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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른이 오는 소리
    모퉁이다방 2008. 12. 31. 22:38

        크리스마스 이브날에는 공연장엘 갔다. 무대의 오른쪽 좌석에 앉아서, 아니 거의 서서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노래하고, 나는 듣고. 그 날은 공연을 보러 온 김동률도 봤다. 물론 아는 척은 안 했지만. 1시간도 채 안 된 것 같은 2시간동안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새 노래도 듣고, 헌 노래, 아니 예전 노래들도 들었다. 토마스가 바운스, 라고 외치면 그를 따라 무릎을 까딱거렸고, '내가 손을 높이 치켜 올리면'이라고 노래부르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쉬지않고 박수를 치고 고함을 질렀다. 같이 간 친구는 오래간만에 행복하다고 했다. 공연장에 와서야 행복해지는 우리가 조금 서글프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그럴 나이인가 하는 이야기도. 마이앤트메리의 새 앨범이 아주아주 좋아서 매일매일 듣고 다닌다. 그때마다 나는 행복해진다. 여전히 음악 하나로 행복해지는 나이라서 행복하다. 아직도 내가 그런 나이라서 참 좋다. 

       친구들도 만났다. 친구는 아주 좋은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넓고 깨끗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우리는 다같이 입을 모아 이 집에서 살고 싶어,라고 종알거렸다. 새 집에서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와인도 마셨다.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들었다. 옛날 이야기도 하고, 지금의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씩 취해가고,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여전한 우리들이 좋았다. 그래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서른 살을 코 앞에 둔 세 명이 케익에 큰 초 두 개를 꽂아두고 우리의 이십대를 위해, 라고 외치며 촛불을 껐다. 그리고 또 한 번. 우리의 서른 살을 위하여, 라고 외치고 또 한번 촛불을 껐다. 우리는 모두 스무 살에 만났다. 나는 스무 살에 장미꽃 백 송이를 선물로 받아봤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던 남자를 짝사랑 했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어떤 사람은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줬고, 어떤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별명을 지어줬다.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들렀고,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작은 것에 행복했던 스무 살. 우리는 그 때 만났다. 

       크리스마스 날에는 롯데월드에 갔다. 아니, 롯데월드 볼링장에 갔다. 푸짐한 감자탕도 먹고, 맛있는 술집에 들어가 맥주도 한 잔씩 했다. 노래방에 가선 슬픈 노래만 골라 불렀다. 그리고 26일이 지나고, 27일이 지나고, 28일이 지났다. 29일이 오더니, 30일이 오는가 싶었다. 30일에는 줄리아 하트,를 좋아하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유령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뜨니 31일이었다. 2008년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 그 날이 왔다. 스물 아홉의 마지막 날. 

        나는 스물 아홉 전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마음이 아팠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가슴 아픈 멜로디와 가사를 마음 속에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른이 될 수 있을까, 늘 걱정했다. 제발, 그 서른이 내게는 오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데 스물 아홉의 나는 '서른 즈름에'를 들으며 조금 실망했다. 오랜 시간동안 내가 생각했던 서른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노랫말 속의 서른도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서글픈 서른이 아니라서, 아픈 서른이 아니라서, 버텨내기에 버거운 서른이 아니라서. 

        나는 내일 서른이 된다. 정확히 두 시간 후다. 그래, 만으로는 스물 아홉이예요, 라는 말을 달고 살 게 분명한 서른이다. 그런데 이건 '서른즈름에'의 서른이 아니다. 여전히 노래 한 소절에 가슴 설레는 서른이다. 아침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단 한 줄 때문에 행복해지는 서른이다.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를 꿈꾸고, 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길 꿈꾸는 서른이다. 매일 실수하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내뱉지만, 내일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하는 서른이다. 맛난 밥을 먹으면 행복하고, 좋은 영화를 보면 잠을 설치고, 별 것 아닌 칭찬 한 마디에 하루종일 웃고 있는 바보같은 서른이다. 이루지 못한 것, 이루고 싶은 것 투성이지만, 그래서 늘 남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뒤처지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고,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 다시 힘이 내는 서른이다. 그러니까 아직 어린애라는 소리다.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소리. 난 그런 서른이 썩 마음에 든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맥주를 가득 샀다. 예전에 사다놓은 와인도 있고. 오늘 밤은 집에서 조용히, 따뜻하게 즐길 거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스물 아홉이 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밤이다. 스물 아홉은 눈가가 촉촉해져 있겠지. 어떤 이별이든 헤어지는 건 슬픈 법이니까. 스물 아홉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꾸만 뒤돌아볼지도.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살며시 뒤돌아보며 씩- 웃는 표정을 잊지 못할지도. 그 눈가에 그득한 아쉬움도. 그렇게 금세 헤어진 스물 아홉이 그리워, 아쉬워하고 있으면 앞에서 저벅저벅 서른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릴 거다. 아주 예쁜 얼굴로, 아주 시원한 걸음걸이로 내 앞에 쓰윽 다가와 안녕, 1년동안 잘해보자,라고 커다란 손을 턱하니 내밀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눈물을 닦고 그 손을 얼른 내밀어 그 아이와 악수를 해야지. 나야말로 잘 부탁해, 라고 말해야지. 1년동안 힘든 순간이 많을텐데 니가 내 옆에서 힘이 되어줘, 부탁해야지. 내가 이렇게 쓰러질 일 없이 튼튼해보이긴 하지만, 가끔 툭하고 돌부리에 걸려 자주 넘어지니까 그 때마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달라고, 눈물을 닦아달라고 당부해야지. 넌 참 예쁘다고, 스물 아홉의 아이만큼 예쁘다고. 우린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스물 아홉에겐 좀 미안하지만 속삭여야지.

       아. 내게 서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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