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500일의 썸머 - 그러니까, 488일의 톰
    극장에가다 2010. 1. 25. 22:41


       금요일, 홍대에 있었다. B를 기다리는 동안 브뤼트라는 잡지에 김연수가 쓴 글을 읽었다. 그건 체 게바라에 관한 글이기도 했고, 파블로 네루다에 관한 글이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보고 울컥 했던 시. 파블로 네루다 시의 어떤 구절에 대해서 김연수는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구절.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 그녀는 가끔 나를 사랑했다."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 어딘가에서 본 <500일의 썸머> 영화 카피.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언젠가의 톰이다.

       영화는 연애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500일동안. 연애를 하는 남자 이름은 톰. 그리고 연애를 하는 여자 이름은 썸머. 톰은 어여쁜 썸머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그리고 뜻밖에도, 혹은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별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썸머는 말한다. 난 심각한 건 싫어. 우린 그냥 친구 사이야. 썸머는 친구랑 키스를 하고, 손을 잡고 쇼핑도 하고, 섹스도 한다. 비오는 밤, 먼저 찾아가서 미안하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우린 그냥 친구 사이라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에겐 모두 썸머가 있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날은 1일 째의 썸머를 보여주고 어떤 날은 462일 째의 톰을 보여준다. 어떤 날에는 163일 째의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순서에 상관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연애란 다 그런 거니까. 아스피린을 넣어둔 장미꽃도 언젠가 시들고 마니까.

        나는 488일 째의 톰을 본다. 그러니까, 488일 째의 톰이 어떤 상태냐면 좋은 친구 사이라고 거듭 강조하던 썸머랑 끝장난(당한) 뒤,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썸머는 여전히 빛나고, 바보같은 톰은 그녀를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했으며, 톰은 썸머의 어떤 파티에 초대받는다. 그 뒤 썸머는 결혼한다. 톰은 좌절했으며, 그 뒤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 톰은 실연의 상처를 잊으러 애쓰러 본래의 자신의 꿈을 찾으러 하지만, 미끄럼틀만 계속 타고 있는 상태. 그리고 488일 째 두 사람은 다시, 우연히(혹은 당연하게도) 만난다. (썸머는 톰에게 상처주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썸머가 있다. 빌어먹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썸머는 말했지. 사랑은 없다고.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 그냥 사는 거라고. 그 때, 우리의 톰은 말했다. 사랑은 있다고. 운명은 존재한다고. 나는 당신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 이제 입 아플 정도지만, 우리에게는 톰'도' 있다. 분명하다. 488일 째 되던 그 날, 썸머는 말한다. 니 말이 맞았다고. 사랑은 존재한다고. 운명은 분명히 있는 거라고. 너와 내가 운명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세상은 장미빛이라고. 그 때, 우리의, 우리의 톰은 생각한다. 빌어먹을 사랑은 없다고. 엿 바꿔 먹을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거라고. (타이밍. 그래. 스무 살의 남자애는 조숙해서, 아니면 선수여서 내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해주었다. 서로의 등만 보는 '좋지' 않은 타이밍.  난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지. 난 톰이었으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썸머 말이 다 맞았다. 결국 엔딩을 보면, 그래 엔딩을 굳이 보지 않아도, 썸머가 옳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해 봤으니까, 한 때의 톰이었고, 한 때의 여름이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의 가을이 될테니까. 그런데 나는 왜 488일 째의 톰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 거지? 썸머가 너와 내가 운명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표정.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썸머가 번쩍이는 결혼반지를 낀 손을 얹을 때 상실감 가득했던 그 떨림. 그건 결국 488일 후 썸머의 표정일 텐데.

        아.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거. 나 왜 이렇게 염세적이 된 거지. 영화 정말 잘 봤는데 말이다. 정말 좋아서 중랑천을 룰루랄라 걸었는데 말이다. 이층에 봄에 혼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왔는데 말이다. 음악이 참 좋다. 이 영화. 이건, 2010년 두 번째 영화. 이번에도 좋은, 영화였다아.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