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231건

  1. 아름다움에 병든 자 2 2015.03.16
  2.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2015.03.07
  3. 반딧불 언덕 2015.02.25
  4. 다시, 포르투갈 2 2015.02.16
  5.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2015.02.08
  6. 스토너 2 2015.02.03
  7. 2015 서재쌓기 2015.01.05
  8. 토우의 집 2 2015.01.02
  9. 백년식당 8 2014.12.17
  10. 계속해보겠습니다 7 2014.12.10

 

 

   시인은 인도에 갔다. 시인의 꿈이었다. 인도에 가는 일이. 시인은 인도에 가서 보고, 생각하고, 보고, 생각했다. 지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고, 지금의 일들도 생각했고, 때로는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했다. 시인은 돌아왔고, 얼마 뒤 다시 인도에 왔다. 시인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 해 만에 다시 인도에 왔다." 김연수의 추천글을 읽고, 출간되었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어느 날 다른 책들과 함께 주문해 놓고는 가만히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2015년 겨울 어느 날, 가만히 꽂혀 있는 하얀 책등을 보게 됐고, 읽을 때라고 생각했다. 기승전결의 여행기를 계속 읽다가, 기승전결이 없는 시인의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지러웠다. 무슨 풍경인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삼분의 일 즈 지나서야 풍경들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인이 두 해에 걸쳐 여행한 인도. 시인의 꿈이었던 인도. 시인의 눈으로 인도를 들여다봤지만 사실 어떤 나라인지 모르겠다. 대학교 때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한달 정도의 경비가 100만원 미만으로 광고된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실제로 한 달동안 인도를 다녀왔는데, 심하게 배앓이를 했지만 그곳에서 행복했다고 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어떤 이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 나는 인도에서 출발한 엽서 두 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는 아니었다. 낯설지도 않았다. 오래되어 더는 느끼지 못하던 바로 그 냄새였을 뿐이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누런 광채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는 이내 주 경계선을 넘어 밤길을 달려갔다. 나도 어떤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 p.86-87

 

   짜이를 주문했다. 고도가 높은 곳이라 더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왠지 뜨거운 것을 마시고 싶었다. 낯선 이국에서 적응하려면 그곳의 차를 자주 마셔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딱히 선택할 만한 것도 없었다. 사내가 손잡이 달린 컵으로 몇 번 우유를 떠 넣고 두 손으로 뭔가를 으깨어 넣는 동안 부글부글 냄비가 끓어올랐다. 그는 유리잔 가득 짜이를 따라주었다. 너무 뜨거워서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손바닥과 손끝으로 겨우 짜이를 받아들고 앉았다. 그 뜨거운 것을 입술 끝으로 조금 받아 넘기자 혼몽인 듯 덜 깬 잠이 물러가는 듯했다. 내 입에서 강물 냄새가 났다. 마치 멀고 먼 고요한 강가에 앉아 있는 듯 했다. 강물에 흰 발목이 잠긴 물풀 냄새가 났다. 두 시간만 더 가면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 p.93-94

 

   혼자서 하는 말이라면 이미 말이 되기 전에 자기 안에 고여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온 혼잣말은 어디에도 고이지 않는다. 흘러가버린다. 밤바람에 스며들 뿐이다. - p.116

 

   아무리 더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어도 그것은 인도에서 산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어떤 물건은 기억과 함께 존재한다. 그 물건에는 그때의 시간과 그곳의 공간이 존재한다. - p.158

 

  이상하게도 모두가 어딘가로 떠나지만 모두가 이곳에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어깨를 스쳐 가지 않아도 좁은 골목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어느 먼 곳을 거쳐 왔는지 꿈꾸게 된다. 한줌의 바람이 젖은 먼지로 바짓단에 묻어 있어도 그 오랜 것들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냄새가 없었다. 묵은내마저 다 사라지고 없는 골목에서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생각했다. 길을 등지고 들어선 식당 앞에 앉아서 양귀비 같은 까만 씨앗을 넣고 담배를 마는 사내에게서 낯선 기억들이 떠올랐다. - p. 168-169

 

  짜이를 한 잔 마시자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내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카다멈과 정향과 생강과 어떤 알 수 없는 마살라 향이 나를 오래된 골목 안쪽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오래 끓고 남은 홍차 찌꺼기처럼 짙은 그늘 속으로 작고 고요한 문이 가득한 길이었다. 냄비에다 두 손으로 생강을 짓이겨 넣던 사내가 그걸 눈치챘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p.210-211

 

    이 세계는 신이 꾸는 꿈이다. 그리고 인간도 신을 꿈꾸며 이 세계를 유지한다. 혹시 인간이 꿈을 꾸는 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실패한 결과가 아닐까. 신조차도 이제는 이 세계를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세계를 허구로 만드는 데 재능을 탕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 꿈이 그러한 자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 p.222-223

 

   시를 외울 필요가 없다고 하니, 다들 얼굴이 환해졌다. 뭔가 불편한 숙제 하나를 해결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서로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쓴 시를 하나하나 읽었다. 별을 소재로 한 시였다. "젠장! 또 달고야 말았다, 별" 이런 시구가 나올 때는 다들 활짝 울었다. 자신의 삶을 시로 쓰고 함께 읽으면서 그제야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다 소용없는 것이리라. 자기의 가슴을 치고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야기를 서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 p.256

 

   사랑할 때 가장 먼저 태어나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다.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다 지워버리고 남은 나를.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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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크리스마스 밤, 잠실의 공연장에 있었다. 옥주현이 출연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뮤지컬을 보러 갔다. 동생이 표가 생겨 따라간 거였고, 별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무엇보다 루이 16세가 궁금해졌다.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왕권이 짓밟힌 상황에서 그(들)의 도주 계획이 실패하고, 감금 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일과를 마친 루이 16세는 자신의 초라한 의자 위에 앉아 노래했다. 그냥 평범한 대장장이로 태어났으면 좋았다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고.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당할 때. 그녀는 의연하게 단수대로 올라갔다. 더이상의 노래나 대사는 없었다. 단수대에 누워 목을 대었고, 무대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게 물들었다.

 

   어쨌든 '그'가 궁금해진 나는 얼마 전에 출간된 이 책이 떠올랐다. 공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읽고 싶었고, 새해 나의 첫 책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인이었던 페르센이 계획했던 루이 16세 일가 도주사건의 24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페르센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녀의 목숨을 꼭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루이 16세 일가를 프랑스 외곽으로 도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곳에서 그들은 망명을 할 수도 있고, 주변 국가들에게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고, 왕당파와 결합하여 다시 왕권을 굳건히 세울 수도 있다고 믿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 도주사건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책을 읽고 보니 이 모든 실패는 내가 뮤지컬을 보면서 측은해했던 루이 16세 때문이었다. 그는 때에 맞지 않는 질투를 했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고, 말도 안 되는 여유로움을 부리면서 이 도주계획을 완전히! 백퍼센트 망쳐놓았다. 설마, 설마, 이번에도? 싶을 때, 루이 16세는 그래, 그래 이번에도 내가, 이러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을지는 몰라도, 무능한 왕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총명했던 형이 죽으면서 그를 왕위에 올려 놓았다. '오직' 루이 16세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결정적인 요인을 한 것은 분명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직 왕실 안에서 곱게 보살펴진, 그래서 불운했던 왕비였지만, 혁명이 발발하고 현실에 직면하자 의연하고 단단해진다. 

 

   이건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문장들.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앙투아네트의 편지)

- 74쪽

 

   애초에 앙투아네트는 용모가 단정하다기보다 그 훌륭한 자세와 우아하면서도 발랄한 태도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터라,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는 회화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쿠차르스키는 슬픔에 빠진, 젊음을 잃어가는 그녀의, 저녁노을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미완성의 이 초상화를 보면 앙투아네트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건 페르센의 마음 한구석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79~80쪽

 

   그런데 방에 있던 사람 모두가 왕의 한심스러움을 말없이 비난하고 있을 때, 긍지 높은 왕비는 놀라울 만큼 스스로를 억제했다. 초조해하고, 절망하고, 체념한 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그것은 신하가 왕을 경멸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결의였다. 왕권은 흔들림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려는 일념으로 표정도 온화함을 되찾고, 거의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일 만큼 상냥한 태도로, 슈아죌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왕은 가족 때문에 하는 수없이 이러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유부단한 왕을 감쌌다.

    왕비의 의향이 충분히 신하들에게 전달되었음은, 신하들이 왕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왕비와 만나기 전까지는 왕당파조차 그녀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았다. '사치스럽고 교만하며 왕을 쥐고 흔드는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편견 섞인 이미지는 그렇게나 강렬한 것이었다. 만약 루이 16세가 선앙 루이 15세처럼 화려한 애첩이라도 데리고 있었더라면 정치에 대한 불평불만은 왕비가 아니라 그 애첩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외국인 왕비 앙투아네트는 떄로 자진해서,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됨으로써 왕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역할을 받아들였다. 

- 283쪽

 

    흥미를 가지고 있는 소재라 그런지, 재미있게 읽혔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책이 말하는 바도 흥미로웠다. 이 도주에 성공했더라도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 페르센의 예상대로 프랑스의 왕권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거. 역사는 이미 이쪽으로 기울었고,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그게 다른 쪽으로 기우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성공했더라도 목숨을 건지고 오래 살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에서는 무심히 잊혀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의 극적인 죽음이 아직까지도 그들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은, 지도자는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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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언덕

from 서재를쌓다 2015. 2. 25. 23:50

 

 

    지난 도쿄 여행 때 산겐자야에 다녀오질 못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산겐자야가 <수박>을 촬영한 지역이라는 걸 알았다. 가고 싶었지만, 여러 계획들이 있어 가질 못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앗! 산겐자야다! 했다. 이 전에 시리즈가 두 권이나 출간되어 있었는데, 산겐자야가 배경인 줄 몰랐다. 하긴 그때는 <수박>의 배경이 산겐자야인 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바로 구입해서 읽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미스터리물인데 세지 않다. 잔잔한 미스터리물이다. 그리고 매 단편마다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맥주도 나온다. 이야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갖춘 셈. 이야기들은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소소하고 따뜻해서 정이 갔다.

 

    그러니까, 도쿄 산겐자야 한적한 곳에 맥주바가 있다. 조용한 바다. 하지만 단골손님들이 가득 찰 때도 있으니, 매번 조용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 곳의 마스터, 구도 데쓰야.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맥주바 가나리야에 찾아오고 네 가지 도수의 맥주 중에 알맞은 맥주를 시킨다. 원하는 안주를 말하기도 하고, 마스터가 눈치껏 알맞은 안주를 만들어 내어오기도 한다. 그러면 손님들은 모두 만족한다. 세상살이 쉽지 않으니 다들 하나 둘씩 문제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고, 손님들은 마스터나 단골손님에게 그 문제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 이 구도 데쓰야라는 마스터는 조용하고 용-하다. 손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 고민을 다 안다. 그리고 해결책이 될 수 있는 힌트를 넌지시 건넨다.

 

    이런 문장들에는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곧 벚꽃이 필테니까.

 

   도부이세사키 선 아사쿠사 역을 빠져나와 걸어서 아즈마 다리를 건너 상류를 따라 2백 미터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스미다 공원이 있는데, 벚꽃 피는 계절이 되면 꽃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명소다. (...)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잠들어 있다고 하면 퇴폐적인 낭만이 느껴지지만, 그 방수 시트를 보는 순간 갑자기 시트에 둘둘 말아 놓은 부패한 시체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흥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적어도 돗자리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거 아니나며 괜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벚꽃은 떨어질 때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평일의 한낮이라면 더욱. 취객도 없고 시퍼런 방수 시트도 없고, 그저 혼자서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게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그것이 가능한 지금은 의외로... 아니, 아니야."

   손에 든 캔 맥주의 마개를 당기자 성대한 하얀 거품이 쏟아져 나오며 흘러넘쳤다. 서둘러 입술을 가져다 대려다가 그러고 있는 자신이 싫어져서 관뒀다.

    바람은 바람인 채로 좋다. 아, 평일의 한낮.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마음껏 벚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이름 있는 좋은 술 약간과 백화점 지하에서 산 고급스러운 안주 같은 걸 옆에 두고서 먹고사는 데 급급하기만 한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벚꽃을 상찬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사치는 없다. 하지만 현실의 내 모습을 보면 결국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살아가기 위해 내 한 몸 보전하느라 급급하다. 그러니 바람은 영원히 바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p. 124

 

    이 문장들을 읽고는, 진정 가나리야에 가고 싶었다.

 

   가나리야는 결코 젠체하는 가게가 아니다. 각 요리의 양도 충분하게 제공된다. 가시와기는 마지막 하나를 다 먹고서 혀끝에 남은 환상적인 맛을 맥주로 씻어 낼 때까지 시간 감각을 아예 잃었다. 가게 밖에서 부스럭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다. 맛있는 안주와 맛있는 술. 이 세상에 근심거리는 수없이 많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잠시 모든 것을 잊으련다.

p. 131

 

   이 소설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은 작가의 이력 때문이기도 했다. 기타모리 고. 서른 다섯에 데뷔해 마흔여덟에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30편 이상의 작품을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가나리야 시리즈는 모두 네 권. 나는 이제 한 권을 읽었으니 세 권의 책을 더 읽으면 가나리야 맥주바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이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이 더 애틋해졌다. 그래서 현재 출간되어 있는 두 권을 빨리 읽고 싶기도 하고, 더 묵혀두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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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포르투갈

from 서재를쌓다 2015. 2. 16. 23:45

 

 

    한 편의 영화로 시작해 꽃피우게 된 포르투갈 여행. 올해 꼭 가리라 결심하고 포르투갈어도 배우고 있다. 사실 포르투갈어보다 브라질어에 가깝고, 열심히 하지 않고 있지만. 하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다. 공부를 안해서 저번 주에는 그냥 그만 다니는 게 어떠냐고 선생님이 말하기도 했지만, 같이 다니는 언니랑도 공통점이 많고,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광화문까지 버스 타고 가고, 거기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종로까지 칼바람을 맞으며 걷는 기분도 좋다. 가이드북은 진작에 사놓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월요일 아침에 책장에서 꺼내 가방에 넣고 출근했는데, 지하철에서 리스본이 소개된 페이지를 펼쳐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리스본 사람들은 최고의 부를 경험했고, 바다로 나간 이를 그리워했으며, 최악의 재앙을 함께했다." 이런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 

 

    지난 주에는 포르투갈 관련 책을 두 권 구입했다. 한 권은 포르투갈을 여행한 에세이, 또 한 권은 포르투갈 시인이 쓴 에세이. 포르투갈 시인이 쓴 에세이는 평이 정말정말 좋아서 아껴두고 있다. 먼저 포르투갈 여행 에세이를 읽었다. <다시, 포르투갈>. 저자는 포르투갈을 여러 번 여행한 사람. 다시 떠난 포르투갈에서 장기여행을 한 기억을 책으로 옮겼다. 그는 스무 도시를 걸었다. 포르투갈 시인이 쓴 책, 포르투갈 소설가가 쓴 책을 좋아하고, 그들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 그 자체 만으로 감격스러운 사람이 여행한 포르투갈 이야기이다. 역시 이 곳도 사람이다. 저자가 여행 중 가장 감동받았던 순간들은 모두 사람에서 비롯됐다. 착하고 정이 많은 포르투갈 사람들. 저자가 표현한 포르투갈은 "고집스러운 노인의 오래된 일기장" 같은 곳,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다시 수 십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 책으로 인해 '파두', '사우다드', '포르투 와인'이 전부였던 나의 포르투갈 지식이 조금 더 넓어졌다.

 

 

    좋았던 구절.

 

    여행을 하다 보면 한 번 마주친 사람을 다른 곳에서 또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비두스에서 같은 호스텔에 묵었던 브라질 청년은 보름이 지난 후 포르투의 돔 루이스 다리에서 만났고, 코임브라에서 같이 식사를 했던 호주 노부부는 한 달이 지나 오르셰 미술관 한 조각 앞에서 만났다. 브라질 청년을 본 나는 반가워 소리를 질렀고, 그는 뽕망치로 나를 때렸다. 이런 만남은 무척이나 반갑다. 여행지에서 다시 만난 사람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다. 얼마간 떨어져 지냈지만, 어느새 더 친근하다. 의도치 않은 만남이 도시 풍경과 같이 각인된다.

p.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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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학원을 마치고, 지난주에 인터넷에서 봐두었던 네팔인도요리전문점엘 갔다. 1월에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를 읽었는데, 이 책 덕분에 출퇴근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어찌나 재미나게 여행기를 썼던지. 읽으면서 엄청 웃었다. 특히 화장실 이야기가 압권이다. 정유정 작가에게 히말라야는 첫 해외여행지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고, 그 뒤로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작가의 꿈을 이룬 뒤에는 또 열심히 썼다. 그러다 <28>을 끝내고 글이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단다. 그렇게 찾아온 슬럼프 앞에서 작가는 혹시나 영영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좌절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히말라야로 가기로. 히말라야는 작가의 등단작 <내 심장을 쏴라>의 주인공이 마지막 발을 디딘 곳. 정유정은 그 곳에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혼자라도 꼭 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쉽지 않은 곳이라 동행을 찾았다. 김혜나 작가. 두 사람은 한달동안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내린다. 고통스러운 변비도 찾아왔고, 죽을 것 같았던 고산병도 찾아왔다. 잘 씻지도 못하고 매일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가이드 검부와 포터 버럼과 함께. 가이드 검부는 뷰를 중요시해 숙소나 밥집, 찻집을 고를 때 맛보다는 풍경이 좋은 곳으로 안내했다. 포터 버럼은 영어를 거의 못하는 작가의 한국말 '까자', '까꽁', '뭐라꼬'의 뜻을 듣고 완벽하게 적재적소에 활용한 영특한 아이였다. 이국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김혜나 작가와는 달리, 정유정 작가는 한국에서도 잘 자고, 잘 먹는 스타일인데 안나푸르나의 음식만은 맞지 않았다. 마살라 향을 못 견뎌했다. 그래서 거의 한 달 내내 야채볶음밥만 먹었다. 지난주에 검색을 하다 보니, 광화문에 있는 한 네팔인도음식점에서 네팔 트레킹을 할 때 여행자들이 먹는 음식을 팔고 있었다. 정유정 작가는 끝내 못 먹고, 김혜나 작가가 맛있게 먹었던 그것. 책을 읽으면서 그 맛이 궁금했는데, 잘 됐다 싶어 오늘 갔다. 그런데 그 요리는 사전 예약을 할 때만 먹을 수 있단다. 그것도 4인 이상일 때. 나는 혼자갔고 사전 예약 따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보긴 했는데, 친절하게 안된다는 대답만 들었다. 재료를 따로 구입해서 만드는 요리라 그렇단다. 아쉽지만 다음에 친구들과 함께 와서 먹기로 하고, 추천해주는 매콤한 치킨카레를 시켜 먹었다. 맛있었다.

 

   친구의 남편, 그러니까 내 친구이기도 한 친구가 15년 동안 내가 딱 네 번 본 자신의 친구와 네팔로 트레킹을 갔다. 작년 12월에. 결국 내가 지금까지 딱 네 번 본 친구가 고산병에 걸리는 바람에 일정보다 일찍 돌아왔지만. 고산병 때문에 두 사람은 네팔의 커피집만 전전했다고 한다. 친구는 네팔을 가기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고, 갔다 와서 한 번 더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 그러니까 친구에게 말했단다. 2년 안에 같이 네팔을 가자고. 다시 가서 꼭 트레킹에 성공하겠다고. 책을 읽으면서 그 친구의 그 결심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영화 <와일드>와 같이 이 책도 트레킹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 마지막에 트레킹 완주 후에 찍은 것 같은 사진 한 장이 있는데 책을 다 읽고 이 사진을 마주하니 괜히 내가 뭉클해졌다. 그 사진에는 트레킹 후 다시 힘을 얻은 정유정 작가가 있고, 그녀의 든든한 동행자 김혜나 작가가 있고, 두 사람을 이끌어 준 고마운 가이드 검부와 포터 버럼이 있다.

 

 

    이틀 전 스스로 던졌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니?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돌아가 맞닥뜨릴 내가 두려웠다. 떠나온 나와 돌아간 내가 똑같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나는 쏘롱라패스 돌탑 밑에 타임캡슐을 밀어 넣던 순간을 돌이켰다. 돌탑에 귀를 대고 안나푸르나를 향해 묻던 내 목소리를 생각했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나 자신과 싸울 수 있을까.

    그때 답해왔던 목소리가 똑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죽는 날까지.

 

    비레탄티는 안나푸르나의 출구였다. 철교를 건너가면 우리는 그녀의 품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철교 앞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정식으로 안나푸르나와 작별했다. 고마워. 그 말 오래오래 기억할게.

-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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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from 서재를쌓다 2015. 2. 3. 22:09

 

 

   사실 나는 이 책의 보도자료에 반했다. 책을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읽고 나는 내가 아는 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첫 문장을 읽기도 전에. 친구에게 함께 읽자고 책을 보내면서 이 책이 우리의 2015년 최고의 책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책을 다 읽은 친구와 맥주를 마시는 저녁에, 내가 물었다. 어땠어? 친구가 말했다. 진짜 있는 사람 같앴어. 스토너. 그리고 생각했어. 이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은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로 끝난다. 이 책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남자의 한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톰 행크스의 추천글. "이것은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정말 그렇다.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농과대학에 진학한 한 남자가 영문학 교양과목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만나게 되고,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는 교수가 되지만 성공한 교수는 아니었다. 남자는 첫눈에 반한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지독하게 불행했다. 사랑하는 딸도 있었지만, 딸과 남자는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친구의 말대로, 이 사람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는 사랑에 빠진 대상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학에 빠졌고,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내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다. 딸 아이도 마찬가지. 그리고 단 한 번,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고, 그는 그녀 안에서 행복을 만끽했다. 함께 책을 읽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는 투쟁하거나 싸우지 않았다. 밀물처럼 몰려온 행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행복을. 밀물의 기억이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체념하는 사람. 내가 읽은 스토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책 뒤표지에 있던 "슬프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안"이라는 문장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소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50년 후에야 빛을 발한 소설. 작가는 스토너를 허구의 인물임을 분명히 했지만, 친구의 말처럼 어디선가 열심히 살다 죽었을 것만 같은 소설. 그게 당신같기도 한 소설. 그래서 내가 마음이 아픈 소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 소설.

 

    이 책에서 가장 신났던 부분이다. 159페이지부터 160페이지. 아내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랜 기간 부재 중일 때, 스토너는 딸과 함께 일상을 산다. 그 일상은 소소하고, 평온했으며, 평화로웠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딸을 더욱더 사랑했으며, 문학에 더욱더 깊이 빠졌다. 그리고 경험하게 되는 어느 순간에 대한 묘사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자신이 성장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의 스토너.

 

    그는 이 새로운 발견에 슬프면서도 기운이 났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학생들과 자신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기계적인 단계들을 반복적으로 밟으며 그의 강의를 끈기 있게 버텨내던 학생들이 당혹감과 분노를 안고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면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는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참석하고, 복도에서 만나면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 p. 159-160

 

   160페이지의 스토너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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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서재쌓기

from 기억의기억 2015. 1. 5. 22:50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히말라야 환상방황.

스토너.

어쩐지 근사한 나를 발견하는 51가지 방법.

 

파리라고 와 봤더니.

다시, 포르투갈.

반딧불 언덕.

 

아름다움에 병든 자.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오므라이스 잼잼 5.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중.

 

현기증.감정들.

소라닌.

질문의 책.


꽃 아래 봄에 죽기를.

홍콩에 두번째 가게 된다면.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환상의 빛.

끌림.

모든 요일의 기록.

 

7월 24일 거리.

도시탐독.

톰 소여의 모험.

 

4월이 오면 그녀는.

D에게 보낸 편지.

걷는 듯 천천히.

어떤 날들.

나를 보내지 마.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나는, 오늘도 7 : 원하다.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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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from 서재를쌓다 2015. 1. 2. 23:44

 

 

   그들은 통성명을 하고 서로가 일곱 살 동갑내기임을 확인했다. 원은 얼마 전에 언니가 보는 만화책을 몰래 훔쳐보고 '스파이'라는 말을 새로 배웠던 터라 그 말이 써먹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럼 이제 우리 목숨을 바치는 스파이가 되기로 하자.˝
  ˝스파이?˝
  ˝스파이가 뭔지 알아?˝
  ˝몰라.˝
  은철이 시무룩하게 발로 땅을 찼다.
  ˝스파이는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야.˝
  은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27~28쪽

 

 

   권여선의 새 소설을 읽었다. 27쪽에서 28쪽을 읽을 때, 저 이야기를 하는 원과 은철이 귀여워서 아이고, 귀여운 것들, 했다. 203쪽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은철과 원은 더이상 동네 사람들 이름을 캐묻고 다니며 우물가 돌을 갈아 주문을 외우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저주하던 신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권여선의 전작 <레가토> 생각이 났다. 권여선은 자신이 겪어온 잔인한 현대사의 아픔과 진실을 소설로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레가토>에 이어 <토우의 집>까지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너무나 잔인해서, 가슴이 먹먹해질 수 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의 어머니는 점심 때면 계란볶음밥을 주로 원에게 해줬다. 간단하고, 찬밥으로도 만들 수 있어 네 식구 중 두 사람만 먹는 점심으로 딱이었다. 어머니는 계란을 풀어 한 번에 다 넣지 않았다. 반은 처음에 넣고, 반은 볶음밥이 반쯤 익었을 때 넣었다. 그래야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게 된다. 그래야 볶음밥이 더 맛있다. 원이는 엄마가 해줬던 이 계란볶음밥을 기억한다. 이 가엾은 아이는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던 계란볶음밥의 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그건 엄마 만이 낼 수 있는 맛이다. 다시는 맛 볼 수 없는 맛. 권여선의 새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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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당

from 서재를쌓다 2014. 12. 17. 23:30

 

   상호도 없이 그저 '실비집'이라고 불렸던 그때, 최대 여섯 팀이 이 드럼통을 놓고 화덕에 고기를 구웠다. 여섯 명이 아니라 여섯 팀! 그러니까 화덕 하나에 여섯 무리의 고기가 다 올라간 것이다. 고기가 섞이기도 하고, 먼저 익으면 다른 손님들에게 고기를 밀어주기도 했다. 상상만 해도 훈훈한 장면이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한다는 커뮤니티 테이블의 진정한 원형인 셈이다.
"그랬지. 멋있고 정겨웠어. 어이 형씨. 이거 한 점 드슈, 그러면서."
- 79~81쪽, 서울 연남서서갈비

 

   "브랜드가 백화수복과 금관 청주가 있는데, 수복이 더 비싸거든요. 문제는 콜라병이 다 똑같잖아요. 그래서 둘을 구별하기 위해 백화수복을 담은 콜라병에는 빨간색 철사를 걸어두었어요. 그게 넥타이를 닮았다고 사람들이 '넥타이 한 병!' 이케 외치기 시작했지요."
은퇴한 시어머니 김 씨의 뒤를 이은 맏며느리이자 2대 안주인 조 씨의 설명이다. 그때의 넥타이는 사라졌어도 청주는 여전히 잔술로 팔고 있다. 오뎅에 청주, 일제 때 시작된 식민음식사의 면면한 현재다. 당시에는 청주를 잔술로 마시면 바둑돌을 놓아서 그 수를 표시했다. 일어설 때 바둑돌 수가 곧 마신 술의 양이었다. 운치 있는 표기법이었다. 요즘에 다들 '포스'라고 부르는 컴퓨터 시스템에 기입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114쪽, 부산 마라톤집

 

   족맛도 족맛이지만, 필자에게 이 집이 각별한 건 이 씨의 말대로 화목한 동업의 역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집은 조카며느리들이 대를 이어 일한다. 영원히 그 역사를 이어갈지 지켜보게 될 것 같다. 필자에게 족발을 내주며 이 씨가 한 말에 평안도족발집의 어떤 기운이 스며 있다.

   "나는 스스로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해.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 219쪽, 서울 평안도족발집

 

   32공탄 연탄에서 프로판가스, 도시가스로 열원이 바뀌었지만 굽는 법은 늘 같다. 10여 년 전부터 가업을 잇기 위해 나온 아들 상건 씨에게 가르쳐주는 기술도 늘 한결같다.

    "미리 부치지 마라, 맛없다. 아무리 바빠도 한 장 한 장 주문이 들어오면 부친다. 뭐 이러거쥬."

   우 씨는 이제 화.목.토 주 3일만 나온다. 그에게는 열 살짜리 손주가 있는데, 열차집을 이을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아, 한 시절을 잘 보냈다 싶어유."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 씨가 혼잣말하듯 필자의 눈을 보며 말했다. 400원짜리 빈대떡이 이제 1만 1000원을 한다.

- 271쪽, 서울 열차집

 

  우선 순댓국밥 한 그릇을 청한다. 건더기 고명 양이 수북하고, 밑에 밥이 깔려 있는데 토렴이 예술이다. 건더기 고명 양이 많아서 같이 데우려면 열 번에 이르는 국자질을 해야 토렴이 완성된다. 적당히 뜨끈한 국밥이 식욕을 자극한다. 국물이 무척 진하다. 이곳 표현으로는 바특한 국물을 '딸린다'고 한다. 아마도 달였다는 뜻인 듯 싶다.

    곁들이는 찬은 소박하다. 내장을 따로 삶아내는 안주를 하나 청한다. 새끼보와 머리고기가 그득하게 들었고, 아주 맛있다. 찍어 먹는 장도 시어머니 시절부터 만들어 쓰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도 아침마다 국밥 먹고 일하우다."

    노포의 한결같은 공통점! 자신이 파는 음식을 늘 먹는다.

- 321쪽, 제주 광명식당

 

    박찬일의 새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사이 새 책이 또 나왔다. 읽을 책들은 쌓여가고 있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백년식당 열 여덟 곳이 소개된 책. 백년식당이지만 백년동안 이어진 식당들은 아니다. 백년식당이 되길 바라는 곳들이다. 한 곳 한 곳 읽으며 내가 그 식당에 앉아 맛난 음식들을 먹는 상상을 했다. 상상 만으로도 행복했다. 좋은 파를 정성껏 손질해 넣은 담박하고 깔끔한 육개장,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돼지국밥, 연탄 센불에 구운 갈비, 심심하고 길게 끄는 맛이 일품인 추어탕, 진하면서도 구릿한 설렁탕, 굴젓과 함께 먹는 빈대떡, 개운한 물냉면, 포항의 자연바람에 건조시킨 국수 등. 한국 현대사와 맛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책이다. 제일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은 제주의 광명식당 순대국. 수첩에 식당 목록을 적어놓고 표시하면서 모두 다녀볼 생각이다. 흐흐-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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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from 서재를쌓다 2014. 12. 10. 00:09

 

    

    요즘 월요일마다 치과에 다닌다. 치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칼퇴를 해야 하므로 안 그래도 일이 많은 월요일을 정신없이 보내고, 치과에 도착해서 대기실이며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친절한 치과지만 어디가 안 좋고, 또 어디가 안 좋고, 그러므로 많은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알려주면 기분이 처진다. 그렇게 짧은 진료를 마시고 치과를 나오면 숙제를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겨울바람이 상쾌해진다. 비록 한 주 뒤에 이 과정이 다시 반복되지만. 이번주 월요일, 마취가 풀리지 않은 채 집에 도착해 씻고 소파에 앉아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래, <계속해보겠습니다>. 마취가 풀리고 왼쪽 이가 아프면 신경치료를 해야한다. 아프지 않으면 신경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면 조금 두근두근해진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12월의 출근길 아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장 읽지 않았지만 알았다. 이 책이 내게 <백의 그림자>와 같은 따뜻함을 줄 거란 걸. 그 느낌은 맞았고. 220쪽. "매년 혼란스러웠지. 상이 두개라서. 올해는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하고. 올해부터는 여기로 오면 돼. 나나가 말했다. 곧장 와도 돼. 소라가 말했다." 이 부분을 읽는데, 눈물이 막 났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마취가 풀려가는 중이었지만, 아프진 않았다. 그러므로 이가 아파서 운 게 아니고, 이 소설 때문에. 소설은 여름과 가을 사이의 일이다. 그 계절 속에 소라와 나나와 나기가 있다. 세 사람은 아주 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그리고 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소라는 나나의 태몽을 꾸었고, 나나는 강해보이지만 약한 아이다. 하지만 나나에게는 언니가 있지. 나기는, 나기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오랫동안 한 사람을.

 

    나기는 '삯'이라는 조그만 맥줏집을 하는데, 삯에서는 신선한 재료만을 쓴다. 그 날의 재료는 그 날 모두 요리한다. 오늘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삯에 가서 애피타이저로 폭신폭신한 계란말이를 시켜 먹었음 좋겠다. 물론 시원한 맥주와 함께. 그 사이에 바삭하게 구운 생선구이도 주문하고. 누군가 삯에 들어오면, 아마도 그 아이일 거다. 소라. 미나리 '라'자를 쓰는 소라. 소라는 나기에게 따뜻한 국물을 달라고 할 거고, 나기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냄비를 불에 올리고 데울 거다. 소라는 맥주도 한 잔 달라고 할 거고, 그걸 마시며 나나 이야길 할 거다. 앞으로 부르나 뒤로 부르나 똑같은 나나. 나나는 그 시간, 뜨끈뜨끈한 방에 누워 있을 거고, 그 옆에는 몇 달을 배에 품었던 '쐐쐐'가 있을 거다. '쐐쐐'의 이름은 뭐가 되었을까. 맥주 두 병을 다 마시면 용기내서 '쐐쐐'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삯'. 

 

    책을 읽으면서 나도, 소라와 나나가 있었던 한 여름의 목욕탕 속에 있고 싶었다. 그 길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 둘 사이에 끼여 잠들고 싶었다. 거실에서 커다란 달을 올려다 보고 싶었다. 황정은은 사진마다 그렇게 퉁명스럽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왜 이렇게 따뜻할까. 참 고맙다.

  

 

여름 달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하루만 두번째 귀가이고 이미 자정입니다. 노곤하지만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소라에게 서운하지만 먼거 가버리지 않아서, 고맙다고 여기는 마음도 있습니다. 간단하지 않네 사람의 마음은, 하고 생각하며 소라의 곁에서 잠자코 걸어갑니다.

목욕용품 중에서 젖은 것을 베란다에 펼쳐두고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탁자에 소라의 앨범이 펼쳐져 있고 종이로 만든 조그만 꽃송이가 열개도 넘게 흩어져 있습니다. 잎이나 꽃자루도 없이 오로지 꽃송이뿐, 패랭이나 코스모스처럼 보입니다. 애자가 만들었다고 소라가 말합니다. 보고 왔느냐고 묻자 그렇다,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떄수건으로 닦아 반들반들해진 뺨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종이로 꽃을 만든대. 이런 것을 잔뜩 만들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밀어주는 패랭이꽃을 받아 탁자 위에서 이리저리 돌려봅니다. 뭔가 만든다니 좋네. 애자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니 그건 좋네. 모처럼 불어온 바람에 창가에 걸린 풍령이 흔들립니다. 소라가 달아 두었는지 풍령의 추에도 애자의 꽃이 한송이 달렸습니다. 저렇게 달아두면 꽃의 무게로 덜 흔들리게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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