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홍대에 있었다. B를 기다리는 동안 브뤼트라는 잡지에 김연수가 쓴 글을 읽었다. 그건 체 게바라에 관한 글이기도 했고, 파블로 네루다에 관한 글이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보고 울컥 했던 시. 파블로 네루다 시의 어떤 구절에 대해서 김연수는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구절.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 그녀는 가끔 나를 사랑했다."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 어딘가에서 본 <500일의 썸머> 영화 카피.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언젠가의 톰이다.

   영화는 연애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500일동안. 연애를 하는 남자 이름은 톰. 그리고 연애를 하는 여자 이름은 썸머. 톰은 어여쁜 썸머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그리고 뜻밖에도, 혹은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별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썸머는 말한다. 난 심각한 건 싫어. 우린 그냥 친구 사이야. 썸머는 친구랑 키스를 하고, 손을 잡고 쇼핑도 하고, 섹스도 한다. 비오는 밤, 먼저 찾아가서 미안하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우린 그냥 친구 사이라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에겐 모두 썸머가 있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날은 1일 째의 썸머를 보여주고 어떤 날은 462일 째의 톰을 보여준다. 어떤 날에는 163일 째의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순서에 상관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연애란 다 그런 거니까. 아스피린을 넣어둔 장미꽃도 언젠가 시들고 마니까.

    나는 488일 째의 톰을 본다. 그러니까, 488일 째의 톰이 어떤 상태냐면 좋은 친구 사이라고 거듭 강조하던 썸머랑 끝장난(당한) 뒤,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썸머는 여전히 빛나고, 바보같은 톰은 그녀를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했으며, 톰은 썸머의 어떤 파티에 초대받는다. 그 뒤 썸머는 결혼한다. 톰은 좌절했으며, 그 뒤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 톰은 실연의 상처를 잊으러 애쓰러 본래의 자신의 꿈을 찾으러 하지만, 미끄럼틀만 계속 타고 있는 상태. 그리고 488일 째 두 사람은 다시, 우연히(혹은 당연하게도) 만난다. (썸머는 톰에게 상처주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썸머가 있다. 빌어먹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썸머는 말했지. 사랑은 없다고.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 그냥 사는 거라고. 그 때, 우리의 톰은 말했다. 사랑은 있다고. 운명은 존재한다고. 나는 당신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 이제 입 아플 정도지만, 우리에게는 톰'도' 있다. 분명하다. 488일 째 되던 그 날, 썸머는 말한다. 니 말이 맞았다고. 사랑은 존재한다고. 운명은 분명히 있는 거라고. 너와 내가 운명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세상은 장미빛이라고. 그 때, 우리의, 우리의 톰은 생각한다. 빌어먹을 사랑은 없다고. 엿 바꿔 먹을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거라고. (타이밍. 그래. 스무 살의 남자애는 조숙해서, 아니면 선수여서 내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해주었다. 서로의 등만 보는 '좋지' 않은 타이밍.  난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지. 난 톰이었으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썸머 말이 다 맞았다. 결국 엔딩을 보면, 그래 엔딩을 굳이 보지 않아도, 썸머가 옳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해 봤으니까, 한 때의 톰이었고, 한 때의 여름이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의 가을이 될테니까. 그런데 나는 왜 488일 째의 톰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 거지? 썸머가 너와 내가 운명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표정.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썸머가 번쩍이는 결혼반지를 낀 손을 얹을 때 상실감 가득했던 그 떨림. 그건 결국 488일 후 썸머의 표정일 텐데.

    아.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거. 나 왜 이렇게 염세적이 된 거지. 영화 정말 잘 봤는데 말이다. 정말 좋아서 중랑천을 룰루랄라 걸었는데 말이다. 이층에 봄에 혼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왔는데 말이다. 음악이 참 좋다. 이 영화. 이건, 2010년 두 번째 영화. 이번에도 좋은, 영화였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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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의 극장 나들이. <더 로드>를 봤다. 한 1시간 정도 제대로 봤나. 앞부분은 거의 다 자버렸다. 왜냐면, 전날 늦게까지 빼갈과 맥주를 마셨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택시를 타고 새벽에 집에 왔고, 아침 일찍 출근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영화보기 전에 포테이토와 콜라가 아니라 찐-한 커피를 마셨어야 했는데. 

    영화의 처음. 아버지와 아들이 걷고 있었다. 황량한 길이 펼쳐졌고, 누추한 차림의 두 사람이 그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고, 백 년은 넘게 자랐을 것 같은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쿵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쿵쿵. 그리고 잠이 들었다. 달게 자고 깨어나 보니, 두 사람은 어떤 지하창고를 발견했는데 거기가 천국이다. 따뜻하고, 먹을 것 천지다.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고, 책을 읽는다. 행복한 나날도 잠시, 또 다시 어디선가 들리기 시작하는 위험신호. 아버지와 아들은 다시 길을 나선다. 처음의 길이다. 황량하고, 잿빛이고, 쿵쿵 쓰러지는 나무 소리만 울려 퍼지는 곳. 남쪽으로 가면 정말 괜찮을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말했다. 소설 <로드>가 자신의 2009년 최고의 책이라고. 세상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멸망했고, 멸망한 세상의 어떤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영화에서처럼 백 년은 넘게 자랐을 것 같은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들이 쿵쿵 쓰러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더라도, 백 년은 넘게 자랐을 것 같은 그런 나무들이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이런 세상에도 해당되는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이라고. 한 세대가 끝나고, 한 세대가 시작되는 이야기라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이야기. 어떤 희망에 대한 이야기. 마음 속에 불씨를 가지고 살자는 이야기. 착한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

    친구 말이 내가 잔 시간 동안 영화에서는 끔찍한 일만 펼쳐졌다고 한다. 내가 잠든 동안 아버지와 아들은 죽은 사람들을 보았고, 갇힌 사람들을 보았고, 사람을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한다. 내가 본 건 희망이 시작되는 부분.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마음 속에 불씨를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영화를 보면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엄마 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내게 불씨를 심어준 사람. 오늘 몇 페이지 읽다 덮어 주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영화, 내겐 2010년 첫 영화. 아버지의 대사를 되새긴다. 올 한 해, 마음 속에 불씨를 간직한 사람이 되기를. 착한 사람이 되기를.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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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기 위에 앉아 지난주 영화잡지를 펼쳤다. <파주> 이야기. 역시 내가 고민한 그 질문이 한 평론가의 글 중심에 놓여 있었다. "왜 그랬니?" 이선균이 서우에게 묻는다. "근데 그 때 왜 그랬니?" 누구는 <파주>를 보고 1마리 어린양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고, 누구는 <파주> 속 이선균이 연기한 중식의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다섯 정거장 되는 거리에 메가박스가 생겼다. 그 날은 영화가 고팠던 날이라,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데도 걸어서 그 곳에 갔다. 새로 생긴 극장의 복작거리는 분위기를 상상했었는데, 건물 주위에도 건물 안에도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봤다. 역시 평론 속 표현처럼 나는 이선균의 그 대사가 너무 갑작스러웠던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다. 곱씹어봐도 그건 갑작스럽다. 그 씬을 중신으로 앞 뒤 씬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영화를 본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파주>는 내게 아직도 혼란스러운 영화다.

   오늘 아침, 평론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이 영화가 계속 된다면 분명 다시 이선균과 서우는 만날 거다. 아마도 파주에서. 그 때의 파주는 개발이 많이 진행된 뒤겠지. 번쩍번쩍하고 높은 건물들이 많아진 뒤겠지. 그 때도 이선균은 서우에게 물을 거다. "왜 그랬니?" 그건 대체 몇 년 전 일에 대한 질문일까. 서우가 중학생 때 이선균의 첫사랑에 대한 장난을 친 것에 대한 것일까. 그 때 가출을 한 이유를 묻는 것일까. 인도에 간 그 때를 말한 것일까. 지금 이 영화의 마지막에 대한 물음일까. 전부 다 일까. 메가박스 상봉 앞에는 아주 커다란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모양이다.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건너편에 보였다. 그 건물을 <파주>를 보고 나와서 올려다보는데 느낌이 묘했다. 비가 그친 뒤였다. 영화 속 '파주' 같은 공기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달큰한 것이 먹고 싶어져 시장에 들러 사과도 사고, 귤도 샀다. 내가 궁금한 질문은, 이선균에게. 근데, 그 때 "왜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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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이 영화가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쇼팽의 이별곡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엠피쓰리플레이어에 이 곡을 집어넣었다. <제노바>에서는 커다란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는 콜린 퍼스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 또 하나는 슬픔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콜린 퍼스가 제노바로 이사를 한 것. 이 외에는 별다른 사건이랄 건 없다. 그저 무덤덤하게 시간이 흘러간다. 막내가 한 번 길을 잃는 일이 있긴 했다. 바닷가 근처 수도원이 있는 산에서였다. 아이는 엄마가 보인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사실일 지도 모른다. 엄마는 막내가 걱정돼 이승을 계속 떠돌고 있는 걸 수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막내의 깊은 그리움이겠지. 그 일을 제외하고는 별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적어도 시간만은 말이다. 막내는 가끔 악몽을 꾸고, 목놓아 엄마를 그리워하고, 아빠와 언니는 아내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생활을 이어간다.

   다시  클래식 음악. 쇼팽의 이별곡. 다음날까지 이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클래식 음악을 좀 안다는 O씨에게 이 곡에 관해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많은 생을 프랑스에서 살았어요. 쇼팽이 폴란드를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게 되었을 때 만든 곡이예요. 쇼팽은 떠나면서 안 거죠. 이제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폴란드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두고 떠나야만 했었다고. 영화 속에서는 첫째가 이 곡을 연주한다. O씨의 설명을 듣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감독이 왜 이 곡을 선택했을지, 그리고 이 곡이 왜 그렇게 슬펐는지. 그리고 쇼팽의 이별곡은, 곡이 만들어진 배경을 몰라도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가만히 눈을 감고 듣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이 아름다운 곡이더라. 특히 처음 시작 부분이 좋다.

    영화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은 낯선 땅 제노바를 끊임없이 걷는다. 그 곳은 덥고, 강렬한 곳, 그리고 복잡한 곳. 아이들은 매일 아파트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는 선생님 집까지 걷는데, 그 골목길은 여차하면 길을 잃을 수 있는 복잡한 곳이다. 그리고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감으로, 다음 번에는 어떤 표식을 기억해두었다가 그걸 따라 집을 찾아간다. 어떤 날은 언니랑 나란히 걷기도 하고, 어떤 날은 화난 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걷는다. 또 어떤 날은 막내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엄마의 손을 잡고 걷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귀엽고 예쁜 막내가 부디 아무 탈없이 잘 자라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엄마도 너를 용서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악몽은 이제 그만 꾸라고, 그렇게 서럽게 울어대지 말라고 토닥거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막내처럼 제노바의 그 복잡한 골목을 정신없이 헤매다 마침내 발견하게된 넓은 광장을 앞에 두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서럽게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좋은 영화였다.


     아, 영화 속에 콜린 퍼스가 강의하는 중에 한 학생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2번을 읊는 장면이 있는데, 그 소네트가 너무 좋았다. 영화에서와 똑같은 번역본을 찾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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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우시절>을 보러 극장에 갔을 때만 해도 이 영화가 무슨 영환지도 몰랐다. B씨가 기다리고 있는 영화라고 했고, 그날 마침 극장에서 예고편이 나왔다. 씨네21에 대대적인 특집기사가 실렸고, 피터 잭슨이 제작한 영화란다. 그냥 그런 정보만 가지고 지난 주 월요일, 내가 좋아하는 왕십리 CGV에 가서 영화를 봤다. 맛난 아메리카노까지 챙겨 마시고 들어가서 본 영화는 그야말로 충격. 첫 장면부터 바짝 집중해서 봤다. 모큐멘터리 형식인데, 2시간 가까이 정말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봤다. 재밌더라. 그리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건 SF지만,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이 스쳐가는 영화다. SF의 탈을 쓰고 있는 정치 영화. 팜플렛을 보니 '디스트릭트 9'라는 제목은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백인들만 거주했던 지역명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남아공의 디스트릭트 9에 어느 날 우주선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우주선에 타고 있던 영양결핍의 외계인들이 우주선이 떠 있는 바로 밑, 디스트릭트 9에서 생활하게 된다. 외계인 관리국 MNU는 외계인들로 인해 무법 천국이 되어버린 디스트릭트 9의 강제 철거를 결정하고, 철거 진행 중에 책임자 비커스가 외계 물질에 노출되는 사고가 생긴다. 그 뒤 비커스는 외계인으로 변해간다. 대충 그런 이야기.

    마지막에 로봇으로 변신하는 비커스 부분에서는 보지도 않았지만 <아이언맨>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이언맨>도 그렇게 로봇으로 변신한 영화 아닌가요?) '샬토 코플리'라는 배우도 궁금해졌다. 검색해 보니 출연작이 별로 없네. 3년 후에 크리스토퍼는 과연 군대를 이끌고 지구로 돌아올 것인가. 그러니까, 3년 후에 2편이 개봉할 것인가,도 궁금해졌다. 어느 장르에서든 뭉클해지는 감성을 찾아내는 나는, <디스트릭트 9>에서도 그 감성을 찾아냈는데, 그건 바로 비커스가 크리스토퍼의 이름을 처음 불러주었을 때. 그 전엔 크리스토퍼는 그저 강제철거 대상인 '프론'일 뿐이었는데, 비커스는 영화 안에서 외계물질에 노출되면서 조금씩 몸도, 마음도 프론이 되어간다. 마지막 장면도 뭉클했다. 그나저나 크리스토퍼의 외계이름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지는 1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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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정확히 몇 시쯤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게 궁금했다. 스탠리(존 쿠삭)의 부인은 직업 군인이다. 현재 그녀는 부재 중이다. 이라크로 파병 간 상태. 스탠리에게는 사랑스런 두 딸이 있다. 착한 첫째 딸과 귀여운 둘째 딸. 엄마가 이라크에 가 있으니 불안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아빠는 큰 딸 하이디에서 이라크 관련 뉴스를 보지 못하게 하고, 막내 던은 엄마와 약속을 했다. 시계에 같은 시각으로 알람을 맞추고 알람이 울리면 눈을 감고 서로를 생각하기로. 그게 정확히 몇 시쯤일까. 그게 궁금했다. 오후 네 시쯤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가 끝난 뒤였고, 오후였고, 해가 지기 전이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내내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엄마를 잃은 던에게 이제 그 시간이,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할지, 얼마나 간절할지 생각해봤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일 테지만 온전히 엄마를 그리워할 수 있는 시간. 그래야만 하는 시간. 던도 언젠가 지금의 엄마의 나이가 되겠지. 삶은 엉터리고, 놀이동산 따위가 하나도 신나지 않는 나이가 올 거다. 왜 엄마가 이라크에서 죽어가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해가 되는 나이가 올 거다. 그 때까지 시간은 계속 흐를테고, 시계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알람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울릴 것이다. 띠띠. 띠띠.

    지난 주 씨네21 김연수 칼럼(아주 좋았던) 중에 아이포드 터치의 금연 (시도)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온다. 그 프로그램대로 담배를 피우다 보면 흡연량이 나도 모르는 새 줄어들어 언젠가 금연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나. 현재 자신이 피우는 담배의 개수를 입력하면 담배를 피울 시간을 정해준단다. 오늘,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오후 5시 넘어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꺼내들고 창가에 기대서 마셨다. 어느 쪽 하늘은 주홍빛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고, 어느 쪽 하늘은 아직도 새파랬다. 어느 나뭇잎은 아직도 싱싱한 초록빛이었는데, 어느 나뭇잎은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포드 터치에 실연 (극복) 프로그램이 없을까하고. 아프고, 힘들고, 그냥 딱 죽어버리고 싶은 실연의 상처를 이 프로그램이 치료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정해진 시간에만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매일 매 순간 생각해서는 안된다. 딱 그 시간만. 그렇게 아이포드가 시키는 대로, 그 시간에만 그 사람을 그리워하다보다 언젠가 하루에 2분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프로그램. 그 때 결정하는 거다. 그 사람을 영원히 잊겠습니까, 아니면 계속 그리워하시겠습니까.

   던에게 필요한 건 그 반대 프로그램. 늙어 죽을 때까지 지금의 엄마를 기억하기.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이니까. 그래서 도움이 되는 일들도 있지만, 꼭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잊고 사는 멍청한 인간들이니까. 이 그리움 (지속)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던은 평생 지금의 엄마를 기억하는 거지. 처음에 자신이 지금 엄마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입력하면, 프로그램은 하루에 어느 시간만큼 엄마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정해줄 거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하지만, 그 말들이 결코 마지막이 될 지 몰랐던), 마지막으로 안아주었을 때의 냄새(역시 마지막이 될 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거다. 오늘은 그 말들을 떠올리세요. 5분동안. 오늘은 그 냄새를 맡아보는 거예요. 코를 킁킁거려봐요. 10분동안. 해가 지기 전에 매일 변함없이 그리워하는 거다. 알람이 울리면 천국의 엄마와 같은 시간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생각하는 거다. 
 
    아, 이 영화는 어떠냐면, 아주 서서히, 천천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울린다. 생각치도 못한 장면에서 울컥 울음이 쏟아지곤 한다. 내가 볼 땐 좋은 영화다. 85분의 시간을 함께 보낼만 하다. 존 쿠삭이 살이 많이 쪄서 등장하고 (85분 내내 슬픈 그의 눈을 봐야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음악을 맡았다. 엄마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사랑스런 두 딸에게 전하지 못하고, 놀이동산까지 긴 여행을 떠나는 아빠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건강하게, 씩씩하게 이를 잘 극복할 두 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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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를 알고 내리는 비. 때를 알고 스치는 바람. 싱그러운 연두빛 나뭇잎들이 바람에 사르르 사르르 흔들리면, 꿈만 같이,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치 <봄날은 간다>의 대나무 숲의 바람의 소리와 같아요. 사르르 사르르. 나뭇잎들의 소리가 한 차례 밀려나면 그 뒤로 한 때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그 때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꿈결처럼. 비 내리는 봄날의 밤, 불빛만 비치는 강 위에 배처럼. 그녀가 나타납니다. <호우시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지요. 어느날 잡지에서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정우성이 나온다 했고, 중국 여자배우가 나온다 했지요. 두보의 시 한 구절을 딴 제목이라 했지요. 나는 그의 영화라면 다 좋으니까, (<행복>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요) 기다리고 기다렸지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때를 알고 막이 오르는 영화. 추석이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니, 바야흐로 가을이 시작될 때,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난 그의 이를테면 빠순이니까 개봉날 부리나게 달려가서 보았지요. 이건 봄의 영화지만, 가을에 보아도 좋아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그리고 그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바람과 공기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어느 계절이든 좋지요. 상처가 아물어가는 이야기는. 

    <호우시절>을 보면서 생각해봤는데요. 허진호의 영화는 항상 상처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세요. 한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여자는 연락없는 남자를 기다려요. 상처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상처가 아물어가는 이야기구요. 마지막 장면 생각 나지요? 빠알간 립스틱을 칠한 심은하가 사진관 앞에서 웃었어요. <봄날은 간다>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몇 번을 엉엉 울었는지 몰라요. <외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손예진이 차에서 내려 도로 끄트머리에 구겨 앉아서는 엉엉 오열하는 장면이요. 그렇게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치유되는 모양이예요. <행복>은 그냥 패스예요. <호우시절>도 그래요. 이건 어떤 상처에 대한 이야기고,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우리는 그 상처가 어느정도 치유가 되어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때를 알고 내리는 비가 있으니, 때가 지나면 단단해지는 상처도 있지요.

    네 장면이 있었어요. <호우시절>을 보면 허진호 영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예전의 그의 영화같지 않아요. 예전의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나로써는 안타깝지만요. 그의 예전 영화들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던 팬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들을 찾을 수 있어요. 내가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여백 때문이예요. 산수화에만 여백이 있는 게 아니예요. 허진호의 영화에도 여백이 있어요. 말하지 않아서, 행동하지 않아서, 그 순간이 더 아리고 시린 장면들이 있어요. 이 영화에서 나는 네 장면을 마음에 담아두었어요. 

    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가 함께 데이트를 시작해요. 메이가 일하는 두보초당에서부터 인력거를 타고 중국음식을 먹으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요. 메이가 오른쪽 풍경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을 때요. 왼쪽에 동하가 있어요. 메이가 바라보는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메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하의 얼굴이 있어요. 그게 첫 번째 장면. 두 번째 장면은 투명한 화장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텔. 그 날의 사건 이후, 그 밤 동하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있었어요. 미동 없이. 가만히. 그 뒤로 화장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여요. 거기에 메이가 있'었'죠. 그래서 쓸쓸한, 쓸쓸하고 쓸쓸한 동하의 모습. 마음에 자꾸 걸렸어요. 그 장면이.

    세 번째 장면은, 메이의 병실 장면. 메이는 누워 있고, 동하는 그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 뒤 저 멀리 창 밖으로 버드나무같이 길게 늘어진 초록색 나뭇잎들이 자꾸 흔들려요.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바람이 불고 또 바람이 부는 모양이예요. 쉴 새없이 흔들려요. 두 사람은 가만히 미동도 없이 있는데, 그 뒤 나뭇잎들만 계속 흔들려요. 바람이 불어요.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장면이예요. 그래, 허진호 영화는 이렇게 끝나야지, 싶은 멋진 엔딩이었어요. 

    <호우시절>을 보고 다음날 아침, 두보의 시를 프린트 했어요. 지하철 안에서 반복해서 읽었죠. 비, 봄, 바람, 구름, 불빛, 꽃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 시. 역시 이것들이 가득한 영화가 <호우시절>이예요. 사실 나는 오래 전에 사랑했다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오래 전 혼자 남몰래 (실은 둘이었지만) 사랑했다 헤어진 친구들이 다시 만나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뭐랄까.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내겐 조금 맹숭맹숭하긴 했어요. 고원원은 예쁘고, 정우성은 멋있어서, 그들이 함께 걷는 중국의 밤풍경도 근사해서, 모든 게 꿈만 같고, 현실같지 않은 영화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좋았어요. 어쩌면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보러가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이건 상처에 대한 이야기고, 그게 아물어가는 이야기니까요. 그 부분이 좋았어요. 사르르. 대나무 숲에, 두보초당에 바람이 불면 상우도 동하도 사랑에 빠졌는데, 나는, 나는요? 사르르 바람 부는 숲에 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럼 나도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고보니 정말 그러네요. 영화잡지 속 20자평처럼 뻔뻔함이 사라졌네요. 대나무 숲에서 사랑에 빠졌던 이영애는 끝까지 그렇게 뻔뻔했는데, 두보초당에서 사랑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고원원은 하나도 뻔뻔하지 않았어. 착했어. 그러니 약간 심심해진 건가.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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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날,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시러 투다리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세 번째 안주 (내가 다 먹었으니 나의 안주구나) 시샤모를 시키기 전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비를 맞으며 지하철 역까지 걸었고, 나는 (이건 온전한 나) 집에 오는 길에 분홍색 타자기가 그려진 주간지를 샀다. 그 날, 우리는 첫 번째, 두 번째 안주, 그러니까 감자베이컨말이와 육포를 먹으면서 어쩐지 이 영화는 뭔가 아쉽다고 이야기했다. 더 깊이, 더 멀리 나갔어야 했는데,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고. 그렇게 끝나 버린 게 못내 아쉽다고. 그래도 좋은 영화였다고. 그 날, 나는 영화를 보면서 울어버렸는데, 영화 속 자매가 어느 날 밤에 우연히 티비에서 엄마가 출연했던 (그렇게 보고싶어했던) 영화의 '피칸파이를 추천해드려요' 대사를 들어버렸을 때, 그리고 그 대사가 두 사람에게 너무나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코 끝이 찡해졌다.

    이 영화의 보석은 에이미 아담스. 나는 그녀에게 홀짝 반해버렸다.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새들을 불러모으던 고 귀여운 공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내게, <선샤인 클리닝>의 그녀의 모습은 뭐랄까. 뭐랄까.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 다음 책을 주문할 때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DVD를 같이 주문할 거다. 그렇게 결심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가.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좀더 많은 표정을 보고싶어졌다. 이 영화가 이렇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종종 짓고 했던 쓸쓸한 표정은 잊을 수가 없지. 정말 잊을 수가 없지. 천국으로 전해진다는 커다란 차 안의 무전기에 대고, 엄마가 그립다고 이야기 하는 모습, 아들의 생일날 피자집 화장실 안에서 동생에게 누군가 널 돌봐줬어야 했어, 라고 말할 때 그녀의 따뜻하고도 외로운 표정. 좋았다. 정말 좋았다. 

    영화 속 주인공 자매의 엄마는 자살을 했다. 그녀들이 아주 어렸을 때. 그녀들은 앞뜰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들어와 엄마의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했고, 그 죽음의 현장과 엄마의 부재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녀들에게 아픔이 되었고,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쓸쓸했고, 외로웠고, 슬펐다. 영화는 그렇게 자라난 자매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절망적인 죽음의 흔적을 말끔하게 없애라고, 그리하여 산 자가 다시 살아갈 수 있게,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보여주라고. 성인이 된 로즈(에이미 아담스)는 이제 엄마의 멈춰버린 나이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거다. 그녀는 세상은 때때로 손목을 확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잔혹하고 힘든 곳이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살만한 날들이 더 많다는 걸, 종종 아주아주 행복할 때도 있다는 걸, 천국에 있을 엄마에게 전하고 싶었을 거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저 앉지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을 내는 것으로 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엄마처럼 천재 아들을 두고, 장사감각 제로인 늙은 아빠를 두고, 평생 돌봐줘야 할 동생을 두고, 손목을 그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다. 대신 당신이 떠난 그 핏자국을 열심히 닦는 거지. 살아야 하니까. 맛있는 피칸파이를 추천받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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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로코 마니아. 나는 우울한 밤이면, DVD로 로코를 틀어놓고 볼만큼 보다 잔다. 그러면 뭔가 내일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안심이 된다. 얼마 전, 중고로 구입한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DVD도 몇 번을 되풀이해서 보다 잠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끝까지 보기도 했지. 로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으니까, 늘 나를 꿈꾸게 해주니까, 때론 나를 위로해주니까, 나이값 못한다고 욕할지 몰라도, 로코를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단, 잘 만들어진 로코의 경우에 그렇다. 혹 잘 만들어지지 못했더라도, 뭔가 나랑 통하는 한 장면이라도 있으면 좋다. 여기서 로코는 로맨틱 코미디. Y언니의 표현이다.

    저번주 씨네21 특집이 바로 로코였다. <프로포즈>와 <어글리 트루스> 개봉 기념 특집이랄까. '씨네21이 선정한 현대적 로맨틱 코미디 베스트 20'이 있었는데, 여기에 내 마음 속 로코들이 대거 소개되어 있었다. 일단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캬아. 처음부터 죽인다. 우디 앨런의 <애니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있다. <사랑의 블랙홀>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도 있고. <노팅힐>!!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도. <제리 맥과이어>도 있고, <브리짓존스의 일기>도 있다. 제니퍼 애니스톤의 <내가 사랑한 사람>은 애니스톤의 팬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이라 소개되어 있는데, 이거 정말 보고싶다아. 그리고, 그리고, 나의 사랑, 나의 로코 <당신이 잠든 사이에>. 하트 뽕뽕이닷. 

   Y언니는 <프로포즈>에 나오는 라이언 레이놀즈가 좋단다. 나는 산드라 블록을 좋아하니깐 우리에게 금요일 딱맞춤 감상영화였던 셈. 영화는 대만족이었다. 그래그래, 자고로 금요일 저녁에는 이런 영화를 봐줘야지. 한참을 웃고 즐기다 나왔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평범한 미국인의 얼굴을 해서 영화 보기 전까지는 그저그랬는데, 귀엽더라. 귀여워- 산드라 블록은 얼굴이 예전보다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 죽지 않았어-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피드> 때부터 이 언니가 좋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보고는 완전 빠졌지. 멋진 언니다. 미국에서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로코 재기에 성공하셨단다.

    <프로포즈>를 보고 있으면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저절로 떠오른다. <프로포즈>에서는 마녀 편집장에, 일 중독자에, 까칠하고, 남에 대한 배려심 따위 꼬딱지만큼도 없는 마가렛 역할이지만, <당신의 잠든 사이에>의 루시가 드문드문 생각이 난다. 일단 마가렛도 루시도 고아다. 부모님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마가렛도 티는 안 냈지만, 루시처럼 분명 크리스마스때면 외로웠을 거다. 혼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면서, 쓸쓸해하다 <폭풍의 언덕>을 읽을 거다. 분명하다. 그리고 거짓말. 마가렛도 루시도 어쩌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일파만파로 커지기 시작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결혼식장에서의 고백 장면도 비슷하다. 그리고 마지막의 엔딩도. <프로포즈>도 재밌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루시가 더 보고싶어졌다. 기다려요, 루시 언니. 내가 곧 언니 또 만나러 갑니다. Y언니는 내가 모뎀소리 장면에서 극장에서 제일 크게 웃었다고 했다. 그건 나이가 있어야 웃을 수 있는 유머코드라고. 요즘 아이들은 그 모뎀소리 아예 모르는 건가요? /아흑/. 여기서 또 세대차이가 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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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몸을 좀 가볍게 하려고 먹는 걸 줄이고, 예전보다 좀 더 걷고 있다. 집으로 오는 길이면, 또 저녁을 못 먹는다는 사실과 내일 점심 때 뭘 먹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책이고 음악이고 읽고 들을 틈이 없다. 이틀 전부터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동네에서 가장 큰 홈플러스 매장에 가서 이것저것 사고 있는데, 거긴 넓으니깐 구경도 하고 걸을 수도 있다. 그제랑 어제는 샐러드를 먹었으니, 내일은 야채랑 닭고기, 새우를 듬뿍 넣은 월남쌈을 싸가자고 왕십리 역을 지나며 생각했다. 월남쌈 재료를 사러 갔는데, 그 매장은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화장품 코너, 다음이 맥주 코너다. 홈플러스 매장에는 얼마나 많은 세계 맥주가 있는지. 며칠 전에는 그냥 와 버렸지만, 오늘은 프랑스 맥주를 한 병 샀다. 아주 작고 귀여운 병에 소량의 맥주가 들어있다. 이름은 비어 스페셜. 4.8도다. 내일 싸갈 월남쌈 준비를 다 해놓고, 고 맥주를 땄다. (안주 없이 맥주랑 먹는 거니깐 괜찮겠죠? ㅠ) 그러니까 이게 프랑스로부터 물 건너온 프랑스맥주란 말이다. 캬, 맛도 좋다. 

   프랑스 맥주 하니까 생각나는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가 나오는 영화를 지난 주말에 봤다. <코코 샤샤넬>. 뭐랄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두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모두에게 해당될 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랬다. 하나는 오드리 토투가 많이 늙었다는 거. <아멜리에>의 상콤한 이미지는 이제 찾을 수 없다. 살이 더 빠진듯한 느낌인데, 나는 지금의, 이 영화 속의 오드리 토투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 차분하고, 약해보이지만 강한 사람이다. 표정은 어두워 보이지만, 결코 어둡지 않은, 당당하게 자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게 샤넬이기도 하지만, 오드리 토투이기도 하다. 둘째는, 이 영화가 샤넬의 전기영화라기보다, 사랑 영화라는 거. 이 부분은 좀 실망스럽다. 이 영화에서 샤넬이 만든 옷이나, 일에 대한 열정, 어떻게 그녀가 성공했는가를 찾기란 좀 힘들다. 그걸 찾으려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영화는 샤넬의 사랑에 집중한다. 오직 사랑 그 하나만. 그래서 마지막의 콜렉션은 좀 황당하다. 지금까지 사랑이야기만 보여주다가, 고 사랑이 없어지고 나니까 1분 동안 열심히 옷 만들다가 콜렉션인 셈이다. 사랑이랑 일 이야기를 적절히 배분했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차라리 일과 성공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좋았을텐데. 사랑은 뭐랄까. 허무하잖아.

     그래도 이 영화의 분위기만은 좋았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취해있었던 이유도 영화의 분위기였다. 고요하고, 잔잔하다. 사랑의 감정은 샤넬의 가슴 속에 번개처럼 찾아와서 강렬하게 불 붙었겠지만, 그걸 표현하는 영화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오드리 토투도 이 영화에서 정말 예쁘다. (그 우스꽝스런 드레스며, 화려한 모자장식들 속에서 단아한 오드리는 얼마나 빛났던가!) 그녀의 미소는 빛난다. 화려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번진다. 게다가 아름답고, 단아하다. 그걸로 된거지. 뭐. 성공하고 싶고, 일하고 싶고, 당당해지고 싶었던 그녀는 영화 속에서 계속 남자의 그늘 속에 있었지만, 영화는 그것밖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아쉽지만, 뭐. 뭐. 오드리 토투가 예뻤으니까. 빛났으니까. 그걸로 됐다, 싶다. 아, 우습게도 샤넬의 진짜 사랑이 나타났을 때, 내 마음이 콩닥거렸다. 별 것도 아닌 영화 속 사랑놀이에 내 가슴이 벌렁벌렁대서, 그게 너무 이상해서, 올 가을에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지. 휴우. 그나저나, 정말, 왜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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