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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인 - 요시다 슈이치가 맞습니까?
    서재를쌓다 2008. 2. 23. 14:52
    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 . . 지금 당장 거짓말을 죽이지 않으면 진실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p.347

        惡人. 요시다 슈이치가 악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슈이치 이름으로 국내에 발간된 책 제목들을 쭉 훓어보니 나는 그의 책을 반쯤은 읽었다. 그의 소설들이 좋은 이유는 그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일요일들'의 느낌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항상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는 그 한 명 한 명의 평범한 일상을 엇갈리듯, 무심하게, 스쳐가듯 이야기한다. 마치 어젯밤 건대입구역에서 탄 7호선의 4-1에서 지하철에 올라탄 나와 4-1에서 내린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한번도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라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듯이. 마치 영화 <접속>에서 좁은 계단 통로를 스쳐지나갔던 여인2와 해피엔드처럼. 그저 일상을 보여줄 뿐, 더 깊이있게 파고들지 않는 면도 좋았다. 그는 보여주고, 그것을 읽는 내가 깊이있게 파고들는 것. 심드렁하게 인물 한 명, 한 명의 풍경화를 그려나가다 보면 어느새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느낌. 잡아두고 싶지만 늘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평온한 일요일 오후같은 느낌. 그것이 요시다 슈이치의 이름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기대하는 느낌이다.

       그래. 왠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이 제목. 악인. 그리고 그 악인에 대한 이야기.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그래, 이건 요시다 슈이치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오후의 느낌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요일의 어느 시간을 꼬집어서 말할 수도 없는 느낌. 책을 받아든 순간, 너무 두껍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량부터 잘못된 거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렇게 두껍지 않아. 얇은 이야기. 무심한듯 방관자적인 시선. 단지 흘러가는 장소와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이건 너무 두꺼웠다.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 치고는 너무 극단적이였다. 그리고 너무 따뜻했다.

       <악인>은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된 악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요시다 슈이치는 500여 페이지에 걸쳐 '악인'을 이야기하는데, 중반을 넘어선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악인'이라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에 당신들이 생각했던 인물이 과연 맞는가, 라고 우리에게 물어온다. 분명 사회에서 바라 본 '악인'이라는 사람은 이 사람인데, 그 '악인'이 정말 악한 사람이 맞느냐고. 아니다. 물어온다기보다는 그렇지 않다,고 요시다 슈이치는 말한다. 누가 사회가 정의한 '악인'을 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고. 결국'악인'은 사회라고. 사회의 환경이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 규정짓고 있다고. 사회의 그릇된 시선들이 악한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p.439

       그러니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으면 했다. <악인>에서 요시다 슈이치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여러 인물들이 엇갈려서 등장하는 소설의 구성뿐이었다. 늘 엉성하게 연결되어있어 그것이 맞물려지는 순간 아,라는 쾌감이 느껴졌었던 전작들이 아니다. <악인>의 인물들은 처음부터 서로 깍지를 낀 듯 단단하게 연결되어져있어 맞물려지는 어떤 순간의 쾌감이 없었다. 소설의 말미에는 챕터들의 연결이 너무 인위적인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동작으로 이어지는. 실제 일본에서 신문 연재되었던 것이라는데, 연재 형식으로 읽었으면 느낌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은 처음부터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해 그것도 요시다 슈이치스럽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나 분명했다. 소설에서 강조하는 이야기가. 공기는 시간을 따라 장소를 따라 흘러 나가지 않고, 자주 머물렀다. 어떤 장소와 어떤 시간과 어떤 사람에게.

       긴 분량을 끊기지 않고 빠르게 읽었다. 재미도 있었다. 너무 신파적이라는 생각도 들긴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아쉬움이 밀려왔다. 변화가 없어서 그 사람의 작품이 싫어졌다는 사람 있지 않나. 영화든 책이든. 예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아니다. 변하는 걸 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읽으면 되지 않나. 내가 그 사람의 창작물을 여전히 찾는 건 내가 기대하는 그 사람의 느낌 때문이다. 전작들을 통해서 느껴졌던 고 좋은 느낌. 이야기가 달라지고, 인물들이 달라져도 여전히 느껴지는 그 느낌. 요시다 슈이치에게서 무라카미 류를 기대하지 않는 것. <악인>에서는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그 느낌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책이 또 나오면 나는 요시다 슈이치라는 이름을 기대하며 열심히 읽을거다.

        내일은 <일요일들>이나 한번 더 읽어야겠다. 일요일이니까. 요시다 슈이치를 제대로 느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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