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231건

  1. 밤에 우리 영혼은 2 2017.02.27
  2. 13월에 만나요 4 2017.02.25
  3. 남편의 아름다움 4 2017.02.15
  4. 염소의 맛 2017.01.15
  5. 심야 이동도서관 2017.01.03
  6. 사라지고 있습니까 2016.10.12
  7.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사 2016.09.06
  8. 낮의 목욕탕과 술 2 2016.08.30
  9.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2 2016.08.23
  10. 침묵 5 2016.08.18

밤에 우리 영혼은

from 서재를쌓다 2017. 2. 27. 23:12




 


   제주도에 가져가서 다 읽고 오려고 했지만, 역시나 여행에서는 얼마 읽지 못했고 다녀와서 다 읽었다. 표지도 좋고, 크기가 작고 두께가 얇은 것도 좋은데, 글씨가 좀 크다. 글씨를 적당히 줄이고 더 얇게 만들어도 좋았을 텐데. 작가 소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콜로라도 주를 배경으로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만들고 쓴 소설 <이븐타이드> <베네딕션> 등, 총 다섯 편의 소설과 유작인 <밤에 우리 영혼은>을 남기고 2014년, 71세에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상의 마을을 만들고 그곳의 이야기를 연이어 쓰다니,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멋진 가상의 마을 '홀트'에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며 오랜 시간을 보낸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의 남편도, 남자의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여자는 남자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과 자러 자신의 집에 와달라고. 혼자가 된 지 오래되어 외롭다고. 외로우니 밤에 자신을 찾아와 함께 잠을 자고,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아니, 섹스는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읽은 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 p. 9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낸다. 처음엔 어색하고 긴장했지만, 점점 편안해진다. 여자는 와인을, 남자는 맥주를 한 잔씩 하고 여자의 집 이층으로 올라가 이를 닦고 침대에 나란히 눕는다. 잠들기 직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 나눈 이야기들은 대체로 가벼운 것들이었지만, 함께 지내는 밤이 늘어날 수록 대화는 깊어진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서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데, 밤에 그런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러면서 두 사람은 깊어진다. 벌레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아늑한 여름밤처럼 깊어진다.


    그러기를 원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미 말했듯, 난 더이상 그렇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잘 사는 길이 아니죠. 적어도 내겐 그래요.

    좋아요. 내게도 당신 같은 분별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말이 옳아요, 물론.

    이제 괜찮은 거죠?

    뭐, 거의.

    맥주 한 병 더 마실래요?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와인을 더 하고 싶다면 함께 앉아 있어줄게요. 그냥 당신을 보면서요.

- p. 33


   홀트는 작은 동네라, 금새 소문이 돈다. 남자가 밤마다 여자 집에 가더라. 둘이서 그 집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걸까. 그러면 안되지 않나. 자식들도 있는데.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냐.


   그들은 상점에서 나왔다. 애디는 식료품들을 뒷좌석에 실은 뒤 운전석에 앉았다.

   루스는 고속도로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들과 가축이나 곡물을 실은 트럭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 여기가 정말이지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럴 수 있었을 때 떠났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 꼬딱지만 한 도시와 편협하고 짜증나는 주민들. 그녀가 말했다.

- p. 41


    두 사람은 부모의 별거로 할머니 집에 맡겨진 손자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며 셋이서 함께 잘 지낸다. 정말 잘 지낸다. 마음을 닫고 있던 손자는 서서히 마음을 연다. 손자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남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캠핑을 하고, 남자가 손자를 위해 데려온 개를 마음 깊이 보살피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 처음에 손자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빠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할머니도 자기를 떠날까봐 불안해했지만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 덕분에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끼는 개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믿게 된다.


   어두운 침실 바깥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열린 창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어오면서 커튼이 이리저리 펄럭거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는 게 좋겠어요.

   꼭 닫지는 말아요. 냄새가 예쁘잖아요. 지금 가장 예뻐요.

   정답이에요.

   그가 일어나 약간만 남기고 창문을 닫은 뒤 침대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 p. 109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두 사람을 바라봤고, 결국 여자는 남자와 더이상 밤을 보내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결국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 두 사람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다. 이 부분은 내가 이 소설 전체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누군가를 만난 후 그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그 순간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군요.

   네.

   두 사람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그들은 이야기를 조금 더 했다. 에미는 울었다. 그가 그녀의 몸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루이스가 말했다. 당신 덕에 나도 많이 변했고요. 고마운 마음이에요. 감사해요.

   지금 비꼬고 있는 거죠?

   그럴 생각 없어요. 진심이에요. 당신은 내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이상 더 뭘 원할 수 있겠어요? 당신과 함께한 후 난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 p. 182-183


   좋은 사랑을 하면, 좋은 이별을 할 수 있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소설에 대화가 무척 많아서 꼭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영화보다 무대로 보고 싶다. 무대 위에 침대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다. 아, 여름밤 냄새와 여름밤 소리와 여름밤 풍경이 보일 창도 있어야지. 밤이 되고, 또 밤이 되고, 또다시 밤이 되는 연극. 이 책을 읽게 된 건 <시애틀 타임스>의 추천글 때문이었다. 내가 반한 문장은 이거다. "여름날 저녁 일몰 직후 아직 하늘에 빛이 남아있을 때, 제대로 들여다보면 볼 것들이 많은 그 순간을 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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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에 만나요

from 서재를쌓다 2017. 2. 25. 10:43





    요즘은 집에 늦게 들어올 때도 꼭 뭘 먹는다. 배고픔을 참질 못하겠다. 이러니 살도 찐다. 집에 만들어놓은 음식이 없으니 뭔가를 사온다. 이 날은 떡볶이 생각이 간절해서 단골 튀김집에 갔다가 떡볶이와 튀김을 사왔다. 다 먹진 못하고, 다음날 못 먹을 지경이 될까봐 튀김만 해치웠다. 예전엔 그렇게 먹고 자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속이 부대끼는지 새벽에 종종 잠이 깬다. 조용한 새벽에 가만히 앉아서 왜 배가 아픈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각의 끝에 전날 잠들기 직전에 먹은 자극적인 음식들이 있다. 아, 나도 늙어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새벽 5시 즈음에 눈이 떠졌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더 잘 생각이 안 들었다. 스탠드를 켜고 10여 페이지가 남은 <13월에 만나요>를 펼쳤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새벽독서란 이렇게 좋은 거구나.


    출간되었을 당시에 사놓은 책인데 손이 가질 않았다. 작가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한 권 선물했고, 몇 페이지 읽다 다시 책장에 넣어뒀다. 친구는 나중에 이 책을 가지고 유럽을 여행하며 조금씩 음미해가며 읽어내려갔다고 이야기해줬다. 사람이고, 책이고, 때가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느 날, 쓸쓸한 이야기가 읽고 싶었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 마침 보였다. 구입했을 당시에 얼마 읽히지 않던 책이 술술 읽혔다. 어느 날 아침,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눈물도 훔쳤다. 실은 실제로 한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의 유럽 여행을 상상해봤다. 여행 중간중간 책을 조금씩 읽어나갔을 모습을.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생경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들도. 우리도 언젠가 때가 되면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포스트잇,


관계의 궁극적 결말은 영원이 아니다. 결말이 영원이었던 관계가 있다면 믿지 않을 작정이다. 내 결말이 늘 영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28


추억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소중하다. 소중해진 것 다음에는 그것이 어떻게 내게서 멀어지는지를 겪는 것이다. 견디어보는 것이다. 견딜 수 있어도 견딜 수 없어도 사랑이다. 서로 기도 같은 것을 하고 살다가 기도를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을 때쯤, 윤은 녹사평으로 이사를 했다면서 전화를 해왔다.

- p. 49


함께 있어보면 그 사람 안의 나의 무게를 가늠하게 될 때가 있는데 여행이 그렇다. 여행이 동거와 다른 점은 집중력에 있다. 집중력이 생활에서는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일은 지루해지고 어려워진다.

- p.70


장의 담배 연기에서 박하향이 난다.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웃으니 나도 기쁘다.

- p. 94


진주는 진주 사람만큼 멀었다. 나는 땅을 가끔 옮겨 사는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여기저기 낯선 곳을 찾아다니는 나를 걱정하지 않기로 하였다. 가만히 잘 살다가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는 편인데, 이번이 진주였다.

- p.131


"그렇게 보이는 게 불편해요?"

"불편해요. 그 사람이 그냥 말하면 생각 없어서 불편하고 그 사람이 의도가 있어서 말하면 솔직하지 못해서 불편하고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부담스러워서 보기 싫고 그 사람이 나를 경계하면 섭섭해서 슬프고요. 그러니까 불편해요."

- p. 145


지연씨는 아버지 이야기를 가끔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성큼성큼 걸어와 나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검은 한복을 입은 지연씨와 손을 잡고 있었고, 무뚝뚝한 지연씨는 내 손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위로하러 와서 위로를 받고 가는, 경우 없고 사람 노릇 못하는 족속이 되어버렸지만 그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것은 처음의 일이 아니다. 이처럼 세상을 떠나는 순간 속에서 보여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일이다. 내가 처음보다 나중에 함께 남는 손님이 될 수 있을 때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느낀다.

- p.187


아침마다 눈 떠지는 일이 막막할 떄가 있다. 또 눈을 떴구나... 이런 현상은 가장 좋은 계절에 몇 번씩 찾아오곤 한다. 오래된 아파트, 웃바람으로 싸늘한 아침, 생강차를 끓여 마신다. 어릴 적 김장철 심부름으로 생각을 깔 때는 그렇게 지독하더니 어른이 되어 생강 향이 좋아진다. 생강 향은 고급스럽고 맑고 맵고 청아하다. 무척 진하게 만들어 먹으면, 죽고 싶은 아침 죽어버리고 싶은 그 아침이 한 번 더 살아보는 아침으로 변하는 약차 같은 것이 된다.

- p. 250



   그러니, 생강차를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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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아름다움

from 서재를쌓다 2017. 2. 15. 23:40




   기석이가 고른 책은 다 기석이 같다. 그동안의 책 중 가장 얇고, 글자가 적은 덕분에 다 읽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긴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읽었다. 무심코 앞장을 넘기다 너무나 생경한 페이지가 있어 앞뒤를 넘겨보니 내가 건너뛴 페이지였다. 어제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읽고 있는 기석이라는 사람에게도 그런 페이지가 있는 건 아닐까. 건너뛴 페이지가 자연스러웠다면, 돌아가 부러 발견하고 다시 읽는 게 좋은 걸까, 그 페이지 쯤은 발견하지 않은 채 흘러 가게 두는 게 좋은 걸까. 누구에게나 그런 페이지가 한 두장씩은 있겠지.



   제목과 표지가 무척 아름다운 2017년 첫 시옷의 책 <남편의 아름다움>. 세 개의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14페이지,

그는 행복한 듯 했다. 당신은 베네치아 같아 그가 아름답게 말했다.


53페이지,

당신은 말하곤 했다. "욕망이 두 배면 사랑이고 사랑이 두 배면 광기야."

광기가 두 배면 결혼이지

내가 덧붙였다

그 독설이 황금률을 만들 의도가 없는

무심한 것이었을 때.


75페이지,

완전함이 잠시 그들 위로 호수 위의 고요처럼 내려앉았다.

고통이 내려앉았다.

아름다움은 내려앉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의 관자놀이를

만지고

돌아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어떤 도시 같아, 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해봤다. 그 도시는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답고, 소박하고 깊이가 있는 곳. 예를 들면, 당신은 포르토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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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맛

from 서재를쌓다 2017. 1. 15. 21:11




   예전부터 궁금했던 책이었는데, 지난 늦여름 노홍철의 책방에 가서 뭔가를 구입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다 발견했다. 벽면에 전시되어 있던 책 딱 한 권이었는데, 계산을 하려고 할 때 노홍철이 이 책을 왜 사느냐고 물었다. 궁금했던 책이라고 말했고, 자기는 이 책을 다 읽고나니 '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읽고나면 어떤 느낌인지 꼭 알려달라고도 했다.


    책을 사고 친구들을 기다리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읽었는데, 그때의 빛에 담긴 표지의 빛깔이 참 좋았다. 참 이쁜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백하건데 나는 제목의 '염소'를 동물로 알았다. 수영장 그림이 있는데도 염소를 그 염소로 생각하지 못했다. 아쿠- 책을 다 읽고 나니 노홍철의 말이 이해가 됐다. 잔잔한 이야기에 미스테리한 결말이다. 여자아이가 물 속에서 한 말에 초점을 맞추면 그렇다.

   이 잔잔한 이야기는 이렇다. 척추옆굽음증이 있는 남자아이는 물리치료사의 권유로 수영을 시작한다. 매주 수요일 수영을 간다. 거기서 수영을 무척 잘하는 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고, 그 아이를 마음에 담게 된다. 억지로 시작했던 수영을 즐겁게 하게 되었고, 여자아이가 오는지 매주 살피게 되었다. 남자아이는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아이이고, 여자아이는 대범하고 활달한 아이이다. 남자아이는 자신과 다른 여자아이가 마음에 든 것 같다. 남자아이가 어느 날 말한다. "나는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 본 적이 한번도 없어." 여자아이가 어느 날 말한다. "너 다리는 잘하잖아." 그러면서 자유형 잘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남자아이는 잠영을 한 번도 쉬지않고 완주하게 되는 날을 꿈꾸게 되고, 이를 위해 깊게 잠수한 남자아이에게 여자아이가 다가와 입모양 만으로 어떤 말을 건넨다. 남자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데, 그 질문은 "이런거 생각해 봤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 같은 거." 이다. 물 위로 떠오른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말이 궁금해 물어보고, 여자아이는 다음주 수요일에 알려준다고 하고 나타나질 않는다.

   그리고 몇 주 후, 남자아이는 아무도 없는 수요일의 수영장에서 한번도 쉬지않고 잠영 완주에 성공한다.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하는 순간에 한번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는 남자아이가 물 위로 올라가려는 욕구를 참고 참으면서 처음으로 잠영 완주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아이의 대답'이 아니라, '남자아이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 이야기는 결말이 결코 미스테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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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이동도서관

from 서재를쌓다 2017. 1. 3. 00:11




   거기서 나는 위안을 찾았다. 손등으로 코를 훔치고 서가를 둘러보았다. 꽃에서 정성스레 추출한 향이 향수에 담겨 있듯이, 책장에 꽂힌 책들에는 내 삶이 스며 있었다. 나를 바람맞힌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읽은 바버라 터크먼의 <희미한 거울>이 보였다. 여러 번 읽어 두툼해진 <안나 카레리나>도 있었다. 나는 <중력의 무지개>를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자 글이 57쪽까지만 있고 그 뒤로는 없었다.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었다. 내가 읽다 만 페이지에 아이스크림 막대가 꽂혀 있었다.

- 오드리 니페네거 <심야 이동도서관> 中



   혼자 있을 때, 자다 읽어났는데 혼자이고, 어느새 해가 늬엿늬엿 지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혼자가 된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순간이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난 뒤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버지,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고 표를 겨우 구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 친구, 젊은 시절의 어머니, 그 시절의 나. 그럴 때 온전히 그 사람이 되어 본다. 그 사람이 되어 그 공간에 있어보고, 앞에 있는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아주 쓸쓸해지는데, 이내 따뜻해지기도 한다. 모두가 때때로 아주 많이 고독하다는 생각에. 내가 고독한 사람을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심야 이동도서관>은 그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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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고 있습니까

from 서재를쌓다 2016. 10. 12. 22:39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결국 주문했다.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은 사두고 시간이 꽤 지난 뒤에 읽었지만, 이번 책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읽었다. 책 두 권 읽고, 영화 몇 편 보았다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런 착각에 빠져 책을 읽었다.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에세이가 너무 적다는 거였는데, 이번 책은 모두 에세이다. 좀더 그의 일상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껏 들었고, 좋았다.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추억, 영화를 하기 전 고단했던 날의 이야기, CCTV에서 오랜 연애를 끝낸 연인의 걸음거리를 찾아내려 노력했던 시간, 유부녀가 된 예전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밤, 눈이 많이 내린 날 청주의 대학교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모텔에 가 쓸쓸하게 누워 있었던 기억, "가면무도회와도 같았던 그녀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나는 조금 다른 방식의 반성을 하고는 한다" 라는 일기를 쓰는 사람, 혼자 하는 여행에서 꽤 지쳐있었을 때 좋은 바람을 만났던 기억, 사소한 기록의 욕구가 영화를 만드는 제1의 이유라는 사람, 좋아하고 매일 지나는 골목에 배우와 스태프를 부르고 그들에게 큐사인을 주는 사람, 시네마테크에서 어떤 위로들을 밥처럼 받아먹고 산 사람, 아름다움을 보고 부러진 날개를 보았을 때 사랑이 시작된다는 사람.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그의 새영화가 상영되었단다. 네 배우가 나오는 그의 새영화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책에 나온 제주도 여행 이야기는 'JEJU'라는 도장이 찍힌 수첩 앞장에 적어놓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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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침묵>을 읽고, 그 시기의 일본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인데, 읽으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심각한 내용일 줄만 알았는데,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고, 거기에 적응해 가는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꽤 재미나게 묘사되어 있다. 같은 시기의 우리나라 모습도 궁금해졌다.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또 다른 책을 찾게 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하며, 언젠가 깊고 풍성한 여행으로 이어질 거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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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에 스페인에는 카스텔라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성이 많아 카스텔라라고 불렸는데 일본인이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인에게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과자를 가리키며 "이 과자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카스텔라지방에서 만든 과자"라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혹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과자의 포장에는 성곽이 그려져 있었는데, 일본인이 과자에 대해 질문하자 선교사는 성곽을 물은 것으로 생각하고 카스텔로라 대답하여 카스텔라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쉬어가는 이야기로 이는 '캥거루'의 경우와 같다. 처음 호주대륙에 도착한 영국인들이 들판을 뛰어다니는 이상한 동물을 보고 원주민에게 이름을 묻자 "나는 몰라요"라는 의미로 원주민이 "캥거루"라고 답한 것을 영국인은 이름으로 착각하여 캥거루에게 '캥거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니, 캥거루나 카스텔라의 이름의 유래는 결국 동문서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 p. 34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옛 이름으로, 당시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다)를 떠난 네덜란드선박은 1-2척으로 계절풍을 따라 대개 6-7월에 나가사키에 입항하였다. 1621년부터 1847년까지 일본으로 온 네덜란드선은 모두 715척이었고 난파한 배는 27척이었다고 한다(그 중 2척이 우리나라에 표착하였다).
- p. 58

(...) 이 행사 역시 유명하여 나가사키 판화에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였는데, 1818년에 편집된 <장기명승도회>에는 큰 뚜껑요리, 닭고기, 카마보코, 계란 버섯, 소고기 튀김, 돼지구이 통구이, 소시지, 햄, 연어와 가자미의 보토루(버터)조림, 스프 등이 등장하고 "일본의 콩 비슷한 것을 부셔서 더운물에 끓여 백설탕을 넣고 마신다"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p. 62

(...) 시볼트가 쓴 나가사키의 일기에도 카스텔라와 보토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보토루는 저장법이 나빠 짜고 악취가 났는데 나를 방문한 일본인의 신사들은 카스텔라 위에 발라 네덜란드의 맛이 난다고 즐거이 먹었다"고 전한다. 시볼트는 일본인이 서양식사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당시 버터는 폐병의 특효약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 p 63

   가나가키 로분이 쓴 <아구라나베>는 저렴한 소고기 전골가게를 무대로 소고기의 맛과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량, 창기, 서생, 인력거 차부 등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계층의 인물들이다. 싸구려 회중시계에 금도금을 한 줄을 달고 아로마의 일종인 오데콜론의 향기를 피우는 겉멋 들은 남자는 "이렇게 맛있고 영양있는 소고기를 미신 때문에 여태 먹지 않았다니!"라고 흥분한다. 이어 <아구라나베>에는 "소고기는 최고의 맛이에요. 이 고기를 한번 먹으면 멧돼지나 사슴고기는 못 먹어요. 이런 청결한 것을 지금까지 먹지 않았다니!" "이제 우리나라도 문명개화가 되어서 소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다행이네요. 야만의 풍습이라니, 육식을 하면 신불에 합장할 수가 없다느니, 부정 탄다느니, 그런 촌스러운 말은 과학을 알지 못하니까 그런 거예요. 후쿠지와씨의 <육식의 설>이라고 읽히고 싶네요." 등등의 실감나는 표현이 여기저기에 배어 있다.
- p. 78

(...) 오오노가 개업한 '카이요테이'에서 소개하는 서양요리집의 풍경을 살펴보면 스프를 마시려다 흘리고 고기를 나이프로 자르려다가 입술을 잘라 피가 나는 상황도 연출됐다.
- p. 80

   너 소야 너는 느린 성질인데 빠른 사람을 먹여 살린다. 네가 만약 사람을 먹여 살리지 않는다면 이 나라에 문명은 없다. 나라는 문명이 없으면 개화는 없다. 그러니 개화의 덕은 너에게 나온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쌀을 살 돈으로 너를 초대한다. 한 근의 고기를 살 능력이 없어도 너를 생각하고 침을 흘리지 않는 날은 없다. 잘 때는 너의 꿈을 꾸고 눈을 뜨고는 너를 생각한다. 배가 고프면 너를 만나고 먹어도 너에게 질리는 일은 없다. 나와 너의 교제는 실로 깊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너를 내 배 안에 묻고 오랫동안 너의 묘로 삼겠다. 찌꺼기는 비록 화장실에 흘릴지라도 너의 혼은 내 배에 자리 잡는다. 너의 혼에 혹시 영험한 힘이 있다면 나의 어리석음을 양질의 지식으로 바꾸고 한 달에 얼마만이라도 이득을 보게 해다오. 3년 동안 먹었는데 아직 관직도 얻지 못했고 돈도 모이지 않았다. 너는 단명을 한탄하여서는 안 된다. 살신성인이란 너를 말하는 것이다. 죽어서 이익을 준다면 어찌 이 세상에 원한이 있겠는가. 네가 늙어 찌꺼기 속에서 죽는 것보다 냄비에 들어가서 성불하는 것이 좋다. 최근에 듣기로 너는 가끔 미인의 입에도 들어간다는데 이야말로 극락정토의 왕생이다. 어느 때는 영웅의 배에 묻히고 어느 때는 미인의 장 속에 들어간다. 이것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도로에서 죽어 허무하게 썩는다면 이런 장례를 할 수 있겠는가. 소여 너는 울어서는 안 된다. 한탄하여서도 안 된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장관이 되지 않고 지갑을 아무리 열어 보아도 미인의 손을 만질 수는 없다. 너는 죽은 고기인 주제에 살아있는 나보다 훨씬 재수 좋지 않은가.
-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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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내가 찾던 이야기도 찾았다.


(...) 부채꼴 모양으로 완성되는 인공섬 데지마는 무역기간 동안 나가사키에 체재하고 계절풍을 이용하여 다시 마카오로 돌아가는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 체재기간 동안 거주할 시설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이것은 포르투갈 상인을 일본사회와 격리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한편으로는 무역을 행하면서 기독교 금교정책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시책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 p. 46~47
 
(...) 기독교를 불교의 일파 정도로 생각하던 일본은 스페인이 세계각지에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선교사가 우선 어느 지역에 들어가 기독교를 전파하고 이후 점차 군대가 들어와서 그 지역을 정복하기 때문이라는 것과, 기독교의 배후에는 스페인과 같은 국가가 존재하여 전략적으로 선교사들이 파견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 p. 40


    그리하여 소설 <침묵>과 같은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활발히 교류하였고, 인정하였고, 허가하였던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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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목욕탕과 술

from 서재를쌓다 2016. 8. 30. 22:00





   동생이랑 오사카-교토 여행을 갔을 때, 우리는 들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동네 사람들만 갈 법한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가 꼬치를 시키고, 맥주를 시키고, 사케와 오뎅탕을 시킬 작정이었다. 일본어를 전혀 못하면서, 들어가면 훈훈한 분위기에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으며 그렇게 생각을 했더랬다. 그래서 오사카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돌아다닐 때 일부러 큰 길 쪽에 있는 가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거닐면서 여긴 어떨까, 여기가 더 낫다,며 많이도 기웃거렸다. 그러다 이 가게다 싶은 곳이 있었다! 크기도, 밖에서 언뜻 보이는 분위기도 딱이었다. 살며시 문을 열었는데, 벌써 만석이었다. 자리가 없었다. 아주 작은 가게였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몇 번을 거절 당하다, 결국 큰 길로 나와 체인점인 것 같아 보이는 커다란 꼬치구이집에 들어갔다. 바 자리에 앉아서는, 그냥 마셔 버리자며 손가락짓과 '구다사이'를 연발하며 생맥주와 꼬치구이와 하이볼을 시켰다. 옆에 앉은 혼자 마시러 온 아저씨가 먹는 치즈 꼬치가 맛있어보여 계속 훔쳐보며 시킬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아저씨가 맛보라며 하나를 줬다. 치즈가 아니라, 떡이었다. 치즈 같이 맛있는 떡이었다.


   이번에 오키나와에 갔을 때는, 숙소 근처에 저녁에만 여는 허름한 술집을 발견했다. 작은 실내 포장마차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낮에 닫혀 있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다. 혼자서 미술관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술집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좁은 공간에 손님들이 꽉 차 있었다. 모두 근처에 사는 동네 사람들 같았다. 가게가 좁아서 다들 따닥따닥 붙어 앉아 있었다. 용기있게 들어가 생맥주 한 잔을 달라고 하고,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어색하지 않게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나의 어색한 일본어를 듣고 힐끔힐끔 쳐다보겠지. 맥주를 반 잔쯤 마신 나와 눈이 마주쳐 씩-하고 웃으면 아저씨가 물어보겠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여긴 왜 왔냐고, 덥지 않냐고, 맥주가 맛있냐고, 언제 돌아가냐고, 너에게 이 곳은 어땠냐고. 자신의 안주로 시킨 꼬치 하나를 내게 건네줄 지도 모른다. 나는 이 곳이 좋으다, 참으로 좋으다,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그 날, 나는 결국 그 작은 술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8월의 시옷의 책인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술집과, 들어갔던 맥주집과, 언젠가 들어갈 수 있을 그 곳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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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을 하고 나와 꼬치구이집에서 생맥주, 일본의 여름이다. 모기향이라도 피워놓았더라면 가슴이 뭉클했을 게다.

  차가운 생맥주는 한순간 여기가 어딘지 잊어버리게 할 만큼 맛있었다.

- p. 169


   컵에 맥주를 따르고 단숨에 쭈욱.

   그리고 후우, 숨을 내쉬었다. 멀고 먼 추억이 이 맛에 깊이를 더한다.

   오늘의 기본안주는 녹미채. 아직 따뜻하다.

   풋콩과 빨간무절임을 시킨다. 맥주 다음은 소주로 하자.

   이곳은 독특한 방식으로 소주를 내놓는다.

   조막병에 상온의 소주를, 알루미늄 물통에 뜨거운 물을 담아 술잔을 낸다. 뜨거운 물에 각자 소주를 섞어 홀짝홀짝 마신다.

   술꾼들에게는 이렇듯 가게 특유의 방식이 묘한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어린애 같은 면이 있어서일 것이다.

   두부볶음이나 고구마튀김도 맛있다. 젓갈이나 락교도 더 시키고 싶다.

   아직 손님은 아무도 없다.

   열린 문으로 늦여름의 바람이 불어온다.

   조금만 지나면 퇴근한 샐러리맨이나 근처 대학생이 길가를 메울 것이다. 해로쿠의 카운터도 단골로 가득 찰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소란스러운 기운이 가게 안을 다정하게 채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전에 계산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이다.

   아직 저녁 햇살이 남은 거리를 따라 오차노미즈 역에서 주오선을 타고 서쪽으로, 약간 취기를 거느린 채 흔들거리며 돌아가야지.

   오늘이 남아 있다는 기쁨을 천천히 곱씹으면서.

p. 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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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어홀'이라는 단어가 책에 나오는데, 참 좋은 말 같다. 비어와 홀이라니. 이 세 음절만으로 그 장소의 맛과 들뜸과 왁자지껄함이 연상이 된다. 언젠가 비어홀에 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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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놀란 것은 사람들이 책을 매우 열심히 읽는다는 점이다. 아마 겨울이 걸어 실내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독서에 매우 큰 의미가 가치를 두는 듯하다. 집의 서가가 얼마나 충실한가로 그 사람의 가치가 판가름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인구에 비해 대형 서점이 많고, 아이슬란드 문단도 활발해, 1955년에는 할도르 락스네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대표 장편소설 <독립한 민중>을 라디오에서 몇 주에 걸쳐 낭독했고, 그 시간에는 전국민이 말 그대로 라디오 앞에 못박혀 있었다고 한다. 버스가 운행을 멈추고, 어선도 조업을 중지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작가수도 많아서 에리캬비크에만 340명이 '작가'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나가세 마사토시 주연의 영화 <콜드 피버>에서 언급했듯이, 아이슬란드는 인구당 작가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p.27~28


 

   요리뿐만 아니라 주류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옛날부터 음주에 얽힌 말썽이 많아서 (아마도 겨울이 길고 혹독한 탓이리라) 오랫동안 금주제도가 이어지다 제법 근년에 들어서야 폐지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맥주에 대해서는 그후로도 계속 금주법이 적용되어, 놀랍게도 아이슬란드에서는 1980년대 말까지 맥주를 전혀 마실 수 없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자기 집 헛간에서 손수 맥주를 만들어 마셨고, 밀매업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외국 맥주를 대량으로 국내에 들여왔다.

- p. 33


 

   숲은 전혀라고 말해도 될 만큼 없다. 아이슬란드가 궁핍했던 시기에 사람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산림을 모조리 벌체해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이곳에 자라 있던 수목의 99퍼센트가 사람들 손에 베여나갔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고작이라 나무를 심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 남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며 여기저기서 식수를 시작했는데, 남쪽과 달리 수목의 성장이 더뎌 울창한 숲을 이루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기껏해야 사람 키만한 나무밖에 없다. 그러나 비록 큰 나무가 없다해도, 푸른 이끼에 뒤덮인 용암대지가 끝도 없이 펼쳐지고 곳곳에 자그만한 한랭지 꽃이 가련하게 피어 있는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그런 풍경 속에 홀로 서 있으면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소리, 혹은 아득한 시냇물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깊은 내면의 고요가 존재할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머나먼 고대로 이끌려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섬에는 무인의 침묵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 섬에 유령이 가득하고 말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무척 과묵한 유령들이리라.

- p. 49



   오로라는 이윽고 말이 꼬여서 의미를 잃어가듯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는 따뜻한 호텔방으로 돌아가서,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었다.

- p. 60



   (...) 그러나 이제는 긴 할주로가 생겨, 많은 관광객이 시간을 절약하며 발이 묶일 걱정 없이 유럽 각지에서 이 섬으로 직행할 수 있다. 물론 편리하지만 왠지 서운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불편함은 여행을 귀찮게 만들지만, 동시에 일종의 기쁨 - 벌거로움이 가져다주는 기쁨 - 도 품고 있다.

- p. 89~90



   나는 몰라보게 밝아진 가게 안을 둘러보고는 "이게 정말 그 파트랄리스 가게라고?" 하며 입을 딱 벌리고 말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생 '파트랄리스 가게'는 우리 마음에 쏙 들었다. 예전처럼 마리자가 메뉴에 빠지지 않고 올라 있고, 역시 예전처럼 맛있었다. 하나하나 양이 푸짐한 것도 변함없다. 가격은 합리적이고(혹은 상당히 싸고), 그러면서 재료는 신선하다. 생선을 주문하면 주방으로 손님을 데려가 직접 실물을 보여주며 고르게 하고, 그것을 눈앞에서 조리해준다. 이 가게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레몬과 올리브오일을 뿌린 신선한 생선 요리를 먹고 있으면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이틀 연달아 이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만 레치나 와인은 톡 쏘는 독특한 향이 예전보다 조금 엷어진 것 같다. 나는 그 촌스러운 향이 무척 좋았는데.

- p. 102~103



   이따금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마음이 가는 상을 만난다. 왠지 반가움 비슷한 감정마저 든다. 그런 상을 만나면 "오호, 네가 이런 데 있었구나"라고 무심코 말을 걸고 싶어진다. 대부분 칠이 벗어지고 표면이 변색되고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것들이다. 개중에는 코나 귀가 아예 사라진 것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스름 속에서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한눈팔지도 않고, 우기도 건기도 가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뎌온 것이다. 백년이고 이백 년이고. 나는 그중 몇몇 조각상과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음이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다정한 친근감을 안겨주는 분위기는 서유럽의 여느 성당들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 성당에는 보는 이를 압도하며 장엄한 기분을 자아내려는 면이 있다. 물론 그것도 그것대로 멋지지만, 라오스의 사원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압도적인 힘' 같은 것이 엿보이지 않는다.

- p. 177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떄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책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 p. 181~182



   그 때문인지 가기올레 인 키안티, 라다 인 키안티, 카스텔리나 인 키안티... 등등. 조금 신기한 울림을 가진 토스카나 마을의 이름들이(모두 오래된 성벽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떠날 줄 모른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그런 이름을 보거나 듣기만 하면 마을의 풍경과 그곳에서 마신 와인, 이름 모를 레스토랑에서 나온 음식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면 '아아, 다시 그곳에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한다. 다름에는 꼭 알과 로메오를 빌려야지, 라고도.

   이것에 나는 개인적으로 '토스카나 열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p. 213~214



(....) 그렇게 오래 혼자 여행해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혼자서 낯선 땅을 여행하다보니 단순히 숨을 쉬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쯤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 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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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에서 하루키는 말한다. "잊을 만하면 띄엄띄엄 청탁이 들어와 여행기를 쓰는 작업을 하다보니, 차츰 원고가 쌓여서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습니다. 한데 모은 글을 새삼 다시 읽어보자 '아, 다른 여행에 대한 글도 써둘걸 그랬다' 하고 은근히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써야 한다! (불끈)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떠나보내며, 한번 더 읽고 싶다고 표시해두었던 문장들을 옮겨둔다. 라오스야, 잘 가라. 그곳에서 행복하렴. 역시 하루키 최고의 여행기는 <먼 북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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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from 서재를쌓다 2016. 8. 18. 23:09





   친구와 홋카이도를 가기로 결심하고, 홋카이도 책을 찾아봤다. 가이드북 말고 에세이. 책이 적었는데,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기는 집에 있었고, 이 책이 궁금했다. <혼자가 아닌 시간, 홋카이도>. 평이 좋아서. 홋카이도의 겨울 이야기이긴 한데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합정점 중고서점에서 샀다. 몇장 뒤적거리고 잊고 지내다 여행 가기 직전에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소설가가 쓴 홋카이도 여행기였는데, 무척 감상적인 글이었다. 거기서 <침묵>을 소개 받았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선교 활동 중에 붙잡힌 포르투갈 신부 로드리고는 배교를 강요받는다. 배교의 증명은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밟는 것으로, 어찌 보면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그러나 신앙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절차다. 성화를 앞에 두고 한참을 번민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가 마침내 '자기 생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 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는' 성화 위에 발을 올려놓은 순간, 로드리고는 자신의 발에 밟힌 얼굴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 p.289 문지혁 <혼자가 아닌 시간 홋카이도> 


   이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읽어야겠다, 싶었다. 알라딘에서 평을 찾아봤다. 어떤 사람은 '좋은 책입니다'라고 이야기해줬다. 어떤 사람은 '무교인 내가 아주 인상적으로 읽게 된 책'이라고 말해줬다. 이 책을 가지고 홋카이도에 가야겠다 싶었다. 새책이 아닌 적당히 낡은 책으로 읽고 싶었다. 누군가가 읽고 선명한 자국까지 남긴 책이 다행히 여행 전에 도착했다. 이렇게 한 권의 책과 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원래 틈틈이 읽을 예정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동하는 전철이나 기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찍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워서,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그렇지만 늘 그랬듯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쉬엄쉬엄 여행하기로 한 우리는 이틀동안 엄청나게 걸었으며, 커피집에도 두 번밖에 가질 않았다. 비행기에서 시작한 책은, 모든 첫만남이 그렇듯, 몇 장을 넘기지 못했다. 책에 푹 빠져들게 된 건 오타루에서 삿포로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였다. 전날도 그렇고, 그날도 엄청 걸었다. 핸드폰 건강앱의 '걸음'란에 이렇게 큰 숫자가 표시된 건 처음이었다. 뿌듯했지만, 그만큼 피곤하기도 했다.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잠들고 싶었는데, 조명이 밝아 잠이 오질 않았다. (사실 나는 불 켜놓고도 잘 자지만;) 친구가 책을 꺼내길래 나도 꺼냈다. 피곤함을 견디며 몇 장 읽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이야기에, 인물들에 순식간에 푹 빠져 들어버렸다. 그래서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몸을 담글 때도 몇 장 읽고, 친구가 씻을 때도 몇 장 읽었다. 아침과 밤에는 너무나 궁금했지만, 피곤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저절로 스르르 감겼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꽤 많이 읽었다. 돌아와서는 다음날 조조로 <나의 산티아고>를 봤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읽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가까운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를 시켜놓고 한참을 읽다 나왔다. <나의 산티아고>를 보면서는 소설 속 인물들이 계속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 하페도 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신은 있는가. 신이 없다면, 이 길의 끝에 섰을 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는 건가, 하고. 소설 속 로드리고 신부 역시 끊임없이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세상에, 이런 가혹한 일들을 당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가. 왜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인가. 신은 없는 거 아닌가. 신이 없다면 이 많은 사람들의 순교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나는 신부인 그가 끊임없이 자신이 섬기는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좋았다. 무교인 내가 종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바다의 단조로움이나 그 무서운 무감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물론 만일의 이야기지만...'
   그때 가슴 한구석 깊은 데서 다른 소리가 속삭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 p. 106~107 <침묵>

   그리고,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그 문장을 읽었다.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문장. 단 두 줄에 가슴이 쿵쾅거렸던 문장. 앞에 있는 문장과 뒤에 이어질 문장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책 한 권을 통째로 읽게 만든 문장.

   "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말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 p. 267

   읽기 전에 찾은 평들이 맞았다. '좋은 책'이었고, '무교인 내가 아주 인상적으로 읽게 되었다'. 나는 로드리고가 믿는, 침묵하고만 있다고 원망하는 '신'에 다른 무언가를 넣어보았다. '로드리고'라는 사람에도 다른 사람을 넣어보았다. 수없이 배교를 하고,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자신은 그저 강하지 못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러번 외쳤던 '기치지로'에는 '나'를 비추어 보았다. '기치지로'는 용감하지 못하고, 비겁하지만, 그를 무턱대고 욕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욕하지 못했다. 작가는 '기치지로'를 소설의 처음, 이렇게 묘사한다. "지금 저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에게 상당히 교활한 성격이 있으며 그 교활함이 이 남자의 연약한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그어뒀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인간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냈다.

   좋은 문장들도 많았고, 아파서 더욱 아름다운 묘사들도 있었다. 언제고 내가 좋아하는 당신이, 꼭 한번 읽었으면 좋겠다. 나를 <침묵>으로 이끈 홋카이도 여행기의 다음 문장은 이렇다. "하코다테의 어느 오래된 성당에서, 나는 그때 로드리고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의 발로 전해졌을 둔중한 아픔과, 신앙과 믿음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수수께끼를. 어디선가 내게도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 계획은 이렇다. 언제고 마음이 힘들어질 때 삿포로행 티켓을 사는 거다. 단, 그때가 겨울이어야 한다. 홋카이도에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날아가 기차를 타는 거다. 삿포로에서도 내리지 않고, 오타루에서도 내리지 않고, 몇 시간을 쭉 달려 하코다테로 가는 거다. 바다로 보이는 창이 있는 따뜻한 숙소를 잡고, 따뜻한 모자를 쓰고, 따뜻한 장갑을 끼고, 두꺼운 어그 부츠를 신고 추운 밤거리를 걷는 거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 따뜻한 음식도 먹는 거다. 춥긴 하겠지만 맥주도 한 잔 하는 거다. 그애는 나의 친구니까. 그리고 다시 숙소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씻고, 라디오나 티비를 낮게 틀어놓고 다시 <침묵>을 읽는 거다. 그때는 책이 더 너덜너덜해졌겠지. 그러다 잠들고, 다시 깨면 또 읽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엔 교회들이 가득한 모토마치를 조용히 걷는 거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기도 하고. 내게도 로드리고의 어떤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지. 그가 스윽- 조용히 내 곁에 앉을 지도. 그도 그가 믿었던 신처럼 침묵하겠지만. 내가 알아들으면 되니까. 그런 겨울을 언젠가 꼭 보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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