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외출, 영화와 책 사이
    극장에가다 2008. 1. 19. 04:36
       아침에 신문을 뒤적거리다 <외출>이 금요일 MBC 주말의 영화인 걸 봤어요. <태왕사신기>의 성공적인 종영과 <무방비도시>의 개봉에 힘 입어 편성된 거 아닌가 혼자 생각하면서요. 2년 전 영화네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친구와 지금은 친구의 시누이가 되어버린 이와 함께였고, 영화를 보기 전에 명동에서 감자탕을 먹었고, 커피를 들고 컵홀더가 없던 2관에서 보았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허진호 감독의 영화라 보기 전부터 설레였고, 약간의 실망을 했지만 사람들 반응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극장을 나섰지요.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면 처음에 보이지 않던 세세한 것들이 보여요. 일상적인 소품이나 사소한 배우의 표정, 스쳐 지나갔던 대사 하나. 오늘도 <외출>을 보면서 2년 전 극장에서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좋았던 장면들과 그 때는 놓쳤던 사소한 것들을 찾으면서 재밌게 봤어요. 역시 <외출>의 가장 큰 오점은 배용준이라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다시 봐도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았어요. 한 여자의 남편같지도 않고, 소주 잔을 입 안에 털어넣는 동작은 어찌나 완벽하던지요. 배의 식스팩이며. 배용준은 완벽해지려는 사람이라 이제 보통 사람의 역할은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만 확고하게 했지요.

       영화 <외출>이 개봉했을 때 김형경 작가의 소설 <외출>이 같이 출간되었어요. 영화를 촬영하는 것과 동시에 김형경 작가도 시나리오만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요. 기획성이 짙어서 별로 안 땡겼는데 김형경 작가가 썼다기에 영화를 보고 바로 구입해서 읽었어요. 괜찮았어요. 같은 이야기와 한 시나리오에서 나온 이야기니까 많은 부분이 겹쳤지만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다른 매체구나를 실감했었어요. 오늘 영화를 다시 보고 소설의 몇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봤어요.   


       "차 좀 세워주세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인수가 길가에 차를 세우자 서영은 황급히 차에서 내려 텅 빈 도로를 가로질러 건넜다. 벌판을 향하고 서서 속엣것을 올리듯 울음을 토해냈다. 단 한 번의 울음에도 내장이 달려 올라올 듯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자세가 더 나쁘다는 것을 서영은 웅크리고 앉은 다음에야 알았다. 그 자세는 오래도록, 깊이 울게 되기 좋은 자세였다.
    외출, 김형경. p.73-74

        마지막에 인수의 아내가 깨어나고, 인수는 아내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아요. 그 남자 누구냐, 둘이 언제부터 만났냐, 나 속이면서 바람피니까 그렇게 좋았냐, 한 때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또렷하게 보며 차라리 죽지 그랬냐고 하던 사람이였는데. 그냥 인수는 이 말만 해요. '처음엔 궁금한 거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그렇게 되기 시작한 시작일 거예요. 저 장면.

       저는 이 장면이 참 좋았어요. 그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그랬어요. 여자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서 텅빈 도로 끝에서 엉엉 울어대던 장면이요.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일어섰겠죠. 남자는 그때까지 여자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테구요. 다시 운전하기 시작하는 창가에 어둠이 퍼렇게 내려 앉아있어요. 엉엉 울었고, 스스르 잠도 몰려오고, 저녁의 어스름이 눈 앞에 보이고, 이제 더 나쁠 건 없을 거라는 평온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예요. 사랑에 빠진 배우자를 대신해서 상갓집에 다녀온 여자의 울음과 남자의 담배. 감정을 다 토해내고 나서 찾아오는 침묵은 말할 수 없이 평온해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서영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식당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인수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영이 식당 출입문을 열고 나가 수족관 앞으로 걸어갈 때, 그제야 인수는 반쯤 풀린 눈빛인 채 서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취한 몸보다 마음이 더 많이 흔들렸다.
    외출, 김형경. p.98

        이 영화는 제게 손예진의 재발견이였죠. 이 배우, 예쁘고 새침하고 내숭떨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괜히 되지도 않는 질투하고 있었는데, 연기 잘하구나, 어쩌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지금은 그 생각이 <연애시대>를 거쳐서 완전히 굳어졌어요. 좋은 배우라고. 이 횟집 장면에서 손예진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하며, 정말 술 한 잔 하고 찍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은 그 취한 연기와 울먹이면서 이어가던 대사들에서 어찌나 사실감이 느껴지던지요. 진짜 같았어요. 진짜. 배우도 진짜. 술도 진짜. 서러움도 진짜. 맥주를 마시는 여자와 소주를 마시는 남자. 소주를 마시는 남자를 남겨두고 비틀거리며 맥주를 마시는 여자가 통유리 너머의 횟집 밖으로 나갔을 때, 남자처럼 여자인 제 마음도 흔들렸어요. 저런 여자라면.

        저는 <외출>의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았나봐요. 좋아하는 장면들도 죄다 여자가 크게 보이는 장면들이네요. 여자가 혼자 여관에서 병맥주를 시켜놓고 씨디피로 음악을 들으면서 마시는 그녀에겐 끔찍했던 그 시간도 기억에 오래 남구요. 남자가 '너무 멀리 왔나봐요'라며 뛰던 강변, 여자가 '죽이지 마세요'라며 화분을 건네던 병원. 오늘 본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억해둡니다. 어쩌다 세번째로 어딘가에서 <외출>을 보게 되면 오늘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도록.

       봄을 좋아한다던 여자와 눈을 좋아한다던 남자였어요. 어디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사랑은 스멀스멀 시작되는 건가봐요. 허진호의 사랑은 늘 그렇죠.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사랑이 한 번 다녀간 뒤에도, 배우자의 불륜을 앞에 두고도요. 그래서 지독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행이기도 해요. 4월에 눈이 내리면 어딘가에서 사랑이 스멀스멀 시작되고 있다는 거겠죠?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