이루어져도 좋을 것 같지만. (과연 이루어질 지가 문제지) 

 

  한수희 작가님의 인스타 팬이다. 작가님이 글과 사진을 올리면 찬찬히 읽어본다. 작가님 덕분에 동인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내가 잘 읽어낸 것이 맞다면 동인천은 오래된 것과 그 오래된 것을 보존하려는 새로운 매력이 뒤섞인 곳 같다. 얼마 전에는 인천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인천맥주공장 사진도 봤다! 홋카이도에서 홋카이도에서만 마실 수 있는 맥주가 있어 얼마나 부러웠는데.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면 꼭 인천맥주를 마시러 인천에 가봐야지. 작가님은 동인천으로 이사를 한 뒤 그곳의 매력에 푹 빠져 마냥 좋은 산책길, 할머니도 혼자 먹으러 오는 돈까스집 등을 인스타에 올리며 자신이 이 동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도 작가님이 좋아하는 가게에서 술을 마시며 읽은 책이다. 자신의 산책길에 소박하고 예쁘고 품위있는 집이 있다고. 늘 그 집이 궁금했는데 그 집의 주인이 책을 썼다고. 동인천의 구도심에 오래된 단독주택을 고쳐 사는 한 부부의 이야기를 동인천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읽는 것이다. 멋지다, 생각하며 나도 책을 주문했고 동인천과는 거리가 꽤 있는 군포의 아파트에서 읽었다. 그곳을 상상하며.

 

  내가 사는 동네가 근사해질 수 있는 방법은 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낡은 것이라 치부되는 것에서 생애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발 디딘 곳의 매력을 발견하고 그 매력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적절히 잘 줘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마음. 그 마음을 두 사람에게서 읽었다. 이 책의 봉봉 작가님과 한수희 작가님. 

 

  내가 사는 동네는 위치가 애매하다. 역과 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4호선 대야미역과 1호선 의왕역. 역세권이 아니여서 서울로 갈 때 아쉽지만 4호선도 1호선도 탈 수 있다. 크지 않은 자그마한 지구에 아파트가 5단지까지 있는데 예전에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동네가 들어선 거라 상점들이 아직 많이 없다. 최근에 주상복합 오피스텔이 입주를 시작했고 속도는 더디지만 하나하나 상점들이 생기고 있다. 이번에는 어떤 상점이 오픈을 하나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마 전에는 분식점이 오픈을 했다. 조그마한 애기들이 엄마들과 함께 가게 앞 파라솔에 앉아 어묵을 먹고 있는 모습을 산책을 하다 봤다. 맛있는 왕겨 참숯 돼지 직화구이집이 있고, 좋아하는 빵집 체인점도 있다. 샌드위치집도 맛있는데 양상추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아이스라떼가 무척 고소해서 산책할 때마다 마시곤 한다. 새로생긴 파스타 집도 맛있다는데 조용하고 자그마한 곳이라 언제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리 동네의 큰 장점은 바로 우리집. 우리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숲이다. 산 이름이 구봉산인데 지도에서 찾아보면 145.3m라고 되어 있다. 그 산의 나무들이 고층의 우리집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바람이 많이 불 때는 나뭇잎이 쏴아하고 일제히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봄이 되어가는 속도, 한여름의 출렁거리는 소리, 가을이 여물어가는 빛깔도 보인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이 창밖 풍경 때문에 긴 출퇴근길을 견딜 수 있겠다 생각했었다. 이 집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는동안 이 집과 이 동네를 많이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이 있다면 그 다음 집도 그랬으면 좋겠고. 욕심보다 애정이 많은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기를 책의 집과 나의 집을 돌아보며 바래본다.       

 

 

 

,

베개를 베다

from 서재를쌓다 2021. 9. 7. 00:32

 

 

 

(...) 네번째로 자동차키를 잃어버린 날, 나는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실패를 한 적이 없어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한테 가봐야겠어. 그제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62쪽, 날씨 이야기

 

(...) "손바닥에 적은 그 단어 스펠링 틀렸어요." 여학생이 말했다. "i가 두 개여야 해요." 그는 한 달만 더 학원을 다녀보자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정말 버스에서 졸지 않겠다고. 학원에 갈 때 스무 개. 돌아올 때 스무 개. 보란듯 외우리라고. 결심대로 그는 정말 버스에서 졸지 않았다. 그러자 평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학원까지 가는 길에는 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나무 그늘 아래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자아이를 같은 버스에서 보았다. 그보다 세 정거장 먼저 내렸다. 늘 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무얼 듣는지 혼자 피식 웃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뭘 들어요? 하고 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여자아이의 뒷자리였다. 어쩌다 여자아이의 앞에 자리가 비어도 그는 앉지 않았다. 자신의 뒤통수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에 앉아 여자아이와 도시락을 나눠 먹는 꿈을 꾸었다. 어쩌다 여자아이가 버스에 없으면 그는 그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탔다. 그러면 어김없이 여자아이가 거기 앉아 있었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면 고백을 하리라. 그는 영어 단어를 외우고 또 외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난 뒤 버스에서 여자아이를 만났을 떄, 여자아이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잘랐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아이가 창밖을 내다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걸 보았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더이상 설레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그는 여자아이가 버스에서 내리고 난 다음에야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아차렸다. 눈 밑의 점. 그 점이 없어졌다. 점 하나 뺐을 뿐인데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니. 그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

- 143-144쪽, 팔 길이만큼의 세계

 

(...) 아빠와 외할머니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셨다. 술을 마셔서인지, 딸이 태어나서인지, 비가 온 다음이어서인지, 그날 아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구름은 하얀색으로 보였고, 하늘은 파란색으로 보였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아이의 어깨 위에 단풍잎 하나가 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 꼭 그림책을 오려놓은 것 같아요. 아빠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그러네, 하고 대꾸했다. 커피가 달아요, 아빠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그러네, 하고 대꾸했다. (...)

- 169쪽, 낮술

 

 

  계절이 오고가는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니. <노포의 영업비밀> 통닭 영상을 보다 갑자기 통째로 튀긴 닭이 먹고 싶어졌다. 남편이 거래처 사람과 술을 한 잔 하고 들어온 뒤 앱으로 닭 한 마리를 주문을 했다. 통째로 튀긴 닭을 파는 닭집이다. 20분 안에 가지러 오라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은 비가 그쳤다고 했는데 혹시나 싶어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선우정아'로 검색을 하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잘 지내니.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우산을 펴고 걸어가는데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조금 쓸쓸해졌다. 이런 날 쓸쓸해할 사람 생각을 했다.   

 

  친구가 아기 낮잠 잘 시간에 읽으라고 보내준 책을 천천히 읽었더랬다. 아기 재우고 얼마 못 읽고 자기도 하고, 아침에 반신욕을 하면서 읽기도 했다. 날씨 이야기, 팔 길이만큼의 세계, 낮술에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좋았던 부분을 옮겨 적다 보니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대단하게 변해버린 것에 내가 공감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이었다.

 

 

 

,

박완서

from 서재를쌓다 2021. 8. 29. 23:10

 

 

  책을 사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림 때문이었다. SNS에서 우연히 봤는데 아이를 뒤켠에 두고 잠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박완서 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박완서는 자기 전에 꼭 책을 읽었어요. 작품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문장과 함께. 책을 읽고 있는 저 따뜻한 불빛이 그때의 내게 위안이 됐다. 그래, 책을 읽으면 돼, 생각을 했더랬다. 그림을 올린 분에게 어떤 책인지 물어봤고 아직 출간 전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얼마 전 불현듯 떠올라 인터넷 서점에 '박완서'라고 검색해봤더니 출간이 되었더라.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었고 짧은 내용이었지만 읽는 동안 뭔가 벅찬 느낌이 있었다. 남의 느낌을 빌리지 말고 정직하게 자기 느낌을 표현하자. 익을 시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 이런 말들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완서는 충격을 받았어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었죠.

  "세상이 달라 보여."

  완서가 도서관 문을 나서며, 친구에게 말했어요.

  "어떻게 달라 보여?"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세상의 뒤쪽을 본 것 같아."

  완서는 두렵고 슬펐어요. 어린이가 알아선 안 되는 어두운 면을 보아 버린 것 같았죠. 문학이 '세상의 뒤쪽'을 담는, 입체적인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어요. 완서는 훗날 <아아, 무정>의 원래 제목이 <레미제라블>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 21-22쪽

 

 

 

,

안녕한,가

from 서재를쌓다 2021. 8. 24. 00:51

 

 

  별것 아닌 나의 기록들이 자꾸만 좋은 사람들을 내 곁으로 데려다 준다. 그래서 계속 쓰게 된다.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라 가감 없이 나를 드러내며 솔직하게 쓴다. 그러다 보면 점점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남는다. 나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이제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 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와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해 편지를 띄운다. 단 한 줄을 쓰더라도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 여름 / 기록, p.57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근처 정류장에 앉아 살짝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름에는 그늘 아래에서 맞는 바람을 사랑한다. 주어진 계절을 오롯이 느끼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콧등과 인중에 맺히는 땀을 스윽 닦아내고 다시 눈을 감는다.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멈췄다 하며 애간장을 태운다. 

- 여름 / 그늘, p.89

 

  월세를 보냈는데 '받았읍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연희주인'이라는 문자가 답장으로 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는 것. 행복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 가을 / 감나무, p.121

 

  낮에는 이불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 해가 질 때까지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그런 다음 여행지에서 사온 티백으로 물을 끓이고 통에 담아 잠깐 식혀두었다. 조금 귀찮지만 시간을 들여 우려낸 물이 고소하고 훨씬 더 맛나니까.

- 가을 / 집, p.123

 

  오늘도 힘든 동작이 시작되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운동하는 안나가 그 마음을 읽었는지, 남은 한 세트는 혼자서 하라며 숙제로 남겨줬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다 끝까지 하겠다고 하고 정해진 운동을 모두 끝냈다.

  <알쓸신잡 2>에서 장동선 님이 들려준 갑각류 이야기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탈피한 갑각류는 가장 연약한 상태를 버티고 나면 더 단단한 껍데기를 갖게 되는데 인간의 마음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성장하는 순간은 죽을 것 같고, 잡아먹힐 것 같고, 스치기만 해도 생채기가 날 듯한 순간일 거라고.

- 겨울 / 성장, p.291

 

   어쩜 이리도 날씨가 포근한지. 뭉게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난다. 바깥을 나서는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발 두 발 경쾌하게 내딛는다. 문득, 지난겨울에 무엇이 그리도 힘이 들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계절을 들여다보면 때에 따라 피고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왜 나는 매번 피어있으려 그리도 애를 썼나 싶어 괜히 머쓱해졌다.

- 봄 / 봄날, p.381

 

 

  무과수 님의 <안녕한, 가>에 포스트잇 붙여둔 부분들을 다시 읽어보며 다린의 '태양계'를 듣는다. 다린의 '태양계'는 <싱어게인> 음악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들은 곡이다. 우주처럼 외롭고 물결만큼 따뜻한 곡 같다. 아이를 재우고 요즘 읽는 책을 가져가 반신욕을 했다. 오늘의 마지막 문장은 '멀리서 폭죽 터뜨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열고 머리를 말렸다. 얼마 전에 미용실을 다녀와 머리가 무척 가벼워졌다. 물을 끓여 허브차를 만들었다. 무과수 님은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책을 출간했다고 해서 주문을 했다.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글들이 짧아 처음에는 아쉬웠다.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 겨울을 거쳐 봄으로 끝나는데, 지금이 여름이라서 그런지 여름 이야기들이 좋았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제일 생동감 넘치고. 읽다보니 일본영화 <리틀 포레스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기를 찾아보니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 있더라. 담백하고 건강한 음식을 양이 넘치지 않게 든든하게 먹은 느낌이다. 

 

 

 

,

중국인 할머니

from 서재를쌓다 2021. 7. 8. 17:47



  오늘 새벽에도 백수린을 읽었다. 이번엔 '중국인 할머니'였다. 환하고 둥그런 달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어제는 새벽 두시와 다섯시에 수유를 했다. 남편은 외근까지 한터라 피곤해 두번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고, 나는 두시에 수유를 하다 다리랑 팔이 저릿저릿했다. 전날 밤에도 다리가 저릿했는데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있었나보다. 족욕을 자주 해주라는 이모님 조언이 있어 수유를 끝내고 세탁실에 있는 아이보리색 세수대야를 가져와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았다. 금방 식을까봐 뜨거운 물로 받았는데 발을 담그니 너무 뜨겁더라. 찬물을 조금 섞었다. 그사이 재워놓은 아이가 울어 방으로 들어가 조금 더 안아줬다. 이번에는 깨지 않고 잘 잤다. 다시 욕실로 돌아와 그새 식은 물에 뜨거운 물을 좀더 부어 뜨끈하게 만들었다. 물에 발을 담그고 낮에 읽다만 '중국인 할머니' 페이지를 펼쳤다.

 

 

   "그때 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으셨어요?"

  새할머니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내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렇게 너를 만나려고 그런 게 아니었겠냐."

   새할머니가 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농담하듯 웃었다. 새할머니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만발했던 여름 꽃송이가 차례로 떨어진 마당은 밤하늘 높이 두둥실 떠 있던 커다란 연등 때문에 환했다. 새할머니의 손끝에서는 낯선 기름 냄새가 났다. 올해는 유난히 달이 밝대요, 하던 내 말에 그렇구나, 새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 149쪽, <참담한 빛>


  물을 버리고 발을 닦은 뒤 대야를 다시 세탁실에 옮겨뒀다.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한 뒤 침대에 누웠다. 저릿한 기운이 사라지고 다리가 가벼워졌다. 족욕 좋네, 남편도 언제 하라고 해야겠네, 생각하고 잠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