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외로움은 외롭다는 느낌보다, 말이 먼저 온다. 내가 봤다. 그런 사람. 그이는 자신이 전혀 외롭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혼자가 편하다고 했다. 집을 평생 사지 않겠다 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외롭다고 말했다. 실은 외로워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는데, 평생 집을 사지 않겠다, 결혼따위 절대 하지 않겠다 결심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외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표정은 꼭 십대에 실연 당한 소년의 것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어 스크린에 대고 그 뺨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라이언,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은 외롭지 않은 사람이었잖아. 어떤 외로움은 말이 먼저 온다.

    영화는 결국 '쿨'하지 않은 결말로 끝났다. 인간은 모두 외로운 섬이지만,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다? 그따위의 결말이다. 베라 파미가가 그렇게 뻔뻔스런 엑스라니. 나는 광분했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 라이언은 언젠가 나탈리가 말했던 계획을 실현하려고 한다. 공항의 전광판 앞에 선다. 출발하고 떠나는 비행기들을 올려다본다. 그 비행기들이 도착할 도시들의 이름을 올려다본다. 곧 그는 그 중 한 곳을 정할 거다. 그리고 무작정 떠날 거다.  

*


기린
                                                      송찬호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 노래하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 웃자람을 막기 위해 어른들이 해바라기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을 때, 나는 그걸 내리기 위해 해바라기 대궁을 오르다 몇 번씩 떨어졌느니, 가파른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기를 잡아먹고 사는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의 비애를 이제야 알겠으니.

    언제 한번 궤도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리 한 가지 꺽어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다시 겅중겅중 뛰어가는 저 우스꽝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詩의 족장을 보아라

  
 *


     그 순간, 커다란 목을 지닌 기린이 겅중겅중 나타난다. 라이언 빙햄씨, 함께 가요. 기린은 자그만 배낭을 메고 있다. 배낭 안엔 아무 것도 없다. 기린은 아무 것도 필요없다. 라이언은 기린을 올려다본다. 목이 아프다. 기린이 씨익 웃는다.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의 비애를 알겠으니. 라이언과 기린은 함께 비행기를 탄다. 아무 것도 없는 기린은 검색대에서도 금방이다. 아시아인 뒤에 설 필요도 없다. 기린이 배정받은 좌석에 가 보니, 비행기 천장이 자그마하게 뚫려 있다. 기린은 자리에 앉고 고개를 쓰윽 비행기 천장 밖으로 내민다. 긴 목과 작은 얼굴이 하늘로 솟는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밤하늘을 난다. 기린의 머리는 별을 훓는다. 라이언은 옆 자리에 앉아 별이 긁히는 소리를 듣는다. 아아아아아-

    어디쯤일까. 세렝게티 초원 근처쯤 될까. 따듯한 풀밭이다. 라이언과 기린은 함께 식사를 한다. 기린은 나무 위의 잎을 잘근잘근 씹어먹고, 라이언은 그 모습을 보고 허허 웃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풀밭 위로 노을이 지자, 라이언은 슬퍼진다. 외로워진다. 이번에도 먼저 말해버린다. 기린님, 저 지금 초큼 외로워요. 금세 실연당한 십대 소년의 표정이 된다. 기린은 조지 클루니의 목에 풍선을 달아준다. 머리에 고깔을 씌어준다.

    그렇게 노을이 진다. 기린의 목처럼 하늘에 별이 쓰윽 떠오르고. 
   
     나는 아직, 외롭지 않다.




 


 
  1. BlogIcon 진사야 2010.03.28 23:0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역시나 알렉스 캐릭터에서 분노하시는군요 ㅋㅋ :)
    며칠 전에 네 번째 관람 겸 이동진 평론가가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에 다녀왔는데, 질문 내용을 들어 보니 여성분들 생각은 대체로 같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저만 빼고?) 이동진 평론가는 '네가지' 없는 알렉스 캐릭터를 꽤나 좋게 보신 것 같습니다만... 이것도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하긴 베라가 너무 실감나게 연기하긴 했어요. 저도 순간 '이런!' 소리를 뱉을 뻔했으니까. 그러나 곧 안정이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자체의 마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정말 감상적으로 빠지기 쉬운 점이 있는데, 거기서 제동을 걸고 처음의 시니컬함으로 돌아간단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좋았던 건지도 모르지요.

    라스트신!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군요. ^ㅅ^ 저도 저 장면 보자마자 나탈리가 생각났어요. 저는 해고전문가 일을 하러 떠나는 모습으로 봤지만,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쁘군요.
    (사실 관객과의 대화 때 저 질문을 하려다가 못 했어요. ㅠㅜ 워낙 손 든 사람들도 많았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흑흑흑.)

    리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뷰도, 시도 잘 읽었어요. :)

    •  address  modify / delete 2010.03.29 21:43 신고 BlogIcon GoldSoul

      알렉스가 조금이라도 미안한 기색이 있었다면. 뭐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을 거예요. 너무 당당하게. 거짓말한 게 당연하지 않냐는 식. 즐길 때 즐기더라도, 그런 당당함은 좀.. 그러고보면 라이언은 정말 소년같이 순진했다구요. >.< 전 제가 어설프고 해서, 라이언이 좋아요. 헤-

      그나저나 조지 클루니는 나이가 무색하게 멋지니. 이거 원.
      이 서른 넘은, 소녀의 마음이 설렌다구요. 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