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맛집산책

from 서재를쌓다 2018.05.1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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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마츠 요코의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가 무척 좋아서 새 책이 출간되면 때맞춰 읽어야지 다짐했었다. 신간 알리미 신청을 안 해놔서 몰랐는데, <일본맛집산책>이라는 촌스러운 제목의 책이 히라마트 요코의 새 책이라는 걸 알고 바로 주문했다. 그림이 조금 나오는데, <고독한 미식가>의 다니구치 지로가 그렸다. 히라마츠 요코가 출판사 편집자 Y군과 함께 맛집을 찾아가 음식을 먹는 내용인데, 흠. 뭐랄까 뒤로 갈수록 기사 느낌이랄까. 딱딱한 글도 있고, 잘 읽히지 않기도 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보다. 그래도 다시 일본을 가게 된다면 방문하고 싶은 가게가 몇 생겼다. 중고서점에 팔기 전에 적어둬야지. 그나저나 나는 '비어홀'이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좋을까. 비어홀. 듣기만 해도 넓직한 곳에서 왁자지껄하게, 삼삼오오 커다랗고 튼튼한 맥주잔을 부딪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아, 생각만해도 좋은 것!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용산의 고깃집에 출몰했다고 해서 용산이 시댁인 친구에게 맛집이냐고 물어봤다. 친구도 아직 못 가본 곳이라는데, 분명 이제는 갈 수 없겠지. 새벽까지 운영하는 곳인데, 고로상이 다녀간 후 저녁 9시에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어제 아침에 보았다는. 흑-



   사람의 몸은 정말로 잘 만들어졌다. 추울 때는 그렇게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따뜻해지면 용기를 내어 먹고 싶어지는 맛이 있다. 싹이 튼 채소나 산나물의 알싸하고 쓴맛에는 추운 겨울 동안 쌓인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해주는 기능이 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몸이 원하는 것이다. 

   경칩에서 춘분, 춘분에서 청명, 청명에서 곡우로 바통을 넘기면서 지금도 봄은 움직이고 있다. 채소와 산나물을 맛보며 계절을 받아들이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주위는 온통 봄의 싱그러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 26-27쪽


  히야시 토마토, 아츠아게, 모로큐.

  이것이 '오늘 신바시 아저씨들의 베스트 3 안주'인 모양이다. 신바시 역전 빌딩 1호관 B1 '타치노미 긴'은 초저녁부터 손님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셀프서비스 안주, 한병 300엔 균일, 생맥주 500cc 한 잔 380엔.

  꿀꺽꿀꺽꿀꺽, 캬아.....

  여기저기에서 환희에 찬 신음소리가 쏟아진다. 옛 추억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건물은 1층과 지하에 술집과 작은 음식점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아저씨들의 성지다. '탄포포' '오후쿠로' '샤샤' '칸자시' '사쿠라코' ...... 저마다 스트레스를 풀러 오라고 유혹하고 있다. 건물 입구의 안내 지도판에 쓰여 있는 한 줄 문구도 마음에 꽂힌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다...... 여기가 바로 논스트레스 공화국!"

- 28-29쪽


   군만두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말투를 따라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극장을 나와 그대로 직진해서 빨리 들어간 곳은 늘 그렇듯 '텐코 만두방'이다. 이곳은 군만두가 생각날 때마다 달려가고 싶어지는 가게 중 하나, 물론 생맥주와 함께다. 

   세상에는 '절묘한 조합'이라는 것이 있다. 마리아주 같은 멋 부리는 말은 시건방지다. 쌍방이 정면으로 맞잡고 다짜고짜 승부를 겨루는 씨름은 이것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군만두와 생맥주.

   '텐코 만두방' 니시키초 점은 1953년 창업한 '간다 만두 가게'가 시초다. 그만큼 만두는 대표 메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작은 '원조 만두'도 버리기 어렵지만,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흑돼지 만두'는 견딜 수 없는 맛이다. 조금 적은 듯한 양배추와 듬뿍 들어간 부추. 흑돼지의 진한 맛이 응축되어 있는 큼직한 놈이다. 바삭하게 구워서 노릇하게 눌은 갓 구운 만두를 한입 물면 도톰한 만두피가 씹히는 맛이 남다르다. 우선 한 개를 다 먹어치운 뒤 차가운 생맥주를 쭉 들이킨다. 감동에 겨워 가게 구석자리에서 TV를 올려다보니 한가로운 오후 와이드쇼가 방영중이다. 아, 행복하구나.

  군만두, 생맥주, TV.

- 30-31쪽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얼음덩어리를 꺼내 옛날부터 쓰던 빙수기로 얼음을 갈아 만드는 빙수는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다. 빙수를 다 먹을 때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고, 그 후 깜짝 놀랄 정도로 시원한 딸기 우유 한잔을 곁들였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가 포렴을 젖히고 불쑥 들어왔다. 

    "여기 빙수요. 그리고 딸기 우유 주세요."

    여름 참배의 즐거움은 얼음, 가을과 겨울은 구운 경단. 봄은 쑥 경단. 이 가게도 참배객들을 부지런히 맞이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오후의 기분 좋은 바람이 지나간다. 장어도 훌륭하고, 빙수도 훌륭하고, 게다가 참배까지 마쳤으니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언젠가 이웃집 아주머니가 귀엣말로 말해주었다.

    "나리타산으로 참배하러 가면 꼭 좋은 일이 생겨요. 이거 정말이에요."

- 60-61쪽


    젓가락을 놓고 볼이 발그레해진 왕씨가 종잇조각에 뭔가를 적었다.

    "주봉지기천배소."

    "소중한 친구와 마시는 술은 천 잔으로도 모자란다는 뜻이에요. 중국 속담이죠." 왕씨가 가르쳐주자 일동은 환희로 들끓었다. 좋구나, 맛있어요, 자자 또 건배! 술잔을 비우면서 만석인 가게 안을 둘러보니 손님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왁자지껄, 시끌벅적. 중국 둥베이가 웬 말이냐, 이건 우주 비행이지 않은가.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지며 공간 전체가 가까운 미래의 한 장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89쪽


    세 개를 안주로 기쿠마사무네를 데워서 마신다. Y군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다. "마구로누타, 참 맛있네요. 시라코폰즈도 맛있어요." 술을 꿀꺽꿀꺽 비우고 이따금 입으로 가져가는 이타와사의 선뜻하고 싱싱한 식감이 또 즐겁다. 처음엔 일 얘기만 하더니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 아이 이야기, 만난 사람들 이야기, 작은 배를 타고 흔들거리며 가는 듯한 기분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이 또한 고아가리의 마법이다.

    "안주 좀 더 시킬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 143-1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