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1월의 일
    모퉁이다방 2008. 11. 15. 21:22

        11월의 일. 영화 <미인도>를 시사회로 봤다. 그 날, 아직 천오백원짜리 해장국이 서울 한 켠에서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날, 낙원상가 앞 헌책 리어카에서 김난주가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렉싱턴의 유령>과 살림출판사에서 96년에 발간된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를 이천원 주고 샀다.
     
        11월의 일. 나는 요즘 영화도 많이 보지 않고, 책도 많이 읽지 않고, 그 전보다 술을 더 마신다. 다행인건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자주 걷지도 않고, 뛰지도 않고, 그 전보다 음악만 많이 듣는다. 자주 우울해진다. 가끔 내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지낸다. 밥을 먹고 나면 마음이 허전해져, 진한 라테를, 과자를, 파리빠게트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는다. 11월의 날씨가 이랬나, 생각한다. 11월의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겁이 날 지경이다. 그래서 싸늘한 예전 11월의 날씨를 닮은 옛노래들을 찾아 따라부른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마지막 부분. 세 번은 읽었다. 이 부분만. 나는 누군가 이 말을 나보다 먼저 해버릴까봐 두려운 것처럼,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나는 권여선이 좋아. 정말 좋아. 나는 권여선이 좋다. 정말 좋다. '사랑을 믿다'를 읽은 그 날밤 나는 생각했다. 따라쟁이인 나는 또 언젠가 기찻간같은 술집에 가게 되면 이 소설을 생각하겠구나. 나물이 기본안주로 나오는 술집에 가면 이 소설을 생각하겠구나. 맥주에 소주를 섞어 소맥을 마시게 되면, '뽀족한 심처럼 독한 소주 맛을 느끼게' 되면 말이다. 그리고 결국엔 어느 순간 기억에 남는 거라곤 한마디도 없는 길고긴 수다 끝에 '그래,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면, 이 소설을 생각하겠구나. 권여선의 소설을 읽으면 어김없이 맛있는 술 안주가 땡기고, 술이 땡긴다. 

       어제는 등갈비에 소주를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아저씨들만 오는, 그래서 주인아줌마가 항상 은근하게 술에 취해있는 동네 맥주집에 갔다. 여긴 안주도 맛있고, 생맥주도 맛있다. 그리고 멀리서 온 친구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홍순관의 '바람부는 날'을 찾아 들으시라. 패티킴의 '이별'을 술에 기분좋게 취한 날, 노래방에서 꼭 부르시라. 임상아의 '나의 옛날 이야기'는 골목길을 걸으며 혼자서 흥얼거리기에 좋다. 오늘은 내가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 '90일 사랑할 시간'의 주제곡 JM의 '사랑은 간다'를 찾아 들었다. 이 드라마, 정말 좋았는데. 이바디의 '그리움'도 좋고. 김광석의 '그날들'은 캬. 015B의 '모르는 게 많았어요'도. 이 모든 건 내 엠피쓰리 플레이어의 폴더명 '가을, 마음이 아픈 계절' 안에 들어있는 노래들이다. 유치하고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가을이 마음이 아픈 계절인 건 분명하니까. 그러고 보니 2008년의 가을도 간다. 나는 오늘 조그마한 새끼상어가 등장하는 꿈을 꿨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