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호우시절 - 비, 봄, 바람, 구름, 불빛, 꽃의 영화
    극장에가다 2009. 10. 10. 01:53
     



        때를 알고 내리는 비. 때를 알고 스치는 바람. 싱그러운 연두빛 나뭇잎들이 바람에 사르르 사르르 흔들리면, 꿈만 같이,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치 <봄날은 간다>의 대나무 숲의 바람의 소리와 같아요. 사르르 사르르. 나뭇잎들의 소리가 한 차례 밀려나면 그 뒤로 한 때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그 때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꿈결처럼. 비 내리는 봄날의 밤, 불빛만 비치는 강 위에 배처럼. 그녀가 나타납니다. <호우시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지요. 어느날 잡지에서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정우성이 나온다 했고, 중국 여자배우가 나온다 했지요. 두보의 시 한 구절을 딴 제목이라 했지요. 나는 그의 영화라면 다 좋으니까, (<행복>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요) 기다리고 기다렸지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때를 알고 막이 오르는 영화. 추석이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니, 바야흐로 가을이 시작될 때,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난 그의 이를테면 빠순이니까 개봉날 부리나게 달려가서 보았지요. 이건 봄의 영화지만, 가을에 보아도 좋아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그리고 그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바람과 공기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어느 계절이든 좋지요. 상처가 아물어가는 이야기는. 

        <호우시절>을 보면서 생각해봤는데요. 허진호의 영화는 항상 상처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세요. 한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여자는 연락없는 남자를 기다려요. 상처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상처가 아물어가는 이야기구요. 마지막 장면 생각 나지요? 빠알간 립스틱을 칠한 심은하가 사진관 앞에서 웃었어요. <봄날은 간다>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몇 번을 엉엉 울었는지 몰라요. <외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손예진이 차에서 내려 도로 끄트머리에 구겨 앉아서는 엉엉 오열하는 장면이요. 그렇게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치유되는 모양이예요. <행복>은 그냥 패스예요. <호우시절>도 그래요. 이건 어떤 상처에 대한 이야기고,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우리는 그 상처가 어느정도 치유가 되어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때를 알고 내리는 비가 있으니, 때가 지나면 단단해지는 상처도 있지요.

        네 장면이 있었어요. <호우시절>을 보면 허진호 영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예전의 그의 영화같지 않아요. 예전의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나로써는 안타깝지만요. 그의 예전 영화들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던 팬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들을 찾을 수 있어요. 내가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여백 때문이예요. 산수화에만 여백이 있는 게 아니예요. 허진호의 영화에도 여백이 있어요. 말하지 않아서, 행동하지 않아서, 그 순간이 더 아리고 시린 장면들이 있어요. 이 영화에서 나는 네 장면을 마음에 담아두었어요. 

        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가 함께 데이트를 시작해요. 메이가 일하는 두보초당에서부터 인력거를 타고 중국음식을 먹으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요. 메이가 오른쪽 풍경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을 때요. 왼쪽에 동하가 있어요. 메이가 바라보는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메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하의 얼굴이 있어요. 그게 첫 번째 장면. 두 번째 장면은 투명한 화장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텔. 그 날의 사건 이후, 그 밤 동하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있었어요. 미동 없이. 가만히. 그 뒤로 화장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여요. 거기에 메이가 있'었'죠. 그래서 쓸쓸한, 쓸쓸하고 쓸쓸한 동하의 모습. 마음에 자꾸 걸렸어요. 그 장면이.

        세 번째 장면은, 메이의 병실 장면. 메이는 누워 있고, 동하는 그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 뒤 저 멀리 창 밖으로 버드나무같이 길게 늘어진 초록색 나뭇잎들이 자꾸 흔들려요.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바람이 불고 또 바람이 부는 모양이예요. 쉴 새없이 흔들려요. 두 사람은 가만히 미동도 없이 있는데, 그 뒤 나뭇잎들만 계속 흔들려요. 바람이 불어요.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장면은 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장면이예요. 그래, 허진호 영화는 이렇게 끝나야지, 싶은 멋진 엔딩이었어요. 

        <호우시절>을 보고 다음날 아침, 두보의 시를 프린트 했어요. 지하철 안에서 반복해서 읽었죠. 비, 봄, 바람, 구름, 불빛, 꽃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 시. 역시 이것들이 가득한 영화가 <호우시절>이예요. 사실 나는 오래 전에 사랑했다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오래 전 혼자 남몰래 (실은 둘이었지만) 사랑했다 헤어진 친구들이 다시 만나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뭐랄까.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내겐 조금 맹숭맹숭하긴 했어요. 고원원은 예쁘고, 정우성은 멋있어서, 그들이 함께 걷는 중국의 밤풍경도 근사해서, 모든 게 꿈만 같고, 현실같지 않은 영화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좋았어요. 어쩌면 내리기 전에 한 번 더 보러가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이건 상처에 대한 이야기고, 그게 아물어가는 이야기니까요. 그 부분이 좋았어요. 사르르. 대나무 숲에, 두보초당에 바람이 불면 상우도 동하도 사랑에 빠졌는데, 나는, 나는요? 사르르 바람 부는 숲에 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럼 나도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고보니 정말 그러네요. 영화잡지 속 20자평처럼 뻔뻔함이 사라졌네요. 대나무 숲에서 사랑에 빠졌던 이영애는 끝까지 그렇게 뻔뻔했는데, 두보초당에서 사랑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고원원은 하나도 뻔뻔하지 않았어. 착했어. 그러니 약간 심심해진 건가. 그런가.




       

Designed by Tistory.