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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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가 매혹된 라틴아메리카서재를쌓다 2014. 12. 4. 23:35
사랑에 빠진 아이가 있다. 최근에. 그 애는 순식간에 그 사람에게 빠졌다.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자마자 웃고, 늘 그 사람 생각을 한다. 왜 그 사람은 나한테 이 말을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나봐.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 사람 이야기 뿐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입맛도 없어졌단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졌어, 라며 청소를 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평소에 절대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가. 사랑의 힘은 이런 거구나. 긍정적인 기운이 그 아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래, 연애, 해 볼만 한 거구나 생각했다. 아이가 사랑에 빠진 동안 이 책들을 읽었다. 김남희가 1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온 얘기. 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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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서재를쌓다 2014. 11. 22. 14:00
공판이 끝났다. 법원을 나와 호송차에 오르면서, 나는 아주 잠깐 여름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알아차렸다. 내 움직이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마치 피로의 밑바닥으로부터인 듯, 내가 사랑했던 도시의, 내가 행복을 느끼곤 했던 어떤 시간들의 모든 친숙한 소리들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이미 나른해진 공기 속에서 신문팔이들이 외치는 소리, 공원의 마지막 남은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도시 고지대의 커브길에 울려대는 전차의 비명 소리, 그리고 밤이 항구 위로 내려 앉기 직전에 울리는 하늘의 웅성거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너무나 잘 알던 것이었는데 이제 내게는 눈 먼 여행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내가 만족하던 시간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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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서재를쌓다 2014. 11. 20. 23:14
내겐 파란색 책이 왔다. 우표가 그려진. 예약판매 중인 이 책을 주문해놓고 타이완에 다녀왔다. 주문할 때 보니, 돌아왔을 때 받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정말 돌아온 다음날 받았다. 나는 이 책을 15년 동안 얼굴을 보아온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2년 동안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친구에게도 선물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셋에게 각각 다른 색의 책이 왔다. 말랑말랑한 산문집일 줄 알았는데, 왠걸 의외로 단단한 작법책이었다. 프루스트 책으로 1년 계획을 세우는 소설가, 자신을 미남 소설가라고 (미안합니다, 말도 안되는) 자뻑 농담을 건네는 소설가, 자신을 정승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소설가, 출근길 아침 나로 하여금 'Creep'를 듣게 한 소설가(무척 좋았다), 옌벤에서 또 독일에서 오래 머물며 글을 쓰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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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일상산책, 야나카여행을가다 2014. 10. 22. 21:38
사실 가구라자카에서 닛포리 역으로 바로 갈까 했다. 두껍긴 하지만, 반팔을 입고 나와서 너무 추웠다. 계속 비 맞고 다니니 다음날 감기에 걸려 하루를 온종일 날려 버릴까봐 걱정도 됐다. 보고 싶었던 야나카 산책 거리는 타바타 역에서 시작해 닛포리 역에서 끝난다. 책에 의하면 3~4시간 소요. 어차피 보고 싶은 것은 닛포리 역에 다 있으니까 닛포리 역으로 바로 갔다가 조금 둘러보고 숙소로 일찍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언니를 기다리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일본까지 왔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두 정거장 더 가 타바타 역에서 내렸다. 일단 첫번째 코스. 타바타문사촌기념관이다. 타바타에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살았다고 한다. 동네가 좋아 모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좋아 모이고 그랬던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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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일상산책, 가구라자카여행을가다 2014. 10. 21. 22:23
이다바시 역과 가구라자카 역 사이 언덕에 있는 가구라자카는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그 옛날 기모노를 차려입은 게이샤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뿌렸을 이곳은 조용히 마음을 비우고 걷기에 좋다. 수많은 인연이 밟고 지나다녔을 돌길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아득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죽이고 귀 기울이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 바람의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이곳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알려졌으며 를 쓴 나츠메 소세키도 이곳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p. 26 이 책이 이번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덕분에 길을 많이 헤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해야겠다. 헤맨 건 가구라자카에서. 메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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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일상산책, 시로가네여행을가다 2014. 10. 20. 22:12
고급스러움이 피부로 느껴지는 시로가네라는 명칭은 피천득의 수필 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1947년 구가 통합되면서 시바구가 미나토구로 변경됐지만, 도쿄로 유학한 그가 머물던 사회교육가 선생의 집이자 어리고 귀여운 꽃 아사코가 살던 지역이 '시바구 시로가네'다. 창문과 지붕이 뽀족한 집에서 함께 살자고 속삭였던 소녀 아사코와 피천득의 인연이 짧고도 길게 얽힌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 p. 392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이 책이 출간됐다. 제목도 컨셉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도쿄는 서울과 많이 비슷하다는데, 그 중에서도 일본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화려하지 않고 소소한 구경거리가 있는 곳. 서울로 따지면 서촌이나 북촌, 광화문 같은 곳. 산책하기 좋은 길을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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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모금, 에비수 맥주박물관서재를쌓다 2014. 10. 12. 11:15
도쿄는 흐렸다. 여행 첫날이었다. 이른 아침에 인천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낮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도로 흐렸다. 그래서 걷기 좋았다. 비도 오지 않았고, 원래 흐린 날을 좋아하기도 하고. 넥스를 타고 고탄다에서 내려 1시간 넘게 기다려 스테이크를 먹고, 메구로의 숙소로 이동했는데 Y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감기가 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날의 원래 일정은 고탄다에서 함박스테이크 런치를 먹고 (우린 늦어서 런치를 못 먹었지 ㅠ), 메구로 숙소에 짐을 풀고, 배경지 나카메구로를 걷고, 부유한 동네라는 다이칸야마를 구경하고, 에비스에서 저녁으로 유자라멘을 먹는 것. 아, 에비스 전에 일정이 있었다. 에비수 맥주박물관에서 갓 나온 신선한 에비수 생맥주를 마시는 것. 결국 언니는 다음날 일정을 위해 숙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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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일단 가고봅시다!서재를쌓다 2014. 10. 3. 22:19
책을 떠나보내며, 잊지 않으려고 옮긴 구절들. 리장 고성이 유명해진 건 지진 때문이다. 1996년 리장이 속한 윈난성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리장 고성 내의 전통 가옥들은 아무런 피해없이 멀쩡했다. 발 빠른 중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리고자 리장 고성에 많은 돈을 투자했고, 1999년 이에 화답하듯 유네스코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부터 대대적으로 진행된 개보수 끝에 리장 고성은 관광지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관광지로 거듭났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그 무서운 버스를 타나 했는데,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버스에서의 무용담과 그 끝에 찾아낸 보물에 대해 조잘대는 엄마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다. 엄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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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서재를쌓다 2014. 9. 27. 16:12
여름의 시작 즈음, 내게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 곳은 캐나다 퀘벡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세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곳. 이름하야 스리 파인스. 조용하고 평화롭고 화목해보이던 이 작은 마을에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사연이 있어 폐가가 되어버린 저택 안이었고,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은 사람을 불러내는 교령회 모임을 하던 중이었다. 교령회 도중 갑자기 죽어버렸다. 공포에 질린 채. 모두가 심장마비일 거라 추측했지만, 마을에 나타난 그는 그녀가 살인을 당한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수사를 진행한다. 그는 바로 가마슈 경감.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 옆에 있으면 어리석고 서투른 존재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가마슈 옆에 있으니 온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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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를 사랑한다서재를쌓다 2014. 9. 15. 22:37
어른이 되고 경주를 세 번 갔다. 한 번은 무더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불국사 길을 걸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문무대왕릉을 보러 갔다. 그리고 올해 늦여름. 부산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날, 경주에 있었다. 비를 쫄딱 맞으며 양동마을을 걸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왔더니 딱 때를 맞춰 이 책이 출간되었다. 마침 옛다, 읽으렴, 이라는 듯.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 경주를 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니 나는 아직도 경주를 모른다. 하긴 소개팅을 해도 세 번을 만나고 더 만날 사람인지 그만 만날 사람인지 알 수 있듯이. 이제 나는 겨우 경주의 마음에 든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더 친해질 일이 남았다. 깊어질 일만 남았다. 때론 토라질 일도 있겠지만. 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