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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2일, 길상사에서
    모퉁이다방 2010. 1. 3. 01:31

       길상사에 다녀왔다. 오전에 가는 길을 검색해놓고서 빈둥거리다, 오후 늦게 집을 나섰다. 우선 사가정까지 걸어서 이층에 봄에 들러 라떼를 테이크 아웃했다. 적어온 낙서를 잘못 보고 태릉입구에서 무턱대고 내렸다. 거기서 6호선으로 갈아타서 보문역까지 가야 하는 거였는데, 태릉입구에서 1111번을 타야 되는 줄 알았다. 의외로 가깝네, 생각했지. 오뎅 하나를 먹다가 아저씨로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고는 다시 낙서를 봤다. 보문역, 이라고 정확히 적혀져 있었는데. 다시 지하철로 내려가 6호선을 타고 보문역을 가 1111번을 탔다. 한성대역에서 아주 가깝더라. 이제 한성대역으로 바로 와야지. 길상사까지 가는 길을 걷는데, 초행길이라 얼마나 멀고, 아득하고, 으스스한지. 길상사까지 올라가는 길이 다 부자동네더라. 그래서 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고, 해 지고 난 뒤에 도착한 터라 어둑하고 아득했다. 겨우 도착한 길상사. 아, 내가 왜 오늘 이 곳에 와야만 했는지 한 번에 깨달을 수 있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길상사에는 쌓인 눈이 있었고, 목탁소리가 있었고, 바람소리가 있었고, 그 끝에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있었다. 어두웠고, 고요했고, 고요했다. 언젠가부터 겨울의 절에 가고 싶었는데, 드디어 겨울의 절에 온 것이다. 멀리 도심의 불빛들이 보였고, 바로 코 앞에 절의 빛들이 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뽀독뽀독 눈 소리가 났다. 멀리서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코 끝이 시리다 싶으면, 그 뒤에 이어 풍경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풍경소리가 들리는 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바람이 불어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면 바람이 불어왔고, 풍경이 그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얼굴 전체가 바람때문에 흔들렸지만, 오리털 잠바에 장갑에 목도리로 무장했으니 괜찮았다. 봄이 오면, 초여름이 오면, 그리고 가을이 오면, 이 벤치에 앉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처럼 춥지 않은 날일테고, 시원한 바람이 불테고, 그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릴 테고, 그 바람의 끝에 풍경소리도 들릴테니. 그 풍경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고 있어도 좋겠다 싶었다.

        길상사는 백석의 연인이었던 이가 한 때 요정으로 운영했던 곳이라 한다. 그는 백석을 사랑했고, 백석의 시를 사랑했다지. 그는 양반이었으나 집안이 몰락해 기생이 되었고, 백석과 그는 사랑했으나 백석의 집안에서 반대해서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지. 요정은 잘 되었고, 그이는 그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겠다고 몇 해를 설득했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결국 받아들였고, 그이의 법명은 길상화였다고. 그이는 그 돈이 아깝지 않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 돈은 백석의 시 한 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눈 오는 날 유해를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했단다. 그이는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고. 이 글을 어디선가 읽고 나는 오늘 길상사에 꼭 가야지 결심했다. 

        길상사로 올라가는 눈길 속에서는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소설 속 그 아이와 꼭 닮은 아이를 안다. 그 아이는 내게 항상 움츠린 어깨를 보였는데, 나는 늘 그 어깨를 감싸안고 싶었다. 정이현이 만든 세계에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그 아이가 있다. 그리고 시와의 노래와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었다. 겨울에 이 노래들이 내 곁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다. 내려와서는 성신여대까지 걸었다. 그 근처에 한 때 내 친구들이 두 명이나 살았다. 그리고 미아까지 가서 통닭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난 언제나 그렇듯이 횡설수설했고, 그 아이는 내 말을 고맙게도 들어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종기와 루시드 폴의 편지를 다 읽었다. 내일, 아니 오늘은 1월 3일. 벌써 3일이 지났다. 길상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도심의 불빛들을 내려다보면 되새겼다. 잘 될거야, 잘 될거야. 새해부터 새 일을 시작한다. 부디 좋은 사람들과, 많이 힘겹지 않기를. 꿈을 잃지 않기를.





    길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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