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에 해당되는 글 5건

  1. 세 PD의 미식여행, 목포 2018.05.23
  2. 전주 (6) 2018.05.22
  3. 상상 (2) 2018.05.18
  4. 일본맛집산책 2018.05.10
  5.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 (12) 2018.05.08



   목포 여행 전에 읽은 책. 미식 여행을 하고 싶어서 였는데, 귀찮아서 숙소 근처만 다녔다. 비록 낙지도 먹지 못하고, 한정식 부럽지 않다는 백반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맛난 음식들을 먹고 다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함양에서 먹은 오동통한 길거리 소라. 책에 소개된 음식 중에 하나는 먹었다. 목포에서 유명하다는 유달콩물. 어릴 땐 휴일 아침에 시장에서 얼음 동동 띄워진 콩물을 곧잘 사다 마셨는데. 콩국수를 시켜먹고, 콩물은 한 통 사가지고 와서 집에서 아껴 마셨다. 진하고 고소했다. 책은 여행을 앞두고 있어 나름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다. 포스트잇 붙여둔 페이지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행지에 가서 주로 보고 듣는다. 관광(觀光)이라는 한자어가 뜻하듯 어디 놀러간다는 것은 그곳의 빛, 풍광을 보는 일에 방점이 있다. 차를 타고 달리든 두 발로 걷든, 새로운 경치를 보고 만끽한다. 거기에 소리가 더해진다. 대숲에서 스며 나오는 바람 소리, 이름 모를 산새의 소리, 계곡의 물소리, 유적지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사찰의 향불, 옛 한옥의 오래된 나무 향, 편백나무 숲의 피톤치드가 더해진다. 경치, 소리, 냄새의 삼위일체가 여행지의 주변 환경, 앰비언스를 이룬다.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욕심을 내어 감각 하나를 더 보태자. 손끝으로 결이 갈라진 문설주를 만지거나, 맨발로 간드러진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는 낙엽을 밟는다. 그러면 요즘 유행하는 4D 극장에서 즐기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현장 체험이 이뤄진다. 

- 7쪽


   산정동에 위치한 '웰빙 조개구이 집', 부부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옆집카센터 주인을 불러 무화과를 나눠주었고 내게 살아있는 새우며, 민어, 운저리 등을 보여주었다. 나는 상행길 도시락에 담아갈 요리를 주문했다. 사장의 제안은 장산도에서 기른 활새우구이, 나는 좋다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틈틈이 무화과를 입에 넣었다. 사장은 나를 목포역에 데려다주었다. 기분 좋은 여행이 끝나가는 시간. 나는 무척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기차에 올랐다. 서대전까지 학회 세미나 토론문을 읽다가 새우구이를 꺼냈다. 맥주와 새우구이의 환상적 궁합. 도시락은 기차여행의 완성이다. 목포 여행의 필수품 하나가 빈 도시락이다. 맛있는 백반이나, 민어, 새우 등을 반찬이나 안주로 담아오면 나만의 에키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인생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없으면 내가 만들어도 좋은 법이다. 

- 222쪽


서용하 : 일본으로 출장을 가면 저녁에 숙소 가까운 곳의 선술집 들르는 게 참 좋잖아요. 주택가에 아주 조그맣게 자리 잡은 유명하지 않은 선술집인데 머리에 하얀 손수건을 매고 일하는 할아버지가 주인인 경우가 많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취 있는 분위기. 가격도 비싸지 않고 맛도 있고.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 40년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또 놀랍고. '자식한테 물려주면 애들이 할지 모르겠네' 하는 이야기도 나누곤 했어요. 목포에도 오래된 식당이 꽤 있는데 자꾸 도시가 재개발되면서 밀려나고 있잖아요. 그런 식당 주인이 한 자리에서 40년씩 자부심을 느끼면서 장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겠다 싶어요. 

- 235-236쪽




  콩은 가뭄이 닥쳐도 벼, 보리보다 잘 견뎌낸다. 



전주

from 여행을가다 2018.05.22 14:30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전주에 여러번 갔었다. 마당이 이쁜 한옥집에서 두 번 잤고, 오래됐지만 깔끔한 시내의 호텔에서 두 번 잤다. 이번에는 지은지 오십년도 넘은 시내의 호텔에서 잤는데, 여기에 여섯명이 한꺼번에 투숙할 수 있는 침대방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저렴했다. 모과가 전날, 샤워용품과 수건이 있는지 물어봐서 직접 전화를 했다. 전화해보니 친절하기까지 했다. 샤워용품과 수건 모두 있는 걸 확인하고, 정말 그 방에서 여섯 명이서 잘 수 있는지 물어봤다. 다섯 명이 침대에서 자고, 요가 있어 한 명은 바닥에서 자면 된다고, 여섯 명이 충분히 투숙할 수 있는 방이라고 했다. 와, 정말 그런 방이 있다니. 


   제일 먼저 방에 도착한 건 모과와 나. 우리는 터미널에서 남부시장까지 한 시간 넘게 걸었다.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날씨는 쌀쌀했는데,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걸었다. 시장에서 민정이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일본음식과 맥주로 배를 채우고 시내의 호텔로 걸어갔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들고 체크인을 했다. 방은 침대로 꽉 차 있었다. 싱글침대가 3개, 더블침대가 1개, 그리고 옷장 안에 요와 베개, 이불이 있었다. 침대들은 따닥따딱 붙어 있었다. 창은 넓었고, 자그마한 창문도 열렸다. 천장에 어쩐지 어색한 상들리에가 틈틈이 먼지가 쌓인 채 있었다. 벽에는 한지 장식에 누구의 그림인지 알 것도 같은 옛그림 카피본들이 있었다. 화장실은 널찍했는데, 오십년의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장실이었다. 모과가 화장실에 간 사이, 조금 떨어져 있는 침대를 붙인다고 움직였는데 그 아래 먼지가 그대로 드러나서 깜짝 놀라 물티슈를 꺼내 방을 닦았다. 먼지가 틈틈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늑하고 꽉찬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모과는 단 둘이서 처음 버스를 타는 거라 전날밤 긴장해서 잠을 설쳤다고 했다. 졸리다는 모과에게 잠깐 눈을 붙이라고 하고, 반대편 침대에 누워서 가지고 간 책을 조금 읽었다. 우리들 때문에 일찍 일을 끝낸 소윤이가 엄청난 시간을 들여 호텔로 달려왔다. 과자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보고 싶었다고, 와줘서 너무너무 고맙다고, 아기새처럼 지저궜다. 이어서 정시 퇴근을 한 민정이가 새로 산 예쁜 구두를 신고 왔다. 지난주에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친숙하게. 봄이지만, 바람이 엄청 휘몰아쳤다. 조금 뒹굴거리다 나가기로 했다. 혼자 있었으면 절대 보지 않았을, 남자와 여자가 함께 생활을 하며 인연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침대에 누워 엄청 큰소리로 웃으면서 봤다.


   8888. 방 번호였다. 다른 방들은 모두 세 자리였는데, 이 방만 네자리였다. 자정 가까이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여섯이었다. 서울에서 퇴근을 하고 출발한 솔이와 봄이와 함께였다. 첫번째 가맥집에서는 넷이었고, 두번째 가맥집에서 다섯이 되었고, 마침내 여섯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여섯이 모이는 건 처음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전주에서. 바삭한 황태구이와 도톰한 계란말이를 먹었고, 잘 튀겨져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던 닭발도 먹었다. 고추가 들어간 매콤한 통닭도. 물론 맥주도. 호텔 앞 편의점에서 먹고 싶은 간식거리를 잔뜩 사와 방에서 밤시간을 보냈다. 언제 다시 이런 순간이 올까 충만한 생각이 들었던, 나도 모르게 잠이 스르르 몰려왔던 밤이었다. 제일 늦게 잠든 사람에 따르면, 한 사람씩 잠이 들기 시작했고, 한 사람씩 코를 골기 시작했단다. 모두 다른 음으로 각자의 코골이를 하던 전주의 밤.


    다음날 약속에 있었던 모과는 새벽 일찍 떠나고, 우리는 모과가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신발들을 보며 한 사람씩 오십년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 봄이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고, 욕실 밖에 있던 사람이 그걸 듣고 즐거워 했던 전주의 아침. 너무너무 추워 가려고 했던 가게에 가지 못하고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갈비탕을 시켰는데, 반찬도, 갈비탕도 정말정말 맛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무척 친절하시고. 누군가는 이번에 읽은 책을 중고서점에 팔고, 누군가는 이 엄청난 봄추위를 견딜 스웨터를 샀던 전주의 토요일 아침. 좋아하는 커피집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던 오후. 그런 시간들을 소중하게 보내고 모과에 이어 먼저 서울로 왔다.


   관계란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는 걸 시옷을 통해 새삼 깨달아갔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먼저 마음을 보여주는 것, 그 마음을 보여주었을 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나이에 상관없이 그런 시간들과 마음들이 더해졌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아갔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2018년 봄, 전주에서 두고두고 펼쳐볼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추억이 이렇게 생겼다.



      

  1. BlogIcon wonjakga 2018.05.22 17:2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는 또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글을 이렇게 편하게 공으로 읽어도 되나. 미안하면서 고마운 마음. 휴일이 끝나가네요. 빗소리가 듣기 좋구요. 끝나가는 휴일은 아쉽구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22 18:40 신고 BlogIcon GoldSoul

      집에 있을 때 비 오니까 이렇게 좋은데, 내일은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 ㅠ.ㅠ 그렇지만 곧 현충일도 있고, 선거도 있더라구요! 그런 6월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 힘을 내어 보아요. 저는 어이없게 이 계절에 감기예요. 갑자기 확 걸려버렸어요. 현정씨도 감기 조심해요. 잘 읽어줘서 제가 더 고마워요. :)

  2. BlogIcon 오혜진 2018.05.24 00:42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금령씨
    마지막 문단의 글이 정말 좋아요!
    나 오랜만이죠 블로그에 글 남기는 것.
    우리도 좋은 친구 맞죠?

    저 마지막 문단의 글, 내가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해줘도 되죠?

    이 글을 읽고 금령씨 엽서를 다시 한번 읽었어요.
    제법 추운날 많은 사람이 함께 한 여행.
    참 좋아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한 여행을 해본지가 언제인지....
    금령씨 글을 읽으며 나도 상상해봐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

    오늘 긴 편지를 썼어요.
    내일이나 모레 부치면 담주쯤 도착하겠다.
    요즘의 마음에 대해 편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게 새삼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밤이어요.
    잘자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24 21:47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편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도 이번엔 편지로 답장할게요!
      신나라 :-D
      그럼요, 우리 좋은 친구예요. 맞아요, 좋은 친구!
      혜진씨, 오늘도 좋은 꿈 꾸어요.

  3. 하진 2018.05.24 01:52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니카라과에서 부러워 죽는 1인.

상상

from 모퉁이다방 2018.05.18 23:47



   어느 날은, 시골에 가서 소 키우며 살래? 라고 물었다. 나는 잡아먹힐 소를 어떻게 애지중지 키우냐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시골에 가 소 키우고 밭 가꾸며 사는 조용한 삶에 대해서 상상해봤다. 일찍 일어나 몸 움직여 일하고, 오후부터는 내 삶이 있는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 오후 볕이 있고, 달콤한 낮잠도 있고, 느긋한 저녁 시간이 있는 삶. 물론 그렇게 달달한 삶만이 아니겠지만, 그 속에 놓여 있는 나를 상상해봤다. 어느 날은, 친구가 미국으로 이직을 한다며, 영어 잘해? 라고 물었다. 나는 다 그만두고 미국에 가는 상상을 해본다. 빠듯하게 일해서 집렌트비 내고, 생활비 내고, 술집에도 가지 않고, 저녁에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삶일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 외롭겠지? 외로울 거야. 영어도 못하고. 그래도 그런 삶은 어떨까. 미국소설에서 본, 대부분 쓸쓸하지만 때론 충만했던 페이지들을 떠올려본다. 나는 요즘 나의 다른 삶이 궁금하다. 줄곧 변함 없었던 생활이 지겨워진 거 같기도 하고. 내년에 마흔이 되는데, 이대로도 괜찮을까 두려운 거 같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지방에 내려가 작은 가게를 하는 상상을 한다. 돈이 될까. 그건 재미날까.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계속 에세이를 사대고 있다. 유럽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노란 책을 이번에 샀는데, 읽던 중에 동생이 스페인 여행에 가지고 갔다. 노란 책은 그곳에서 어떤 삶들을 또 들여다보고 있을까. 스페인 햇볕을 듬뿍 받은 책을 다시 이어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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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희님께, 남겨주신 다정한 글을 당일에 읽었는데, 답장을 미뤄두고 있었어요. 오늘 남기려고 보니 글이 삭제되어서 여기에 남겨요. 저는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특별하지 않은 일도 아니네요. 진짜 그러네요. 이곳에서 오래 일하고 있어요. 방문해주시고, 흔적도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 




  1. 2018.05.21 12:5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22 18:39 신고 BlogIcon GoldSoul

      서울에서 줄곧 살지 않은 저는, 지금도 여전히 좋고, 예전에는 서울의 삶을 더욱 동경했지만, 흠. 다른 곳은 어떨까 이런 생각도 조금씩 들고 있어요. 문화적인 혜택은 서울이 정말이지 최고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너무나 비싸고. ㅠ.ㅠ
      들꽃, 치즈, 베갯잇이라니, 정말 오묘하고도 근사해요. 장사는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하하- 저는 장사가 좀 되는 가게를 하고 싶어요. 만일만일 정말 한다면요! 돈이 되어야지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마음으로다가. 흐흐-

일본맛집산책

from 서재를쌓다 2018.05.10 23:14



  ​

   히라마츠 요코의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가 무척 좋아서 새 책이 출간되면 때맞춰 읽어야지 다짐했었다. 신간 알리미 신청을 안 해놔서 몰랐는데, <일본맛집산책>이라는 촌스러운 제목의 책이 히라마트 요코의 새 책이라는 걸 알고 바로 주문했다. 그림이 조금 나오는데, <고독한 미식가>의 다니구치 지로가 그렸다. 히라마츠 요코가 출판사 편집자 Y군과 함께 맛집을 찾아가 음식을 먹는 내용인데, 흠. 뭐랄까 뒤로 갈수록 기사 느낌이랄까. 딱딱한 글도 있고, 잘 읽히지 않기도 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그래도 다시 일본을 가게 된다면 방문하고 싶은 가게가 몇 생겼다. 중고서점에 팔기 전에 적어둬야지. 그나저나 나는 '비어홀'이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좋을까. 비어홀. 듣기만 해도 넓직한 곳에서 왁자지껄하게, 삼삼오오 커다랗고 튼튼한 맥주잔을 부딪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 생각만해도 좋은 것!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용산의 고깃집에 출몰했다고 해서 용산이 시댁인 친구에게 맛집이냐고 물어봤다. 친구도 아직 못 가본 곳이라는데, 분명 이제는 갈 수 없겠지. 새벽까지 운영하는 곳인데, 고로상이 다녀간 후 저녁 9시에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어제 아침에 보았다는. 흑-



   사람의 몸은 정말로 잘 만들어졌다. 추울 때는 그렇게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따뜻해지면 용기를 내어 먹고 싶어지는 맛이 있다. 싹이 튼 채소나 산나물의 알싸하고 쓴맛에는 추운 겨울 동안 쌓인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몸이 원하는 것이다. 

   경칩에서 춘분, 춘분에서 청명, 청명에서 곡우로 바통을 넘기면서 지금도 봄은 움직이고 있다. 채소와 산나물을 맛보며 계절을 받아들이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주위는 온통 봄의 싱그러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 26-27쪽


  히야시 토마토, 아츠아게, 모로큐.

  이것이 '오늘 신바시 아저씨들의 베스트 3 안주'인 모양이다. 신바시 역전 빌딩 1호관 B1 '타치노미 긴'은 초저녁부터 손님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셀프서비스 안주, 한병 300엔 균일, 생맥주 500cc 한 잔 380엔.

  꿀꺽꿀꺽꿀꺽, 캬아.....

  여기저기에서 환희에 찬 신음소리가 쏟아진다. 옛 추억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건물은 1층과 지하에 술집과 작은 음식점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아저씨들의 성지다. '탄포포' '오후쿠로' '샤샤' '칸자시' '사쿠라코' ...... 저마다 스트레스를 풀러 오라고 유혹하고 있다. 건물 입구의 안내 지도판에 쓰여 있는 한 줄 문구도 마음에 꽂힌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기가 바로 논스트레스 공화국!"

- 28-29쪽


   군만두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말투를 따라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극장을 나와 그대로 직진해서 빨리 들어간 곳은 늘 그렇듯 '텐코 만두방'이다. 이곳은 군만두가 생각날 때마다 달려가고 싶어지는 가게 중 하나, 물론 생맥주와 함께다. 

   세상에는 '절묘한 조합'이라는 것이 있다. 마리아주 같은 멋 부리는 말은 시건방지다. 쌍방이 정면으로 맞잡고 다짜고짜 승부를 겨루는 씨름은 이것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군만두와 생맥주.

   '텐코 만두방' 니시키초 점은 1953년 창업한 '간다 만두 가게'가 시초다. 그만큼 만두는 대표 메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작은 '원조 만두'도 버리기 어렵지만,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흑돼지 만두'는 견딜 수 없는 맛이다. 조금 적은 듯한 양배추와 듬뿍 들어간 부추. 흑돼지의 진한 맛이 응축되어 있는 큼직한 놈이다. 바삭하게 구워서 노릇하게 눌은 갓 구운 만두를 한입 물면 도톰한 만두피가 씹히는 맛이 남다르다. 우선 한 개를 다 먹어치운 뒤 차가운 생맥주를 쭉 들이킨다. 감동에 겨워 가게 구석자리에서 TV를 올려다보니 한가로운 오후 와이드쇼가 방영중이다. 아, 행복하구나.

  군만두, 생맥주, TV.

- 30-31쪽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얼음덩어리를 꺼내 옛날부터 쓰던 빙수기로 얼음을 갈아 만드는 빙수는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다. 빙수를 다 먹을 때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고, 그 후 깜짝 놀랄 정도로 시원한 딸기 우유 한잔을 곁들였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가 포렴을 젖히고 불쑥 들어왔다. 

    "여기 빙수요. 그리고 딸기 우유 주세요."

    여름 참배의 즐거움은 얼음, 가을과 겨울은 구운 경단. 봄은 쑥 경단. 이 가게도 참배객들을 부지런히 맞이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오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간다. 장어도 훌륭하고, 빙수도 훌륭하고, 게다가 참배까지 마쳤으니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언젠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귀엣말로 말해주었다.

    "나리타산으로 참배하러 가면 꼭 좋은 일이 생겨요. 이거 정말이에요."

- 60-61쪽


    젓가락을 놓고 볼이 발그레해진 왕씨가 종잇조각에 뭔가를 적었다.

    "주봉지기천배소."

    "소중한 친구와 마시는 술은 천 잔으로도 모자란다는 뜻이에요. 중국 속담이죠." 왕씨가 가르쳐주자 일동은 환희로 들끓었다. 좋구나, 맛있어요, 자자 또 건배! 술잔을 비우면서 만석인 가게 안을 둘러보니 손님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왁자지껄, 시끌벅적. 중국 둥베이가 웬 말이냐, 이건 우주 비행이지 않은가.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지며 공간 전체가 가까운 미래의 한 장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89쪽


    세 개를 안주로 기쿠마사무네를 데워서 마신다. Y군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다. "마구로누타, 참 맛있네요. 시라코폰즈도 맛있어요." 술을 꿀꺽꿀꺽 비우고 이따금 입으로 가져가는 이타와사의 선뜻하고 싱싱한 식감이 또 즐겁다. 처음엔 일 얘기만 하더니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 아이 이야기, 만난 사람들 이야기, 작은 배를 타고 흔들거리며 가는 듯한 기분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이 또한 고아가리의 마법이다.

    "안주 좀 더 시킬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 143-144쪽






   망원의 벨로주에서 친구와 나란히 본 정밀아 공연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곡은 '심술꽃잎'이다. 정밀아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안에 사정이 있어 형제 중 자신만 잠시 시골 할머니집에 맡겨졌는데, 그때 서럽고 슬펐던 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생각이 났다고 한다. 이 아이를 잘 달래서 노래로 만들어 잘 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심술꽃잎'은 그렇게 만든 노래라고 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큰 나무, 풀잎, 바람 모두 실제의 것이니, 노래를 들을 때 그것들을 직접 눈앞에 그려보라고 했다.


    노동절에는 혼자 광화문에 가 와인영화를 봤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와인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다 보니 아버지와의 어긋난 관계로 집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던 주인공이 집에 돌아와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어린시절의 자신을 껴안는 이야기였다. 어린시절의 자신을 잘 보듬아 준 다음에야 주인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린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런 장면이 늘 뭉클하다. 


   그리고 어느 목요일에는 그 사람 집 앞 커피집에서 이 책을 읽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연애를 잘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오는 어떤 고약한 부분이 있다. 지난 연애에서도 그랬었다. 그게 상대방을 슬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결국에는 외면하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잡고 다잡지만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거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한 짧은 글을 봤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다음 독자에게 남긴 말이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과 잘 되지 않았는데, 헤어지면서 자신은 불안형 애착을, 상대방은 회피형 애착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고. 자신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단계부터 차차 성장해나가 건강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그리하여 좋은 엄마도 되고 싶다는 글이었다. 


   중간쯤 읽다 잘 읽히지 않아 덮어뒀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이 나 책을 들고 전철을 오랫동안 타고 집 앞까지 갔다. 야근이 언제 끝나는지 모르지만 놀래켜 주려고 몰래 커피집에 자리를 잡았다. 야근이 늦어지고 늦어져서 결국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 성인의 애착 유형에 관한 설명이 있다. 200페이지부터 202페이지까지, 거기에 내가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릇된 행동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 페이지들을 읽어나가는데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아이였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결국 자정 넘게 야근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는 동안 가슴이 벅찼다. 


    시옷의 모임에 가기 전, 나는 지금보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던 것 같다. 늘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겸손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언젠가 이 사람이 나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어 결국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네, 생각해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도 이 페이지에 있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어린 아이들이 이 언니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렇지 않다고, 더 알게 되어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하다고 자꾸자꾸 얘기해줬다. 그리고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에 계속계속 얘기해줬다. 그것들이 나의 못난 면을 치유해 주고 있었다는 것 역시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247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거든. "치료와 성장은 일생 어느 시기에도 가능합니다." 고마운 사람들.


    나는 내 안에 있는 이 아이를 잘 달래고 오래 들여다 볼 것이다. 보듬아주고, 손잡아주고, 괜찮아 질 때까지 곁에 있어줄 거다. 그 사람에게도 그런 아이가 있다면 힘들었지, 고생했지, 무섭고 쓸쓸하지는 않았니, 말 걸어 주고 싶다. 그리고 괜찮다고, 이것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안아 줄 거다.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지만 다들 실수는 하는 거라고,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자고 다독여 줄 것이다. 상처는 누구에게든 있다고, 그 상처를 어떻게 아물게 하는 지가 중요한 거라고. 우리는 상처를 잘 아물게 할 수 있다고. 보경이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튼튼하고도 단단한 애착 상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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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착의 핵심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주고 내 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과 기대입니다. 아기는 혼자 상황을 이해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돌봄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호 간의 연대감 없이는 애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즉, 돌봄을 주고받는 사람이 서로 즐겁고 행복감을 느껴야 애착이 잘 형성됩니다. - 105쪽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애착 도식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애착 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놀라운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저는 심리 치료 중에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본인이 긍정적 변화를 원하는 것과, 상담자와 함께 자신의 변화와 성장에 대해 실존적 책임을 지는 것이 정서적 금수저로 거듭나는 관건입니다. - 207쪽



  1. 2018.05.09 01:2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09 18:38 신고 BlogIcon GoldSoul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앤셜리가 진짜진짜 상담공부를 했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전에도 쭉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 책을 읽고서 앤셜리는 정말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확신했거든. 천천히 준비해서 좋은 상담사가 되어줘. 응응. 나의 다정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내가 큰 나무가 되어줄게. 그러자, 죽을 때까지 재미나고 따뜻하게, 그렇게 서로를 지켜봐주고 격려해주자. 고마워, 앤셜리 (하트 뿅뿅) :-D

  2. 2018.05.09 19: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09 19:20 신고 BlogIcon GoldSoul

      이렇게 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ㅎㅎ 여긴 저의 솔직한 마음들이 담긴 곳이라 (누군가는 일기를 왜 일기장에 안쓰고 인터넷에 쓰냐고 놀려댔지만 흐흐) 그때의 제 마음도 남겨두고 싶었어요. 비단 연애 뿐만이 아니라 관계에서 제가 조금씩 움츠렸던 부분을 이 책을 통해 나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두려운 게 아니라 더 튼튼해졌어요! 헤헤 사실 저 막 내지르는 스타일이거든요. 좋은 관계들을 쭉 이어나가고 싶고, 그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고, 좋은 기운을 주고 싶어요. 제 안의 그 아이는 모른척 할 게 아니라 더 잘 어루만져주다 내보내고 싶어요. 그 아이도 저의 한 부분이지만, 더 긍정적인 부분을 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이렇게 써 놓았지만, 여전히 바야흐로 봄이랍니다. 헤헤- 좋은 밤 보내세요.

      아, 꽃검색 기능은 예전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 보고 알고는 있었어요. 정말 신기하고도 똘똘한 세상이에요! 좋아진 거...겠죠? 하하

  3. BlogIcon wonjakga 2018.05.11 21:4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글 읽고 오늘 이 책 대출했어요. 잘 지내시죠? 벌써 오월이네요. 잘 지내시리라 믿으면서 오랜만에 인사하고 가요. 사실 자주 들어오긴 하지만요 헤헷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22 신고 BlogIcon GoldSoul

      헤헤- 잘 지내고 있어요. 현정씨도 잘 지내죠? :)
      벌써 5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어요. 흑흑-
      이 책, 현정씨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괜찮았음 좋겠어요!

  4. 새봄 2018.05.13 11:1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제 속에는 어떤 고약한 아이가 있어서 이 모양인지!
    저도 오랜만에 인사하고 갑니다:) 잘 지내시죠?! 너무 좋은 계절이에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25 신고 BlogIcon GoldSoul

      진짜요. 먼지랑 일교차만 빼면요. 흐흐-
      저도 가끔씩 올라오는 새봄씨 일상 잘 보고 있답니다.
      기운 내고 있는 거죠? 화이팅이에요! 아자아자

  5. 2018.05.16 18: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34 신고 BlogIcon GoldSoul

      썬님이 회피형이라니. 번쩍!
      잘 모르지만, 이렇게나 멀리 있지만, 왠지 요즘 좋아보였다구. 상처 받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상처 주지 않으려는 노력. 이 노력 좋다아. 나도 노력하겠어! 길고 다정한 조언 고마와. 그러니까, 정말 언니는 30년도 (흑흑) 훨씬 넘는 시간을 타인으로,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지내왔는데 말이야. 몇 개월 만나고서 감정의 소용돌이에나 빠지고 말이야. 반성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육두문자는 줄이도록 하자 ㅋㅋㅋㅋㅋㅋ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많은 커플. 고마워요, 썬님. :-D

  6. 2018.05.17 16: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5.18 23:41 신고 BlogIcon GoldSoul

      요 며칠 이곳은 비가 요란하게 왔는데, 그곳도 그랬죠?
      빗소리가 시원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막 그랬어요.
      저도 잘 읽지 않는 류의 책인데, 그 평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어요. 완전 마음에 든건 아니지만, 제게 깨달음을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랍니다. 헤헤- 그리고 다음에 산 책도 같은 애착에 관한 책인데 마음에 들어요. 아직 초반이라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요. 다 읽으면 또 얘기 풀어놓아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