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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여행을가다 2018. 5. 22. 14:30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전주에 여러번 갔었다. 마당이 이쁜 한옥집에서 두 번 잤고, 오래됐지만 깔끔한 시내의 호텔에서 두 번 잤다. 이번에는 지은지 오십년도 넘은 시내의 호텔에서 잤는데, 여기에 여섯명이 한꺼번에 투숙할 수 있는 침대방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저렴했다. 모과가 전날, 샤워용품과 수건이 있는지 물어봐서 직접 전화를 했다. 전화해보니 친절하기까지 했다. 샤워용품과 수건 모두 있는 걸 확인하고, 정말 그 방에서 여섯 명이서 잘 수 있는지 물어봤다. 다섯 명이 침대에서 자고, 요가 있어 한 명은 바닥에서 자면 된다고, 여섯 명이 충분히 투숙할 수 있는 방이라고 했다. 와, 정말 그런 방이 있다니. 


       제일 먼저 방에 도착한 건 모과와 나. 우리는 터미널에서 남부시장까지 한 시간 넘게 걸었다.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날씨는 쌀쌀했는데,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걸었다. 시장에서 민정이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일본음식과 맥주로 배를 채우고 시내의 호텔로 걸어갔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들고 체크인을 했다. 방은 침대로 꽉 차 있었다. 싱글침대가 3개, 더블침대가 1개, 그리고 옷장 안에 요와 베개, 이불이 있었다. 침대들은 따닥따딱 붙어 있었다. 창은 넓었고, 자그마한 창문도 열렸다. 천장에 어쩐지 어색한 상들리에가 틈틈이 먼지가 쌓인 채 있었다. 벽에는 한지 장식에 누구의 그림인지 알 것도 같은 옛그림 카피본들이 있었다. 화장실은 널찍했는데, 오십년의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장실이었다. 모과가 화장실에 간 사이, 조금 떨어져 있는 침대를 붙인다고 움직였는데 그 아래 먼지가 그대로 드러나서 깜짝 놀라 물티슈를 꺼내 방을 닦았다. 먼지가 틈틈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늑하고 꽉찬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모과는 단 둘이서 처음 버스를 타는 거라 전날밤 긴장해서 잠을 설쳤다고 했다. 졸리다는 모과에게 잠깐 눈을 붙이라고 하고, 반대편 침대에 누워서 가지고 간 책을 조금 읽었다. 우리들 때문에 일찍 일을 끝낸 소윤이가 엄청난 시간을 들여 호텔로 달려왔다. 과자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보고 싶었다고, 와줘서 너무너무 고맙다고, 아기새처럼 지저궜다. 이어서 정시 퇴근을 한 민정이가 새로 산 예쁜 구두를 신고 왔다. 지난주에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친숙하게. 봄이지만, 바람이 엄청 휘몰아쳤다. 조금 뒹굴거리다 나가기로 했다. 혼자 있었으면 절대 보지 않았을, 남자와 여자가 함께 생활을 하며 인연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침대에 누워 엄청 큰소리로 웃으면서 봤다.


       8888. 방 번호였다. 다른 방들은 모두 세 자리였는데, 이 방만 네자리였다. 자정 가까이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여섯이었다. 서울에서 퇴근을 하고 출발한 솔이와 봄이와 함께였다. 첫번째 가맥집에서는 넷이었고, 두번째 가맥집에서 다섯이 되었고, 마침내 여섯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여섯이 모이는 건 처음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전주에서. 바삭한 황태구이와 도톰한 계란말이를 먹었고, 잘 튀겨져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던 닭발도 먹었다. 고추가 들어간 매콤한 통닭도. 물론 맥주도. 호텔 앞 편의점에서 먹고 싶은 간식거리를 잔뜩 사와 방에서 밤시간을 보냈다. 언제 다시 이런 순간이 올까 충만한 생각이 들었던, 나도 모르게 잠이 스르르 몰려왔던 밤이었다. 제일 늦게 잠든 사람에 따르면, 한 사람씩 잠이 들기 시작했고, 한 사람씩 코를 골기 시작했단다. 모두 다른 음으로 각자의 코골이를 하던 전주의 밤.


        다음날 약속에 있었던 모과는 새벽 일찍 떠나고, 우리는 모과가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신발들을 보며 한 사람씩 오십년 전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 봄이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고, 욕실 밖에 있던 사람이 그걸 듣고 즐거워 했던 전주의 아침. 너무너무 추워 가려고 했던 가게에 가지 못하고 근처 가게에 들어가서 갈비탕을 시켰는데, 반찬도, 갈비탕도 정말정말 맛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무척 친절하시고. 누군가는 이번에 읽은 책을 중고서점에 팔고, 누군가는 이 엄청난 봄추위를 견딜 스웨터를 샀던 전주의 토요일 아침. 좋아하는 커피집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던 오후. 그런 시간들을 소중하게 보내고 모과에 이어 먼저 서울로 왔다.


       관계란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는 걸 시옷을 통해 새삼 깨달아갔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먼저 마음을 보여주는 것, 그 마음을 보여주었을 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 나이에 상관없이 그런 시간들과 마음들이 더해졌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아갔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2018년 봄, 전주에서 두고두고 펼쳐볼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추억이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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