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추워졌다. 정말 이제 겨울인가봐. 오늘이 벌써 십이월 삼일이니까. 집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세탁기에 있는 수건을 다섯 장 꺼내서 세제 풀어서 팍팍 손빨래했다. 따뜻한 물로 몇 번 헹궈주고 팔에 힘을 꽉 줘서 비틀어 짰다. 얼마 전에 노끈을 꼬아서 방을 가로지르는 빨래줄을 만들어 놓았는데, 일종의 가습기 대용이랄까. 그 위에 다섯 장의 수건을 나란히 널었다. 윗풍이 세고 오래된 이 집에서 겨울이 나는 방법은 보일러를 빵빵하게 트는 것인데, 가스비가 너무 많이 나온다. 더군다나 전기세고 가스비고 다 올랐다는데. 어흑.
이 겨울, 요즘 내가 빠져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이름은 시와. 오지은과 친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노래를 듣게 됐다. 2층에 봄에 앉아 있는데 어떤 좋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음이 뭉클거리면서 움직였다. 내가 항상 탐내는 2층에 봄 애플모니터를 힐끔 보니, 시와의 노래였다. 집에 가서 플레이어에 넣어야지, 생각했다. 넣어두고서 잊고 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길상사에서'라는 노래를 재생했는데, 아름다웠다. 슬프고, 맑았다. 노래를 끝까지 들으면 세 번의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분명 길상사의 풍경소리겠지. 바람이 그 풍경을 움직였을 거다. <봄날은 간다>가 생각났다. 그리고 세 번의 풍경소리 뒤로 바람소리도 들렸다. 처음엔 자동차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럴리가 없잖아. 그건 바람소리가 분명해. 오지은 홈페이지를 보니 1집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기대된다구요. :D 십일월의 어느 날에는 하루종일 이 노래만 반복해서 들었다니까. 눈이 내리면 길상사에 가 봐야지. 4호선을 타고 가서, 버스로 갈아 타면 갈 수 있단다. 그 때도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만화를 그리는 사람. 소복이. 오늘 서점에 가서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를 당장 구입했다. 빌려 읽었는데, 당장 사고 싶을 정도로 소중했다.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따스해서, 그리고 위안이 되어서, 사랑스러워서 고맙고 고마웠다. 소복이님한테. <시간이 좀 걸리는 두 번째 비법>은 소복이님과 소복이님 친구들, 가족들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소복이님은 소개팅을 몇 번 하는데, 그 때마다 남자에게 어김없이 하는 질문, "어떤 음악 들으세요?" 두 사람이 김종국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남자는 소복이가 루시드 폴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외국가수냐고 했다. 책의 마지막 이야기를 보면 소복이님은 루시드 폴을 듣는 남자를 만난 게 분명하다. 그 음악이 루시드 폴이 아니라면, 루시드 폴이 외국 가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 남자. 친구들이랑 성북동 걷는 이야기, 독일에 있는 친구랑 메신저 하는 이야기도 좋았다. 언니야,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옆에 있는 것 같다. 언니야, 바람부는 대로 살자. 라고 친구가 말해준 것도. 언젠가 이 책에 소복이님의 사인을 받게 된다면 멘트는 '바람부는 대로 살아요'라고 해 달라고 해야지. :)
저 분홍형광빛 요란한 책의 제목은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 두 권 다 책에 타이핑 된 글자는 없다. 모조리 손으로 쓴 손글씨와 손그림. <우주의 정신과 삶의 의미>의 내용은 매화동 사람들 이야기. 소복이님이 매화동 사람들을 소재로 만화를 그리고 싶어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만든 만화란다. 우주의 정신님이 보낸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와 지구인의 삶의 의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이야기랄까. 역시 따뜻해. 눈물 날 뻔한 장면은 연극을 하는 상범씨. 상범씨가 그린 그림을 보면 사람의 얼굴인데 귀가 아주 크고, 눈이 세 개고, 입이 점처럼 작다. 많이 듣고, 많이 보고, 적게 말해야 되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현한 그림. 아, 완전 동감이다. 나 요즘 계속 말을 적게 해야 해, 생각한다. 많이 듣고, 많이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사실 술을 처음 먹어봐요' '저도 사실 오늘이 세 번째예요.' '그럼 마셔볼까요?' '맛이 어때요?' '맛이 없어요.' '그럴 때는 이렇게 안주를 먹으면 돼요.' '그렇지만 안주를 너무 많이 먹으면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럼 마음 속의 것들이 술술 나올 때는 언제인가요?' '일곱 잔쯤 마시면 될 거예요.' '저는 50살에 자살할 거예요.' '그때 너무 잘 살고 있으면요?' '그럼 그냥 오래 살구요.'
이런 식의 이야기, 정말 좋다니까. 홍대역 4번 출구 밖에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만화책을 봤는데, 추운 줄도 모르겠더라. 그리고 계속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느낌. 오늘 친구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꼭 해줘야지 하는 생각. 이렇게 추운 날 이런 만화를 보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고, 이 정도면 행복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만화였다. 난 완전 당신의 팬이 되어버렸다니까요. 헤헤- 그러니, 다행이지요. 소개글에서처럼 당신이 그림도 조금 그리고 글도 조금 쓸 줄 알아서. 고마워요. 나 두 권 포개서 쌓아두고 언제든 우울할 때 금방 펼쳐볼 수 있는 자리에 둘 거예요.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요. 사람을 따스하게 하는 만화가라니. 나도 소복이님이 계속, 변함없이 만화를 그릴 수 있길 바래요. 세번째 책도 기다릴께요- 십이월 술 많이 먹고, 실수하지 말고, 조금 울고, 많이 웃으면서 보내세요. 아, 저 홈페이지도 매일 간답니다. 흐흐흐-
아, 나도 만화를 그리고 쓸 줄 아는 아이였다면, 내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오늘 그려두고 싶은 장면들이 꽤 있었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앉아 있었던 세종문화예술회관의 계단. 내가 좋아하는 닭스의 사장님. 그 닭스는 아주 특별해서 소금구이와 계란탕이 무엇보다 맛나고, 항상 외국뮤지션의 공연 실황 DVD만 틀어준다. 오늘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기타로 벽을 장식해 놓고. 그리고 가배나루의 라떼, 고양이, 이준기. 우리가 마신 밀크커피와 크림커피. 무릎을 달달 떨게 만들었던 십이월의 바람. 이런 걸 죄다 그려넣을 수 있을텐데. 아쉽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