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안 가봤지만 숲님이 추천해 주셔서 언젠가 가 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동네 북카페가 있다. 한번도 안 가본 주제에 블로그를 즐겨찾기 해 놓았는데, 어느 날 소규모의 일본어 스터디를 진행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일본인이 가르쳐주고, 수업 속도도 빠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하려고 한다는 설명과 함께. 이거다 싶었다. 공부도 하고, 새로운 사람도 사귀고. 전화로 문의를 했는데, 설명을 해주시는 분의 목소리와 말투가 좋았다. 목소리 만으로 좋은 사람이구나 신뢰감이 느껴졌다. 카페 스텝인데, 스터디에서 함께 공부를 할 거라고 했다. 일본여행을 가면 서점에 가곤 하는데, 무슨 책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할 결심을 했다고. 여러 가지로 좋았는데, 수업료가 비쌌고, 히라가나부터 수업을 시작한다고 해서 망설여졌다. 결심이 서면 연락을 달라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키나와에서 마지막 날, 돌아가서 해보기로 결심했다. 왠지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어도 처음부터 단어 하나하나 빼먹지 말고 익히는 계기를 만들자 싶었다. 마침 여행이 끝나고 먼저 연락이 왔다. 그런데 요일이 바뀌어서 퇴근하고 가기엔 좀 벅찬 시간이었다. 셔틀이 없는 요일이라. 그래서 좀더 나중에 함께 하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오키나와에 다녀와서 열심히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는 말과 함께. 그러자 그 분이 이 책 얘길 했다. 오키나라에 울랄라라는 헌책방이 있는데, 그곳을 가보기 위해서라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오키나와라고. 그래, 내게도 이 책이 있다. 오키나와 가기 직전 사 두었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책. 카페 스텝 분 덕분에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사실 책을 구입하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가이드북을 사야했는데, 가이드북이 헌책이라 배송료가 들었다. 배송료를 없애려면 다른 책을 한 권 더 사야했는데, 소개글과 독자들의 평을 읽는데, 아무래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구입을 했더랬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자, 꽤 재밌었다. 소설도 아니면서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친구와 함께 치맥을 하기로 한 날은 먼저 가게 안에 들어가 맥주를 시켜놓고 친구가 올 때까지 야금야금 읽었다. 마지막의 중국 이야기는 그저 그랬는데, 그 전의 오키나와 이야기가 재밌었다.


   저자는 도쿄의 서점에서 근무를 했는데, 오키나와 나하시에 분점이 생기자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지원을 했다. 오키나와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하 지점에서 2년동안 근무를 했다. 향토책 코너를 맡으면서 오키나와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오키나와와 오키나와 사람들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특이하게도 오키나와 지역 출판사가 출간하는 오키나와 현산 책이 많다. 그 책들은 주로 오키나와 내에서만 유통이 된단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고 한다. 그래서 오키나와의 역사나 문화에 관련된 책이나, 오키나와 출신 작가가 쓴 책은 신기하게도 꽤 많이 팔린단다. 이런 이야기들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확실히 오키나와는 본토와는 다른 독특한 자체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오키나와에는 헌책방들도 많은데, 어쩌다 저자는 그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책방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누군가 한번 해봐, 라고 권유하는데 그래, 진짜 한번 해볼까,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우다 도모코 씨는 오키나와의 복작거리는 시장 안에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서점을 열었다.


    서울의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키나와의 울랄라 씨를 상상했다. (울랄라는 저자의 별명이다) 반찬가게, 우산가게로 복작거리는 시장 안에 조그맣게 열려있는 서점, 작은 공간의 벽면에 책장이 꽉 차 있고 그 책장에 책들이 꽉 차 있는 모습, 그 서점 한 켠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울랄라 씨. 오키나와 여행을 마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여행 전에 먼저 읽고 가보질 않은 걸 후회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가보지 않은 것도 좋았다, 라고 생각했다. 가보지 않은 대신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책에는 울랄라 서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상은 제법 근사했다. 사실 울랄라 씨가 여자라는 사실도 책의 중간 즈음 울랄라 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나오면서 알았다. 그 떄의 충격이란! 지금까지 정말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러웠다.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다는 꿈을 결국 이뤘고, 그 꿈이 일상이 되었고, 꿈이었던 시절보다 현실은 녹록하고 조금은 무미건조할 수 있지만, 그 일상을 기록하며, 또 하나의 꿈이었을 게 분명한 책까지 썼으니. 그걸 오키나와 사람 뿐만 아니라, 본토 사람들도 읽고, 일본 사람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 나같은 외국인들도 읽고 있으니. 아아, 책을 보면 중국 독자도 있었다. 일상이 이야기가 되고, 마침내 책이 된 사실이 부럽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것. 앞으로도 열심히 읽겠습니다아. 울랄라 씨도,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서점도 힘내주세요. :)



   "오키나와 좋아요?"

   "네."

   "어디가 어떻게?"

   "살기 좋고, 사람들도 좋고요."

   진심이었다. 하지만 오키나와 역사와 서민 생활에 대해서는 제쳐둔 채 내게 득이 되는 부분만 보고 오키나와를 판단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처음 한 해는 정신없이 살았다. 두 번째 봄을 맞으며 이후의 삶을 고민할 여유가 좀 생겼다. 오키나와에 오기 전에 상사는 "2년만 다녀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겨우 2년 만에 도쿄로 돌아간다면 관광객과 다를 게 없으니까.

   오키나와 생활을 단순한 경험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애써 큰맘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정말 오키나와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딱히 답을 내지도 못한 채 떠나야 한다니...

   고쿠사이 거리를 걷다가 선물 가게에 들어섰을 때 예의 "보고 가세요"란 권유를 듣는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이방인이 아닌 걸까? 전근을 핑계로 벗어나려 했던 쳇바퀴 같은 삶을 이제는 끝내야 했다.

-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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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from 서재를쌓다 2016. 7. 27. 23:00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몸 속 어딘가에, 아니 마음 속 어딘가에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는 것 같다고. 전혀 잊고 있었던 말인데, 어느 순간 문득 떠올라 나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의 그이는 이런 마음이었던 거구나. 그때의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그 마음을 백프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다. 그 말들은 아주 소소한 말들부터 의미심장한 말들까지 다양하다. 따뜻한 말도 있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말도 있다. 얼마 전 만난 남희언니는 친구 얘기를 하며, 그즈음엔 술을 마시면 신이 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어, 신이 나는 게 미안했어,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어느 저녁 친구네 집으로 가는 지하철 계단 위에서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 언니는 언젠가 그해에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부럽다고 하자, 언니는 그만큼 외로웠다는 거야, 식의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극장 안에서 혼자 있다가 생각이 났다. 차장님의 내 나이엔 기름종이가 필요없어, 라는 말도. 흑흑.


   소설의 경우도 그렇다. 어제 일본의 장애인 살인사건을 접하면서 이 소설이 생각났다. 이 소설은 살인사건 이야기도 아닌데, 생각이 났다. 같은 일본의 이야기라서 생각이 났던 건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거액의 은행돈을 횡령한 주부의 이야기를 범죄 자체보다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냈기 때문인 것 같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떻게 자라났고,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 사건 후에 어쩔 생각이었을까. 이 소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이 말은 한때는 함께 돈을 쓰는 게 즐거웠지만 이제는 그녀의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진 불륜의 연하남이 주인공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태국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이렇게는 더는 살 수 없을 거 같다 결심하고 라오스 국경을 넘으려다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거 같은 경찰에게 중얼거리듯 건넨 말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여기'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고, 그보다 더 많은 걸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리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뒀고 임신을 하고 싶었지만 잘 되질 않았다. 집안일만 하며 계속 있는 것이 그래서 일을 구했다. 은행의 파트타이머였다. 일하는 즐거움을 소소하게 느끼다가 어느 날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살 때 현금이 부족해 고객의 돈에 손을 댄 이후로 리카의 인생을 조금씩 달라졌다. 한 아이를 만났고, 횡령이 시작됐다. 조금만 조금만, 금방 채워넣으면 돼, 했던 것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의 횡령으로 이어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리카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소설을 읽고 꽤 지난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내 안에도 리카가 있다는 걸. 나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이 이야기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도 그만큼 좋다고 해서 보았는데, 정말로 소설도 좋고, 영화도 좋다. 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이야기같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 중 뭘 먼저 보든, 나중에 다른 것도 꼭 보는 걸 추천한다. 영화는 리카가 연두빛이 가득했던 커다란 창을 깨어부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고, 소설의 경우는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태국에서의 도피생활 부분이 좋았다.

   나온 것은 닭고기와 바질 볶은 것에 달걀부침을 올린 밥이었다. 리카는 하야마 것까지 맥주를 추가 주문하고 먹기 시작했다. 입에 넣자 은근히 달았지만, 삼키는 순간 놀라울 만큼 매워졌다. 매워, 라고 조그맣게 말하자 하야마가 웃었다. 리카는 너무 매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맥주를 마시고 식사를 계속했다.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식사하고, 사람과 웃는 것이 얼마 만인지. 방심하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추억 때문에 좀 전까지 단단하게 뚜껑을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물이 새듯 어느덧 리카의 마음속에 추억이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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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불어넣기

from 서재를쌓다 2016. 6. 16. 21:59





   이 책의 본래 제목은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이었다. 나는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일 때 이 책을 샀다. 누군가 추천해 준 책, 이라고 기억한다. 아니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따라 읽은 책, 일 수 도 있다. 이 책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편 '혼 불어넣기'를 오키나와에서 다시 읽었다. 세상에, 오키나와에서 이 단편을 다시 읽다니. 나는 이 단편을 다시 읽기 전, 오키나와 북부 버스 투어를 했다. 우리는 뚜벅이었기 때문에 북부로 가려면 투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투어에서 갔던 장소들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지만, 버스 안에서 가이드에게 들었던 오키나와와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가이드가 말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성향은 분명 일반화의 오류일 거다. 모두가 똑같을리가 없지. 그렇지만 나는 상상해봤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늘을 즐기는 사람들, 날씨 때문에 출근을 하지 않는 사람들, 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들, 여러 번의 이혼이 흉이 아닌 사람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 바다는 뛰어드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늘 밝고 긍정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만든 역사적인 사건들. 나는 오키나와에 와서 오키나와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다. 그 전엔, 이 책을 통해 오키나와를 알게 되었다.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에 태어나, 오키나와를 사랑하고 아끼고, 오키나와의 이야기를 쓰는 오키나와 작가이다. 


   나는 오키나와의 바닷가에서 '혼 불어넣기'를 다시 읽었다. 남부의 모래가 가득한 바닷가이면 좋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키나와의 어두운 역사 중 하나인 미군기지가 있었던 아메리칸 빌리지의 아라하 비치에서 읽었다. 나는 둘이라고 말하고 둘의 값을 치르고 하나만 가지고 냉큼 나온 바보같은 외국인으로 넷째날 아침을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들고, 전날 저녁 봐두었던 공간까지 걸어갔다. 그곳은 내가 보기에, 아라하 비치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육지였다. 길이 있었고, 그 길의 끝에 자그마한 크기의 동그란 섬이 있었다. 그 작은 섬에 발을 디디면 온 사방이 바다였다. 오키나와의 커다란 구름이 더 가까이 느껴졌다. 섬의 한켠에는 바다를 바라보고 쭈그리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는 센언니가 있었다. 나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가지고 간 책을 펼쳤다. 그러자 몇 년 전 처음 만난 고타로의 혼이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우타는 그 나무로 다가가다가 그늘 밑에 옆모습을 보이고 앉은 한 남자를 보았다.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를 보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 보니 역시나 고타로의 혼이었다. 우타는 그 옆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의 목덜미에 바람을 훅 불어 넣었다. (...)

   고타로의 혼은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짧게 깍은 머리, 흰 터럭이 섞인 다박수염, 고기잡이와 농사로 까맣게 탄 얼굴을 두 팔로 껴안은 무릎에 대고 있었다. 늘 애교스러운 웃음을 띠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몹시 쓸쓸해 보였다. 우타도 바다로 눈을 돌리고 잠시 함께 바라보았으나, 하얀 햇빛이 쏟아지는 바다는 눈만 부실 뿐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고타로, 후미도 그렇고 겐타로와 도모코도 걱정하고 있어. 빨리 집으로 가자."

   그렇게 말을 걸어 보았으나 고타로는 반응이 없다. 우타는 보자기를 풀어 쟁반에다 쌀을 소복하게 쌓아 올리고 아와모리를 술잔에 따랐다. 백 엔짜리 라이터로 향에 불을 붙여 모래에 꽂은 다음 앉음새를 고쳤다. 합장을 하고 고타로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우타는 중얼거리듯이 혼이 들기를 빌었다.

- 22~23쪽

 


   전날의 버스 투어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는 추라우미 수족관이었다. 영상에서 본 것처럼, 커다란 고래상어가 아름답게 유영하는 곳.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물고기들의 탈출을 상상했다. 우리에게는 커다랬지만, 물고기들에게는 너무나 좁은 공간이었다. 고래상어와 쥐가오리들은 금방 갔던 곳을 또 헤엄쳐가고, 또 헤엄쳐가고, 또 헤엄쳐가고 있었다. 그들에겐 모험도 없고, 시련도 없었다. 바로 수족관 앞이 드넓은 바다인데. 돌고래 쇼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건너편 바다거북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수조 앞에 걸터 앉을 수도 있고, 수조를 가까이 만질 수 있는 그곳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어떤 바다거북의 목과 등에는 이끼가 가득 자라 있었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그 바다거북을 따라 걸었다. 어떤 바다거북은 뭔가를 알고 내 쪽으로 오는 것 같아 손을 내밀고 눈을 맞춰보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내 손과 눈을 지나쳐 갔다.



   어디에선가 산신과 노랫말 잇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우타는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다. 밤에 혼자 바닷가에 나와 본 게 언제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에도 오미토도 유키치도 전쟁으로 죽고, 자기만 늙은 몸으로 이렇게 바닷가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외로워져 우타는 고타로의 혼에게 말을 걸었다.

   "뭘 보고 있는 거냐?"

  대답이 없다.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빛이 흐려지자 고타로의 모습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안 가려느냐, 고타로야?"

   우타는 일어서면서 물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를 응시한 채 고타로는 아주 약간 고개를 갸우뚱거린 듯이 보였다. 나뭇잎 그림자가 움직인 탓에 그렇게 보였는지도 몰랐지만, 자기 마음이 좀 통한 것 같아 우타는 합장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 32쪽



   바다거북도 좁은 수조에 갇혀 헤엄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지 이 곳은 그래도 살만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개의 수조가 있고 그 앞에 티비가 있었다. 티비에서는 새끼바다거북이 살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화면이 반복해서 나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작디 작은 생명체들이 온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장면 또한, 수 년 전 메도루마 슌의 소설을 읽고 찾아봤던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바다거북관의 공간이 그다지 생경하게 느껴지지도, 그 속을 헤엄치는 바다거북들도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고타로의 아버지 오미토가 빼앗아 가려한 알에서 부화한 거북이일지도 몰라, 어쩌면 고타로의 혼이 따라간 새끼 거북이들일지도 몰라, 이런 말도 되지 않은 상상을 마구마구 했다.



   그렇게 모두가 바다 저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모래 결이 무너져 내린다. 우타는 일어나서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까만 무리를 지켜보았다. 달빛 아래 부채꼴로 퍼지면서 바다로 향하는 새끼 거북들의 속도와 기세에 우타는 놀랐다. 양옆에서 달려든 모래게들이 새끼 거북을 집게발로 잘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옮겨 갔다. 그래도 여전한 기세로 새끼 거북들은 잇따라 바다로 들어갔다. 새끼 거북의 무리가 사라지자, 우타는 연안의 산호초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바다거북이 부화하는 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새끼 거북을 노리고 바닷가 가까이로 몰려드는 큰 물고기들 때문이었다. 그 물고기들을 잡으려고 아버지는 작살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하얀 물결이 출렁이는 데까지 가는 새끼 거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타는 해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마스 나무 잎사귀들이 살랑거리고, 아단 숲 속에서 소라게가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난다. 목마황 방조림이 까만 벽이 되어 바다와 마을을 갈라놓아, 바닷가에 있는 사람은 우타 혼자뿐이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몰려와 물가로 내려간 우타는 파도에 발목을 적시며 걸었다. 밀려드는 파도에 바다반딧불이가 빛났다가 사라진다. 파도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우타는 멈춰 서서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그러나 기도는 그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 54~55쪽

 

  

   이야기를 모두 읽고, 눈을 감으면 메도루마 슌이 그려낸 슬프고도 따듯한 바닷가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소설을 쓴 그의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수 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작년부터 운명을 믿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여행 이틀째, 남쪽 바다에서 물이 빠진 바다를 보고 나하 시로 돌아오던 버스 안, 핸드폰에 알림 메시지가 도착했다. 믿을 수 없게도, 메도루마 슌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는 메시지. 제목은 '신의 섬', 부제는 '오키나와 현대소설선'.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책을 주문했고, 그 책은 지금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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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남쪽 나라에서 보낸 나의 겨울은 따뜻했다. 그 200일 동안 긴장을 풀고, 서두르지 않고,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고요히 호흡을 고름으로써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필요한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울에서보다 생활비가 훨씬 적게 든 건 물론이다. 일상보다 설레고, 여행보다 편안한 날들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겨울이 오면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게 될 것 같다.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모두가 같은 곳을 찾아가 같은 것을 소비하고, 같은 사진을 찍고, 같은 방식으로 여행하게끔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나만의 여행법을 찾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는 여행자가 있다고 믿는다.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비싼 여행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20대의 청춘들이, 살아남기 위해 달려왔지만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건가 가끔씩 두려워지는 30대와 40대가, 아이가 성장하거나 직장에서 은퇴해 이제야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50대와 60대가, 여전히 젊은 정신을 간직한 70대와 80대가 이 책을 읽고 떠날 수 있다면, 그래서 저마다의 따뜻한 남쪽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날 것 같다.

- p. 8-9, 프롤로그

 

 

    지난 남미 이야기에 실망을 한 부분이 있어, 따뜻한 남쪽 나라 이야기를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는데, 표지의 바다빛깔이 너무 고아서 바로 주문했더랬다. 이번 여행기는 프롤로그에서부터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 추위를 피해 떠난 남쪽 나라에서 걷고, 먹고, 생각하고, 만난 이야기들. 특히 치앙마이에서는 E언니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추천해준 블로그의 주인장이 등장해서 깜짝 놀랬다. 그녀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태국 남자와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그 남자의 나라에서 아이 셋을 낳고 살아가고 있는 강하면서도 고요한 사람. 영화 <수영장>의 촬영지였던 호시아나 빌리지 이야기도 나온다. 언젠가 치앙마이에 가게 되면 이 두 곳에서 묵어보고 싶다.

 

    올해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 중이다. 하반기에 또 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름성수기 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어디가 좋을까. 아직 형편없지만 일본어를 배우고 있으니 써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기도 하고, 일본은 여러 번 갔으니 가본적 없는 이국적인 곳으로 가고 싶기도 하고. 일단 교토 한 곳에서 느긋하게 머무는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혼자서 이국에서 생일을 보내보는 것도 생각중이다. 교토의 이곳저곳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한 책자가 있어 주문해놓았는데, 지금 실력으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게 되면 한 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 김남희처럼 하루정도 그 나라 전통음식을 배워볼 수 있는 요리수업도 꼭 한번 들어보고 싶다. 이런저런 꿈들을 꾸어본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오다니, 참 잘했다. -p.29

 

  내 이름은 그의 추억 속에 잠시 머물 것이다. 서치의 이름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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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들

from 서재를쌓다 2015. 12. 27. 19:40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그해 읽었던 최고의 소설이었다. 어떤 단편은 세 번이나 읽었다. 그 단편의 어떤 장면이 머릿 속에 계속 맴돌아 다시 꺼내 읽었다. 여자주인공이 늦은 밤 뒷마당에서 혼자 조용히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세 번 읽어도 좋았다. 작가의 이름이 외워두고, 언제 새 책이 나오나 주시하고 있었는데, 지난 9월에 새책이 나왔다. 그것도 장편소설. 출간되자마자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장편은 읽으면서 첫 소설집만큼의 느낌은 없었다.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오빠가 있고, 여동생이 있다. 아빠와 엄마는 오랜 갈등 끝에 이혼을 했고, 오빠는 게이고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지만 미래에 대한 의욕이 없다. 여동생은 폭행사건에 휘말린 남자친구의 도피를 도와주고 있다. 소설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챕터에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려 550쪽이 넘는 긴 이야기다. 처음에 좀 심드렁하게 읽다가, 점점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이 가족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형편없었지만, 어떤 면에서 모두 이해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여동생의 남자친구 라자를 포함해서. 왜 이렇게 행동할까 답답하기도 했지만, 내가 그이들이라고 생각해보면 그이들처럼 행동했을 것 같았다.

 

   이 책에 반한 건 마지막 결론때문이었다. 여동생은 멕시코 국경을 앞두고 A와 B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녀는 B라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A라는 선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B라는 길에서 잘 살아나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 선택은 그녀를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이 삶이기에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해 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녀와 라자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그녀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어려운 일이었다. 무척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녀는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았다. 멋졌다. 그애의 이름은 클로이, 아니 앤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이들 가족이 아니라, 막내 클로이의 남자친구 라자이다. 나는 그애한테 한동안 반해 있었다. 라자의 친구로 승이라는 한국계가 나오는데, 좀 비열한 역할이라 읽으면서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좋았던 구절들.

 

 - 언젠가 N언니가 말했다. 그해 언니가 극장에서 본 영화가 지금까지 살아온 해 중에 가장 많았는데, 그건 외로웠단 증거라고. 그리고 언젠가 시옷의 모임에서 왜 책을 읽느냐고 S가 물었는데, 나는 내 삶이 무료해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라자도 그랬다. 

 

   그때 내 유일한 안식처가 영화관이었어, 라자는 말했다. 그곳에서는 몇 시간이고 날 잊어버리고 주위의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어. 어둠 속에서는 내가 누구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까. 최소한 몇 시간 동안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었지. 그 몇 시간 동안은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프랑스령 유럽 국가로도, 1960년대의 런던으로도, 미주리 동부 평원의 구릉지대로도. 매주 금요일 밤이면 난 혼자서 뉴어크에 있는 달러시네마에도 가고, 주말이면 NYU에서 열리는 영화제나 뉴욕의 엔젤리카 극장에서 하는 특별상영회에도 갔어. 내 영화 공부가 시작된 곳이 바로 거기야. 그는 말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고다르를 알게 됐지. 

p. 345

 

- 가족은 각자의 이유로 모두 외로웠다. 엄마의 이야기. 그녀는 이른 나이에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그녀의 가정은 부유했지만, 계속 행복하지는 않았다.

 

   겨울방학이면 때때로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오곤 했다. 뒤뜰 베란다에 앉아 수영장을 내다보며 맥주를 마시면서 그들은 실패한 연애나 늘어가는 카드빚, 학자금 대출 등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시에 그녀의 집과 수영장과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너무나 안정되고 어른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떠나고 나면 그녀는 가슴에 밀려드는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어쩐지 뒤에 남겨진 듯한 느낌. 그다지 원했던 적도 없으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진 어떤 삶을 속임수에 빼앗겼다는 느낌.

p. 386

 

 

  1972년생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 그의 다음 소설도 여전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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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제본해 갈까 했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니 7권 정도로 제본을 하고 하루에 한 권씩 들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았다. 고작 서문을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황홀할 지경이었으니.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 시인이 쓴 글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봤다. 결국 게으른 나는 제본할 곳을 찾지 못했다. 두꺼운 책은 서울에서 천천히 읽기로 했다.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혼자 잘 해내가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는데, 이 소설이 그런 이야기인 것 같았다. 곡예사 언니랑 언젠가 이 책 얘길 했는데, 언니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중에 이 책이 제일 좋다고 했다. 나는 나 안 읽었나봐요 기억이 안 나요, 하니 언니가 너도 분명 읽었을 텐데, 했는데. 이번에 주문하면서 보니 내가 주문을 했던 책이었다. 그 책은 어디로 간 걸까. 읽은 기억은 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시집도 챙겼다. H가 읽다가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봤는데, 그 시가 너무 좋아서 시집 제목을 묻고 냉큼 구입했던 시집이었다. 그리고 이 책. 시옷의 모임 네번째 책. 내가 고른 책. 좋다는 이야기들이 많아 사두었던 책. 때를 기다리며 우리집 책장에서 조용히 견뎌 주었던 책.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아, 음악도 가득 담아갔다.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아서, 멜론 30곡 다운로드 결제를 하고 가득 담아갔다. B는 서울전자음악단의 '꿈이라면 좋을까'를 추천해주며 자기 전에 꼭 들으라고 했다. 동생의 작은 스피커를 가져갔다. 음악을 틀고,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눕고, 눈을 감으면 내 앞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니 평생 봐 온 것 같은 별들이 반짝였다. 폭신한 밤길을 기분좋게 혼자서 걷는 느낌이었다. 아침을 맞이할 때, 밤을 보낼 때 어김없이 음악을 들었다. S가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를 찾아보다 좋아하게 된 자우림의 노래들도 내게 힘이 되어줬다. 담아간 음악은 여러 번, 모두 들었지만, 책은 이것만 읽었다. 169페이지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환상의 빛'이다."로 끝나는 책. 네 편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부분은 슬펐고, 어떤 부분은 아름다웠다. 어떤 부분은 쓸쓸했으며, 어떤 부분은 다행이었다. 외롭고 쓸쓸했지만, 우울하지 않았다. 그게 꼭 포르투갈에서의 나 같았다. 그래서 이 한 권만 읽은 게 더 좋았다. 어떤 다른 이야기와 섞이지 않은 이번 여행의 감정이 고스란히 이 한 권에 담겨 있다.

 

   그곳에서 내가, 귀퉁이를 살짝 접어놓은 부분들.

 

    "배가 아파."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졌습니다. 초경이 무서웠던 게 아닙니다. 저는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도로 사라진 할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이나 막벌이꾼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낮인데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축축한 방 가득히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장지문을 쾅 닫고 피가 굳어서 딱딱해진 팬티를, 스커트 위로 언제까지고 꼬옥 누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달거리가 시작될 때는 어김없이 이유 없이 썰렁해지고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마 초경이 있었던 순간, 파친코점의 냉방으로 얼음처럼 차가워진 땀에 절어 있었던 탓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p.31, 환상의 빛

 

   울면서 아야코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아닌 휑뎅그렁한 들판에 홱 내던져진 듯한 쓸쓸함이, 꽉맨 오비 위로 아야코의 몸을 더욱 조여 왔던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생각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부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이 남편을 원했던 적이 없다. 이혼하고 나서도 그런 쓸쓸함을 느낀 적은 없다. 자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담백한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슈이치까지 죽게 했다. 맥락도 없는 그런 생각이 한꺼번에 분출해서 아야코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조와 단 둘이 앉아 있는 것이 지금의 아야코를 한층 더 애달프게 했는지도 몰랐다. 아야코는 일어나 잠자코 옆방으로 갔다. 오비를 풀고 기모노를 벗고 갈아입을 원피스를 든 채 잠시 멍하니 방 한구석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내가 입원해."

- p.94, 밤 벚꽃

 

   갑자기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따스한 날씨인데도 목에서 뺨에 걸쳐 피가 거꾸로 오르는 증세는 허리나 장딴지나 발끝의 열을 빼앗았다. 슈이치의 사고 이래 달거리의 징후도 불규칙해졌고, 세 달쯤 전에 희미한 것이 있었을 뿐 그것으로 뚝 그쳐버렸다. 그런 나이이기도 했지만 아야코는 자신 안에 뭔가 살아 있는 것이 소실되어간다는 불안과 초조를 느꼈다.

- p. 103, 밤 벚꽃

 

   그것은 확실히 울음소리였다. 닫힌 칸막이 커튼 너머에서 노인이 울고 있었다. 나는 놀라 가만히 귀를 귀울였다. 열차의 진동이나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섞여 숨죽여 우는 노인의 울음소리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었다. 통절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낮고 긴 울음소리였다.

- p. 154, 침대차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열차가 멈췄다. 신호를 기다리는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울음소리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나는 커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는 불규칙한 율동에 몸을 맡겼다. 노인의 울음소리가 끝난 것으로 일단락된 듯,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잠깐 자고 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자 이른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차 안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 p. 163, 침대차

 

 

   덧, 포르투갈에서 내내 들었던 자우림의 '반딧불' 이 너무너무 좋아 통화연결음으로까지 설정해놓았는데, 늦은밤 연락이 되지 않는 언니를 찾는다고 여러 번 전화를 했던 동생들이 다음날 일제히 말했다. 당장 바꿔. 귀신 나오는 줄 알았어.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내 취향을 무시하는 거야? 핏대 올리며 싸웠는데, 다음 날 조심히 들어보니 무섭더라. 당장 바꿨다. '반딧불'은 화창한 여름 낮에 듣는 걸 추천합니다아. 그러면 분위기 좋은 여름밤이 기분 좋게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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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from 서재를쌓다 2015. 7. 30. 23:32

 

 

 

    동생은 박웅현 빠순이다. 어디서 박웅현을 알아와서는 <책은 도끼다>를 매일 들고 다니며 읽었다. 모든 부분이 좋다고 했다. 밑줄을 얼마나 그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박웅현이 나온 팟캐스트를 같이 듣자고 했다. 집에서 둘이서 낮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술도 들어갔으니, 좋다고 듣자고 했다. 박웅현이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우리 둘에게 필요한 거였다. 내가 말했다. 다시 들어보자. 방금 자존감 부분. 다시 들었다. 다시 들어도 좋았다. 다시 들어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였다. 동생이 물었다. 한번 더 들을까?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가 우리는 그 부분을 녹음하기로 했다. 동생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들을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어느 쓸쓸한 귀가길에 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 밤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의 시도 뒤에 우리는 말끔히 '자존감'을 녹음했다. 그 파일은 결국 맥주를 잔뜩 마신 쓸쓸한 귀가길에 딱 한 번 듣고, 유유히 사라졌다. 핸드폰 용량이 부족해 이것저것 지우다 그 파일인 줄 모르고 삭제해 버렸다.

 

   어쨌든, 동생은 박웅현 빠순이다. 그래서 이 책도 샀다. 언니, 박웅현이 추천한 책이라는데 혹시 알아? 나는 모르겠는데, 라고 했고, 동생은 바로 주문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동생은 그때 깁스 상태라 회사가 끝나면 늘 집에 왔고, 덕분에 나도 집순이가 되어 동생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지금은 깁스를 풀었다! 나는 이제 동생의 손발이 아니다!) 아무튼 깁스 상태여서 티비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는 일 말고 별다른 일이 없었던 동생은 이 책을 야금야금 읽다가 어느 날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언니가 딱 좋아할 책이야. 리스본 얘기도 나오고. 꼭 읽어. 그 날 이후에 하루에도 몇번씩 말했다. 읽었어? 읽고 있어? 아직도? 읽으라니까. 읽고 있다고? 좋지? 읽었고, 좋았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내가 딱 좋아할 책이었다. 얼마 전에 다녀온 리스본 얘기도 나왔다. 사실 이 책은 한 카피라이터의 오래된 일기인데,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 이야기인데, 나는 거기서 나를 봤다. 내가 보였다. 이상했다. 이 카피라이터의 일상 이야기가 내게 위안이 됐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슬프기도 했다. 즐겁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런 책이다. 좋은 책. 그래서 나를 닮은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동생이 나한테 계속 읽으라고 한 이유가 서문만 읽어도 이해가 되는 책. 그러니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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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포르투갈을 못 가게 된다면 마카오라도 가자고 결심했었다. 뭔가를 검색하다가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마카오에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여럿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카오는 카지노가 다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막 열의에 차서 마카오 책을 찾았는데, 마카오만 소개된 책은 없고, 홍콩과 마카오가 함께 소개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여행을 가게 된다면 사람들이 다 가는 곳 말고 좀더 특별한 곳을 돌아다니고 싶어 구입한 책이다.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책. 이 책을 읽고 홍콩이라는 도시는 물론이고 주성철이라는 사람에 빠졌다. 정말 심한 홍콩영화 덕후인데, 뭐랄까. 그 열정이 부러운 사람이랄까. 영화를 보다 인상적인 곳을 발견하면 크레딧의 장소협찬지를 캡쳐해 두고 그 곳을 검색해서 찾아가는 식이다. 그렇게 찾아간 홍콩에서 똑같은 장소를 발견하면 뛸 듯이 기뻐하고, 그 장소에 있었던 캐릭터들을 생각하고, 배우들을 생각하고,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곳에 가게 되면 너무나 아쉬워하고. 주성철의 장국영과 양조위에 대한 사랑이 무척이나 각별한데, 이 책을 읽다가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지하철 안에서 장국영에 대한 글을 읽다 울어버린 적도 있다. 장국영 이야기로만 책을 따로 출간했던데, 그 책도 읽어보고 싶다. 장국영 책에 대한 이동진의 추천사. "주성철 기자의 글은 늘 흥미롭다. 그게 홍콩영화와 관련된 글이면 더욱 그렇다(그가 중국어 혹은 광동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홍콩 영화와 배우들의 인기가 굉장했을 때도 있었는데, 예전 생각도 많이 났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나도 홍콩 영화를 꽤 많이 봤더라. 주성치 영화를 보면서 정말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여명과 서기도 그때 참 좋아했더랬다. 장만옥은 나이 들어가면서 더 좋아진 배우. 좋았다. 이 책이 여러 추억을 일깨워주었다. 몇 편은 다시 봐야겠다. 으아, 추억 돋는다.

 

  

. . .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일 때문에 싱가폴로 떠나게 된 양조위는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장만옥에게 묻는다. "나에게 티켓 한 장이 있다면,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하지만 장만옥은 거기에 응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4년 뒤, 앙코르와트를 찾은 양조위는 사원의 구멍 속에 자신의 못다 한 오랜 사랑을 봉인한다. (p.15)

- 골드핀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기. 꼭 겨자 소스에 찍어 먹어야지.

 

   <중경삼림>의 모든 주인공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금성무는 허탈한 마음에 자정이 지나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막 뛰어오르고,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스튜어디스 주가령과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남자 친구 양조위 모두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요리를 하고 밖을 내다보며 그렇게 잠든다. 장장 80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인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이 촬영되던 당시 막 운행을 시작했었다. 그 속도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마치 눈앞으로 영화 슬라이드쇼가 펼쳐지는 것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는 누구나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집을 훔쳐보던 왕정문처럼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는 창문과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앞뒤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곁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현지인과 관광객 그렇게 모두 뒤섞여 일렬로 한 방향만을 바라본다.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2046>에서 양조위는 말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스쳤다면 우리의 인연도 달라졌을까?" (p.58-59)

 

. . .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99년 장만옥에 대한 특집호에서 이렇게 썼다. "장만옥은 홍콩의 비 오는 밤과 같다. 그녀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p. 64)

 

. . . 스탠튼 바 앞은 세계 각국 여행자들이 모여 맥주 한 병을 들고 서로 친구가 되는 곳이다. 늘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꼭 스탠튼 바 옆 계단에 컬터앉아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는 사람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며 맥주 한 병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다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는데 정말 주변 계단에 걸터앉은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걸어왔다. 여행자의 들뜬 마음을 만끽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나 할까. (p.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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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만나는 구도 마스터. 5월에는 술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셔봤다. 두 번씩이나. 한 번은 강남의 엄청 큰 수제맥주집에서. 한 번은 상수의 아일랜드 펍에서. 처음에는 무척 긴장되었고, 두 번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서도 씩씩한 서른 여섯으로 적응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 사이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을 읽었다. 이 책이 시리즈의 첫 권인 것 같은데, 어쩌다보니 나중의 이야기부터 읽게 되었다. 이제 구도 마스터의 이야기는 출간된 책으로는 <벚꽃 흩날리던 밤> 한 권이 남았고, 또 마지막 한 권이 출간되겠지. 그러면 끝. 아쉽다.

 

    산타마가와 선 산겐자야 역에서 나와 역 앞 상점가를 지나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2백 미터 정도 되는 골목의 끝에 막다른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 바로 앞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술집 '가나리야'. 하얗고 커다란 초롱 이외에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을린 삼나무로 만든 두터운 문을 열면 카운터 안쪽에 마스터 구도가 있다. 가게에는 열 석 정도의 L자형 바와 2인용 탁자가 두 개 있다. 생맥주는 필스너. 도수가 다른 네 종류의 맥주가 갖춰져 있다. 맥주잔이 비거나 오래되서 거품이 빠지면 새 맥주로 바꿔주고, 좋은 재료가 있는 날은 마스터가 묻는다. 마침 이 재료가 들어왔는데, 이런 걸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맛있는 안주와 내 기분에 맞는 도수의 술이 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꿰뚫어 보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은 마스터가 있는, 그리고 항상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있는 술집이다. 5월, 두 잔의 맥주를 혼자 마시면서 가나리야를 생각했다. 내게도 가나리야가 있음 좋겠다, 하는.

 

   이번 책에서 좋았던 단편은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거처'. 사실 나는 이 전에 읽었던 <반딧불 언덕>의 이야기가 더 좋았다. '마지막 거처'의 이 부분에는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좋은 안주에 좋은 술을, 좋은 사람과 마시고 싶은 불금이다. :)

 

   조금 더 달라고 하자, 부인은 올해 처음 수확한 가지로 만들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모터크로스 라이더들이 엉망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텃밭에서 자란 가지인 듯했다. 땅에 모래가 섞여 있어서 작년에는 재배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흙을 조금씩 옮겨와 토양을 개량하고, 마침내 스무 개 정도의 가지 묘목을 키웠다며, 처음으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더욱이 겨자와 누룩과 미소를 균등하게 섞어서 기분양념을 만들고, 가볍게 소금을 뿌려 담근다는 것까지 즐겁게 말해 주었다. 옆에서 차가운 청주를 마시고 있던 데라오카 노인도 들뜬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 안주에 마시는 술이 최고지."

   '시작 즈음에'라는 제목을 붙인 사진이 그때 오두막 안에서 부부를 촬영한 것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되었다. 그날 밤, 데라오카 노인은 마침내 쓰마키의 명함을 받아 주었다. '마지막 거처'라는 시리즈는 약 1년에 걸쳐 촬영되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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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 말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여행을 떠난다고 믿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삼천년이 걸리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영혼이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로 보존에 신경을 쓰진 않아요."

   염색체도, 미토콘드리아도 없는.

   "삼천년이라, 그리고 돌아온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에 따르자면 그렇죠." 그가 빈잔을 내려놓고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니나가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물어보았다. "영혼같은 걸 믿나요?"

   그는 손으로 식탁을 누르며 잠시 서 있었다. 작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젓더니 그는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 p.210 '위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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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 혹은 그가 있다. 그가 길을 걷고 있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있었지만, 나쁜 길은 아니었다. 길을 걷던 그녀 앞으로 갑자기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그녀의 몸이 흔들릴 정도다. 그녀는 길가의 작은 나무 아래 몸을 기댔다. 나무 아래였지만 비바람을 온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흠뻑 젖었다. 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비바람이었다. 그녀는 작은 나무에 기대어 몸을 잔뜩 숙이고 비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비바람이 지나갔다. 멈춘 게 아니라 지나갔다. 사라진 게 아니라, 커다란 회오리를 만들며 그가 지나왔던 길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비바람이 지나고 이내 햇볕이 나타났다. 그녀는 길을 계속 걸었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서 가느다란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난 후, 그 혹은 그녀는 기억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따듯한 무엇이었다고. 그리고 그녀 혹은 그는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은 그것이 언제고 자신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2014년 9월 12일 직인이 찍힌 엽서에 소설의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앨리스 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글은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어 읽어볼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 문장들에 반해 책을 구입했다. 두꺼운 책이라 오래 걸렸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덮어버렸고, 몇 개월 뒤에 다시 펼쳤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그 이야기가 끝나니, 그 다음 이야기는 그 전 이야기보다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위와 같은 풍경이 머릿 속에 그려졌다. 소설 속에 나오는 비바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랬다. 무슨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결국 벌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마무리됐다. 어떤 이는 마음을 여미고, 어떤 이는 서서히 누군가를 잊어갔다. 그런 결말들이 쓸쓸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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